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75화 (75/236)

제75화

비뚤어진 우정(3)

<“히… 히히히… 히히히히….”>

<“꺄아아아악! 당신! 당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어떻게 들어왔냐고!”>

<“이런 곳에 숨는다고…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어?”>

<“꺄아아아악!”>

살인마가 칼을 휘두르고, 화면을 향해 피가 확 튀어 오른다. 암전하는 화면.

-지이이잉

거기까지 보던 영화를 소연은 리모컨을 들어 꺼버렸다. 몇 번이고 본 영화라 이젠 재미가 없었다.

“다들 괜찮을까?”

소연은 처음으로 만든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뭐라고 말을 할까 말까를 몇 번이고 고민하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강림이도 수아도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다들 어딘가 가야 한다고 훌쩍 가버렸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을 보니 둘 다 듣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소연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 때문에 유진이 채경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한 적이 있었고, 채경이 다시 유진에게 그 복수를 했겠지.

채경은 예전부터 그랬다. 자기가 당한 일을 꼭 갚아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 시절, 소연은 항상 채경에게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강림과 수아는 아마 채경을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강림이도 수아도 둘 다 주변에 있는 일에 오지랖이 넓은 편이니까.

둘은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곤경에 처해 있는 친구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성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마치 히어로처럼, 곤경에 빠진 누군가를 도와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

둘의 차이점이라면 강림이는 장난인 척 친근하게 다가가 직접 듣고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타입이라면, 수아는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문제를 해결해 주고 티도 내지 않으려고 하는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 수아와 강림에게 예전 이야기들을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채경의 이야기를 말해 버릴까 봐. 또다시 누군가 상처 입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엄마라도 일찍 오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오늘은 엄마도 늦은 시간까지 마쳐야 할 일이 있어 회사에서 자고 오신다고 하셨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와서 다시 한번 카톡해 보자. 그렇게 생각한 소연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보고 말았다. 소연을 기다리고 있는 심연의 그림자를.

“찾았다. 한소연.”

소연은, 집에 엄마가 계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지예의 집이 습격당했다면, 소연이도 위험하다. 119에 구조 지원을 요청한 나는 서둘러 날개를 펼치고 소연의 집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화르륵-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붉게 물든 머리칼을 만든 퀘이사가 내 등 뒤로 따라붙었다. 머리 색이 평소의 황금빛이 아닌 걸 보니, 아무래도 충전 시간이 더 필요한데 급한 상황이다 보니 그냥 따라붙는 모양이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내 뒤에서 전혀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는 퀘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원작에서 퀘이사의 비행 속도는 손에 꼽힐 정도로 빠른 편으로, 벨제뷔트의 힘에 의존해 겨우 날아오르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게 빠르다.

그래서인지 거의 충전이 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나와 비슷한 속도로 날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칼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퀘이사가 가지고 있는 미모와 조화를 이뤄 아름답게 느껴졌다.

<“당신! 여기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내 등 뒤에 따라붙어 날아오던 퀘이사로부터 통신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런 질문은 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는 게 맞지 않았나? 아까 혼잣말 하던 걸 걸린 탓에 깜빡했던 모양이다. 이젠 친한 반 친구가 되어버린 수아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예전부터 예의주시하던 아이가 하나 있소. 심연의 여왕을 정신에 품고 있던 아이인데, 내가 심연의 여왕을 제거할 방법을 찾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아이에게서 빠져나갔더군. 다시 그 흔적을 찾아 움직이다 보니 그쪽에 도착했던 거요.”

<“심연의 여왕…?”>

“그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거요? 차원 어비스의 지배자이자 심연의 괴물들의 어머니. 예전에 같이 해결했던 지옥의 알 사건. 기억나시오? 그때랑 같은 맥락의 일이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싶다는 야욕을 가진 다른 차원의 존재.”

【“그때의 이야기를 굳이 왜 꺼내는 건가?”】

아무래도 지옥의 군주께선 내가 자신의 예전 흑역사를 들춘 것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언짢은 악마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네가 한 일에 대한 결과는 달게 받아라. 이 못생긴 개구락지야.

【“으아아아악!”】

내가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날개 한쪽의 불이 꺼졌다 켜져 하마터면 벽에 부딪힐 뻔했다.

야, 이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되지!

【“네가 한 말에 대한 결과는 달게 받아라. 이 못생긴 인간아.”】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오.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능력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아무튼 심연의 여왕의 흔적이 다시 원래 지배하고 싶어 하던 몸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거 같아서.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오.”

[“혹시 거기로 향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일단 지금은 소연이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거짓말로 하는 변명이잖아.

<“혹시 그 아이의 이름이… 한소연?”>

“아는 사람이오?”

<“어… 내가 아는 사람의 친구…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야.”>

너도 거짓말하느라 고생이구나.

약간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아이의 몸에… 아까 봤던 괴물의 어머니 같은 게 들어가 있었다고?”>

“지금은 채경이라는 아이의 몸에 들어가 있지.”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지? 예전에 지옥의 알도 그렇고… 당신 이 일 시작한 지 몇 개월 안 됐잖아.”>

“그건….”

