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데빌-보이(3)
“아저씨! PC방에 왔으면 게임을 해야지. 어? 여기저기 다 때려 부수고 그러면 쓰나?”
박준석은 PC방에서 난동을 부리는 남자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또 슈트를 입은 자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 미치겠네.
박준석은 지금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박준석은 비닐봉투를 쓰고 PC방 알바를 구해준 이후로 단 한 번도 히어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건 다크 카이저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치도록 무섭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했던 두 번의 히어로 활동. 그 두 번의 활동을 하는 동안 박준석은 두 번 연속으로 머리가 깨졌고, 두 번 연속으로 칼을 맞았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능력이 자가 회복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긴 했지만, 회복이 빨라진다고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회복이 빠른 만큼 회복하는 동안 몸에 느껴지는 고통은 더 심했다.
그래서 PC방 알바를 위해 했던 그 히어로 활동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었는데….
“흑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신이 구해준 PC방 알바, 강우리가 울며 말하던 그 감사의 인사 덕분에, 박준석은 묘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 여자만큼은, 계속 구해주고 싶다.
그날 박준석은 집에 들어가 세 가지 물건을 샀다.
조금이라도 더 튼튼한 가죽으로 된 바이크 슈트와 얼굴을 완전히 가리며 머리도 보호할 수 있는 바이크 헬멧.
그리고 부러질 일 없는 금속 배트.
PC방 화장실의 환풍구 근처에 숨겨두고, 혹시 또 PC방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위험에 처한 강우리를 위해 박준석은 처음으로 준비해 두었던 슈트를 입었다.
그런데….
깡! 깡!
박준석은 들고 있는 금속 배트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어어이~ 아저씨~ 내 말이 안 들려? 나 무시하는 거야? 정말 안 되겠네. 나랑 한판 뜨자.”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자신의 입이, 자신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컨셉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 세상엔 <규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약소한 초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뮤턴트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이 규약은 사람마다 다르게 만들어진다.
규약은 특정한 어떤 옷가지일 수도 있고, 혹은 능력을 사용할 때 꼭 해야 하는 버릇일 수도 있다. 혹은 히어로의 컨셉이나, 정체 그 자체라거나.
그리고 명백하게, 박준석의 규약은 컨셉이었다. 실은 원작에서도 쟨 컨셉충이었거든.
박준석… 내심 동네 멋진 일진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 만난 도지훈이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고.
사실 원작에서의 컨셉은 힐링 팩터를 이용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야만 전사였다.
그때보단 지금이 낫긴 하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은 좀 위험하다.
기왕 히어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일단 완성된 형태의 슈트와 컨셉을 만들어두는 게 좋으니까.
이 세계에서 강력한 수준의 초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결국, 심리적인 약속 <규약>이 중요해진다.
규약은 그 초능력자의 약점이고, 그 규약을 방해한다면 히어로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초능력자들은,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많은 연막을 만들어놓는다.
직접 자신의 컨셉을 정해 연기하고, 슈트를 만들어 입고 정체를 숨긴다.
그러면 어떤 것이 그 초능력자의 규약인지 알기 힘들 테니까.
그래서 보통 히어로에게 한번 정해진 컨셉, 슈트, 버릇 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씩 제외하다 보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 버리고 말 테니까.
비슷한 능력을 휘두르며 다녀도 헬 카이저가 다크 카이저와 동일 인물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이런 이유도 존재한다.
지금 준석이의 복장은 컨셉에 비해 너무 노멀하다. 대충 눈치 빠른 사람들은 준석이의 규약을 알아채고 말 거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라도 붙여서 디자인을 맡겨봐야겠는데.
퍼억-
박준석이 남자의 손에 얻어맞고 벽 너머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쾅!
벽에 부딪히며 들려오는 큰소리!
“어이, 아저씨. 그 정도밖에 못 해? 정말 하나도 안 아픈데.”
비틀비틀하며 일어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금방 자세를 정돈하는 박준석.
쉭!
박준석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진다.
던져져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동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떨어진곳에서 나타나는 준석이의 모습.
쉭! 쉭! 깡!
순간이동으로 순식간에 따라붙은 준석이가 다시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보다 몸놀림도 빨라졌고, 공격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제대로 된 규약을 각성한 탓에 전체적인 육체 능력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리고 위험할 때마다 사용하는, 순간이동. 매번 동전을 던져대는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동전이 떨어진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아, 부럽다. 나도 저런 초능력 가지고 싶다.
【“너에겐 초능력보다 더 강한 지옥의 흑염이 있다. 헬 카이저.”】
네. 네. 그러시겠죠.
마침 주변의 시선은 모두 박준석과 아저씨에게로 모여 있는 상황. 바로 이때가 변신하기 최적화인 타이밍이다.
나는 몸을 숙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변신을 시도했다.
제인이 깨어났다면 그냥 전기 끄고 어둠 속에서 변신하면 그만인데, 제인이 없으니까 여러모로 힘들구만.
화르륵!
온몸을 순식간에 덮을 듯 타오르는 지옥의 흑염. 그리고 그 흑염 안에서 나오는 헬 카이저의 슈트.
곧바로 흑염의 힘을 이용해 책상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옥에서, 나 강림.”
