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현장학습(2)
사실, 요즘 소연의 기분이 좋은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최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친구가 하나 생겼으니까.
채경의 습격을 막아내면서 각성한 자신의 능력….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열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엔, 소연을 따르는 괴물이 하나 있었다. 소연은 처음엔 통로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괴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었지만, 이윽고 익숙해졌다.
괴물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소연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연의 생각보다 훨씬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괴물은 막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했을 뿐, 금방 소연의 말을 잘 따라 소연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온전히 알 수 있는, 소연이 예전부터 꿈꿔왔던 온전히 소연만을 위한 친구.
소연은 그 친구의 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던 공포 영화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을 따 ‘데다이트’라고 지었다. 줄여 부를 땐 ‘데다’.
‘뭐? 벌써 배가 고프다고?’
여기선 곤란한걸….
평소에는 소연이 먹는 척하며 음식물을 통로로 넘겨주는 방법을 많이 썼었지만… 여기는 박물관이고, 박물관 내에서는 음식물 취식이 금지되어 있다.
‘조금만 더 참아줄래? 곧 관람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거든. 그때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서 나눠줄게.’
‘뭐? 그냥 달라고? 안 돼. 너 또 껍질째 삼킬 거잖아. 내가 이따가 껍질 벗겨서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시무룩해지는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윽고 알겠다고 긍정하는 듯한 데다의 사고가 느껴져서 소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애완동물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상상만 하던,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젠 이런저런 일도 겪고 이겨냈는데 주인공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주인공은 결국 좋아하는 사람하고 이어지잖아.
소연은 자신의 옆에서 전시된 물건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나강림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며 남몰래 얼굴을 붉혔다.
* * *
역사박물관의 내용은 내가 원래 세계에서 다니던 역사박물관에 잠들어 있던 물건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건 이 세상에 초능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지 60여 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
만약 초능력이 세계대전 시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 세계는 조금 더 과거로 회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 이후, 전쟁의 참혹함이 어떤지 아는 시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던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초능력자들은 또 다른 전쟁을 만들지 않고 사회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역사의 흐름을 나 혼자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사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은 다른 힘을 가진 개인으로서, 이 세상이 올바른 곳으로 향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현장 학습을 다니는 게 아니었네요. 현장 학습이라는 거, 그냥 놀러 다니고 쉬러 다니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글쎄… 이 집중력이 과연 오후까지 갈 수 있을지 난 모르겠군.”】
내 머릿속에서 나가! 이 악마들!
얘네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턴 무슨 감상에 젖을 수가 없다. 내 생각을 다 읽고 날 놀려먹기 바쁘니….
<기증자: 경한 그룹>
역시 여기저기 경한 그룹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네…. 내가 경한 그룹과 쉽사리 척을 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뒤에선 나쁜 일을 하는 만큼, 또 앞에선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천산시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으니까.
지금 살펴본 역사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이 경한 그룹이 돈으로 사다 기증한 물건이라고 하니… 천산시에서 경한 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밖에 없긴 하다.
“자, 그럼 일단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점심 먹고 와서 다시 돌아보는 걸로 하자. 각자 먹고 싶은 곳으로 가서 점심 먹고 쉬다 오는데, 1시 반까지는 여기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와아아!”
담임 선생님의 말에 왁자지껄 떠들며 각자 모여서 점심 먹을 자리를 찾으러 떠나는 반 친구들.
“와!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거의 졸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리의 뒤를 조용히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도유진이 신이 나서 외쳤다.
“유진이는 아까까진 지루하다고 엄청 힘들어하더니, 점심 먹는다니까 기운이 나나 보네.”
“그럼! 너무 지루하고 졸렸잖아. 나 서서 졸 뻔했다니까?”
“어휴… 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한 톨도 없네. 저런 게 무슨 경찰을 하겠다고….”
나는 도유진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유진은 중간고사 이후부터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의외였던 점은 도유진이 은근히 우리 사이에 잘 어울려 다녔다는 점이다.
“야. 그런 건 나중에 열심히 공부하면 돼. 원래 이런 덴 머리 식히고 놀러 오는 곳이지 공부하러 오는 곳이 아니야.”
“도유진. 내일은 여기서 본 내용으로 역사 테스트할 거야. 준비 제대로 하도록 해.”
학기 초에 비하면 많이 밝아져 사람을 가리지 않게 변한 소연이는 그렇다 치지만, 수아도 의외로 도유진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어울려 다녔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도유진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아아아악! 테스트는 싫어!”
“아하하하! 유진이 표정 완전 웃겨!”
도유진도 오빠의 몸이 좋아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많이 밝아지기도 했으니까. 예전부터 저렇게 밝은 면이 많아 어디든 잘 섞여 들어가는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
“나! 나! 나! 나 밖에서 먹고 싶어! 밖에 풀밭에서! 나 돗자리도 가져왔어.”
내 질문에 신이 나서 손을 들어 올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소연이.
“거기 들어가도 되는 거야?”
“어. 나 작년에 거기 들어가서 먹었는데 선생님이 상관없댔어.”
