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흑염의 사용법(3)
대한민국 천산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악명높은 빌런 집단을 몇 개 꼽아보자면, 보통 4개의 빌런 집단이 꼽히기 마련이다.
망령당, 흑사자회, 불곰파, 그리고 잿빛 망토단.
그렇다면 그중 가장 강한 집단은 어디인가? 약과 정신 지배를 통해 부하를 부리는 망령당?
힘 좀 쓴다는 놈들이 거들먹거리며 푼돈 좀 벌기 위해 들어가는 흑사자회?
빅 베어(big bear) 강진웅 외에는 볼 필요도 없는 쓰레기 집단. 혐오스러운 짐승 새끼들이 만든 불곰파는 아예 언급할 필요도 없지.
잿빛 망토단의 현 클록 헤드, 라이트닝 스파크(lightning spark)는 당연히 그중 강한 집단은 바로 자신이 이끄는 잿빛 망토단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마약을 위해 충성하는 망령당, 밤 장사하는 놈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구성된 흑사자회, 살아남겠다고 강진웅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있는 불곰파… 전부 대의란 것이 없는, 그저 그런 잔챙이 집단들일 뿐이다.
그에 반해 잿빛 망토단은 어떠한가? 그들은 대의를 위해, 이념을 위해 모였다. 약과 정신 지배, 돈과 이익, 그리고 생존을 넘어선 무언가를 위해 뭉친 집단인 것이다.
최소한 천산시에 있는 빌런 집단 중에선, 대의를 위해 뭉친 잿빛 망토단을 이길 수 있는 집단은 없다. 라이트닝 스파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빠진 채 텅 빈 도로를 내려다보는 라이트닝 스파크. 라이트닝 스파크가 분위기를 잡겠다며 가져다 놓은 무거운 데스크와 비싼 의자 위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가 앉아 있었다.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에 두꺼운 겨울용 코트. 짙은 화장과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곤 하지만 꽃샘추위가 밀려가고, 슬슬 따뜻해져 가고 있는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래서, 비도(非島)랑은 연락이 됐나?”
가만히 야경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트닝 스파크가 기억났다는 듯 뒤를 돌아 자신의 부하직원에게 말을 건다.
“예. 다만 클라이언트 측에서 물량을 문제 삼고 있는데요… 일주일 전에 잃은 물량이 적은 수준이 아니라….”
“그랬지… 까마귀 두 마리가 물어갔다고 했던가? 새 물량 못 받아왔어?”
저벅저벅. 뒤를 돌아 부하직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라이트닝 스파크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성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친다.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에서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여성을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아니, 눈여겨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메두사.
우습게도 자신들이 가장 강한 빌런 집단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잿빛 망토단은, 단 한 명의 빌런에게 지배를 당하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좁은 사상에, 가지고 있는 알량한 자부심은, 메두사가 정신 지배를 사용하기 쉽게 만들었다.
“지난번에 잃은 물량이 다시 불곰파 놈들한테 돌아갔잖습니까? 그 이후로 화가 많이 난 상태라서요. 경계가 심해져서 브루트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랬지. 도시 내에서 공급할 방법은 없나?”
딱.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메두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같은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의 행동이 멈춘다. 잠시 그대로 라이트닝 스파크를 노려보던 메두사는 뻗은 손가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랬지. 도시 내에서 공급할 방법은 없나?”
그러자, 마치 영상을 몇 초 전으로 돌린 것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하는 라이트닝 스파크.
다시 한 바퀴 돌아가는 손가락.
“지난번에 잃은 물량이 다시 불곰파 놈들한테 돌아갔잖습니까? 그 이후로 화가 많이 난 상태라서요. 경계가 심해져서 브루트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딱.
이 X신 같은 놈들 같으니….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을 텐데…. 메두사는 자신이 걸어두었던 주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메두사는 자신이 걸어뒀던 주문이 헐거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얼마 전에 벌어진 전투 때문인가?
자신을 가르친 스승과의 전투.
10여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메두사는 자신의 스승을 이길 수가 없었고, 또다시 큰 상처를 입고 도망쳐야만 했다.
쯧.
스승과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는, 메두사가 잿빛 망토단에 걸어둔 정신 지배에도 영향을 주고 만 것이다.
메두사는 다시 한번 손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저었다.
“그랬지… 까마귀 두 마리가 물어갔다고 했던가? 새 물량 못 받아왔어?”
까마귀? 메두사는 라이트닝 스파크의 정신 속에서 다크 카이저와 다크 스코프의 정보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메두사가 본 적 있는 놈들이었다.
밀키웨이의 본거지, 다프네에 꽤 자주 드나들던 놈들이다.
자신과 똑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동문이지만, 밀키웨이는 메두사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 똑같은 가르침을 받아도 밀키웨이는 언제나 메두사보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밀키웨이가 자신보다 좋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놈의 슈페리어!
스승은 밀키웨이가 품은 “대의”를 꽤나 고평가했고, 메두사도 밀키웨이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 그 뜻을 함께 이루었으면 했었다. 어쩌면 스승은 그때부터 메두사가 품고 있는 “악의”를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두사는 이 세상에서 초능력자라는 존재가 모두 없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엔 초능력이 필요 없다. 초능력이라는 것은 그냥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가지고 태어난 것만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superior)는 소리를 듣고 살 수 있는 건 불합리하다.
