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나 이제 너 무섭지 않아
“그 힘은… 지옥… 그런가. 악마의 계약자였나.”
내 오른팔에서 치솟아 오르는 화염을 본 심연의 여왕이 알아냈다는 듯 중얼거린다.
“소연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 이제 그만 놔줘.”
“그럴 수 없지. 나는 심연의 괴물들의 지배자이자 어머니, 어비스의 여왕이다. 내가 만든 괴물을 버리거나, 놔주는 일은 없지. 심지어 그 괴물이 역작이라면 더욱이.”
휘릭-!
휘두른 채찍에서 상처투성이 얼굴의 입을 벌린 아귀와 피투성이 얼굴을 한 구울이 튀어나온다. 암흑 속에서 번들거리는 바퀴벌레들이 내게 스멀스멀 기어 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비스, 심연과 공포의 세계. 나는 심연과 공포의 여왕. 여기서 네가 날 이길 방법은 없다. 나의 아이들아. 저놈을 죽여라!”
다시 한번 휘둘러진 채찍이 괴물들의 등을 후려친다.
키리리릭! 캬라라락!
나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사슬을 휘두르고, 나를 향해 기어 오는 바퀴벌레를 향해 흑염을 뿌린다.
투투투퉁!
사슬에 부딪히고, 흑염에 휩싸인 괴물들이 우수수 터져나간다.
“뭣이?”
나는 이제 저 괴물들의 정체를 안다. 소연이의 공포. 소연이가 만들어낸 공포들이다. 머리를 부딪히는 구울,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학교 바깥에서 소연이 나오길 기다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아귀.
소연을 괴롭히던 아이들, 어둠, 학교가 끝난 후 집에서 받을 폭력까지. 전부 소연이 두려워하는 것들뿐이다.
휘릭-!
다시 한번 채찍이 휘둘러진다.
피투성이 얼굴, 상처투성이 얼굴… 심연이 다시 한번 내게 달려든다.
원작의 어비스 위치가 사용하던 괴물들은 전부, 그 괴물들을 본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울도, 어둠도, 아귀도, 전부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온 괴물들의 모습엔 나의 공포가 없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이모의 목소리가 나를 지켜줬으니까.
영원하진 않을 거다. 공포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뿌리내리고 있다가 언제든 마음이 약해지길 기다리다 올라오겠지.
그래도 한번 쓰러졌다 일어나는 법을 안다면, 그 다음번에 쓰러졌을 때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모가 내게 공포를 이겨낼 힘을 줬던 것처럼, 내가 소연에게 공포를 이겨낼 힘을 줄 수 있다면….
사슬을 휘두르고, 흑염을 뿌린다.
피투성이의 얼굴을 지운다.
상처투성이 얼굴을 지운다.
심연, 심연의 어둠을 지운다.
쿵! 쿵!
내가 괴물들을 쓰러트릴 때마다 굳게 닫혀 있던 도서실 문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쿵! 쿵!
도서실 문이 부서질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달려들던 공포, 공포들을 모두 지우고 나자 남은 것은 무너져 가는 세계에 나와 심연의 여왕, 단 둘뿐이었다.
“그렇군. 나강림, 한소연은 너로 인해 공포를 지워낼 수 있는 것인가.”
“나뿐만이 아니야. 여기에 수아가 있었어도 나처럼 똑같이 너에게서 소연을 구해낼 수 있었을걸?”
“그래. 친구… 친구라는 존재인 것인가.”
심연의 여왕이 괴물들을 부리기 위해 휘두르던 채찍을 손에서 놓는다.
“소연은 전 차원에서 군림할 최고의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약한 부분은 도려내야만 하지. 공포엔 약점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나강림.”
무너져 가는 세계 속에서 심연의 여왕이 나를 지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심연의 여왕 등 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의 구덩이. 심연의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쿵!
쿵!
쿵!
쿵!
심연의 구덩이 안에서 거대한 손이 삐죽 튀어나오던 바로 그때,
드르륵.
도서실의 문이 열렸다.
* * *
한소연은 웅크리고 있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밤마다 찾아오던 어둠이, 자신을 괴롭히던 중학생 시절의 아이들이, 자신을 때렸던 아버지의 폭력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희미한 빛만 띠우고,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혹시라도 누가 여기까지 찾아올까 봐 두려워서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하지만 소연은 알고 있었다. 이 웅크린 자신을 누군가가 찾아주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금자리 한구석에 웅크린 채 찾아올 심연의 공포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세계에 강림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이런 나를 혐오스럽게 생각할 거야.’
소연은 강림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가지 않고 꽁꽁 숨었다.
자신의 공포가 강림을 공격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강림이가 그걸 보고 공포에 질려 도망치길 원해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공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강림이 도망치다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이것들이 무서운 것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내 안에 있는 공포와 마주치고, 강림이도 허우적대기 시작했으니까.
‘나강림. 이제 그만 도망쳐. 내 안에서 나가.’
하지만 강림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공포를 지워내기 시작했다. 강림이 사슬을 휘두르고 흑염을 내뿜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공포심이 지워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한소연의 마음속 한구석엔 항상 심연이 존재했다. 소연은 심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연은 항상 소연이 공포에 질리길 원했다.
소연은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 공포, 우울, 아픔과 외로움.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히려 소연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소연은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었고, 항상 고통스러운 척 연기했다.
그래야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행복, 즐거움, 기쁨과 사랑. 그런 감정들은 소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에.
