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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42화 (42/236)

제42화

히어로의 숙명.

나는 여느 때처럼 슈트를 해제한 뒤 엎어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click… click….

내 방의 적막을 유일하게 깨는 시계 소리.

오늘 하루는 늘어난 테이프처럼 평소보다 길게 느껴져 피로가 더욱더 심했다.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내게 경례를 하던 장면과 감옥 안에서 풍겨오던 쾌쾌하고 찝찝한 냄새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각보다 후각이 훨씬 더 충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래도 다행히 아이들은 황서연이 책임지고 잃어버린 보호자를 찾아 보내주겠다고 했다.

치료사로서 다른 히어로들과 연이 많은 황서연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들의 집을 찾아줄 수 있겠지.

제인이 오늘 쉬자고 했는데도 쉬지 않고 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까지 생각이 미쳤다.

도유진의 결석으로 그 행방을 찾던 도중, 도유진의 오빠 도지훈이 크게 다쳐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일 년 가까이 입원하고 있다는 것.

원작만을 생각하던 나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다.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동화율을 유지하는 한 내 주변인들이 다칠 일은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가 원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나 혼자만을 특별하게 대우해주지 않았다.

하루에도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사건이 터지는, 범죄와의 전쟁이 일상인 세계에선 내 주변의 사람들 또한 당연하게도 그 범죄가 만들어내는 불행의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한번 동화율을 떨어트렸던 사실이, 과연 이 상황과 연관이 있었을까?

점점 더 괴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든 실수가 지훈이 형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간 스스로에게 생긴 자괴감 때문에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만약의 가능성을 외면했다.

click… click….

시계 초침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방 안을 채웠다.

click… click….

*    *    *

나강림과 강수아, 한소연은 언제나처럼 함께 등교를 하기 위해 합류 지점에서 모여 학교로 향하던 중이었다.

언제나 같은 등굣길에서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말수가 적은 수아와 숫기가 부족한 소연 대신 매번 대화 주제를 꺼내던 강림이 오늘따라 기운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진 듯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무언가 우울해 보이기도 한 그 표정에, 소연은 자신이 어제 무언가 말실수를 했는지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항상 쾌활하게 웃으며 주변인들에게 화도 잘 내지 않고, 선생님과 학생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학교생활을 하던 강림을, 조금 동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던 소연이기에, 자신 때문에 이 우울함이 전염된 건 아닌지 우려하는 지점에 다다를 무렵.

지금까지 친구를 매체로만 접했던 소연의 머릿속 인간관계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부모님이 크게 다치셨다거나… 아니면 큰 빚을 졌다거나… 그런 큰일이 생겨서 저렇게 우울해 보이는 거 아닐까?

소연의 망상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을 때, 소연의 어깨에 얹어진 손 하나.

수아였다.

뭐지. 내 얼굴에 뭐라고 쓰여 있었나? 어떻게 매번 내 생각을 읽는 거 같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소연에게 강수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주고는, 강림에게 말을 건넸다.

“나강림. 너 무슨 일 생겼구나.”

“어? 어? 아니… 아니야. 무슨 일은….”

수아가 먼저 강림의 말문을 트게 해준 것에 소연은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오늘따라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여.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우리한테 말하다 보면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우린 친구잖아.”

그러면서 소연은 수아의 동의를 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소연의 시선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

“응. 아니야.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내 주변에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이 계셔서… 꽤 친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게 생각보다 꽤 힘드네.”

“아. 그래….”

강림이 힘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조금 뒤에 수아가 소연에게 팔꿈치를 먹였다.

“앗, 아야!”

“응?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    *    *

등교 후 도유진의 자리를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도유진은 오늘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래, 그때 도유진이 말한 것처럼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겠지. 앞으로 계속 상황이 안 좋으면 어쩌지… 걱정이네.

“야, 나강림. 너 무슨 일 있냐? 아침부터 죽상이야.”

“어? 어… 아냐. 별일 있긴.”

“어제 강등했어? 무슨, 세상 다 잃은 표정이네.”

내 얼굴을 보고 걱정 반 타박 반 말을 거는 박준석 때문에, 나는 내가 거짓말을 잘 못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생각이 많은 게 밖으로 티가 많이 났구나.

어쩐지 아침에 소연이가 잘하지도 못하는 농담을 하나 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괜히 기분 안 좋은 티를 내서 미안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담임 선생님.

“자. 조용조용. 자는 애들 다 일어나고. 뭐… 대충 보니까 올 사람 다 온 거 같고… 아, 반장. 혹시 다른 선생님 중에 도유진이 왜 안 왔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시면, 도유진 오빠가 심하게 아파서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올 수도 있다고 말씀드려라.”

도유진… 어제는 학교에 말도 안 하더니, 오늘은 그래도 말이라도 했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책상에 처박았다.

.

.

.

그리고 강수아는 그런 강림을 보며 무언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수아의 설명을 들은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 소꿉친구라는 애 오빠가 많이 아파서 그런 거구나.”

강림이한테 소꿉친구가 있었다니… 소연은 묘한 패배감과 충격에, 본분을 잊은 채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또다시 그런 생각에 빠지려는 소연을 빠르게 건져 올리는 수아의 말.

“보니까, 강림이가 도유진 오빠랑도 친하던 모양이야. 아주 어릴 때부터 친했다고 하니까.”

그렇네. 그럴 수도 있겠다.

소꿉친구의 오빠니까. 옛날부터 셋이서 많이 친했겠지?

“그럼…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이해는 가네… 그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강림이랑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으니, 소꿉친구라는 포지션은 평생 못 가지는 걸까? 좀 더 어릴 때부터 알았으면 좋았을걸… 그럼 소꿉친구이면서 같은 동아리원은 나 혼자일 텐데.

