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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98화 (98/236)

제98화

휴식

<히어로 다크 카이저는 대체 어디로?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히어로의 짝퉁들….>

와아아~

바깥에서 먼저 끝난 옆 반 친구들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밑에서 스마트폰으로 신문 기사를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라 화면을 껐다.

보통 이럴 땐 제인이 알아서 홀로그램으로 중요 기사 스크랩해서 띄워줬는데… 없어지니까 또 그립네.

제인이 없어진 지 약 일주일. 나는 그동안 다크 카이저로서의 활동을 거의 관두고 헬 카이저로서만 활동하고 있는 상태였다.

함께 일하는 히어로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알리지 않았다.

바뀐 컨셉이 다크 카이저랑 거의 다를 바 없어 창피한 것도 물론 이유 중 하나지만, 이렇게 된 김에 새로운 컨셉의 슈트를 하나 만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들키게 될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빌런들에게 혼선을 주기도 유리할 테니까.

거기에,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오며 많은 이야기가 변경되었다. 원작에서는 히어로들끼리 전투를 하거나 싸우게 되는 상황도 많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명인 척 할 수 있다는 것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다.

복도에 난 창문으로 빼꼼, 소연이의 얼굴이 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우리 반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쌤~ 저희는 집에 안 가요?”

“빨리 보내주세요.”

“어허. 종이 울려야 가지.”

“너무해요~.”

우리 반 여자애들이 애교를 부려봤지만, 담임선생님껜 통하지 않았다.

평소엔 그런 거 없이 잘 보내주시던 분인데, 혹시 나이 든 다른 선생님한테 잔소리라도 좀 들었나?

♩♬♪

“오늘 모의고사 보느라 다들 수고했고, 슬슬 기말고사 코앞이다. 잠깐 눈 깜짝하면 기말고사 다가오는 거 순식간이야. 주말이라고 다들 퍼져서 놀지만 말고. 알았지?”

“네~ 선생님~.”

“자, 그래. 가자.”

“와~.”

우르르.

“PC방 갈 사람!”

담임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몸을 일으켜 소리 지르는 박준석.

“성현이랑 다른 팀 시켜주면 간다. 진짜 요즘 성현이 X나 못해~.”

“야, 넌 무조건 나랑 반대 팀으로 가라. 뒤졌다, 진짜.”

“오케이. 일단 성현이랑 힘찬이 가는 거고.”

친구들을 모으며 신바람이 나 있는 듯한 준석이의 표정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히어로 일 제대로 시작하고 나니까 게임 할 맛 떨어지던데… 얜 왜 히어로 하기 전이랑 후가 다른 게 없냐?

“야. 사람 숫자 한 명 부족한데?”

“더 없어?”

“야, 강림아. 너도 갈래?”

“아니. 요즘 롤 별로 재미가 없어서… 너네끼리 가.”

【“그렇지. 영웅은 전자 놀이 따위에 시간을 소비할 이유가 없지. 잘 생각했다.”】

으악. 벨제뷔트! 적당히 해!

나는 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벨제뷔트의 잔소리에 진저리쳤다.

이 세계에 빨려 들어왔을 초반의 제인보다 훨씬 더 잔소리가 심하다.

“오. 진짜? 나도! 나도 갈래!”

“도유진. 넌 빠져.”

“아 왜~ 나도 끼워주라. 야~.”

“그래. 유진이도 같이 가자.”

저 멀리서 소연이와 수아, 도유진 셋이 모여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쟤네는 또 쟤네 나름대로 어디엔가 갈 생각인가 보다.

끼려면 저길 껴서 놀아야지. 남자 새끼들이랑 PC방 들락날락해서 득 될 게 하나도 없지….

【“아주 불건전한 사유로군. 조금 더 어른스러워져라, 나강림.”】

이젠 내 이름도 부르는구나.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인생 훈수질이긴 하지만.

“게임이 재미가 없어졌다고? 걍 니가 못해져서 그런 거 아니고?”

【“어허….”】

하지만 그런 내게 박준석이 이니시를 걸었다. 박준석의 말과 동시에 들려오는 벨제뷔트의 탄식 소리.

