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비뚤어진 우정(5)
소연의 눈앞에 나타나 채경의 공격을 막아내고 튕겨낸 것은 커다란, 녹색의 피부를 가진 팔 하나였다.
소연이 만들어낸 작은 구멍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그 팔은, 구멍 너머의 몸과 이어져 있었다.
소연은 신기하게도 그 구멍 너머의 생명체의 생각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무섭게 생긴, 커다란 팔을 가진 생명체는 소연을 돕기 위해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통로를 넓혀줄게.’
소연은 생명체가 이곳으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통로는 움찔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미안해. 아직 내가 널 거기서 꺼내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봐.’
구멍 속에서 빠져나왔던 커다란 팔은 실망한 듯 잠시 축 늘어졌지만,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근육을 씰룩대며 팔을 들어 올렸다.
소연은 생명체가 조금은 실망했지만, 자신을 위해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악!”
소연이 만들어낸 통로에서 나온 팔에 맞고 튕겨져 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채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연은 거대한 팔을 타고, 튕겨 나간 채경의 앞에 내려섰다.
“크아아아악!”
10층짜리 아파트에서 떨어져 버린 채경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육체 능력이 강화되었다곤 하지만, 그 기반은 결국 황채경, 인간의 몸인 것이다. 떨어지는 순간 피떡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상황.
“크아아아악… 크아악 으아아아악!”
바닥에 틀어박힌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채경을 본 소연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과거 소연을 괴롭힌 적 있던 가해자였지만,
소연은 채경이 이 정도까지 괴로워하길 바라진 않았다.
능력이 개방된 지금, 소연은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지금 이 생명체와 채경이 가지고 있는 저 능력의 원천이 본질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채경에게서 그 힘을 거둬들일 수 있으리란 사실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힘을 거둬들여 버린다면, 채경이 지금 겪는 고통은 끝이 나고 안식이 찾아올 테지.
소연은 자신을 괴롭히던 채경의 마지막을 돕기 위해 손을 펼쳤다.
턱.
그런 소연의 손을 잡아채는 괴물 하나.
“그렇겐 안 되지. 얜 지금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통로거든.”
퍼억!
소연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소연을 지켜주고 있던 팔이 괴물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완전히 박살 난 괴물은 벽에 부딪히기도 전에 검은 재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마음대로 주먹을 휘둘러선 안 된다. 어쩌면 자신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군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니까.
“내가 시키기 전까진 누군가를 공격해서는 안 돼.”
소연의 말에 미안하다는 듯 흔들거리는 팔.
뚜둑 뚝‥ 뚜둑….
그때, 뼈가 다시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며 몸을 일으키는 황채경, 아니, 황채경의 몸을 뒤집어쓴 무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이니 너무 윽박지르지 않는 것이 좋아. 너희 군인 아버지처럼 강압적으로만 가르치면 소심해지잖아… 소연이 너처럼.”
뚜둑 뚝
몸을 일으킨 황채경이 마지막으로 목을 한 바퀴 돌리자, 소름 돋는 소리가 들리며 뼈가 완전히 맞춰졌다.
“저기에 네 친구들이 와 있네. 보이니?”
채경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라는 말엔 강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내 친구?”
‘아직은 알려줄 때가 아니지. 네가 죽기 직전에 너를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네가 가질 수 있었던 힘을 앗아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도록 하마.’
“저기 있는 쟤네는 자기들이랑 싸우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괴물이라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야.”
소연은 슬쩍, 저 너머에서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히어로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세계에서 온 괴물의 입장에선 같은 인간이면 친구들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소연은 입을 열었다.
“채경이의 몸을 빼앗아간 게 바로 너구나.”
자신의 몸에 흐르는 힘의 근원과 같은, 강한 힘이 채경의 몸에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채경에게 힘을 빌려준 그 대상이 채경의 몸의 주도권을 완전히 뺏어온 모양이다.
“그래. 네가 만든 생명체가 이 몸을 박살 내버린 탓에 내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 뭐야? 친구니 뭐니, 생각보다 삶에 미련이 많은 아이라 몸을 쉽게 내주지 않더라고.”
그제야 소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상대의 정체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소연의 정신에 기생하며 소연의 능력을 탐내던, 심연의 지배자.
“네가 만든 첫 번째 생명체가 바로 그거구나? 역시… 탐나는 재능이야. 이 몸도 나쁘진 않은데, 아무래도 나와 육체 능력자는 썩 어울리진 않아서 말이지. 방해자만 없었으면 내가 너의 능력을 모두 가졌을 텐데.”
