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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89화 (89/236)

제89화

히어로 슈트에 담긴 의미(1)

“아~ 또 졌네….”

강림이의 반 친구, 박준석은 하고 있던 게임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게임기의 화면에는 YOU LOSE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어디 같이 놀아줄 사람 없나?”

준석이는 단톡방에 놀아줄 사람을 찾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답변을 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생 때엔 함께 놀러 다니던 친구들도 모두 예전과는 달라졌다. 다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믿었던 나강림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요즘은 여자인 친구들이 많아져서 자신과는 함께 다니지조차 않는다.

“아~ 난 정말 공부하기 싫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르다. 박준석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시점부터 다른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박준석은 아직 중학교 3학년의 어딘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준석이에게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하기까지는 아직 멀고 멀게만 느껴졌다.

준석에게는 목표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앞으로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고 싶은 꿈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공부에 재미도 붙지 않았다.

“할 것도 없는데, 히어로 덕질이나 한번 해볼까?”

박준석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마침 최근 가장 잘나가는 히어로, 다크 카이저의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이번에는 공장에서 금경강에 흘린 폐수로 인해 만들어진 괴물을 제압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강가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을 습격했던 모양인데, 마치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난 다크 카이저가 곧바로 제압해 아무런 인명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 인터넷에는 누군가 다크 카이저를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드론으로 찍은 듯 다각도로 편집되어 있는 동영상에는, 다크 카이저의 활약상이 자세하게 담겨 있었다.

“와~ 진짜 개쩐다….”

과연 어떤 게 진짜 실체인지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환영술, 손에 달린 멋진 블래스터, 빠르고 유연한 몸놀림과 큰 괴물을 멈춰 세우는 힘. 그리고 마무리의 검은색 화염까지….

그렇게 괴물을 잡아내고, 미련 없이 털고 떠나는 다크 카이저의 뒷모습을 보며 박준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 속 깊숙이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

“내 이름은! 더 다크 카이저! 죄지은 자들을 벌하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이 세계에 강림했다!”

박준석은 뜨겁게 차오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방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박준석! 이 시간에 왜 소리를 지르고 X랄이야! 조용히 안 해?”

아이쿠.

옆 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고3 누나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 내 맘이야~.”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누나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박준석은 일단은 조용히 하기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가슴 깊이 새겨진 뜨거운 감정은 도저히 식을 줄을 몰랐다.

여기저기 히어로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며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던 박준석.

히어로 커뮤니티의 글을 쭉쭉 내리던 박준석은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대부분 이미 다 알고 있거나, 봤던 것들이라 더 이상 보고 즐길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스크롤을 쭉쭉 내리던 박준석의 눈에, 글 하나가 들어왔다. 일주일 뒤에 히어로 코스프레 대회가 열린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거다.

평소에도 종종 히어로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진성 덕후 박준석은 이번에도 코스프레 행사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    *    *

기말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정말 히어로의 삶은 바쁘기 그지없구나.

나는 강에 약품을 흘려보내려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전에 강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만들어진 이유가, 사실은 폐수가 아닌 이 약물들 때문이었다.

브루트 태생 의사, 닥터 하쉬가 만든 이 약은, 가지고 있는 브루트 인자를 변이시켜 새로운 병을 만들어내고 만다.

작품 내에서 인휴먼증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병을 앓는 사람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으로 만들며, 스스로가 가진 능력의 제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예컨대, 전기 능력을 가진 능력자는 몸 자체에 전류가 계속해서 흘러버린다거나, 팔에서 독물을 흘리는 능력을 가진 능력자는 끝없이 온몸에서 독물이 흘러나오는 식이다.

이 약 때문에 병을 앓던 등장인물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인간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이, 얼마 전에 강에 나타났던 물고기가 변형된 그 괴물이다.

원작 내용을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은 발단. 지금 약이 퍼지지 않게 틀어막는다면 그런 수많은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거다.

[“마스터.”]

응? 왜?

[“어젯밤부터 다크 스코프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쉰다고 했었잖아요. 이참에 마스터도 잠깐 쉬시는 게 어때요?”]

아. 맞아 그랬었지. 어쩐지 얼마 전부터 잘 보이지가 않더라니. 혹시 가족한테 들키기라도 했나? 그럼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맡은 구역은 지금 계속 비어 있는 거야?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인데….

[“마스터. 애초에 마스터가 다크 스코프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가장 치안이 좋고 활동하는 히어로도 많은 북구를 맡겼었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큰일이 일어난 적도 없고.”]

그래도 내가 신경 쓰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일이 터져서 세상이 위험에 처해 버리면 어떡해? 당분간 내 순찰 범위를 그쪽 구역까지 늘리는 걸로 하자.

[“마스터! 어제도 시험공부 하신다고 거의 밤새셨잖아요. 그러다가 마스터의 몸부터 먼저 상하겠어요.”]

제인이 한숨을 푹 내쉰다. 아니 AI가 한숨은 어떻게 내쉬는 거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마스터. 모든 걸 마스터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마스터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새로운 히어로가 탄생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스터는 혼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초인이 아니라구요.”]

알겠어… 이번 일이 끝나면 다프네에 가서 다른 히어로들과 이야기 좀 해보자.

[“그래요, 마스터. 좋은 생각이에요.”]

나는 이제 확실히 약물을 강물에 흘려보내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S

H

H

H

BOOM!

“지금 여기, 나 강림.”

*    *    *

박준석은 차려입은 자신의 코스튬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보기엔 생각보다 잘 만든 괜찮은 코스튬이었다.

