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인간의 영역
<도심 한복판에서 나타난 괴물들… 히어로 다크 카이저와 퀘이사의 빠른 대응으로 퇴치하는 데에 성공해… 사상자는 0명….>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등장했던 괴물들… 그 괴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또다시 대형 사건을 막아낸 히어로, 다크 카이저. 사건의 범인은 다른 차원의 생명체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고등학생….>
<괴물 사건의 뒤에 숨어 있는 살인 미수! 중학생 때부터 괴롭히던 피해자가 행복해지는 모습이 보기 싫어 죽이려고 시도한…>
<괴물의 정체는 다른 차원의 생명체. 정부가 공식적으로 다른 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어젯밤 9시, 도시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모습의 블랙홀이 등장합니다. 블랙홀에서 떨어진 것은 수많은 괴물들… 출몰한 괴물들을 모두 물리친 것은 최근 유명해진 히어로 다크 카이저와 퀘이사입니다. 이 두 히어로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괴물들을 모두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는데요. 현장에 나가 있는 공대기 기자 불러보겠습니다. 공대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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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님들아. 제가 다크 카이저랑 꽤 친하다니까요. 그래서 찍은 거예요. 지금 뉴스에 나가는 현장 영상 다 제 걸로 나간 거예요. 돈 많이 벌었겠다구요? 뭐 그런 걸로 돈을 받아요? 그냥 줬어요.”
경한 타워가 위치한 은척동. 그 은척동의 한 오피스텔에 숨겨져 있는 사하준의 스튜디오. 사하준은 지금 16년 인생 최고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다크 카이저의 출동 때마다 몰래 따라붙었던 하준의 스텔스 드론이 괴물들과 싸우던 다크 카이저의 모습을 완벽하게 촬영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플럭스 공학회가 말하길, 대마법사가 와도 알아차릴 수 없는 완벽한 수준의 스텔스 드론이라고 했다. 과학자들이 마법사 운운하는 농담을 하는 건 좀 웃기는 일이지만.
플럭스 공학회에 꽤 큰 돈을 주고 주문 제작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아버지의 금고에서 살짝 가져와도 되고.
이 전에 쓰던 스튜디오에서 은척동으로 스튜디오를 옮긴 이유는, 지난번처럼 다크 카이저가 스튜디오로 찾아오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지난번엔 해킹을 통해 위치를 추적했던 모양이지만, 이젠 해킹이 그렇게 쉽진 않을 거다.
“괴물이 진짜 다른 차원에서 온 괴물이 맞냐고요? 아, 그거요. 그건 지금 다크 카이저가 저한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부분이라, 다크 카이저가 직접 언급하기 전까진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거든요. 좀 이해해 주세요.”
베팅이 성공했다.
채널 내에 있는 모든 조회 수가 며칠 만에 모두 10배 이상 증가. 구독자도 이미 2배를 넘게 증가함을 넘어서서 3배에 가깝게 늘어나고 있었다.
첫 만남 때부터 다크 카이저에게서 느꼈던 대박의 기운이 채널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괴물들을 시원하게 터트리는 다크 카이저와 퀘이사의 영상은 큰 인기를 끌었다.
“다크 카이저랑 퀘이사가 무슨 관계냐고요? 아, 그건 솔직히 제가 알려드릴 순 없는데… 좀 응원하고 싶은 관계라고 해야 되나? 여기까지만 이야기할게요. 네.”
- 앞으로 채널에서 퀘이사 관련된 콘텐츠도 만들도록 해.
앞쪽에 앉아 있던 성민이가 하준이 타이핑한 내용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대로 다크 카이저의 정보를 이용해 채널의 규모를 늘린다. 다크 카이저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새롭게 만들어진 하준의 장비들을 이용해 다크 카이저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하준은 다크 카이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유명해질 수 있다.
하준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사건을 일으켰던 채경은 결국 슈퍼 빌런 교도소에 수감될 예정이라고 한다. 차원에 대한 내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이번 일로 결국 공식적으로 다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다차원으로 펼쳐지는 세계관 확장은 내가 막아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옥의 악마들이나, 어비스의 괴물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세계관 확장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비스의 통로는 퀘이사가 뿜어낸 흑염의 빅뱅 어택으로 무너져 버렸다. 심연의 여왕도 완전히 소멸해 버렸음을 확인했다. 이지가 없는 일반적인 짐승과도 같은 심연의 괴물들은 또 다른 지배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이 세계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변수가 있다면… 그 소녀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점이군.”】
그러게.