뭐라고 거짓말해야 할까? 따로 정보통이 있다고? 아니면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할까?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던 나는 결국, 이 한마디를 하고 입을 닫았다.

“영업 비밀이오.”

*    *    *

거실에 앉아 소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광택이 나는 소재로 돼 있는 슈트를 입고 있는 황채경이었다.

채경이 입고 있는 슈트와 그 표정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연에게 꽤 익숙하게 느껴졌다.

“우리 소연이… 이전에는 친구가 도와줬지만… 지금은 혼자네?”

저것은 채경이 아니다.

저것이 소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표정에서 소연은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다.

“누… 누구세요?”

“날 잊어? 섭하네. 우리 예전엔 참 좋았잖아. 기억 안 나?”

머릿속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만질 수 없는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며 소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딱.

앞에 앉아 있던 채경의 얼굴을 한 그것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무언가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소연에게도 퍽 익숙한 것들이었다.

“아쉽네. 이 힘이 네 것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미안하게 됐어. 난 당한 만큼은 갚아줘야 하는 성격이라서. 잘 가. 나의 옛 친구…. 으아아악! 그만해! 얜 내가 처리하기로 했잖아!”

소연에게 다가오던 괴물의 몸이 펑펑하고 터지며 사라졌다. 소연은 어안이 벙벙하여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채경을 보았다.

“얜… 내 손으로… 처리하기로… 했잖아… 그게… 네가 제시했던 계약이었어….”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 그 모습은, 소연이 알던 채경의 표정이었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네가 아까부터 아무도 못 죽이게 하는 바람에 제대로 처리를 못 했잖아. 얘도 그럴까 봐 그랬지.”

“걔네는 내 친구였어! 얘는 내 친구가 아니야. 얘는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그놈의 친구! 친구 같은 건 세상을 지배할 괴물에게는 필요 없는,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했잖아!”

그것은 마치, 두 명의 사람이 한 몸에 있는 듯했다. 가끔 공포 영화에서나 보았던 이중인격의 모습을 보며, 소연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채경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일단은 이 좁은 집 안에서 탈출하는 게 먼저다.

번쩍.

뭐지? 방금 구석에 붉은빛이 반짝였던 기분인데.

“알겠어. 알겠어. 우리끼리 싸우다가 쟤 도망치겠다. 저거 봐.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잖아. 약속한 대로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난 다른 손님을 받아야 할 거 같으니까.”

“그래.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는 대로, 내게 필요 없는 것은 지우고 새사람이 되어줄 테니까.”

치이익.

손과 발을 검은색의 기괴한 괴물처럼 변화시킨 채경은 날카로운 손톱을 소연에게 휘둘렀다.

*    *    *

눈앞에 소연의 집이 보였다.

【“…저 앞에서 심연의 여왕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 근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소연의 집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내가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최악의 상황이다. 내가 날아가고 있는 동안, 더 빠르게 앞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오른눈의 기운을 개방해서 앞으로 쏘아 보냈다.

소연의 집 창문을 통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채경이 보였다. 채경이 입고 있는 옷차림은 내가 원작에서 봤던, 소연이 입고 있던 슈트의 모습과 흡사했다.

어비스 위치. 소연이 어비스 위치가 되는 일은 막았지만, 아무래도 어비스 위치가 탄생하는 것 자체는 막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가 처음부터 막아내고 싶었던 세계관의 확장. 심연의 차원이 이 세계와 연결될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처음에 지옥과의 세계관 확장을 막아냈던 것이 얼마나 운이 좋았던 일인지를 깨달았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방식으로 막아내긴 힘들 테지.

붉은 기운을 움직여 거실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슬쩍 내 쪽을 바라보는 어비스 위치.

그와 동시에 내 오른쪽 눈의 기운이 흩어졌다. 내 오른쪽 눈의 능력에 한 번 당해본 적이 있는 탓인지 눈치채고 내 힘을 흩어버린 모양이다.

벨제뷔트! 출력 올려! 조금 더 빠르게!

“심연의 여왕을 발견했소. 여기 있는 것이 맞는 모양이야. 전투를 준비하시오.”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저 위를 봐. 저게 당신이 말했던 그 심연의 통로인가 바로 그거지?”>

나는 퀘이사의 말에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검은색 통로가 열리고 괴물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 시간이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닌지라, 거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대로 괴물들이 사람들을 습격한다면 인명 피해가 꽤 크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소연이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 소연을 구하느냐, 지금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괴물들이 벌일 살육전을 막을 것이냐. 나 혼자서였다면 둘 모두를 해결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먼저 괴물들을 상대해 주시오. 나는 집 안에 들어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겠소.”

<“뭐?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당신이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내 화력이 당신보다 강하진 않아. 괴물들을 순식간에 쓰러트릴 수 있는 화력은 나보다 당신이 낫소. 더 말할 시간이 없어.”

일대일이나 소수전이면 모를까, 다대다 전투에서는 나보다 퀘이사가 훨씬 낫다.

<“알겠어. 몸조심해.”>

나는 거실 창문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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