이 정도면 입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석은 실존 히어로 코스프레가 아닌, 자작 히어로 코스프레 분야에 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진짜 세상에 존재하는 히어로들의 코스튬을 완벽하게 따라 만드는 진짜 금손들에 비하면 박준석의 코스튬은 서투르다. 애초에 그 영역은 정말 재능의 영역. 일반적인 사람들은 따라 할 수 없다.

실존 히어로의 코스튬을 따라 만드는 부문은 정말 경쟁률이 박 터진다. 당연하다. 진짜 인기 많은 히어로의 코스튬을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지금까지 많은 코스프레 행사에 참여했었지만, 단 한 번도 입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입상을 노려보기로 했다.

코스튬의 전체적인 느낌은, 요즘 가장 잘나가는 히어로 다크 카이저의 느낌을 따라가고 있었다.

멋진 올블랙에 포인트로 들어가는 회색. 갸름한 턱이 보이는 가면에 휘날리는 망토. 그리고, 검은색으로 칠한 목검까지.

어둠의 힘을 다루며, 지옥에서 올라온 히어로 캡틴 다크. 코스튬의 이곳저곳을 다시 한번 살펴본 박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 미친X아. 그 꼴을 하고 어딜 가냐? 으아아악! 창피해!”

집을 나서는 박준석의 등 뒤로 누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    *    *

“여보… 그 꼴을 하고 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올 게 왔구나.

다크 스코프, 정학근은 뒤를 돌았다. 평소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깨지 않는 자신의 와이프가 결국 코스튬을 입은 자신을 보고야 말았다.

사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와이프가 잠드는 새벽마다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히어로 활동을 하러 나가는데, 아무리 깊게 잠이 드는 사람이라도 언젠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같았으면 자신의 아지트에 숨겨놓고, 출동 전에 아지트에서 옷을 갈아입고 왔을 터였다.

하지만 최근 긴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슈트를 집 안까지 가지고 들어온 게 패착이었다.

정학근이 슈트를 갈아입기 위해 아지트까지 가는 그 찰나에, 어떤 큰 사건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집 안에서 몰래 입고 나가곤 했는데, 기어코 오늘 와서야 와이프에게 자신이 슈트를 입은 꼴을 보이고야 만 것이다.

“깨버렸군….”

사실, 조금 속이 시원했다.

정학근은 내심 진짜 히어로들과 함께 섞여 사건을 해결하러 다니고, 범죄자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조하러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비밀로 해서 미안하오. 이 세계엔 범죄가 많소. 그리고 그 범죄의 대부분은 범죄가 일어난 다음, 그 사후에 처리하게 되지. 애초에 막을 수 없는 범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

찰! 싹!

“앗, 따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진짜 이렇게 세게 때릴 줄은 몰랐다. 정학근은 화들짝 놀라 뺨을 움켜쥐었다.

“미쳤어? 당신 미쳤어? 당신 그러고 다니다가 큰일이라도 당하면, 나 혼자 어떻게 애를 키우라고. 미쳤어? 당신 진짜 미쳤어? 미쳤어? 미쳤냐고!”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스판 재질로 이루어진 옷 위로 손바닥이 계속해서 날아든다. 따갑긴 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옷까지 입은 상태였다면 아내의 손이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당신 앞으로 그러고 다닐 거면 나랑 이혼해. 나 당신 그러고 다니면 못 살아. 앞으로 절대 못 살아. 이혼해. 이혼하자고. 어흐흐흐흑….”

계속해서 정학근을 때리다 제풀에 지쳐 우는 아내를 안으며, 정학근은 이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심란함을 느꼈다.

이렇게 될 줄 알았고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미안해… 미안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나가긴 글렀다. 정학근은 팔에 달린 리모컨의 버튼을 조작했다.

오늘은 긴급한 일이 있어, 자신의 구역 순찰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히어로들의 호출기로 전송되었을 것이다.

요 며칠 어떻게 와이프를 설득해야 할지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학근은 울고 있는 아내를 더 힘주어 안았다.

*    *    *

‘이거… 생각보다 창피하네….’

캡틴 다크의 옷을 입고 있는 박준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 표정이 가려지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박준석은 지금 지하철 안에 있었다.

보통 히어로 코스프레 행사 날엔 지하철 안에도 코스튬을 입고 노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코스튬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야… 야… X… X…발… 야 너. 거기. 그래. 너, 너… 뭔… 뭔데. 날 그따구로 쳐다보는데? 내가 이렇게 사니까… 거… 마… 만만해 보여? 너… 딱, 딱… 이리 와봐. 어? 어딜 도망가? 이리 안 와?”

준석이 있는 옆 칸에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주변 사람들한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지하철에서 저러는 사람이 다 있네. 구경하고 있는 준석에게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저기… 히어로… 세요?”

“네? 저요? 아… 아닌데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준석은 깜짝 놀랐다. 아니, 세상에 지하철 타고 다니는 히어로가 어디에 있어요?

“그래도 슈트 입으셨잖아요….”

“그래. 총각. 슈트 입었잖아. 가서 한 번만 어떻게 해주면 안 될까? 거, 거기 무기도 하나 들고 있잖아.”

얼굴에 가면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준석은 지금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주변의 기대 어린 시선에 조금 흥분한 것도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자신에게 기대해 준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준석은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고 말았다.

“저기요. 아저씨.”

“뭐… 뭐야? 넌 또?”

“너무 시끄러우신데, 좀 조용히 하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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