하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저 부분이다.
소연이 채경의 습격을 받으며 새로운 능력을 깨달아 버린 것 같다는 점.
어딘가 다른 차원에 연결되어 있는 듯한 차원 통로를 열어, 그 안의 괴물을 다루는… 원작의 어비스 위치와 비슷한 타입의 능력이지만….
[“저런 괴물은 마스터가 보고 온 ‘원작’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죠?”]
나는 제인이 녹화해 놓은 영상 속, 거대한 팔 하나가 차원문에서 나와 채경과 싸우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괴물들과의 전투에 대한 많은 영상이 인터넷에 풀렸지만, 소연이와 소연이가 휘두르는 능력이 찍힌 영상은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았다.
당시 근처, 주변에서 누군가 찍었을지도 모르는 영상은 제인이 일일이 모두 확인해 지웠으니까. 그걸 다 지우느라고 사건을 막으며 벌었던 동화율과 경험치를 거의 다 까먹었지만.
【“그런데도 뉴스에는 어둠의 황제의 전투에 관한 영상이 버젓이 방영되었지.”】
[“분명 주변에 있는 모든 카메라가 달린 전자 기기는 확인했어요, 마스터. 전 정말 억울해요.”]
괜찮아. 오히려 내가 조명되면서 소연이의 능력이 노출되지 않은 걸 수도 있어. 어떻게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해결하겠어.
[“네… 죄송해요, 마스터… 아무래도 제가 알아차릴 수 없는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기기가 아닌가 싶어요.”]
괜찮아.
내가 열심히 많은 것들을 막아낸다고 해서 세상이 멈춰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는 하나의 등장인물일 뿐.
세상의 변화는 나 혼자의, 개인의 힘으로는 모두 막아낼 수 없다. 나는 최악으로 향할지도 모르는 세상의 변화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나는 항상 개인으로서 번민하던 스타 라이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강림아. 오늘부터 다시 학교 가야 하는 날 아니야? 일어났니?”
“네, 이모. 저 일어났어요. 금방 나가요.”
나는 손을 휘저어 홀로그램 화면을 지워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 * *
“우와. 오늘 아침은 된장찌개인가? 냄새 너무 좋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후다닥 식탁에 앉아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한술 떠 입 안에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이모가 해주는 된장찌개의 맛. 내가 일 년 반 동안 군 생활을 하며 그리워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해준 된장찌개를 이렇게 좋아했다고 오바야? 어릴 땐 된장찌개 싫다고 난리였잖아.”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아직도 해? 우리 이모 된장찌개가 최고지.”
“언제 적 이야기긴. 너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싫어했으니까, 길어봐야 4년밖에 안 된 이야긴데.”
그게 제 기준으론 사실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거든요.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제 입맛도 꽤 많이 바뀌었어요, 이모.
이렇게 가끔 느껴지는, 이모와 나와의 기억의 차이를 느낄 때마다 조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기도 한다.
“지금 내가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한 거지. 앞으로도 계속 맛있게 먹을 테니까 맛있게 해주세요.”
“참나. 그래그래, 많이 먹어. 고맙네. 우리 조카. 아, 강림아. 오늘 비 온다니까 우산 꼭 가져가고.”
“네, 이모.”
히어로 활동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시작을 하지 않았을 거고, 이모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열심히 히어로 활동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이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 돌아온 이상, 다시 옛날에 살던 세계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이모가 해준 밥 한술을 떠 입 안에 집어넣었다. 이모가 해준 쌀밥은 단맛이 났다.
* * *
소연은 학기 초에 강림이의 뒤를 몰래 따라다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숨기고 등교하는 길에 강림이와 마주치던 골목길을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다.
채경과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은 자수한 채경의 입으로 밝혀져 세상에 알려졌고, 사건이 일어난 곳이나 다름없는 학교는 잠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소연도 당연히 사건과 관련된 참고인이자 피해자로서 불려 갈 뻔했었지만, 과거 엄마의 이혼을 도와줬던 변호사가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한 번도 제대로 진술하지 않고 사건을 정리할 수 있었다.
슬슬 강림이가 올 때가 되었는데….
이미 수아와 강림이와 친한 친구가 된 소연이 또다시 숨어서 강림이가 오길 기다리는 데에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심연의 여왕과의 전투, 그 끝에 돌아온 기억의 중심엔 항상 강림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던 심연의 여왕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몰아내 주었던 강림이. 강림이가 꿈속에서 들고 있던 체인과 같은 것을 들고 있던 다크 카이저. 그리고 심연의 여왕이 마지막에 사라지며 외쳤던, 저주.
