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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90화 (90/236)

제90화

히어로 슈트에 담긴 의미(2)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박준석이 등에 메고 있는 목검을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취객 아저씨가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너어! 내가 얼굴 지금 딱! 봐놨어. 내가 지금 내려야 돼서 내리는데, 다음번에 다시 만나면 진짜 나한테 뒈~ 질 줄 알아~ 알겠어?”

그렇게 말한 아저씨는 다음 역에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지하철에서 내려 버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얼굴을 기억해? 이 아저씨 완전히 취했구만?

“술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퍼 자지, 지하철에서 행패야, 행패는?”

“어휴. 학생 고마워. 너무 시끄러워서 힘들었는데.”

실질적으로 한 건 없었지만, 자신의 행동을 긍정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준석은 잠시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전까진.

이거 미튜브에 그대로 올라가겠네… 창피하게.

*    *    *

터덜터덜.

박준석은 기운 빠진 걸음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막상 행사장에 나가보니 자신 외엔 코스튬을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웨딩 박람회 현장이라 가자마자 시선 집중이 돼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순간 당황했던 준석은 행사장의 행사 일정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코스프레 행사의 날짜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던 거다.

괜히 하루 일찍 옷을 입고 나오는 바람에 창피만 당하고 만 것이다. 아까 영상 찍은 사람들도 있을 텐데, 곧 미튜브에 박제돼서 놀림당하겠지.

지금 만든 이 코스튬은 그냥 폐기해야겠다….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앞에 보이던 반찬 가게에서 복면을 쓴 사람이 튀어나와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에는 돈이 든 게 분명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투를 든 채로. 곧바로 이어지는 반찬 가게 아주머니의 비명! 분명 강도다.

돈을 들고 도망가는 강도를 뒤 따라 나온 아주머니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도망가는 강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석이 아는 얼굴이었다. 준석의 엄마가 자주 찾아가는 단골 반찬집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남편을 여의고, 두 자식을 홀몸으로 키우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준석의 엄마가 자주 그 가게에서 반찬을 사 오셨던 것이다.

그런 반찬가게 아주머니의 사정과 더불어, 아까 전에 지하철에서 잠시나마 느꼈던 아드레날린이 채 다 빠지지 않고 준석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 버릴 슈트를 입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을 거다.

준석은 등 뒤에 메어 두었던 목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칠까 무서워,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지금은 얼굴에 가면도 쓰고 있을 터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다. 준석은 강도가 들어간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저… 저저… 저 사람 칼 들었어요! 따라가지 마세요!”

뛰어드는 준석의 등 뒤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돈을 잃은 아주머니의 멍한 표정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잠시 골목길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준석은 막다른 골목에 가만히 서서 봉투 안의 돈을 살펴보는 강도를 발견했다.

준석은 강도가 도망칠 수 없게 골목길을 틀어막을 수 있는 위치에 섰다.

“너 뭐야? 저리 안 비켜? 뒤지고 싶어?”

강도는 골목길을 막아선 준석을 보고 칼을 꺼내 들었다. 조폭 영화에서나 보던 길쭉한 사시미칼. 해가 지고 있는 저녁 시간대인데도 불구하고 칼끝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꿀꺽.

침을 꼴깍 삼키고 박준석은 목검을 다시 한번 고쳐 쥐었다. 리치는 자신이 훨씬 길다. 해봐야 반찬 가게 정도나 터는 잡범. 초능력을 가진 빌런일 가능성도 없다.

그동안 히어로 영상을 수두룩하게 돌려본 준석의 머릿속에서 전투 시뮬레이션이 순식간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을 내려쳐 떨어트리게 만들고, 그대로 머리를 가격해서 기절시킨다. 빠르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지… 지금 가지고 나온 그 돈. 다… 다시 돌려주면 비… 비켜드릴게요.”

“뭐? 이, 이 X끼야! 내가 지금 손에 칼 쥐고 있는 거 안 보여? 내 눈에 뭐 뵈는 게 있을 거 같아?”

쉭- 쉭-

그렇게 말한 강도가 칼을 두 번 휘둘렀다. 칼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소리가 났다.

