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히어로 슈트에 담긴 의미(3)
준석은 다크 카이저에게 질책을 받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봄을 지나 6월, 점점 여름이 되어가는 날씨. 분명 날이 추울 리가 없는데도 준석은 자신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준석의 현실 감각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당할 뻔했던 건지, 준석은 이제야 절절하게 깨달았다.
어두운 골목길을 암약하는 범죄자들, 특히 그중 강력한 슈퍼 빌런 중에서는 자경단 활동을 시작하는 초보 히어로들을 유독 지독하게 공격해 오는 타입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히어로로서 성장하기 전에 싹부터 밟아 없애 버리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 자경단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심하게는 자경단의 신상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을 경우에는, 가족에게도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마치 정신 능력자의 환상 속에 빠져 있다 정신을 차린 기분이었다.
준석은 가면이 만들어주는 환상에 빠진 채 자신이 정말 히어로라도 된 것마냥 행동했을 뿐이다.
준석은 주머니 속에 챙겨온 가면을 거리에 보이던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준석은 다시는 가면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 *
그다음 날 아침부터, 준석은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그때부터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marvelous, fabulous, ridiculous, enormous….”
벽 너머에서 누나가 중얼중얼 영단어를 외우는 소리가 꽤 선명하게 들려왔고, 방 안에 있어도 엄마가 무슨 요리를 준비하시는지 냄새만 맡고도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시력이 조금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때부터였을 터였다. 준석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준석은 그때까진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준석이 자신의 변화를 인지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오늘.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일들 때문이었다.
더운 여름날, 체육 시간 내내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 위해 뛰어다녔음에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숨도 별로 차지 않았다.
“아. 이제 날씨 진짜 덥네. 아직 에어컨 안 틀어주나?”
“반장! 에어컨 좀 틀면 안 돼?”
남들이 다 느끼는 초여름날 더위도 분명 체감할 순 있었지만, 그것이 괴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냥 컨디션이 좋은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술 시간인 지금 일어난 일은 달랐다.
“어?”
미술 과제를 하던 도중, 실수로 조각칼을 우르르 떨어트릴 뻔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 조각칼들을 모두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잡아낸 것이다.
그것도, 조각칼에 상처도 입지 않고 모두 자연스럽게.
준석은 자신의 손을 책상 위로 올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던 것치고 온몸에 남은 상처가 너무 없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크 카이저가 데려간 치료소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능력이 좋아서일 거라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외상을 좋은 병원에 찾아가서 회복계열 초능력을 통해 회복을 받는다고 쳐도, 몸이 피로하거나 근육통이 남는 등의 후유증까지 제거할 순 없었다.
일반적으로 초능력을 통해 회복을 촉진 시킨 후에는 며칠 동안 움직임을 자제하고 회복에 전념하는 등의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자신은 그다음 날부터 아무 무리 없이, 심지어 자신의 몸에서 더 기운이 많이 솟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아마 초능력이 개화했을 터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준석은 꽤 오래전부터 히어로를 꿈꿨었다.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었더라면 어떤 식으로 히어로 활동을 할지 계획을 짜보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준석에게 히어로의 세계는 이제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살짝 맛봤던 히어로의 세계는 훨씬 더 무섭고 무거운 세계였다.
“야. 괜찮냐? 손 다친 거 아냐?”
자신이 살짝 지른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앞에서 나무판에 무슨 그림인지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무언가를 새기고 있던 강림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준석은 반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어? 아니. 살짝 다쳤는데 피는 안 났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당분간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준석이 각성, 생각보다 훨씬 빠르네.
원작에서의 박준석은 원래 사고에 휘말리고, 그 사고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각성하게 된다.
시기로 치면 앞으로 최소한 일 년은 더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사건이 일어나 버렸다.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고 난 시점에서도 준석이에게 큰 위험이 생겼었는데, 더 어린 지금은 훨씬 위험하다.
앞으로 며칠 동안 준석이를 조금 더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사건들이 모두 제멋대로 아무 때나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일 터였다. 원작에서의 스타라이트는 천천히 작은 사건부터 딛고 올라서는 히어로. 히어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병원 폭탄 테러를 막아내고 이름값을 날린 나와는 달랐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 설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활동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빌런들은 더욱더 날뛰기 시작했고, 내 활약을 보고 히어로 활동을 쉽게 보고 도전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활동했어야 했는데….