소연이 며칠간 집에서 끙끙 앓으며 고민했던 그 모든 단서의 결론은, 강림이와 다크 카이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조각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피곤해 보였던 강림이의 모습, 방과 후엔 항상 학원에 간다며 서둘러 사라진다.
항상 주변에 관심이 많고 주변을 돕길 좋아하던 강림이의 모습은, 소연이 상상하던 히어로의 모습과 일치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나밖에 없겠지.
알 수 없는 짜릿한 쾌감에 소연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밖에 알아차리지 못한 이 짜릿한 비밀이 정말 사실인지 강림이에게 직접 물어보기 위해, 수아와 만나기 전에 먼저 강림이와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소연이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연이 기다리던 골목으로 강림이가 들어섰다.
언제나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강림이의 모습을 보며,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소연이 천천히 강림의 앞으로 나섰다.
“…어? 소연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어… 강림이 안녕.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먼저 왔는데….”
어… 음… 뭐라고 하려고 했더라. 혹시 네가 다크 카이저 맞니? 좀 뜬금없는 거 같은데….
혹시 강림이 너 밤마다 학원 가는 게 아니라 히어로 활동을 하고 다니는 거 아니니? 이것도 조금 이상한데….
너 혹시 퀘이사랑 사귀는 사이야? 이건 중간을 너무 건너뛰었잖아.
“며칠 쉬는 동안 별일 없이 잘 보냈니?”
물어보려다 우물쭈물하면, 뭔가 다른 오해가 생길 것 같아 소연은 자기도 모르게 안부를 묻고 말았다.
아, 이게 오히려 더 이상하잖아. 소연아, 이 바보야.
소연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 * *
[“마스터. 방금 고백하려던 분위기 아니었어요?”]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여기 만화 속 세상이라 기본적으로 다들 비주얼 좋아. 그런데 나 나강림은 소꿉친구에게 고백했다 차이고, 23살이 넘도록 모쏠이었던 전적이 있는 남자지.
[“그게 뭐, 어때서요?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거기에 요즘은 몸도 좋아지셔서 충분히 인기 있어요. 반 친구들 중에서도 몰래 좋아하는 여자아이들 있을걸요?”]
야, 넌 AI잖아. 말하는 건 무슨 진짜 사람인 줄 알겠어. AI한테 그런 말 들어봐야 신빙성이 없다고. 그리고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칭찬이냐?
[“아니. 그래도 제가 남자 AI는 아니잖아요. 남자보단 여자 AI가 훨씬 여자아이의 맘을 잘 알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내가 보기엔 AI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군.”】
얼씨구. 이젠 악마 놈까지 끼어서 난리네.
[“제가 보기엔 가능성 있다니까요?”]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그래. 백번, 아니 천번쯤 양보해서 쟤가 날 좋아한다고 치자. 그럼 내가 지금 쟤랑 사귈 상황이야?
[“어…”]
학교 다녀와서 밤마다 슈트 입고 밤거리를 돌아다녀야 돼. 툭하면 진짜 나를 죽이려고 드는 악당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고. 거기서 돌아와 짬이 조금이라도 나면 내 미래를 위해 공부하거나 아니면 나를 위해 휴식을 조금이라도 취해야 되잖아.
내가 지금 이 사이에 누군가를 만날 틈이 있긴 하냐? 그건 나랑 만날 상대방한테 실례야. 내가 밤마다 뭘 하고 다니는지 말할 수도 없는데, 비밀을 가진 채 서로를 속이면서 어떻게 누구랑 연애를 하겠냐?
거기에 지금의 나는 해야 할 것,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누군가랑 연애를 해? 어떻게 나 혼자 행복하자고 연애를 하냔 말야. 내가 그런 사람이 될 가치가 있긴 해?
【“이 말이 더 맞는 말이군. 역시 AI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너도 조용히 해. 이 박쥐 같은 놈아.
[“마스터. 농담으로 한 말인데 너무 발끈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둠의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사춘기 남자아이였군.”】
으아아악. 이제 둘이 편 먹고 놀려먹네.
“강림아.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게 둘이나 되는 탓에 가끔씩 이렇게 어색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 어?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기분 나빠서 이런 거 아니야.”
AI랑 악마 놈은 인간의 연애에 관여하지 마셔. 그런 건 인간들끼리 알아서 할 영역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