꿀꺽.

준석은 다시 한번 침을 삼키고 목검을 꽉 쥐었다. 싸구려 목검에서는 싸구려 물감 냄새가 났다.

*    *    *

싸움은 생각만큼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강도는 기어코 준석이 막아서는 걸 뚫고 도망쳤고, 추격전은 어두운 골목까지 이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치열하게 쫓고 쫓겨본 것도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치열하게 쫓고 쫓기는 동안 숨도 전혀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생소하지 않았다. 원래 그랬어야 했던 것처럼.

골목까지 이어진 추격전은 결국 난투로 번졌고, 난투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던 것처럼 멋있지 않았다.

목검은 생각보다 일찍 부러졌고, 칼은 생각한 것보다 더 아팠다. 상대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칼뿐만이 아니었다. 칼을 떨어트렸다고 방심한 사이, 강도가 바닥에서 주운 벽돌에 머리를 얻어맞아 큰일 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석은 결국 이겼다.

자동차 소리에 깜짝 놀란 강도가 실수로 넘어져 버려서 그랬던 거긴 하지만….

온몸이 쑤시고 상처투성이여도, 결국 준석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겼다. 그리고 준석은 거기서 자신이 무얼 하고 싶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히어로, 자신이 동경하는 히어로들처럼 되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를 도와줄 용기가, 누군가와 싸울 용기가 없었을 뿐.

강도에게서 빼앗아 손에 쥔 현금이 든 비닐봉투를 보며 준석은 피식 웃었다.

누나가 또 X랄 하겠네.

‘너 진짜 X친 X끼냐? 칼 맞아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깜빡깜빡,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에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야, 누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

“저… 저기요… 이거… 저 앞에 반찬가게 아주머니가 도둑맞은 돈이거든요…? 저 대신….”

거기까지 말한 준석은 정신을 잃었다.

*    *    *

나는 쓰러진 박준석을 보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처음 보는 히어로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냐고? 치열한 전투 덕분인지 가면이 반쯤 벗겨져 있었거든.

어설프게 나를 따라 한 듯한 코스튬에, 검게 칠한 목검을 보며 나는 묘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가 처음으로 했던 실수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히어로 일은 흥미로, 재미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 저기요… 이거… 저 앞에 반찬가게 아주머니가 도둑맞은 돈이거든요…? 저 대신….”

[“글쎄요. 진짜 흥미만을 위해서 한 일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는데요?”]

*    *    *

꿈뻑꿈뻑.

준석은 눈을 떴다. 아까까지 골목에 누워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 있는 곳은 처음 보는 침대 위였다.

준석은 조금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방 안에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의자와 탁자가 하나, 그 위엔 수술용 도구들과 타투를 새길 때 쓰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마치, 히어로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불법 치료소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와 치료해 준 모양이다.

끼릭.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보고, 준석은 조금 긴장했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치료소는 보험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냥 병원에 가도 됐는데….

하지만 곧이어 들어온 사람의 정체를 보고 준석은 언제 그런 걱정을 했냐는 듯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고 보이는 사람은 최근 가장 유명한 히어로, 다크 카이저였다.

다크 카이저는 문에 기대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다크… 다크 카이저…?”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럼 다크 카이저가 날 구해준 거야? 와, 이거 사인이라도 받아야 하나?

“정신이 조금 들었나 보군.”

“헉. 네. 저… 저… 다크 카이저 님. 제… 뵙게 돼서 여, 영광입니다.”

“몸은 좀 괜찮나?”

“네…? 네! 어, 어떤 일을 해주셨는지 모르겠는데 아무 데도 아픈 곳 없이 멀쩡해요. 저… 정말 감사합니다.”

다크 카이저가 자신을 치료해 준 모양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히어로를 만나 치료까지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다크 카이저가 걱정까지 해주다니….

“요 근방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 말이야. 혹시 원래부터 자경단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나?”

“어… 아, 아니요. 오, 오늘이 처음인데요?”

혹시 내 용기를 높이 사서, 사이드 킥으로 만들어주려고 그러시는 건가? 히어로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는 그러는 경우 많은데.