[“마스터. 그건 마스터가 스타라이트보다 훨씬 매력 있는 히어로이기 때문이에요. 매력적인 히어로에겐 언제나 사람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위로하려고 하지 마. 이렇게 내 자신에게 위기감을 주지 않으면 난 또 큰 실수를 해버릴지도 모른단 말야.
[“하지만 진짜인걸요. 마스터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나는 제인의 주책을 무시하고 일단은 미술 시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서 미술 시간은 예전부터 애증의 시간이었다. 내가 노력했던 것에 비해 결과가 항상 좋지 않았거든.
미술 시간에 내가 제출한 숙제는 점수가 반타작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 내가 그린 그림이 어떤 걸 그렸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나는 정말 미술을 잘하고 싶은데, 내 손은 주인의 의도를 따라주지 않았다.
솔직히 미술 시간이나 음악 시간에 점수 매기는 거 잘못된 거 아니야? 나는 예술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와. 이거 크툴루 맞지?”
뭐? 크툴루?
나는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 옆에 앉아 집중하고 있던 소연이가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진짜 책에서 나오는 크툴루 같아, 강림아. 진짜 잘했다.”
두두둥!
크툴루? 그… 문어 괴물 말하는 거야?
“아하하하하하! 크툴루래! 크툴루! 아하하하하!”
내 앞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유진이 빵 터져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의 내 미술 작품들을 알고 있는 도유진은 내가 그린 게 크툴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어? 크툴루 아니야? 그럼 문어?”
“아하하하하! 문어래, 문어! 진짜 문어같이 생겼어. 하하하하!”
“문어가 아니라 나무인데….”
“아하하하하! 나무래! 나무! 이게 나무래. 아하하하하!”
내 나무가… 문어 괴물처럼 보이다니… 역시 나는 미술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어….
[“마스터. 사고를 좀 다른 방향으로 해보는 게 어떨까요? 제목을 나무를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문어를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응? 그런 방법이…?
그날 나는, 처음으로 미술 점수에서 90점을 맞았다.
* * *
그날 저녁, 준석은 하교하며 PC방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얼마 전 학기 초까진 알바 누나가 예쁘다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PC방이었는데, 요즘은 통 들르지를 못했다.
학교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이 생기며 친구들이 모두 금방 어른이 된 탓이었다. 같은 반 친구가 슈퍼 빌런이 되어버리기도 했고, 현장 학습에 나갔다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늦게 어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PC방 앞을 지나던 바로 그때,
“꺄아아악! 왜 이러세요! 하지 마세요!”
“조용히 안 해? 죽고 싶어?”
준석은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손을 잡혀 끌려가고 있는 PC방 알바 누나의 모습을.
아마 자신의 감각이 예전과 비슷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수준의 거리였지만, 각성된 능력으로 인해 감각이 발달한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보이고, 똑똑히 들렸다.
준석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평소 그렇게 사람이 없는 길목이 아니었는데도 주변엔 자신을 제외한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자신의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준석은 당황해서 일단 알바 누나가 잡혀간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알바 누나가 골목길 안쪽의 불이 꺼진 오래된 건물 안쪽으로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PC방 누나를 끌고 가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지는 명확했다. 준석은 112에 전화해 목격한 장면과 위치를 신고했다.
경찰은 10분 안에 도착할 테니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봐 달라고 했다.
10분. 짧은 시간이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경찰이 곧 올 테고, 분명 범인은 잡힐 것이다.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흑흑흑.”
감각이 발달한 지금은, 건물 안에 잡혀간 누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10분만 기다린다면 경찰이 도착할 테고 분명 범인은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PC방 누나가 겪을 상처는 평생 낫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준석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수집했던 히어로들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자신이 존경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히어로들.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범인을 잡고 싶은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말.
지금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범인은 분명 잡힐 테지만,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마치 운명처럼, 준석의 눈앞에 자신이 마스크를 버렸던 쓰레기통이 있었다. 그 쓰레기통엔 이제 마스크는 없었지만, 검은 비닐봉투가 하나 있었다. 검은 비닐봉투에 구멍을 뚫고 준석은 그것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바로 그날, 천산시에는 새로운 히어로가 하나 생겼다.
* * *
weeeoooo-weeeoooo-weeeeoooo-
경찰들이 건물 안에 쓰러져 있는 범인을 잡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지켜보던 건물 옥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어 언제 들어서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준석이 생각보다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바람에 들어설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사건을 해결하고 골목길을 뛰어 도망치고 있는 준석을 보았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거봐요, 마스터. 마스터가 바꾼 세상이 꼭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건 아니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