소연은 그래서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더 우울하고, 더 무서워하며, 더 외로워하고, 더 아파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겁쟁이인 자신의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겁쟁이다.
행복함이 끝나고 찾아올 공포가 두려워서,
기쁨 뒤에 찾아올 우울함이 두려워서,
즐거움 뒤에 찾아올 외로움이 두려워서,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소연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강림이 생겼고, 수아가 생겼다. 더 이상 소연은 혼자서 외롭고 아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소연은 더 이상, 심연의 공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연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공포는 이제 그만.’
소연은 웅크려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드르륵.
소연이 숨어 있던 도서실의 문이 열린다. 도서실의 문에서 나오는 빛이 심연의 어둠을 지우기 시작한다.
이겨냈구나! 소연아!
“크아아아악!”
“소연이를 약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지.”
도서실에서 흘러나온 빛이 심연을 밀어낸다. 빠져나오려던 심연이 다시 통로를 따라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 무너졌던 세계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해도, 달도 없던 세상에 빛이 생긴다. 어둡던 복도 창문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바퀴벌레들이 지워진다.
교실 안에 차곡히 쌓여 있던 구울들이 지워진다.
학교 바깥에서 아가리를 열고 있던 아귀들이 지워진다.
심연. 심연의 공포가 서서히 소연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에 기생해서 약하게 만들어 잡아먹는 주제에, 뭐? 필요 없는 부분을 도려내? 정말 필요 없는 부분은 너야. 기생충 같은 녀석아!”
나는 심연의 여왕을 향해 봉인의 사슬을 휘둘렀다.
심연의 공포는 마(魔)의 기운.
항마(降魔)와 봉마(封魔)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봉마의 사슬에 충분히 봉인할 수 있는 존재일 거다. 충분히 약해져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크아아아아악”
사슬에 묶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심연의 여왕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집채만 한 크기에서 자동차만 하게, 자동차만 하던 크기에서 성인 남성만 하게, 성인 남성만 하던 크기에서 작은 아이만 하게, 작은 아이만 하던 크기에서 새끼 염소만 한 정도로.
이대로 가면 사슬 안에 완전히 봉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툭.
심연의 여왕을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진다. 사슬이 끊어짐과 동시에 작은 도마뱀만 하게 변해 버린 심연의 여왕이 정신세계에서 흩어져 사라진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충분히 봉인할 만큼 나약해졌었던 거 같은데?
【“용량 부족이다. 지옥의 군주와 심연의 여왕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물건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니가 너무 돼지라서 자리가 없었다는 이야기야?
【“…돼지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거다.”】
돼지 같은 놈.
【“…….”】
도서실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사라지고, 그 안에 있던 소연이 도서실에서 빠져나와 한 발 내딛은 바로 그때, 내 오른쪽 눈의 붉은빛이 꺼졌다.
* * *
소연아!
한소연!
소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아! 괜찮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더라? 붉게 물들어 있던 강림의 눈을 아주 잠깐 봤던 거 같은데. 그리고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피곤했나?
“어? 응. 괜찮아. 잠깐 졸았나 봐.”
그 사이,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다.
“도유진! 그만해!”
“놔. 내가 오늘 저 쓰레기 같은 년의 정신머리를 고쳐놓을 거니까.”
“뭐? 쓰레기 같은 년? 그런 쓰레기 같은 년 돈 받겠다고 붙어먹었던 빈대 같은 년이.”
“그래, 씨발. 내가 니가 좋아서 붙어 있던 건 줄 알아? 돈 받으려고 붙어 있었지.”
“이 X발, 배신자.”
“황채경! 이제 그만하고 가자니까!”
꽤 오래 잠든 느낌인데,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 참. 싸우려면 좀 다른 데서 싸우지. 왜 하필 도서실까지 찾아와서 싸우고 난리람?
드르륵.
소연은 의자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켜,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야, 너희 싸우려면 다른 데 가서 싸워! 여기 도서실이란 말야. 자꾸 여기서 싸우면 민아 쌤이랑 경비 아저씨 부를 거야.”
얼마 전이라면 할 수 없었을 말과 행동이었지만, 소연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잠깐 잠들었다 일어났을 뿐인데, 마음속에 뿌옇게 쌓여 있던 어둠이 모두 흩어져 버린 기분이다.
“하! 이제 한소연, 저 찐따 같은 년도 날 무시하는 거야? 니가 도유진이랑 같이 공부 좀 했다고 나랑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뭐래? 도유진이나 너나 둘 다 다른 데 가서 싸우라는 이야기야. 여기 도서실이고 나 도서 도우미거든? 민아 쌤이랑 경비 아저씨한테 방금 문자 했어. 지금 올라오신대.”
분명 그렇게 두려웠던 황채경인데, 이젠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야, 한소연. 너 진짜 미쳤냐?”
삐이이익!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너희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야, 황채경. 이제 그만하고 가자.”
“너 진짜 나중에 뒤졌다, 한소연.”
삐이이이익!
경비 아저씨의 호루라기를 무시하고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하는 황채경과 서지예.
흥. 너 같은 거 한 개도 안 무섭다.
“너흰 여기 가만히 있어라. 쟤네 잡아와서 이야기하자.”
도서실 앞에서 주의를 주고 다시 황채경과 서지예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는 경비 아저씨.
“너희, 거기 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 소연이 도유진의 손을 잡고 도서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제 갔네. 유진아, 이제 다시 공부하자.”
소연이 등을 돌리자,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왜들 그렇게 봐?”
뭐?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