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46화 (46/236)

제46화

페이퍼 백(2)

“위험해….”

너무 느리다.

다크 카이저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지만, 너무 느렸다. 다크 카이저의 속도가 느리다고 할 순 없었지만, 저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빌런, 닥터 보기맨에게 하기엔 너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몸에 묶으려는 쇠사슬은 충분히 튼튼해 보였지만, 저 정도 힘을 가진 빌런의 몸을 묶으려면 최소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충족해야만 했다.

저 덩치가 힘을 썼을 때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게 안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라야 했다. 놈이 자신의 몸이 묶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히어로 활동을 해본 적 있는 공다혁의 눈으로 보기엔, 다크 카이저는 둘 중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할 듯 보였다.

그리고….

CRASH!

공다혁이 예상했던 것처럼, 다크 카이저는 닥터 보기맨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벽에 처박히고야 말았다.

틀렸다.

공다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정도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려면 육체계열의 능력자 중에서도 몸의 경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육체 경화 능력을 가진 능력자여야만 한다. 하지만 다크 카이저에게 경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후두두둑.

자신의 옆에서 무언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공다혁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바라보았다.

이가영이 너무 먹고 싶다며 이것저것 골라 담았던 빵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빵봉투에 담겨있던 빵들이 모두 쏟아지고 남은 것은, 결국 종이로 만들어진 빵 봉투 뿐.

이가영은 들고 있던 빵 봉투에 구멍을 내더니, 공다혁에게 내밀었다.

“가영아…?”

“멍하니 있지 마. 나와 별이의 은인이잖아. 자기가 지금까지 히어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나와 별이 때문이란 걸 알아.”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자기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은인, 그리고 여기 있는 많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말 거야.”

“더 길게 말할 시간 없는 거 알지? 빨리 달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내 남자, 우리를 구해줘.”

그리곤 이가영은 공다혁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덩치 큰 닥터 보기맨이 다크 카이저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영이의 말이 옳다. 히어로 활동을 유지할지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지금은 내 가족과 나의 인생을 구해준 은인을 살려야만 할 때다.

공다혁은 얼굴에 가면을 썼다.

*    *    *

공다혁, 아니 래피드 스타는 신체계열 슈페리어로서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능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슈페리어다.

신체계열, 이름대로 신체 능력을 강화해 주는 능력인 것 같지만, 실은 부르는 용어와 실제 작용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신체계열의 능력은 사실은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만 작동하는 일종의 자기 버프 능력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수 있거나, 자기 몸에서 독을 뿜을 수 있거나, 자기 자신의 몸을 변형시킬 수 있는 등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작동하는 종류의 능력들인 것이다.

반대로 이능계열은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는 각종 이능력을 의미한다. 이능계열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 작용한다.

다른 물건을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염력이 생긴다든지, 들고 있는 물건을 상상을 초월하게 강하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몸을 치유할 수 있다든지….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작용하는 종류의 능력이다.

그런 고로 속도를 작용하는 스피드스터는 대부분 육체계열이다. 자기 자신의 육체 능력을 최대한 강하게 만들어 극한의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래피드 스타는 실은, 그런 육체계열 스피드스터와는 다르다.

래피드 스타의 능력은 시간을 극한으로 느리게 만들 수 있는 힘이다.

이능계열의 능력은 스스로에겐 적용되지 않는 고로, 래피드 스타는 그 시간 속에서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주변의 공기 흐름까지 느려지지 않았다면 래피드 스타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빠른 무언가가 되었을 테지만, 시간이 멈춘 세상에선 공기의 흐름까지 함께 느려졌다.

그런 시간 속을 달린다는 것은, 마치 머리끝까지 물이 차오른 수영장 바닥에 붙어 내달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런 곳을 내달리기 위해선 온몸의 근육이 꽤 단련되어 있어야만 했고, 그래서 몸을 극한까지 단련한 래피드 스타는 신체계열의 히어로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굳이 그 오해를 풀지 않은 이유는, 히어로로서 그런 오해는 적들을 상대할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얼굴에 마스크를 씀과 동시에 세상이 느려지고, 숨이 답답해져 온다.

래피드 스타에겐 익숙한 감각이었다.

다크 카이저가 닥터 보기맨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래피드 스타의 방법과 꽤 닮아 있었다.

래피드 스타의 전용기인 인피니티 플래시.

래피드 스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무구인 인피니티 로프를 들고, 그 초인적인 속도로 상대를 빠르게 묶어 제압하는 기술.

마법 무구인 인피니티 로프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 절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래피드 스타만의 전용 무구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 인피니티 로프를 래피드 스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은퇴를 마음먹고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 버렸거든.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란 생각에 저질렀던 짓이지만, 그게 있었으면 조금 편하긴 했었을 텐데….

대체 할 수 있는 물건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끊어진 전깃줄.

닥터 보기맨을 제압하기엔 너무 약하다.

아니면 내 허리를 묶고 있는 벨트?

그건 안 돼.

가죽 벨트는 놈을 묶기에 꽤 괜찮은 강도의 물건이지만, 벨트가 없어 바지가 내려가게 되면 래피드 스타의 이미지에 손상이 갈 가능성이 있다.