별 능력이 없어도 히어로 활동을 할 수 있게 장비를 지원해 준다거나….

준석은 미튜브에서 봤던 정보를 떠올렸다.

다크 카이저 전문 분석 미튜브 채널, 한밤의 수호자 - 다크 카이저에 따르면 다크 카이저가 자신의 사이드 킥을 만들기 위해 초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을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첨단 장비로 움직이는 단검 두 개라든지, 초능력이 없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글라이더라든지, 연막탄이나 섬광탄 같은 도구들까지.

쉬운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도구들로만 해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다크 카이저의 사이드 킥이 될지도 모른다.

“초능력은 있나?”

“어… 없습니다.”

“들고 있던 장비는?”

“목검 하나 들고 했어요.”

“정신이 나갔군.”

동경하던 히어로를 만나 들떠 있는 박준석의 귀로 다크 카이저의 차디찬 말이 날아 들어왔다. 생각보다 싸늘한 말투.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칼에 6방을 맞았다. 그중 한 방은 내장을 상하게 했고. 만약 내가 발견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병원으로 향했더라면, 그냥 죽을 수도 있는 상처였다.”

휙-

그와 동시에 준석을 향해 날아오는 물건. 반사적으로 받아든 그 물건은, 반쯤 부서져 넝마가 된 준석의 마스크였다.

준석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얼굴에는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았다.

“천산 고등학교 1학년 박준석. 손위 누이를 포함한 4인 가족. 히어로 코스프레 관련 커뮤니티에서 ‘히어로 캡틴 준’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었군. 캡틴 준이면… 준석의 준인가? 이런 닉네임, 창피하지도 않나?”

줄줄줄 나오는 자신의 신상 정보를 보며 준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일 리는 없을 테니 자신의 얼굴만을 보고 조사해 누군지 알아냈을 터였다.

“내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만약 다른 사람들이 발견해서 신상이 공개되었다면, 넌 아마 분노한 빌런들한테 타깃이 되었을 거다.”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자경단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 빌런들이 미리 새싹을 밟아놓는 일도 이 세계에서는 흔하니까.”

그렇게 말한 다크 카이저는 이번에는 옷가지를 던졌다. 고등학생이 입기에는 조금 작은 아이의 옷이었다.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리라. 너 같은 아이는 필요 없다는, 다크 카이저가 보내는 메시지.

“다신 밤거리로 돌아오지 마라. 너 같은 놈이 들쑤셔서 괜히 엄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니까.”

덜컥.

문이 닫혔다. 준석은 멍하니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    *    *

“너무 심하게 구시는 거 아니에요? 회복력을 보면 진짜 그냥 일반인은 아니던데… 새로 생긴 능력에 대해선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문을 닫고 나오는 내게 밀키웨이, 황서현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능력을 개방한 것 같긴 했으니까.

밀키웨이의 회복력 상승으로 받는 회복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만약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다면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 나가진 못했을 거다. 내츄럴인 나도 매번 치료를 받고도 최소 하루는 통증에 시달릴 정도니까.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요. 이런 일을 하기엔 아직 너무 어려. 언젠간 그렇게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지.”

“고등학교 1학년이면 별로 어린 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밀키웨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퀘이사, 강수아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강수아만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박준석의 미래를 알고 있다. 최강훈을 따라 히어로가 되었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시 때문에 능력을 개방한 뒤 금방 목숨을 잃게 되는, 최강훈을 각성시키는 각성제 같은 캐릭터였다.

그리고 아마 이대로 히어로로서 데뷔한다면, 또 똑같은 전철을 밟아 죽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보다 한참 작은 이 옷을 주신 큰 뜻을 생각하며 다신 이 일에 뛰어들지 않겠습니다.”

벌컥, 문이 열리고 고등학생이 입기엔 작은 옷을 입은 박준석이 인사를 꾸벅하더니 문밖으로 우다다다 뛰어나갔다.

근데 뭐? 무슨 큰 뜻?

“어머. 저거 이전에 애들 구해줬을 때 애들 입히던 옷인데. 내가 옷을 잘못 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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