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43화 (43/236)

제43화

첫사랑(1)

부우웅….

이모의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게 느껴진다. 차가 평소와 다를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내가 심란한 탓이겠지.

원래 세계에선 그렇게 건강하다 못해, 국제급 격투기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도지훈이 누군가에게 당해 쓰러졌단다.

“라디오라도 들을까?”

조용한 차 안이 조금 답답하셨는지 이모는 라디오를 틀었다.

<“안녕하세요! 달이 빛나는 밤에 오늘 나온 게스트는 팀 브릴리언트 소속 히어로, 밴디저(bandager)입니다.”>

때마침 라디오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는 팀은 팀 브릴리언트, 과거 도지훈이 소속되어 있던 소속 팀의 리더 밴디저였다.

「팀 <브릴리언트> 소속 히어로 <듀크>, 빌런과의 사투 중 ‘중태’」

아까 학교에서 불안한 마음에 검색하다 발견한 기사다.

듀크│히어로│도지훈, Duke

출생 : 2003년 4월 17일

그룹 : 팀 브릴리언트

소속 : 브릴리언트 엔터테인먼트

브릴리언트는 원작 만화에선 등장하지 않는 팀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히어로들이라는 것뿐이다.

<“요즘 화제의 팀이죠. 지난번 팀 훈련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돼서 꽤 화제가 되었잖아요? 생각보다 굉장히 위험해 보이던데요.”>

<“저희는 매일 해야 하는 훈련을 했던 건데, 그런 게 이슈가 돼서 저희도 많이 놀랐어요. 그 정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실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거든요.”>

전에 말했듯, 이 세상의 히어로들은 먹고 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브릴리언트 같은 아이돌형 히어로들이다.

히어로 활동보다는 다른 활동을 통해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연예인을 만들기 위한 팀업.

본래 같으면 어려운 사건은 맡지도 않았을 팀이건만, 1년 전에 일어났던 빌런 간의 충돌에 휘말린 모양이고… 그 사이에 도지훈이 크게 다쳐 입원까지 하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도유진의 오빠 도지훈은 원래 세계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동했었다. 아무래도 히어로를 지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스타 히어로가 되길 원하는 경우가 많을 터였다.

그럼 내가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혹시 이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면?

우리 이모, 그리고 도유진의 가족들이 넘어올 수 있었다면… 내가 알던 다른 사람들도 넘어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또다시 이번처럼 이 세계가 마음대로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 버리진 않을까?

<“그래서,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셔서 나왔다고 그러시던데….”>

<“네…. 사실 오늘이 입원한 저희 멤버의 생일이거든요….”>

아아- 탄식하는 방청객의 소리.

<“그럼… 입원한 팀원을 위해 한마디 하세요.”>

<“지훈아. 아직도 우린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꼭 깨어나서 우리와 함께 다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일 축하한다, 지훈아.”>

이모는 도지훈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라 라디오의 채널을 바꿨다.

♪♬

라디오에서는 철 지난 아이돌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늘이 지훈이 생일이었구나.”

내가 한참을 혼자 고민하고 있자, 나를 힐끔 바라보던 이모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오늘 같은 날이 하필 지훈이 형 생일이네.”

“걱정하지 마. 내가 아까 들으니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 모양이더라.”

“응?”

좋은 소식이 있다고…?

“이모도 전화로만 들어서, 설명해주기 좀 어려우니까 일단 병원으로 빨리 가자.”

부우웅….

우리 엄마가 예전부터 타던 오래된 차가 익숙한 소음을 내뿜으며 거리를 달렸다.

*    *    *

흰옷을 입은 사람들, 흰 벽, 하얗게 질린 얼굴들…. 온통 흰 것밖엔 존재하지 않는 이곳, 병원에 나는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다.

평소엔 검은 옷을 입고, 어둠 속에서 활동해서일까? 나는 온통 흰 것밖에 존재하지 않는 병원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병원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병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부턴, 병원이라는 곳은 항상 내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제대로 형체도 남아 있지 않은 아산 성모병원도, 하마터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뻔했던 경한 센트럴병원도, 그리고 래빗즈의 어머니도, 도지훈도, 심지어는 이 전 세계에서 이모가 입원해 있던 병원마저도.

내 오른팔에 감겨 있는 쇠사슬처럼, 내 심장을 얽매어온다.

내가 지키지 못한 것들이 모여있는 곳.

나는 그래서 병원이 불편했던 거다.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서 쿡쿡 찔러 들어오는 죄책감에 덜덜 떨려오는 손을 숨기기 위해,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소희랑 강림이 왔구나.”