“아니다.”

한 번은 참는다.

“아니긴. 요즘 맨날 빼는 거 보니까 실력 떨어졌나 본데. 나강림 폼 다 죽었다.”

하. 박준석 니가 오늘 선을 넘는구나.

【“전자 놀이 따위에 시간 쓰지 말라는 소리는 취소다. 나강림! 가서 본때를 보여줘라.”】

“야, 박준석. 너 탑으로 따라와.”

*    *    *

탑티스트박준석 : xcd

탑티스트박준석 : ㅌㅊㅇ

- 패배 -

【“…졌군.”】

졌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아, 나강림 뭐야. 진짜 폼 떨어져서 진 거 맞네.”

“이거 진짜 탑차인데.”

“야, 나강림. 나~ 옛날에 정글에서 니 뒤 닦아주던 박준석이 아니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알겠냐?”

“야 X발. 정글 개입이 너무 많이 들어왔잖아. 한판 더해. 이번엔 양쪽 정글 다 오지 마라.”

【“그… 그래! 한 번은 질 수 있다. 이번에 압도적으로 이기면 돼!”】

·

탑티스트박준석 : ㅌㅊㅇ

탑티스트박준석 : ㅌㅊㅇ

- 패배 -

“이… 이럴 수가….”

또 졌다.

이번에도 압도적으로.

이번엔 정글 개입이 없었는데도 압도적으로 발렸다.

【“또…! 또 지다니…! 이건 수치다…! 앞으로 황제라는 수식어는 빼도록 해라. 너는 그냥 어둠의 조무래기다. 나강림!”】

“하하하! 나강림! 넌 이제 나한테 안 돼!”

그리고 나는, 두 번째 패배하고 나서야 패배의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준석, 이 녀석… 초능력을 각성하고 난 후 전체적인 신체 능력도 향상한 모양이다. 반응 속도랑 콤보가 들어가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르다.

게임 하면서까지 초능력의 영향이 들어간다니….

【“크으으윽… 초능력 차이였나… 분하군….”】

“야~ 난 오늘 그만한다.”

그때, 박준석이 어쩐 일로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쩐지 조금 멀리를 바라보는 느낌.

“야! 한 판 더 해!”

“야, 나강림. 넌 지금 나랑 탑에 올라올 실력이 안 돼. 실력을 더 키우고 다시 도전하도록.”

후다닥. 서둘러서 가방을 안고 자리를 떠나는 박준석이 바라보고 있던 것은, 이제 막 교대를 하고 퇴근하고 있는 PC방 알바였다.

어쩐지. 초능력을 가지고도 계속해서 PC방에 다니더라니.

지난번에 자기가 구해내고 나서부터 조금 신경이 쓰였나 보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경험상 PC방 알바가 좋아해서 엔딩이 좋은 경우가 없었는데….

힘내라… 박준석!

*    *    *

【“아까 거기서는 맞서 싸울 게 아니라 스킬을 피해서 한 타임 쉬고 들어갔어야 했다. 스킬을 피할 수 없다면 끌어들여서 포탑의 도움을 유도했어야….”】

아아악! 제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신 게임 안 한다!

머릿속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악마의 게임 훈수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친구들과 헤어진 이후부터 평소에 히어로 활동을 하기 위해 나오는 큰 길가로 향하는 동안 벨제뷔트는 내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잘댔다.

진짜 예전엔 입이 간지러워서 말 못 하고 어떻게 참고 살았대 대체?

그냥 내가 게임을 접고 만다. 앞으로 안 할 테니까 제발 게임 이야기 좀 그만하자.

갑자기 열이 받아서 겜 하느라 두 시간이나 낭비해 버렸네.

제인! 아. 제인은 없지.

벨제뷔트! 지금 일어난 사건, 정리해서 홀로그램으로 띄워줘.

【“없다.”】

어? 뭐가 없는데? 천산시에서 해결할 사건이 없을 리가 없는데.

