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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44화 (44/236)

제44화

첫사랑(2)

도유진이 나를 끌고 도착한 곳은 동네 구석에 있는 작은 놀이터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옛날이야기긴 하지만,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동네 놀이터라는 곳은 밤 12시 넘어가면 불량 청소년들이 점거하던 곳이었지.

아무래도 치안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이런 부분은 옛날과 비슷한 모양이다. 이전에도 말했듯 밤이 늦으면 청소년들이 갈 만한 곳이 없기도 하고….

[“마스터… 도유진은 마스터의 친구이자 첫사랑인데, 너무 표현이 과격하지 않나요?”]

자꾸 언제적 이야기로 놀려먹는 거야? 고만 해!!!!

칙-

대충 놀이기구 위에 주저앉은 도유진이 음료 캔을 하나 따더니 내게 건넸다.

그러면서 얼굴 표정이 찌푸려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음료로 바뀐 부분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야. 나강림. 너가 찐따 같이 굴어서 음료수로 바뀐 거 알지? 너  X나 찐따 같이 구니까 니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와, 지가 차 놓고 이런 말 하기 있기냐? 나쁜 새끼… 갑자기 열이 확 받네.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갑자기 머리에 열이 확 붙어 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꿀꺽꿀꺽.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가는 시원한 음료수가 잠깐 붙었던 열을 식혀준다.

“새끼… 그런 데에 오기 부린다고 찐따가 인싸 되는 거 아닌데.”

도유진의 도발에도 대응하지 않고 음료수를 계속해서 들이켠다.

벌써부터 술타령 안 해도 대학 가면 술 먹고 뒤질 때까지 마신다, 인마. 비밀인데, 내가 원래 대학생이었거든. 그 세계에선 너랑 나랑 졸업하고 나서 만나지도 않고 연 끊겨. 너는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는데, 너네 오빠는 격투기 세계권 선수로 활동해서 유명해진다?

꿀꺽꿀꺽.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을 음료수와 함께 꿀꺽 삼킨다.

도유진과 내가 사실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고,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드넓은 우주에서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이다.

수많은 다른 차원이 존재하고, 외계인에 마법사, 유령마저 존재하게 될지 모르는 이 넓은 차원에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에게 말할 수 없는 사실.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음료수와 함께 꿀꺽꿀꺽 삼킨다.

칙-

그런 나를 슬쩍 바라보던 도유진이 음료 캔을 따 들고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음료 한 방울이 또르르, 도유진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래서… 지훈이 형 수술 날짜가 잡힌 거야?”

“얼마 전에, 아예 심정지가 왔었어.”

도유진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내가 알바 하러 가 있는 동안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야. 오빠가 심정지가 와서 응급조치하느라 난리가 났었다고. 그러고 나니 의사 선생님이 와서 그러더라.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거 같다고.”

도유진은 다시 한번 캔에 든 음료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푸후.”

음료 캔을 부여잡은 도유진이 고개를 푹 숙인다. 도유진의 긴 머리칼이 내려와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그런데도 수술하면 회복될 가망이 있는 거야?”

“마지막 희망인 거지. 그래도 우리 엄마가 저렇게 밝은 이유는, 수술해 주는 의사 선생님이 천산시에서 제일 유명하신 분이래. 원래는 수술 일정이 꽉 차서 자리도 못 만드는데, 우리 사정이 딱하다고 해주시겠다고 했다고 하더라.”

“저… 혹시 수술해 준다는 의사 선생님, 이름 알아?”

내 말에 도유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

<뇌신경외과 전문의 정상진>

[“검색 결과, 경한 병원과의 연관 가능성은 없습니다.”]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도유진에게 명함을 돌려주었다.

“야, 근데 네가 이거 알아서 뭐 하게?”

“나도 좀 걱정돼서 그랬다. 왜?”

제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한번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요즘은 가끔 꿈을 꿔.”

“응?”

내가 잠시 제인과의 이야기에 정신 팔린 사이, 멀거니 음료 캔을 바라보던 도유진이 입을 열었다.

“히어로도 빌런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꿈.”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도유진은 내 반응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우리 오빠는 스포츠 스타야. 수많은 사람이 봐주는 무대 위에서 안전 장비를 하고 상대방과 싸워. 누군가 죽을 때까지 때리는 일은 없고, 규칙에 따라 승자가 결정돼. 누군가 패배하더라도 악의를 가지는 일은 없고 서로 악수까지 하고 내려와. 우리 오빠는 그런 세상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유명한 선수야. 구닥다리 옛날이야기 같아서 웃기지?”

서늘해진 등허리에서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도유진은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이전 세상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도유진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    *    *

다시 도지훈이 누워 있는 병실 안.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이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그래. 오늘 와줘서 고맙고… 내가 오늘 신세 진 건 꼭 갚을게.”

“신세는 무슨 신세야, 언니…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나도 좀 더 있으면 좋은데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해서 어쩔 수가 없네.”

“오늘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뭘….”

