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우정
[“마스터! 아이들 앞에선 표정 관리하셔야 해요.”]
나는 제인의 말을 듣고 무너지려던 표정을 다 잡았다. 다크 카이저의 가면, 특히 눈 부분은 내 눈과 연동되어 있으므로 내 눈의 움직임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아이들 앞에서 표정이 무너져 봐야 좋은 것이 없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 좋을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보였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집으로 보내는 아이들이고, 그 이전 몇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했지만… 매번 부모님이 눈물 흘릴 때 함께 흐르려는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앞으로 아이들을… 아이들과 큰일 없이 행복하게 산다면, 그거야말로 이런 일을 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일 거요.”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다 말을 바꿨다. 아이를 잃어버린 게 어떻게 아이 부모의 잘못이겠는가?
내가 몸을 돌려 건물 위로 뛰어오르려고 하던 바로 그때,
“고마워. 까마귀야.”
도도도 달려온 아이가 내 다리를 꼭 안아준다. 아이의 몸의 온기가 다리를 통해 느껴졌다. 온몸에 털이 자라고,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분명 이들은 사람이다.
나는 다리에 붙은 아이를 안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내려놓았다.
“큼… 흠흠.”
목이 메어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몇 번 목을 가다듬은 뒤, 나는 항상 하던 말을 외쳤다. 나를 지켜보는 아이들을 위해서.
“내 이름은 다크 카이저. 죄지은 자들을 벌하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이 세계에 강림했다.”
외면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뛰어올랐다.
* * *
“어. 수아야, 안녕.”
“나강림. 안녕.”
여느 때와 같은 등굣길이었지만, 나는 슬쩍 강수아의 얼굴을 살폈다.
이번 주말에 있었던 빌런과의 사투가 꽤나 격렬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오자 건물에 남아 있던 주요 간부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빌런들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겨우 살아남아 빠져나간 빌런은 미즈 컴뱃, 라이트닝 스파크를 포함한 소수의 간부진뿐이었다.
그래도 그놈들은 이번 전투를 통해 잃은 것이 많기 때문에, 상처를 회복하고 조직을 다시 구성하기 전엔 큰 사건을 일으킬 순 없을 테지.
신경 써야 할 집단이 4개에서 3개로 줄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꽤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거기에 본부에 남아 있는 데이터를 이용, 경찰과의 협력으로 납치당했던 브루트 아이들을 모두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하기까지가, 주말 이틀간 일어났던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아의 얼굴은 꽤나 평온해 보였다. 나도 이용해 본 적 있는 것처럼, 황서현의 치료 능력은 꽤 효과가 좋다. 싸움이 일어나고 이틀이 지났고, 틈틈이 밀키웨이가 퀘이사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마 당분간 히어로 활동을 하긴 힘들겠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정도에는 무리가 없을 거다.
“뭐야, 나강림? 너 또 어디 아파?”
요 며칠 있었던 일을 복기하느라 잠깐 말을 하지 않았더니, 강수아가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훅 끼쳐오는 샴푸 향과 더불어 그 맑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퀘이사를 안아 들었던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나강림. 너 또 열나는 거 같은데? 또 감기야?”
“아냐, 아냐. 이제 날씨가 슬슬 따뜻해지잖아. 좀 더워져서 그래. 더워서.”
나는 깜짝 놀라 강수아와 멀리 떨어지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일 한소연이 기다리고 있는 골목의 담벼락에 도착하자, 한소연이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아야. 강림아, 안녕! 얘들아. 이제 나 학교 가야 해. 너희도 빨리 너희 집으로 돌아가. 너희 주인이 걱정할 거야.”
한소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물들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모두 흩어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멍!”
“야옹!”
지난번에 능력을 각성할 뻔한 이후로 자주 보는 장면이다. 어비스와 연결된 차원의 문을 열어 어비스의 괴물들을 불러내는 능력은 아직 각성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동물들을 다루는 정신계열은 먼저 깨우치기 시작한 모양이다.
좋은 변화다. 다루지도 못하는 어비스의 괴물들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보단 동물들을 통해 괴물을 다루는 방법에 충분히 익숙해진 후, 그다음 어비스와의 차원의 문을 여는 능력을 각성하는 것이 훨씬 안전할 터였다.
웬만하면 차원의 문을 여는 능력은 각성하지 않는 방향이 가장 좋겠지만.
“강림아! 수아야! 시험공부는 좀 했니?”
강수아와 친구가 되고, 동물들과도 친해지고 나서부턴 한소연의 성격도 꽤 밝아진 것이 눈에 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개도 안 했지롱.”
“나강림. 공부 하나도 안 한 게 그렇게 자랑스러워?”
“괜히 얼굴 찌푸리고 있는 거보단 시원하게 인정하는 편이 몸에 좋다? 괜히 기분 안 좋으면 잠도 안 오고 소화도 잘 안 돼.”
“말은 잘해.”
이제 중간고사까지 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내일은 뮤턴트 인자 능력 검사가 있을 테고, 능력 검사가 끝난 수요일부터 전쟁 같은 중간고사가 시작될 테지.
다행히 꽤 큰 사건을 해결한 탓인지, 벨제뷔트에게 떼어줄 만큼 떼어주고도 흑염을 사용해서 잃은 동화율보다 얻은 동화율이 컸다.
그러니까 정말 위험한 큰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다른 히어로와 경찰을 믿고, 당분간은 내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중간고사 공부에 열중할 계획이다.