다시 돌아온 병실에는 이전처럼 도지훈 혼자 있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서자, 내가 기억하던 모습보다 훨씬 초췌해진 도유진의 어머니, 강은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 옆에 묘하게 샐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도유진까지.

“어머 유진이도 있었구나?”

“소희 이모~ 너무너무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은 무슨, 전에도 집 앞에서 봤으면서.”

“야, 나강림. 이모랑 오랜만의 해후 중인데 우리 사이 방해하지 마라?”

“참나. 말이나 못 하면.”

괜히 오버해서 밝은 척하는 게 보여 일부러 한 마디 쏘아붙이자, 도유진이 지지 않고 응수했다.

“어휴, 바쁘고 피곤할 텐데 뭐라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어?”

“언니, 우리가 남이야? 다들 먹는 것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 같길래 이것저것 사 왔어.”

이모가 그렇게 말하며 간단한 음식이 든 봉투를 건네자, 살짝 눈가가 붉어진 은화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봉투를 받아들고 우리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잠깐의 정적 후, 병상에 누워 있는 도지훈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모가 먼저 말을 이었다.

“아휴… 그렇게 튼튼하던 애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어? 언니…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이야기라도 하지 그랬어요….”

“뭐 좋은 일이라고 전화까지 해….”

이모는 나랑 대화할 땐 꽤 덤덤하게 이야기하시더니, 막상 지훈이 형이 누워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아프신 듯,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때, 그런 두 명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희 이모.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일주일 뒤로 수술 날짜 잡혔어. 우리 오빠 살 수 있대.”

응?

“수술?”

나는 순간 원작 만화에서 나오는 여러 수술의 결과물들이 생각이 나 흠칫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대부분 실험실이거나, 경한 센트럴병원이었다.

“그래. 오늘 교수님이 오셔서 수술해 주신다고 했어. 수술 예약이 엄청나게 밀려 있는 교수님인데, 지훈이 회사에서 힘을 써줬다나 봐.”

도유진의 어머니께서 도유진 대신 내 말에 대답해 주신다.

여긴 천산 대학병원… 내 기억 속에선 나쁜 일과 엮인 적이 없었던 병원이니까 괜찮을 거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교수님 이름을 알아내서 조사를 좀 해보면….

“혹시 그 교수님 이름이….”

“엄마! 난 밖에 바람 좀 쐬고 올게. 병원 안에서만 오래 있다 보니까 좀 답답해서.”

도유진이 내 말을 사정없이 끊고 들어왔다. 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이러더니 아직도 안 고쳐졌네.

“뭐? 야, 도유진. 갑자기 이 야밤에 나가긴 어딜 나가.”

“당연히 너도 나갈 거잖아. 나 혼자 보내려고 했어?”

당연히는 무슨 당연히… 내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도유진의 명령에 내가 뭐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이모가 조카 맘도 모르고 옆에서 부추겼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제 강림이가 지훈이 이야기 듣고 와서 마음이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더라. 같이 가서 좀 놀다 와.”

도유진이 그 말을 듣자마자 씩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이모는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겠지만… 얘한테는 그런 말을 했으면 안 됐어.

“어? 나강림 또 울었냐? 내 앞에선 안 울더니, 또 이모 앞에서 펑펑 울었지?”

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벌써부터 피식피식 웃는 꼬라지에 약이 바짝 오른다.

“일부러 참아주는 거 안 보이냐? 슬슬 긁는다, 어? ”

“어머. 진짜 오열했나 봐. 아무것도 반박 못 하죠?”

“아, 아니. 이건 그냥 넘어가 주는 거거든?”

아직 남아 있는 남자의 자존심을 긁어모아 대응해 보았지만….

“그냥 넘어가 주는 건 무슨. 아무튼 이 근처 밝은 곳에서만 놀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씨알도 안 먹히는 모양이다. 도유진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내 손을 잡아 쥐고 병실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편의점?”

도유진과 함께 도착한 곳은… 우리 동네 후미진 곳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    *    *

직업병 때문인가, 가로등도 몇 개 없는 동네다 보니 여기까지 걸어오며 주변에 신경이 쏠려, 저 멀리서부터 밝은 편의점 불빛을 보자 안도감이 느껴졌다.

“뭐 그럼 이런 늦은 시간에 우리 같은 고딩들이 어딜 가겠냐?”

하긴 이전에 살던 세상이면 이 시간에 열린 카페 같은 곳도 많겠지만, 아무래도 이 세상에선 미성년자가 밤 8시 이후에 놀 만한 곳을 찾기란 힘든 편이다.