메두사가 굳이 잿빛 망토단을 정신 지배해 써먹고 있는 데에는 그런 유치한 이유도 존재했다.
슈페리어 우월주의 집단이 슈페리어의 몰락을 꿈꾸는 자신의 조종을 받는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메두사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휘저었다.
“예. 다만 클라이언트 측에서 물량을 문제 삼고 있는데요… 일주일 전에 잃은 물량이 적은 수준이 아니라….”
일주일 전? 일주일 전인데 강진웅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밀키웨이. 그 발칙한 계집년이 무슨 수를 쓴 모양이지. 메두사는 잿빛 망토단과 불곰파 사이의 전쟁을 일으키려던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창밖을 내다본 메두사는 번쩍이는 빛이 이곳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꼬리도 붙었나….
정신 지배가 헐거워지면서 주문을 받은 대상들을 둔하게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헐거워진 정신 지배는 대상을 둔하고 멍청하게 만든다. 정신 지배가 헐거워진 잿빛 망토 단원들이 쉽게 추적을 허용해 버린 탓이리라.
순식간에 날아온 그 빛은 창문을 깨고 메두사의 앞에 떨어졌다.
쨍그랑!
창문을 깨고 들어온 것은 붉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는 퀘이사와 그 품 안에 안겨 함께 날아 들어온 밀키웨이였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메두사.”
호랑이 같은 계집애. 지 생각한 건 어떻게 알고 튀어나온 거야?
그와 동시에 건물의 불이 모두 꺼졌다.
* * *
4층으로 올라온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푸른색으로 빛나는 퀘이사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난 그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퀘이사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이트닝 스파크.
푸른빛이 도는 번개 불꽃을 사용하는 자연계열 슈페리어 빌런인데, 퀘이사에겐 꽤 상성이 좋지 않은 상대였다.
퀘이사가 열 에너지와 빛 에너지를 흡수하는 데에는 강한 내성이 있지만, 번개 에너지에는 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다.
불꽃의 형태를 띠고 있는 라이트닝 스파크의 번개 불꽃은, 퀘이사의 몸에 흡수되어 손상을 일으킨다.
그다음으로 보인 건, 쓰러져 있는 잔챙이 빌런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밀키웨이. 그리고… 밀키웨이와 대치하고 있는 건… 만화와 현실의 괴리 때문에 곧바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몸 안에 흡수된 번개 에너지를 분출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퀘이사의 뒤를 라이트닝 스파크가 따라붙는다.
똑같이 하늘로 날아오른 두 명의 초능력자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뿜어내며 격돌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둘이 대등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퀘이사의 몸에 흡수된 번개 에너지가 퀘이사의 육체를 갉아 먹고 말 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유도, 몸에 흡수된 번개 불꽃을 빠르게 허공으로 뿜어내기 위해서일 테고.
BOOM!
내게 날아오던 무언가가 밀키웨이가 만들어낸 보호막에 부딪혀 사라진다.
“하! 밀키웨이! 네까짓 년이 쓰는 같잖은 초능력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딜 먼저 도와야 하는 거지?
지금 당장 더 위급한 쪽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 불합리할 정도로 상성이 좋지 않은 퀘이사 쪽이 더 위급할 터지만… 허공으로 날아올라 버린 두 사람을 따라붙기에 내 망토의 활공 능력은 너무 미약하다.
그렇다면 밀키웨이 쪽을 먼저 도와 저 빌런을 먼저 쓰러트리고, 밀키웨이와 협력해서 라이트닝 스파크를 쓰러트리는 방법이 더 좋을지도….
“여긴 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퀘이사를 도와줘요! 저러다가 추락하면 퀘이사는 죽어!”
급박하게 들리는 밀키웨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곤, 일단 다짜고짜 창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BOOM!
BOOSH!
PZZZZZ-!
허공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초능력 전투를 보며 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지금의 내가 저기서 퀘이사를 도울 수 있을까?
원작에서 라이트닝 스파크를 어떻게 처리했더라? 불꽃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퀘이사는 허공을 날 수 있지만, 라이트닝 스파크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래피드 스타는 허공으로 날아오른 라이트닝 스파크를 상대할 수 없었다.
불꽃을 발사하는 슈팅 노바의 코즈믹 건도 라이트닝 스파크의 번개 불꽃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고, 밀키웨이는 다른 빌런을 상대하는 중이라 우리를 도울 수 없을 거다.
지금 퀘이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제인. 지금 당장 다크 윙, 만들어낼 수 있나?
[“지금 당장 다크 윙 능력을 개방할 순 있지만, 지금 허공에서 싸우고 있는 저 두 사람을 따라잡을 속도를 만들 수는 없어요.”]
그렇겠지. 슈트의 능력들은 경험치를 충분히 먹여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미즈 컴뱃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벨제뷔트가 그랬지.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고. 벨제뷔트.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거, 가능한가?
【“가능은 하다. 그런데 지금 주기로 한 동화율론 조금 부족해. 아무래도 네가 가지고 있는 동화율의 일부를 소모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나는 잠시 동화율이 떨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후폭풍에 대해 고민해 보려고 했지만….
PZZZZZ-!
불안하게 깜빡이는 퀘이사의 불빛을 보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들어갈진 모르겠는데. 일단 해보자.”
내 어깨 위에, 흑염으로 만들어진 날개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