우리는 박물관에서 빠져나와 박물관 바깥의 풀밭에 소연이의 귀여운 핑크색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네 명이서 앉기엔 조금 비좁은 느낌이기도 했지만, 원래 이런 데 와선 조금 비좁게 앉아도 즐겁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우와. 뭐야? 다시 버스에 다녀온다고 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무슨 도시락을 이렇게 많이 싸 왔어?”
“어… 응…. 다 같이 먹으려면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소연이가 들고 온 도시락의 양은 족히 사 인분은 될 만한 양이었다.
이렇게 바리바리 많이 싸가지고 온 데에는, 소연이 새로 개방한 능력의 영향도 있을 거다.
지난번에 얼핏 봤던 괴물의 팔은 그 팔 하나만으로 내 몸통만큼 거대했다.
그 정도 괴물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선 필요한 음식의 양이 생각보다 많을 테지.
“와, 진짜 완전 예쁘다~ 한소연 뭐야~ 시집가도 되겠는데~.”
“이걸 너 혼자 다 만든 거야? 대단하다.”
“아니. 나 혼자선 아니구, 엄마께서 많이 도와주셨어.”
많이 싸 오고 화려하게 싸 온 도시락을 보며 다들 신나 있던 바로 그때, 나는 은박지에 싸여 있는 김밥 한 줄을 꼼지락대며 뒤로 숨기고 있는 수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항상 어른스러워 보여도 애는 애야. 이런 건 창피하게 생각할 게 아닌데도 창피해한다니까. 나는 들고 왔던 도시락통의 뚜껑을 덮었다.
미안해요, 이모. 싸주신 도시락은 이따 밤에 일하다 배고프면 야식으로 먹을게요.
“야, 이대로 가져가면 소연이 가지고 온 도시락 전부 버리겠다 야. 난 오늘 그냥 소연이 도시락이나 뺏어 먹어야겠어. 소연아, 괜찮지?”
“응? 어! 응, 괜찮아. 다 같이 나눠 먹으려고 싸 온 거니까.”
“어, 진짜? 오케이. 나도 이건 이따 배고프면 먹고 소연이거나 먹어야겠다.”
내 말에 소연이의 도시락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던 도유진이 옳다구나 하며 도시락 뚜껑을 닫고 달려들었다.
“와! 한소연. 진짜 요리 X나 잘해. 개 맛있어. 야, 너 나한테 시집와라.”
“어… 어. 유, 유진아…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해.”
도유진이 시끄럽게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약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수아의 모습을 보아하니, 한 번 더 떠밀어줄 필요가 있겠다.
“수아야, 뭐 해? 너도 네 거 그냥 넣고 이거나 같이 먹어.”
* * *
강림이와 친구들이 밥을 먹고 있는 풀밭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 안.
호수관광이라고 쓰여 있는, 보통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들이 관광을 다니기 위해 사용하는 관광버스 안엔, 투박한 모양에 눈구멍과 숨구멍만 뚫려 있는 가면을 쓴 험상궂은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그 버스 안의 가장 뒷자리에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남자가 하나 있었다.
안 그래도 번쩍이는 은빛 나이프를 다시 한번 꼼꼼히 닦아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스카 페이스였다.
“대장! 보니까 애들이 소풍이라도 왔는지 군인들이 돌아다니던데요. 오늘 말고 다른 날 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스카 페이스는 옆에 앉아 한심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부하를 찔러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방금 깨끗하게 닦아놓은 나이프에 다시 피와 기름을 묻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돈을 보고 대충 모여든 날파리 같은 부하들이다 보니 부하의 질이 전부 괜찮은 편은 아니었다. 괜찮은 부하를 찾아 채우기엔, 사대희의 밑에 숨죽이고 있던 기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그 늙은 여우는 자신이 다른 주머니를 채울 기미가 보이기만 해도 자신을 내쳐 버렸을 테니까.
“날 믿어라. 지금 이 주변에 있는 군인들은 별것도 아니니까. 총알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여기 있는 군인들의 대부분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어 있는 군인들일 테니까.
군인들은 박물관의 물건을 지켜내기보단, 아이들이 인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지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스카 페이스는 오히려 군인들이 많아진 틈을 타 생긴 보안 체계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이 날짜를 선택했다.
“대장. 그럼 언제 시작합니까? 버스 안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한데요.”
또 한심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부하를 보며 스카 페이스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지옥의 열쇠를 손에 넣었다면,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버리고 작별했을 텐데.
경한 그룹과 완전히 대립하길 각오하며 벌인 일이었는데, 히어로들의 난입으로 인해 손에 넣었던 열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차원의 문을 열 가능성이 있던 헬-스폰을 다크 카이저에게 뺏기고 난 후, 가까스로 찾아낸 새로운 차원 열쇠와 관련된 정보였다. 정보의 출처를 생각하면 꽤 신뢰성이 있는 정보였다.
여기 있는 기증품의 거의 전부가 경한 그룹에서 기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조금 더 확신을 얻었다. 설령 여기에 있는 물건이 찾던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기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은 확실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시작 신호가 울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