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심연(1)
이 세계에는 초능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의 몸 안에 있는 뮤턴트 인자로 인해 만들어진다.
사실 그 뮤턴트 인자가 어떻게 작용해서 사람에게 초능력을 가지게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이 세계에선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진 않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이 없다 하더라도 이 세상엔 초능력자들이 존재하고 있고, 국가는 그들을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중간고사 시험 때마다 하는 뮤턴트 인자 능력고사다.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은 중간고사와 더불어 초능력에 대한 능력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학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종류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점수를 내려주는 것인데… 특정 능력이 필요한 대학의 어느 특정 학과라든지, 직장 등지에서 초능력의 종류와 점수에 따라 추가적인 점수를 내려주기도 한다.
가지고 태어난 초능력만으로 추가 점수를 받는 것이 조금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재능이고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재능인 것처럼, 이 세계에선 좋은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의미인 거다.
다만 능력의 유무에 대한 차별이 학교 폭력을 만들게 되는 경우가 있는 터라, 대부분의 능력고사는 국가 시설에서 1:1 개인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점수가 얼마나 나왔는지에 대한 부분도 학생 개인에게만 통지될 뿐, 모두 비밀에 부친다.
그런고로 나는, 오늘 능력고사를 받기 위해 돌연변이 인자 검사센터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내추럴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센터로 오기만 하면 되고, 간단히 피 검사를 하고 나선 센터 내에서 자습하며 대기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으아아아악.”
“좋아. 쿵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내려놔.”
쿵.
“죄… 죄송해요. 너무 힘들어서.”
“어. 그래. 그럴 수 있지. 네가 안 다쳤으면 괜찮아. 너 다치지 말라고 하는 거니까, 다른 건 조금 더 조심히 다루렴.”
그리고 나는 지금, 육체계열 슈페리어로 재분류를 받고 능력 검사를 치르고 있었다.
* * *
뮤턴트 인자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내추럴로 확정된 사람이 다시 슈페리어로 재분류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첫 번째로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경우. 방사능은 히어로물의 역사상 가장 초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주 역사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방사능에 노출된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능력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런고로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그 즉시 센터로 이송되어 재검사를 받게 된다.
둘째는 아직 뮤턴트 인자에 대한 과학 기술이 부족하여, 해당 뮤턴트 인자의 정보가 없었던 경우다. 이 경우는 기계와 전산상의 오류로 취급하고 재검사를 받게 된다.
“좋아, 좋아. 속도 올라간다.”
“으에에에엑. 이제 한계예요!”
“멈춰.”
내가 지금 육체계열 슈페리어로 분류되어 능력 검사를 치르고 있는 이유다. 내 육체 능력의 성장이 중3 기말고사 때 치렀던 때보다 너무 급격하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틀대며 한참을 서 있던 구 형태의 기계에서 벗어나 의자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흠… 작년에 비하면 육체 능력의 전체적인 수치가 엄청나게 올라갔구나. 내추럴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정도는 아니지만, 올라간 수치만 보면 조금 이상하긴 하네. 내추럴 평균 이하에서 내추럴 상위권 이상으로 올라온 수준이거든. 최근에 갑자기 몸이 좋아졌다거나… 그런 걸 느낀 적은 없니?”
“아니, 이 몸은 제가 열심히 운동해서 만든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뭐…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뮤턴트 인자는 뇌에도 작용할 수가 있단다. 유명한 과학자나 사업가 중에는 정신계열 슈페리어가 대단히 많거든. 뮤턴트 인자가 뇌에 작용해서 머리를 똑똑하게 만드는 거지.”
“그럼 연구원님도 정신계열 슈페리어세요?”
“보통 여기서 일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이면 정신계열 슈페리어인 경우가 많긴 하지만, 난 정신계열은 아니야.”
내 질문에 싱긋 웃으며 답변하는 연구원의 가슴팍엔 <서승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그래. 아무튼 검사 결과에 대해서는 일주일 뒤쯤 너한테 메시지가 갈 거야. 다시 아까 검사복 받았던 데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가면 된단다.”
“네. 고생하셨어요.”
나는 연구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문고리를 손으로 잡았다.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얼마 전에 눈에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게 조금 걱정이 되긴 하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검사실을 나섰다.
* * *
“뭐야, 나강림. 너도 이제 끝났냐? 너는 점수 잘 나올 거 같냐? 아, 맞다~ 너 내추럴이라고 했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도유진이 낄낄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계집애… 그래도 꽤 밝아졌네. 다행이다. 이모에게 전해 듣기론 지훈이 형의 몸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몸 상태가 꽤 좋아졌기 때문에 일주일 후에 수술에 들어갈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꽤 좋아 보이네.
머리가 잔뜩 젖어 있는 것에서 육체 능력 검사를 받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학교 폭력과 평등을 위한 비밀이네 어쩌네 하는데, 어차피 이런저런 방법으로 서로 대충 시험 때마다 어떤 능력 검사를 받았는지 눈치채게 되어 있다.
개개인에게만 점수를 알려준다고 해서 서로 자기 능력을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랑 어릴 때부터 친구인 도유진은 내가 내추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 너도 이제 끝났나 보네. 나야 내추럴이라, 뭐 별로 할 것도 없지.”