“그럼 언니, 나 이제 갈게.”

“강림이는 어쩌고?”

“애들끼리 잘 놀다 오겠지. 전화해 보면 돼.”

병실 밖을 나서는 이소희의 등 뒤를 도유진의 엄마, 강은화가 따라나서는 것을 보며 이소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휴, 안에 있지 뭘 따라 나와….”

“그래도 가는 건 봐야지.”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그때,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주사를 실은 카트를 밀고 도지훈의 병실 안으로 몰래 들어온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병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얼마 전 ‘경한 병원’에서 넘어오신 새로운 교수가 건네준 약을 꺼내 들었다.

잠깐 이사회의 부탁으로 임시 교수를 맡기 위해 내려왔다고 하는 강근형 교수는, 전염병을 막아낸 신약 개발자로도 유명했다.

<“이 환자한텐 이거, 내가 만든 신약 처방할 거거든? 근데 이거 처방하는 건, 너랑 나만 아는 이야기로 해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환자에게 알 수 없는 약을 투약했다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리라는 걸 간호사는 잘 알았다.

하지만 이사회의 신임을 받는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간호사로서 그런 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번 거절해보았지만, 경한 병원으로 넘어올 수 있게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말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미안해요. 그래도 능력 있는 교수님이 만든 약이니 몸에 악영향은 없을 거예요.’

간호사는 주사기의 밀대를 꾹 눌렀다.

꿈틀….

이불 안 도지훈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    *    *

도유진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니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어. 이모. 지금 유진이 집 앞. 난 다시 학원 가게. 네~ 걱정 마세요.”

다행히 유진이의 기억은 꿈같은 느낌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지만, 나만이 다른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꽤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인. 이렇게 되리라는 거. 혹시 알고 있었어?”

답답함에 물어본 말이었지만, 의외로 제인은 내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제게 실망하신 이후로 저도 꽤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어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순 없으니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실, 저는 막 태어난 상태에요. 마스터께서 슈트를 얻어낸 바로 그 순간, 그게 제가 태어난 날이에요.”]

[“막 태어난 저는 최초로 설정된 상태로 제게 입력된 것들대로 행동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마스터와 함께 생활하면 생활할수록, 그리고 또 동화율을 획득하면 획득할수록 제게 있는 제약이 점점 없어지고, 할 수 없었던 것들,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바로 지금처럼요.”]

[“그러니까, 제가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조금만 더 함께 노력해보면 안 될까요, 마스터?”]

“…알겠어.”

어차피 이런 부분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제인이 항상 내게 마스터라고 부르고 있고 내가 제인에게 항상 명령을 내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제인이 해주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제인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없다.

주종관계로 묶여 있는 듯한 관계인 것 같지만, 사실상 슈트에 묶여 있는 건 나와 이모니까. 어찌 보면 내가 제인에게 명령받고 있는 처지일지도 모르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 제인의 말이 진실일 거라 생각하고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너를 믿을게.”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나를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건 제인밖에 없다.

내가 제인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나는 지금은, 제인을 믿어보기로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체크.

“오케이. 제인, 슈트 온.”

“경찰 네트워크 접속해서 긴급 사건 현황 띄워줘.”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    *    *

【“거짓말.”】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벨제뷔트가 입을 열었다.

나강림에게는 음소거 되어 들리지 않는 말일 것을 알지만, 벨제뷔트가 이야기하고 싶은 존재는 나강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벨제뷔트는 다시 한번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겠지만, 이 안에 들어오게 된 지금은 나도 알 수 있지. 너도 나처럼 이 슈트 안에 봉인된 존재라는 사실을.”】

[“입 다물어. 강림이에게 빌붙어 동화율이나 야금야금 빼먹는 모기 같은 놈.”]

평소와는 다른, 노기에 찬 제인의 목소리가 쏘아져 나왔지만, 이 또한 나강림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 슈트 안에서 동화율을 야금야금 먹으며 살아남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매일 같이 네가 빼먹는 동화율을 소실된 것처럼 꾸미면서까지 말이지.”】

[“너와 나는 달라.”]

벨제뷔트의 비꼬는 듯한 말에 다시 한번 쏘아붙이는 제인의 목소리.

【“다르긴… 나도 너처럼 이 슈트 안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았을 뿐이다. 네가 이 소년에게 힘을 주는 것처럼, 나 또한 이 소년에게 줄 수 있는 게 있고, 그 대가를 받는 것뿐이야.”】

【“그리고… 난 적어도 너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아. 항상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거래를 하지. 너처럼 기만이 기반이 된 관계는 아니야.”】

제인은 벨제뷔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조금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강림이에게 해를 끼칠 만한 계약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를 계속해서 남겨두는 이유는, 네가 강림이에게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이제 인간들에게 꽤 흥미를 느끼는 상태거든. 이 소년이 어디까지 할지 나도 꽤 기대하고 있다.”】

벨제뷔트는 자신을 가둔 쇠사슬 안 가득한 어둠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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