[현재 동화율 : 37%]
[현재 경험치 : 421exp]
동화율은 얼마나 히어로다운 일을 했는가가 중요하지만, 경험치는 오롯이 내가 얼마나 성장할 만했는가에 따라 그 양이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동안은 위험한 상황이 자주 있어서 경험치가 모이기도 전에 사용해 버리곤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능력을 열어볼 만큼의 경험치가 모였다.
다크 카이저 설정 노트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내가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다. 두꺼운 스프링 노트에 100p가량 빼곡히 적혀 있는 다크 카이저의 설정 노트의 내용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군인이 되고, 다시 대학생이 되는 동안 서서히 잊혀갔다.
그렇게 잊히고, 내 기억 속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능력은 지나치게 살상력이 강했다. 내 치기 어린 시절, 내가 되고 싶었던 히어로는 범죄자를 가차 없이 처단하는 다크 히어로였으니까.
이 세계에 들어와 경험치가 모이기 시작했을 때 몇 번 들춰본 적 있긴 하지만, 내 중2병 시절 흑역사 안의 내용들을 보며 몸서리치며 꺼버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심연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유용하게 사용 가능한 능력들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
“저… 수아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우리 집에서 시험공부 하지 않을래? 나… 친구가 생기면 집에서 같이 시험공부 하는 거 꿈이었거든.”
등교해서 학교 정문 앞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던 한소연이, 결국 학교 정문을 넘어오고 나서야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한소연… 너 정말 적극적으로 바뀌었구나.
그런 말을 하면서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게, 나에겐 말하지 못한 게 미안한 모양이다.
소연이 집? 그럼 소연이 방에 들어가서 공부한다고?
나도 그런 상황은 민망하다. 이전 세상에서도, 이번 세상에서도 여자 방은 이모 방 외엔 들어가 본 적이 없는걸. 여자애 방에서 여자애들이랑 공부? 분명 별거 아닌 일이지만, 내겐 조금 쑥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다는 듯 소연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그런 나와 한소연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친구니까.”
* * *
친구.
찌릿.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언가가 찌릿하고 강수아의 몸을 울렸다.
얼마 전에 전기 능력자와 싸운 후유증이 아직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건가? 서연 언니는 이제 몸 안엔 전기가 남지 않았을 거라고 했는데.
친구. 강수아의 친구.
히어로로 활동하는 퀘이사에겐 친한 친구들이 꽤 있지만, 가면을 벗은 고등학생인 강수아에겐 친한 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강수아 스스로가 항상 같은 반 친구들과의 거리를 두곤 했다. 강수아로서는 누구와도 아주 친해지지 않게, 그냥 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게.
히어로 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껴보았던 강수아로서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비밀로 인해 자신과 친한 친구가 아픔을 느끼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가끔은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것도 참을 만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강수아에게 어느 날 나강림과 한소연이 나타났다.
나강림은 친화력이 좋은 친구였고 주변을 배려할 줄 아는 친구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 중엔 나강림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강수아는 나강림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니까. 등교 정도는 같이해도 괜찮겠지. 실은 그게 누구든 강수아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외로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강수아는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한소연을 만났다.
‘짝사랑을 현실 도피 수단으로 삼지 말라.’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주제넘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제넘은 말을 듣고도 한소연은 자신과 친구를 하고 싶다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괴롭힘당하는 한소연의 입장을 눈치채고,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서기 위해 항상 지켜봐 왔던 강수아에게, 한소연이 내디딘 한 걸음의 변화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강수아도 친구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일어난 사건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꼈을 때, 강수아는 그 끝에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강수아는 자신이 퀘이사만의 삶이 아닌, 강수아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강림과 소연은 강수아로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얼마 되지 않은 인연이지만, 친구로서 오래 지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아야?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강수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소연과 강림이 보였다. 소연이 강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수아는, 항상 자연스럽게 소연과 강림을 나란히 앉도록 유도하곤 했다.
“아니야. 혀를 잠깐 씹어서.”
“어이구, 바~ 보. 조심 좀 하지 그랬냐, 으아아악.”
강수아는 얄밉게 까불대는 강림이의 손등을 꼬집었다. 강림은 자신과는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스스럼없이 놀려대곤 했다. 아직 소연이한테는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지만.
그 간격은 아무래도 강림을 좋아하는 소연이 좀 더 적극적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에 집에서 함께 공부하자는 말도 그렇다.
“저… 강림아….”
“응?”
“그… 있잖아… 그… 신간. 그래. 도서실 신간 언제 들어온댔지?”
“쌤 말로는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 들어온다던데. 아직까진 여유 있어.”
아무래도 소연은 강림이와도 함께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오늘 온종일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실패하는 모습은 강수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다.
연애.
자신의 앞에 있는 친구들은, 자신이 보기엔 굉장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다. 이렇다 할 능력도 없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
강수아는 자신의 부모님을 기억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만난다면, 아무래도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히어로여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비밀 없이 상처 주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수아는 잘 알고 있었다.
찌릿.
갑자기 심장 한쪽이 찌릿하며 흑염의 날개를 펼치고 자신을 구하던 다크 카이저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때 꽤 아팠던 모양이지. 오늘 저녁에 황서현에게 가 치료를 한 번 더 받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소연의 모습을 보던 수아는, 가만히 지켜보기보단 한번 도와주기로 했다.
“기왕 같이 공부하기로 한 거, 나강림, 너도 오늘 저녁에 같이 소연이 집에 가자.”
“엉…? 엉? 아니. 아냐 난….”
“응. 그래, 강림아. 너도… 너도 올 거지? 꼭 와줬으면 좋겠어.”
한소연. 내가 한번 도와줬다.
찌릿.
알 수 없는 통증이 다시 한번 심장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