“야, 나는 꽤 잘 나왔다. 경찰대 특채도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이래.”
“뭐? 니 주제에 무슨 경찰대. 공부나 똑바로 하셔.”
“어. 그러려고.”
엉?
“나 군인이나 경찰 해보려고. 사실 웃기잖아? 나라에 군인이 있고 경찰이 있는데도, 히어로라는 존재들이 설치는 거. 나는 정식으로 나라에서 인정받고 범죄자들을 잡아보려고.”
요 녀석… 공부 못 하는 거 내가 뻔히 아는데도 저렇게 쪽팔린 대사를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외칠 수 있다니… 철면피가 수준급이구나.
“아직 공부 시작도 안 한 주제에 말은 청산유수다? 너가 경찰대는 무슨.”
“어쭈, 나강림. 두고 봐라. 나는 입에서 나온 말은 꼭 지켜.”
웃기고 있네.
“야, 나강림. 그런 의미에서 나 공부 좀 가르쳐 줘라.”
“야. 씨. 무슨 나한테 공부를 가르쳐달래. 내 코가 석 자거든?”
수능도 치르긴 했는데, 군대까지 전역하면서 거의 다 까먹어 버려서 처음부터 공부해야 할 판이다.
“야, 그래도 너가 나보단 나을 거 아냐. 내 주변에선 네가 젤 공부 잘한단 말야.”
대체 넌 인생을 어떻게 살아온 거냐? 거기에 나는 가르치는 덴 재능이 없단 말이야.
“헛소리하지 마, 인마! 그리고 난 오늘 다른 친구들이랑 공부하기로 했어.”
이 말을 듣고 도유진이 이렇게 나올지 알았다면, 이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 야, 나도 같이하면 되잖아.”
* * *
“나강림. 그래서 쟤를 데려온 거라고?”
“어… 미안하다, 애들아. 얘가 나쁜 애는 아니거든? 대신 내가 치킨 살게. 저녁은 치킨 먹자, 얘들아.”
그래도, 지 딴에 공부 좀 해보겠다는데… 도유진의 소꿉친구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얘네 오빠가 아픈 것에 내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으니까. 내가 이 세계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도유진도 도지훈도 원래 세계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을 터였다.
[“마스터.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마스터도 끌려 왔지, 선택했던 게 아니잖아요.”]
그래.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아무튼 난 그래서 도유진의 부탁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불량아들과 어울리던 도유진을 갱생시킬 기회이기도 하니까. 거기에 한소연도 강수아도 공부를 꽤 하는 편이다. 나도 도유진도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래. 너희 공부 잘한다며. 미안한데 나 좀 도와주라. 치킨은 나강림이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살게. 음료수? 간식? 심부름? 그런 거 필요하면 전부 나한테 맡겨. 내가 다 할게.”
자처해서 물주랑 셔틀을 맡겠다고 하는 전직 일진 도유진. 근데 쟤 돈 없는 거 내가 뻔히 아는데, 거기서 자존심은 왜 세우는 거야? 또 편의점 알바 형한테 삥뜯어 오려고 그러나?
“그래. 그럼 오늘은 소연이네 집에 가지 말고 도서실에서 공부하자. 민아 선생님께는 내가 카톡 보내볼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연이를 본 수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응… 그게 좋을 거 같아.”
“각자 집에 놀러 가는 건 시험 끝나고도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래. 우리 중간고사 끝나면 다 같이 소풍이라도 갈까? 꽃놀이하러 가자, 꽃놀이.”
“소… 소풍? 꽃놀이…?”
시무룩해 보이는 한소연을 달래기 위해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는데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이, 아무래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나… 나 친구들이랑 꽃놀이 가는 거 처음이야… 너무 꿈만 같아….”
약간 울먹이기 시작하는 소연이를 달래느라, 나와 수아는 한참 진땀을 빼야만 했다.
* * *
다행히 민아 선생님은 우리가 도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신데다, 경비 아저씨한테도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경비 아저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준비해놓으라는 조건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이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치킨은 미리 먹고 들어왔다. 값은 도유진이 지불했고. 도유진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치킨값을 내게 내버려 두긴 했지만, 혹시 다른 지출이 있다면 내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공부는 두 페어로 나눠서, 공부를 잘하는 두 사람이 못하는 나와 도유진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사실은 너무 미안해서 내가 도유진을 어떻게든 가르쳐 보려고 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강수아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거세게 반대한 탓에, 나는 한소연과 함께 공부하고 도유진은 강수아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 한글은 읽을 줄 아니?”
“…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그럼 알파벳은 읽을 줄 아니?”
“야, 너 진짜 죽을래?”
…저러려고 도유진을 가르친다고 했나?
잠깐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금세 서로 집중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유진이 꽤 진지하다는 것을 강수아도 느낀 모양이다.
“저, 강림아…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
“어… 내가 하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볼게.”
“어, 응. 난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물어봐 줘.”
그런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며 공부하고 있던 바로 그때,
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경비 아저씨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야, 도유진. 너 여기서 뭐 하냐?”
유리로 된 문 너머에 양손과 머리를 가져다 댄 황채경과 그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서지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