“엉? 넌 또 뭐야? 여긴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저리 꺼져!”
깡깡깡!
배트를 빠르게 휘두르며 나를 향해 말하는 준석이의 표정은 사실, 가관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고양이 같은 표정.
…차라리 구해 달라고 말해라.
깡깡깡깡!
빠른 속도로 연속으로 휘두르곤 있지만, 들고 있는 야구 배트는 사실 재질이 히어로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나름대로 부러지지 않게 하겠다고 가져온 물건이겠지만, 저거 생각보다 금방 망가질걸.
뚝-
생각하기 무섭게 부러져 버리는 야구 배트.
일해보겠다고 나대는 건 좋지만, 아직 생각도, 장비도, 조사마저도 너무 미숙하다.
“큭… 악!”
야구 배트가 부러지고 나서부턴 눈에 띄게 밀리기 시작하는 박준석.
마음 같아선 블래스터 모드의 화력으로 순식간에 제압해 버리고 싶지만, 아직도 이 주변엔 휩쓸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흑염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지만, 불에 타는 듯한 고통까지 막아줄 수 있진 않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흑염을 뿌리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화르륵!
배트가 부러져 당황하고 있는 준석이와 남자의 사이를 흑염이 벽을 만들어 갈라낸다.
그와 동시에, 래피드 데빌 모드로 변경.
화륵!
순간적으로 슈트에 흐르는 흑염의 힘.
순식간에 상대에게 총알처럼 쏘아져 나가는 나의 몸.
순간적으로 주변이 길게 늘어났다 돌아온다.
벨제뷔트가 래피드 데빌 모드라고 이름 붙인 스피드 모드는, 기존에 쓰던 스피드 스타 모드보다 체감적으로 훨씬 빨랐다.
벨제뷔트가 말하길, 내가 흑염의 힘의 새로운 활용법을 깨달은 거라고 했나? 최소한 스피드 모드에 있어선 궁합이 좋았다.
【“스피드 모드가 아니라 래피드 모드다.”】
칭얼대는 악마를 무시한 채, 한 번 더 흑염을 이용해 스피드 모드의 가속을 이끌어냈다.
화륵!
슈트 안으로 순식간에 활력이 밀려 들어온다. 곧바로 활력을 에너지로 이용해 손발을 움직인다.
팟-파파팟!
순식간에 박혀 들어가는 4연속 공격.
“으… 컥억!”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이제는 완전히 도마뱀처럼 변해 버린 남자.
그래도 준석이와의 전투로 인해 몸에 타격이 꽤 누적된 듯, 비틀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공격으로 끝을 본다.
화륵.
체인을 쥔 오른팔에 흑염이 맺힌다.
노리는 것은, 놈이 나를 공격하려고 할 때.
가속화된 몸 때문에 놈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피잉-
뻗어나간 주먹이 순식간에 남자의 턱에 틀어박힌다.
남자보다 늦게 휘둘렀지만, 놈보다 더 빠르게 도달했다.
붕 떠서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는 도마뱀 남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름하야, 흑염권(黑炎拳).”】
그런 오글거리는 이름 붙이지 말아 줄래?
나는 뒤를 돌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박준석을 보았다.
주저앉아 있는 준석은 조금 멍해 보였다.
규약마저 개방하고, 능력을 완전히 활용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원작에선 결국은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다크 스코프 아저씨를 통해 증명한 바 있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은, 결국 그 능력을 활용하는 일을 하고야 만다. 그게 어떤 방향이든 간에.
그렇다면 나는 이 초보 히어로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어쩔 수 없지. 다크 카이저에게 다크 스코프라는 사이드 킥이 있다면, 헬 카이저에게도 사이드 킥이 하나쯤 있어서 나쁠 건 없을지도.
나는 박준석에게서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너. 내 사이드 킥이 되어라.”
될 대로 되라.
weeeooooo-weeeeeoooo-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 * *
“크아아악! 크아악!”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병원으로 실려 가는 남자를 보며 나는 몸을 돌렸다.
PC방 내부는 엉망이 되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야, 나강림! 너 대체 어디 있었냐? 이럴 때 갑자기 사라져서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어. 그게…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오려고 나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바람에 밀려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지. 넌 좀 괜찮아?”
【“나강림… 연기가 정말 어색하군. 변명도 궁색하고… 웬만해선 연기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게 낫겠다.”】
…익숙해지겠지. 다행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태생부터 내추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도 카운터 쪽에 있어서 금방 대피하긴 했는데… 요즘 진짜 일진 왜 이러냐? 가는 데마다 사건이 터지는 것 같네.”
“어? 그럼 지훈이 형은? 지훈이형은 좀 괜찮아?”
아까 슬쩍 봤을 땐 거의 몸에 이상이 없어 보이긴 했는데….
“어? 어. 괜찮지. 그래도 나름 히어로 일하던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상처는 하나도 없드라 야. 그런데….”
“그런데?”
“아니. 아니다. 난 일단 혹시 모르니까 오빠 데리고 병원 가볼 테니까, 넌 그냥 집에 가라. 소희 이모 걱정하실라.”
얘는 뭘 해도 불길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같이 병원까진 가보고 싶기도 한데….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준석이를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너도 몸조심하고. 내일 보자.”
이따가 한번 확인해 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