쏴아아-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이 소연과 채경의 머리를 흩날린다.
그와 동시에 채경의 손이 쭉- 길어지며 소연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소연의 뒤에서 소연을 감싸 안고 있던 팔이 채경이 찔러오는 손톱을 막아낸다.
챙-
분명 손톱과 살점이 부딪히는 건데도 마치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차 휘둘러지는 반대편 손톱을 막아내기 위해, 소연은 팔이 열려 있는 통로를 빠르게 움직여 냈다.
챙-
다시 한번 팔과 부딪혀 튕겨져 나가는 손톱. 쉬지 않고 재차 밀고 들어오는 황채경의 공격.
소연이 열어낸 통로를 비집고 나온 팔 자체의 피지컬은 좋은 편이었지만, 통로를 움직이는 소연은 아직 능력을 다루는 데 서투른 탓에, 가까스로 막아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서투르구나. 통로의 크기도 더 키울 수 없는 것 같고, 통로의 위치를 움직이는 것도 익숙지 않아.”
챙-!
다시 한번 튕겨져 나가는 손톱.
“통로의 개수도 더 늘릴 순 없는 것 같고. 엄청난 수준의 괴물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다루긴 아직 경험이 부족해.”
손톱을 그대로 튕겨내려던 팔을 채경의 손이 잡아채고 버틴다.
“통로의 개수를 늘릴 수 없다면, 유일한 통로를 틀어막으면 그만이지 않겠느냐?”
팔을 잡아내고 있는 손 대신, 반대편의 손이 소연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 *
쏴아아-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퀘이사의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머리칼이 나부꼈다.
흑염 또한 순수한 불이 아닌 다른 성질을 띠고 있는 불꽃이기 때문에, 퀘이사의 몸 안을 돌아다니며 타격을 입히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나보다 퀘이사가 훨씬 더 잘 알 테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는 퀘이사의 머리 색을 바라보며, 나는 블래스터를 들어 올렸다.
퀘이사의 시그니처 기술, 빅뱅 어택(Bigbang Attack)을 준비하기 위해선 몸 안에 들어간 화염의 압축도가 중요하다. 퀘이사가 기술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시간을 벌어줘야만 한다.
블래스터를 발사하며 나는 붉은 눈을 이용해 소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연의 머리 위에 열려 있던 통로, 그 안에서 뻗어 나온 팔을 이용해 채경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원작에선 본 적 없는 괴물이고, 원작에선 본 적 없는 능력이다. 아마 내 개입이 소연의 능력에 영향을 준 탓이겠지.
[“마스터! 지금 상황… 조금 위험한 거 아닐까요? 이러다가 소연이 큰일이라도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길 버리고 떠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될 거다.
그렇다면, 소연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슬슬 퀘이사의 기술이 전부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한 번, 마지막 한 번을 버틸 기술이 필요했지만….
Dark Blast
□□□□□□
다크 블래스트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 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쓰러져있던 괴물들이 꿈틀대더니 한곳으로 모여 점점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여길 지켜보는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점점 강해지는 모양이군. 이대로 뒀다간 위험하다.”】
다크 블래스트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한 슈트가 다시 다크 카이저 모드로 변형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빅뱅 어택. 준비 완료. 지금 당장, 저 거대한 괴물한테 박아 넣는다면, 다른 히어로들이 올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나는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원을 요청했던 히어로들이 여기까지 오기는 아직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동의할 수 없소. 지금 천산시에서 빅뱅 어택 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는 히어로는 사실상 없소. 빅뱅어택은 차원의 문을 닫기 위해 써야만 해.”
“…그럼 우리 둘이서 이대로 계속 대치하자고? 아직 저 안의 아이도 구하지 못했잖아! 지금 저기 있던 아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단 말야!”
옳은 지적이었다.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 오래 끌수록, 소연이 위험하다.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소.”
나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내 흑역사와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다크 카이저의 비기.
제인. 죽음의 광선 데스 레이저. 이번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게 개방시켜 줘. 남은 경험치 다 때려 박아서. 부족하면 동화율을 써도 좋아.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이렇게 사용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데스 레이저는 사용할 수 없게 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지. 원래부터 봉인하려던 능력이잖아.
【“그래. 원래는 살상 능력이 너무 강해서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기술 아니었던가?”】
[“그럼… 다음에 또 이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떤 싸움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보았다. 지금 당장은 버티고 있지만, 괴물을 처리하는 데 시간을 끌면 끌수록,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늘어나게 되겠지.