요즘은 편의점 음료수도 괜찮은 게 많은 편이고, 먹을 것도 많고 밝으니까. 위험하지도 않은 편이고… 나쁘진 않네.

치링-

귀를 간질이는 차임벨 소리.

“승우 오빠, 하이!”

“어. 유진이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알바가 얼굴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유진이의 목소리에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스마트폰에 얼굴을 처박는다.

뭐야, 아는 사람이었나 보네.

약간 노랗게 탈색한 머리에, 기생오라비처럼 생겨먹은 꼬라지를 보니, 유진이랑 어떻게 아는 사람인진 알 만하다.

얘는 왜 맨날 이런 사람들이랑 친한 거야?

묘한 기분을 떨쳐내고 나는 편의점을 슬슬 둘러보았다.

난 뭐 먹지?

“야, 나강림. 찐따 새끼처럼 굴지 말고 이리로 와.”

도유진은 대충 음료 코너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내 팔에 강제로 바구니를 쥐여주더니, 맥주캔을 몇 개 휙휙 던졌다.

※만화책에서나 나오는 장면입니다. 착한 학생들은 따라 하지 마세요. 우리나라에선 미성년자는 주류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야. 너… 뭐 이렇게 대놓고….”

“야, 나강림. 닥쳐. 또 찐따처럼 굴지 말고.”

와… 얘 진짜 완전 발랑 까졌네.

[“마스터! 히어로는 친구가 비행 청소년이 되지 않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나도 얘 상태 안 좋아서 어떻게 해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니까.

대충 안줏거리가 될 만한 과자 몇 개까지 집어 던진 도유진이 바구니를 뺏어 들더니, 계산대 위에 척 올린다.

척 올려놓은 바구니에 무의식적으로 계산을 하려던 알바생이 깜짝 놀라 주변에 다른 손님이 있는지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야, 이씨. 나 이러다 점장님한테 걸리면 짤려. 요즘 야간 알바 할 곳도 없단 말이야.”

“아. 진짜 오빠 자꾸 찐따처럼 굴 거야? 나 친구 데려왔잖아. 내 체면 좀 살려줘 봐.”

“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음료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

“술은 됐고, 이걸로 대신 계산해 주세요.”

“야, 나강림. 너 자꾸 찐따처럼 이럴래?”

“어, 그래. 이걸로 계산한다.”

알바는 냉큼 술이 담긴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가 가져온 음료와 과자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짜증나~~.”

“야. 팔천오백 원.”

“일단 봉투에나 좀 담아줘 봐.”

“그럼 팔천오백이십 원. 야. 난 너한테 술 절대 안 팔아.”

“왜? 왜? 왜? 왜? 오빠도 학생 때 술 먹고 그랬잖아. 내가 다 봤는데 왜?”

“니네 오빠가 안 좋아할 거니까.”

“…….”

그 말에 순식간에 싸해지는 분위기.

“아, 됐어. 짜증 나. 나 갈 거야. 그럼 돈은 우리 오빠한테 받아.”

도유진은 그 말과 동시에 계산도 하지 않고 봉투에 담긴 물건을 냉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뭐야, 도유진 이거, 완전 양아치 새끼네.

너무나 당당하게 외상을 달아두는 도유진의 행태에 내가 얼이 빠져 있자, 반쯤 편의점 밖을 나섰던 도유진이 얼굴만 내밀고 나를 쏘아본다.

“안 올 거야? ”

“아니… 그래도 계산은.”

저 알바형 시급보다 더 많이 산 거 같은데… 내가 카운터 앞에서 계산하려고 멈칫거리자, 알바가 고개를 젓는다.

“계산은 됐다. 내가 말실수했다 치고 내가 대신 계산할게. 넌 쟤나 집에 잘 들여보내라. 오늘 상태 안 좋네. 병원 갔다 온 거야?”

이거 봐라, 도유진. 니 상태 안 좋은 거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생긴 건 기생오라비에 양아치처럼 생겼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네.

[“마스터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너무 실례되는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뭐 어때. 생각만 했는데.

내가 그 자리에 멈칫거리고 있자, 도유진이 잰걸음으로 걸어와 내 팔을 휘감곤 끌어당겼다.

“어어.”

“빨리 오라니깐. ”

“아, 알겠으니까 좀 놔봐.”

“놓으면 또 혼자 갈려고? 나 혼자 가게 만들면 소희 이모한테 이를 거다.”

도유진의 얇은 회색 후드티 위로, 도유진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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