안색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소연의 얼굴에 수아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한소연. 괜한 생각하지 말고. 오늘 CA 시간 있으니까, 그때 기분 전환될 만한 걸 하면 돼.”

“아… 응. 강림이가 기분 좋아질 만한 거? ”

소연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수아.

“응. 근데 걔, 대체 좋아하는 게 뭐지?”

“소꿉친구?”

“뭐?”

“아, 아냐….”

*    *    *

“뭐? 강림이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쉬는 시간, 자신을 찾아온 두 사람의 전투적인 기색에 조금 긴장했던 박준석은, 용건이 자신이 아닌 강림에게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럼 그렇지. 왜 갑자기 여자애들이 말을 거나 했네.

박준석은 조금 생각에 빠진 척 팔짱을 끼고 시간을 충분히 끈 후, 입을 열었다.

“강림이는 중학교 때부터 히어로 덕후였지. 과거 나와 함께 수많은 히어로 노벨과 히어로 애니메이션을 섭렵하던….”

“히어로? 혹시 히어로 영화 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을까?”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는 박준석을 무시하고 소연이 수아를 보며 말했다.

“아.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있….”

“애니메이션은 싫어.”

“네.”

강림이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히어로 애니메이션을 싫어하는 거야? 재밌는데.

“애니메이션이 싫으면… 최근에 나온 히어로 영화 중에 괜찮은 거, 생각나는 게 있긴 해. 강림이도 좋아할진 모르겠지만.”

박준석이 가방 속에서 꺼내 드는 물건을 불안하게 보던 두 친구는 막상 박준석의 손에 들린 DVD를 보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좀 괜찮아 보이네.”

“근데 넌 학생이 이런 걸 학교에 들고 다녀?”

“아이 씨… 빌려줘도 그러네.”

*    *    *

아, 벌써 CA 시간이네. 오늘 하루도 벌써 다 가버렸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아야. CA 시간인데 도서실로… 없네?”

뭐야? 방금 종 울렸는데 수아는 어디로 간 거지?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을 빼고 있다 보니 내가 뭘 했는지도 잘 모르겠네.

혹시 복도에 서 있는지도 확인했지만, 복도에서도 수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혹시 소연이도…?

나는 5반 창 너머를 슬쩍 살펴보았지만, 역시 소연이도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복 많은 친구여….”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내 등 뒤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박준석을 볼 수 있었다.

뭐야? 얘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냐?”

“네 친구들은 먼저 도서실로 갔다. 최대한 천천히 도서실로 가봐. 좋은 친구들을 뒀더라. 그것도 다 여잔데. 부럽다, 친구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박준석이 얄미워 한 대 때려준 뒤, 나는 도서실로 향했다.

*    *    *

평소 같았으면 책을 읽는 곳이라 밝게 조명이 켜져 있을 도서실이, 오늘따라 불이 모두 꺼져 어두웠다.

뭐야? 책 읽으러 오는 곳인데 뭐가 이렇게 어둡게 돼 있는 거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서실 한쪽 벽에 스크린이 펼쳐져 있고, 그 스크린엔 빔프로젝터가 영상을 쏘아내고 있었다.

“나강림. 어서 와.”

“강림아, 여기 앉아.”

두 사람이 마련해 준 자리에 나는 얼떨떨하게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오늘 영화 보는 거야?”

“응. 우리가 영화 보고 싶다고 하니까, 민아 쌤도 허락하셨어. 걱정하지 마.”

“무슨 영화인데?”

“히어로 영화. 시작한다. 봐봐.”

이윽고 천천히 올라오는 제목.

솔라 버드 : 리턴즈

이거 맨날 준석이가 나보고 꼭 보라고, 블루레이까지 빌려준다고 했던 영화잖아.

그리고 그제야 나는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다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수아와 소연이가 나를 위해 준비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친구들이었네.

친구들이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늘 종일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영화 내용은 과거에 활동했던 히어로 ‘솔라 버드’의 생애를 다룬 내용이었다.

시를 대표하는 최고의 히어로라고 불리던 솔라 버드가 한순간의 실수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인해 능력을 잃기까지 했었지만… 그런 상처를 딛고 일어나 능력을 다시 되찾고 히어로로서 재기하기까지의 이야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와닿는 바가 있어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는 스크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 내 옆에서 대화하는 수아와 소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치, 수아야?”

내 눈치를 살살 보며 수아에게 말을 건네는 소연.

“응. 꽤 괜찮은 내용이었네. 나한테도 기대 이상의 이야기였어.”

“어? 어떤 부분이?”

“히어로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거든.”

“그래? 난 오히려 반대인 줄 알았는데….”

“히어로들이 몇 명이나 사람을 구하든, 한 명의 사상자만 나와도 온갖 욕을 먹는 세상인데… 두꺼운 가면을 써서 밖으론 티가 안 나는 거지, 속으론 우는소리 하는 히어로들이 더 많을걸?”

오래간만에, 수아가 말이 많네.

“음… 그건 그래. 아무리 히어로라도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부담 때문에 히어로들도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겠다.”

“뭐… 그거 때문에 히어로 일에 회의감 느끼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몇 명 있지.”

“몇 명만?”

“사고 터지면 몸부터 나가는 게 히어로들의 숙명인걸.”

“헤… 본능적인 거야?”

“뒷일 생각할 시간이 어딨어. 바로 눈앞에 사람이 있는데.”

“응! 듣고 보니까 그렇네. 근데 수아, 너도 평소에 히어로에 관심이 많았나 보네.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어.”

소연의 질문에 수아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렸다.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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