【“지금 네가 평소보다 6시간은 일찍 학교가 끝났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모양이군. 아무리 천산시라고 해도 대낮부터 막아내야 할 강력 사건이 매일같이 일어나진 않는다. 최소한 오늘은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군.”】

확실해? 너는 경찰 시스템에 접속 못 하는 거 아니야?

【“슈트 기능 중에 가장 먼저 회복된 기능이 경찰 시스템을 엿보는 기능과 알람 시스템이었다. 가장 먼저 회복돼야 할 우선순위로 지정되어 있는 것 같더군. 제인이 실수한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렇네. 제인은 그런 걸로 실수 안 하지.

평소보다 학교도 일찍 끝나고, 막상 같이 놀자던 친구들과도 일찍 헤어지고 나니 평소보다 시간 여유가 남아버린 모양이다.

도유진이랑 수아, 소연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나는 폰을 들어 올려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보았다.

<나: 얘들아. 너네 뭐 해?>

<나: 얘들아?? 나 빼고 뭐 해??>

잠깐 기다려 봤지만 아무도 답장 해 오지 않았다.

전화나 해볼까 하다, 막상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자애들 노는 곳에 끼어보려고 한다는 게 약간 구차하게 느껴져 그냥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밤까지 아무런 사건이 없을 것 같진 않고… 그럼 집에 가서 시험공부나 하다 올까?

나는 혼자 우리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마! 나 이거 사줘!”

“얘는... 집에 그런 장난감 아직 많잖아.”

“그럼 나 옆에 있는 로봇 사주면 안 돼?”

“안된다니까. 대신 저기 가서 아이스크림 사줄게. 자 가자~”

“그래서 어제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나한테 뭐라고 했게?”

“왜 말을 하다 말아? 뭐라고 했는데?”

“아~ 배고프다~ 잠깐 저기 들려서 뭐라도 좀 먹고 갈래?”

“니가 쏘면 간다.”

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천산시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대화가 들려왔다.

산들바람이 살짝 불어 내 머리카락을 잠깐 들어 올렸다 내렸다.

왜인지 지금 있는 길이 익숙하게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탈옥한 닥터 보기맨이 난동을 부린 적 있는 길이었다.

페이퍼 백의 아내가 차에 치일 뻔한 것을 막아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 당시 완전히 반파되었던 가게와 건물도, 뽑혀서 휘둘러졌던 신호등도. 전부 제자리를 찾아 가만히 서 있다.

그렇게 많은 사건이 있었던 이 길은, 지금은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평화롭네.

이 세계로 떨어져서 처음으로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뭔가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도, 뻐근하게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기분.

【“이 거리의 평화를 지킨 것에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군.”】

뭐? 보람을 느끼긴. 그냥 이모도 구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했을 뿐인걸. 나는 무언가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계를 구한 게 아니잖아.

【“변명이 너무 길군. 그냥 조금 더 뿌듯해해도 좋다. 이 평화에는, 당연히 너의 지분이 있으니까.”】

변명은 무슨.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그래. 조금은 뿌듯하긴 하네.

*    *    *

“어. 강림이한테서 카톡 왔다.”

“어어. 한소연 움직이지 마. 가만히 있어.”

우리랑 안 놀고 PC방에 게임 하러 갔는데 뭐가 그렇게 기쁘니?

강수아는 도유진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한소연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수아가 보기에 소연이는 강림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강림이는 도유진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치면,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사실상 연적이나 다름없는데….

“자! 봐라, 한소연! 네 피부톤엔 이런 색이 어울린다니까?”

“우와! 유진이 진짜 잘한다. 난 내가 이런 색이 어울리는지도 몰랐네.”

“그래. 예전에 쓰던 거 다 갖다 버리자. 아니다. 같이 쇼핑 가자. 내가 다 골라줄게.”

“어? 정말? 좋아!”

갈수록 둘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둘 사이가 좋아지면, 나중에 서로 상처받을지도 모르는데….

“수아야! 너도 같이 가서 좀 봐주라!”

“야. 쟨 화장 거의 안 하고 다니잖아. 아무것도 모를걸?”

슬쩍 본 소연의 표정은 너무 즐거워 보였다.

에휴. 어쩔 수 없지.

강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친구의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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