그리고, 지금 당장 내 친구인 소연이가 저기서 홀로 싸우며 버텨내고 있다.
이까짓 능력, 지금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과 소연이를 구할 수 있다면 당장 수십 개라도 버릴 수 있다.
[“…네, 마스터. 죽음의 광선 데스 레이저가 준비되었습니다.”]
내 어깨 위로 레이저 캐논이 만들어져 얹어졌다.
데스 레이저 롤링 발칸 모드 온.
Dark Kiaser
‘Death’ Laser Rolling Vulcan
내 어깨에 얹어져 있던 레이저 캐논이 발칸 모드로 변형했다.
예측 사격 자동조준 시스템 온.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내가 보고 있는 홀로그램 화면에 떠 있는 거대한 괴물이 순식간에 자동조준 되기 시작한다.
삐이이이잉-
데스 레이저의 롤링 발칸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소연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손톱은, 소연의 심장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으으윽…!”-
채경의 입에서 신음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고 잠깐 놀라 멈춰 있던 소연이 채경의 손을 쳐냈다.
-“크아아아악! 황채경!! 왜!! 왜 막는 거냐?”-
으드드득. 황채경의 입에서 들려오는 이를 가는 소리.
“내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잖아….”
-“웃기지 마!! 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일 생각이 없었어! 한소연도, 도유진도, 서지예도. 심지어는 너와 관련이 없는 모르는 사람들까지. 넌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잖아!”-
“입 닥쳐! 짜증나게 하지 마! 내 머릿속에서 기생해서 살아가는 주제에! 기생하는 벌레 주제에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크아아아아악!”-
심연의 여왕은 채경의 정신에서 느껴지는 고집과 단호함을 읽었다. 어린 소녀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던 정신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력했던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히어로들이 바로 앞까지 온 상황에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거대 괴물을 만드느라 소모된 힘을 거둬들이고, 다시 어비스로 도망쳐 훗날을 도모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연의 여왕이 괴물의 힘을 거둬들이던 바로 그때…!
-==지잉========-
-==지잉========-
-==지잉========-
거둬들이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라져 가는 괴물들의 힘. 다크 카이저의 데스 레이저 – 롤링 발칸에 백여마리가 넘는 괴물들이 합체했던, 거대 괴물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빛을 내기 시작하는 퀘이사의 빅뱅 어택.
“크아아아아악!!! 내가… 내가 또 진다고?”
이젠 훗날이 문제가 아닌, 지금 당장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당장 어비스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어비스의 차원문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화염 폭풍. 거대한 폭발이 어비스로 향하는 차원문 안쪽으로 던져 넣어졌다.
차원문 너머에 어비스의 여왕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힘, 마지막 괴물들마저 폭발에 모두 휩쓸려 소멸하기 시작한다.
어비스의 여왕이 가지고 있던 힘의 근원, 어비스의 지배력이 서서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채경의 몸을 변형시키던 검은색의 힘이 서서히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채경의 몸. 그런 채경의 몸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검은색의 얼룩.
“크… 크아아아악!! 한소연…! 나강림…! 결국 너희가, 결국 나를 죽이고 마는구나. 아니다. 이렇게 쉽게 끝나진 않겠다. 지옥… 죽어 지옥에 가서도 너희를 끝까지, 너희의 앞날을 저주하겠다.”
“나… 강림?”
점점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검은색 얼룩을 바라보던 소연의 머릿속으로, 잊었던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심연의 여왕이 자신에게 무엇을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무너져 가던 자신을 위해 강림이 해주었던 모든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 심연의 괴물들과 싸우고, 심연의 여왕을 몰아내 주던 일련의 과정이 모두 기억나기 시작했다.
끼긱… 끼이이익….
소연이 멍하니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소연의 머리 위에 있던 구조물 중 하나가 불안한 소리를 내더니 소연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욱.
따뜻한 바람 소리와 함께 소연의 머리 위를 감싸주는 검은 그림자.
“괜찮소?”
다크 카이저였다.
짤그락.
다크 카이저의 오른손에 걸려 있는 봉마의 사슬이 쇳소리를 내었다. 소연은 다크 카이저의 오른손을 보며 살짝 웃음 지었다.
* * *
나는 내 얼굴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소연의 얼굴을 보며 안도해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꾹 참았다.
고마워. 버텨줘서 정말 고마워.
실패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족해 친구를 구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소연이 멀쩡하게 웃고 있었다.
미안해. 널 먼저 구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나는 죄책감을 삼키기 위해 봉마의 사슬을 꽉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