이건….

주변을 둘러보던 래피드 스타의 눈에 끊어진 쇠사슬이 보였다. 아까 전 다크 카이저가 닥터 보기맨의 몸을 묶기 위해 사용하려던 물건이다.

아까는 시커먼 검은색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 떨어져 있는 쇠사슬은 평범한 쇠사슬들처럼 번쩍이는 회색빛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닥터 보기맨의 몸에 붙어 있다 끊어져 버린 쇠사슬은 너무도 짧았지만 래피드 스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래피드 스타의 두 번째 능력.

그것은 줄처럼 길고 늘어진 물건을 길게 변형시키고, 더 튼튼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신체 능력자는 이능계열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래피드 스타가 신체 능력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으므로, 래피드 스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피니티 로프를 마법이 깃든 물건으로 오해받게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는 이능계열 능력자인 래피드 스타의 두 번째 능력이었을 뿐이지만.

네 이름은 오늘부터 인피니티 체인이다.

래피드 스타의 두 번째 비장의 무기, 인피니티 체인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슬슬 부족한 공기 때문에 숨이 차기 시작했기 때문에, 래피드 스타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닥터 보기맨을 향해 달렸다.

*    *    *

“나약한 검은 쫄쫄이.”

차르륵….

닥터 보기맨은 몸에 걸려 있던 체인을 바닥에 흩뿌리며 씨익 웃었다.

보기맨은 감옥에서 새로 사귄 친구, 황금 남자와 보석 여자를 도왔다는 데에 꽤나 만족했다.

옆 감방에 있던 놈이 자신에게 괴물 자식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열받은 보기맨이 감옥 벽을 부수고 놈의 허리를 접어버린 이후로… 그가 갇혀 있는 감옥에선 자신과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금 남자와 보석 여자는 그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유일한 감방 친구였다. (안쓰럽게도, 골드 재킷과 다이아몬드 진저는 감옥 벽을 뚫을 정도로 힘이 센 보기맨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보기맨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무언가! 하지만 보기맨은 눈치채지 못했다./

감옥을 탈출시켜 주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준다는 말을 들었을 땐, 보기맨답지 않게 눈물까지 흘릴 뻔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골드 재킷과 다이아몬드 진저는 그렇게 해줄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

/이번엔 보기맨의 등 뒤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이번에도 보기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만드는 덴 비용이 필요하고, 그걸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땐 금방 납득했다.(미안하지만, 골드 재킷과 다이아몬드 진저는 보석을 절대 팔지 않는다.)

그래서 보기맨은 검은 쫄쫄이를 막아달라는 황금 남자와 보석 여자의 요청을 흔쾌히 수행했다.

그들을 도와주면, 자신은 괴물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자신이 발견한 유전자 조작 방법으로 논문을 써 노벨상을 탈 것이다.

노벨상을 탄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신이 지은 죄들을 사면해 줄 것이다.

그 기술로 돈을 벌어 그는 황금 남자와 보석 여자와 함께 살며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사서 먹을 계획이었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챘겠지만, 골드 재킷과 다이아몬드 진저는 보기맨과 함께 살 생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멍청한 검은 쫄쫄이.”

그 정도 속도로, 그 정도 힘으로 자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아주 오산이다.

검은 쫄쫄이를 빨리 처리하고, 빨리 친구들을 따라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는 신호등으로 놈의 머리를 내려찍어 끝장을 보려던 바로 그때,

“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온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보며, 보기맨은 당황했다.

검은 쫄쫄이는 이미 쓰러졌을 텐데…!?

부스럭!

종이 봉투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눈 앞에 나타난 남자.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 래피드 스타. 우주를 가르는 혜성처럼 빠르게.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군. 내가 늦는 일은 없지만 말이야.”

검은 쫄쫄이보다 우스운 가면을 뒤집어쓴 요상한 히어로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페이퍼 백…?”

“페이퍼 백이 아니라 래피드 스타다, 다크 카이저. 조금은 내가 지은 이름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종이봉투 히어로는 축 늘어져 있는 검은 쫄쫄이를 보며 혀를 쯧 찼다.

“거, 꼭 내가 멋있게 등장하면 다들 쓰러져 있더군. 분명 나만큼 빠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럼 보통 내가 아니면 큰일을 당했을 거라는 의미지. 운이 좋았군, 다크 카이저.”

“으아아아아!”

보기맨은 점점 조여오는 체인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미안하다, 빌런. 내가 너무 빠른 나머지 네가 눈치채기도 전에 네 몸을 모두 묶어버렸지 뭔가? 이름하야, 인피니티 플래시!”

짜잔!

“너! 봉투를 뒤집어쓴 멍청한 놈!!! 내가 찢어 먹어버리겠다으캌!”----siiiiiiiing!〕〕

다시 목까지 꽁꽁 묶여 점점 숨을 쉴 수 없게 된 보기맨은 정신을 잃으며 다짐했다.

저 날파리 같은 봉투 쓴 히어로 놈에게 꼭 복수하고 말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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