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09화 (109/236)

제109화

도지훈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멍하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손만 들어 올려도 느껴지는 전신의 통증.

이거 아무래도 갈비뼈가 나간 거 같은데.

내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 똑같이 파이트 자세를 취하는 도지훈.

하지만 나는 그 파이트 자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이랑 다르다. 미묘하게 균형이 어긋나 있다. 내가 타격을 입은 만큼, 분명 도지훈도 충분한 타격을 입었다.

죽을 만큼 아프고, 죽을 만큼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도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주먹을 휘둘러 왔다.

래피드 데빌 모드도 켜지 않았지만, 이제는 도지훈의 주먹 경로를 예측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도지훈이 뻗어낸 주먹을 피한다.

왼손 다음은 오른손.

뻗어지는 왼손이 회수됨과 동시에 뻗어지는 오른손은 이번엔 내 턱을 노리고 있다.

턱을 살짝 든 채 뒤로 슬쩍 움직인다.

퍼억-

예측했다고 생각했지만, 힘이 빠져도 도지훈은 도지훈이었다. 뻗어낸 주먹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와 내 턱을 강타한다.

순간 귀가 멍하고 정신이 흩어질 뻔했지만, 여기서 쓰러질 거였다면 애초에 다시 일어서지도 않았다.

나는 무너지려던 몸의 균형을 다시 바로 잡았다.

재차 내게 뻗어지는 보디 블로를 막기 위해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며 왼손으론 카운터를 준비한다.

퍼-억!

“크헉-”

분명히 가드에 성공했는데도 숨이 턱 막힐 만큼 강력한 위력의 주먹. 아머 모드가 풀려버린 탓에 주먹의 위력이 그대로 뼛속 깊이 스며든다.

하지만 아까까지 단단했던 도지훈의 피부도 물러져 있는 상태다.

내가 뻗어낸 왼 주먹에 맺혀 있던 흑염을 도지훈의 피부가 머금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흩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격을 주고 있는 걸 거다.

지금은, 내 남은 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나는 도지훈과 함께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    *    *

이제 기억났다.

도지훈이 언젠가 내게 주먹을 휘두르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어떤 놈에게 엄마 없는 새끼라는 소리를 들었던 때였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던 때이기도 했다.

분노에 차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찾아와, 도지훈은 내게 처음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법을 알려줬었다.

“다리는 어깨너비로. 양팔은 11자로. 그래 그렇게. 오른 주먹을 휘두를 때는 등근육을 쓴다기보단, 허리를 이용해서 휘두른다는 느낌으로.”

“…자. 내가 가르쳐준 대로 나한테 한번 휘둘러봐.”

*    *    *

화륵.

흑염의 힘이 내 오른손에 맺힌다.

【“나강림! 더 이상은 위험하다! 네 몸은 지금 흑염의 힘을 버틸 만큼 강하지 못해!”】

벨제뷔트가 경고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흑염의 힘을 안 쓰더라도 나는 이번 공격이 끝나면 쓰러지고 말 거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에 내 모든 것을 담는다.

가장 흑염이 많이 맺힐 수 있는 체인을 오른 주먹으로 꽉 쥐었다.

쉬익-

또다시 도지훈이 나를 향해 스텝을 밟아 들어온다.

내 오른손에 맺혀 있던 흑염의 기운이, 점차 내 온몸으로 옮겨붙는 것이 느껴진다.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마치 래피드 데빌 모드를 극한으로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느려진 세상 속에서 도지훈의 주먹이 서서히 내게로 뻗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번 한 방. 한 방으로 승부를 가린다.

도지훈의 주먹보다 더 빠르게.

내가 노리는 것은, 완전한 크로스 카운터.

다리는 어깨너비로, 양팔은 11자로, 등보다는 허리를 이용해서.

느려진 세상 속에서 도지훈의 얼굴을 향해-

주-

주먹-

주먹을-

주먹을 뻗-

주먹을 뻗는-

주먹을 뻗는다!

“으아아아아아아!”

퍼억!

*    *    *

“커헉!”

나는 눈을 부릅뜨며 쓰러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도지훈과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얽혀있다.

방금 전까지 도지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대체 여긴….

내가 쓰러져있던 곳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격투기를 하는 링 위였다.

정신없이 기억을 더듬다 보니 도지훈의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는 장소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전투 도중에 도지훈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 앞에는 어느새 챔피언 벨트를 차고 링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도지훈이 있었다.

링 너머의 세계에는 도지훈의 일생이 담겨있었다.

태어났을 때, 학교에 다닐 때, 처음으로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선수로서 링 위에서 싸움을 하고 있던 때.

하지만 도지훈이 바라보고 있는 링 너머의 세계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도지훈의 정신을 좀먹는 무언가가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의 도지훈의 이야기다.

“깨어났구나. 나강림.”

나는 도지훈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두 발로 서 있는 도지훈은, 아까까지 나와 싸우던 도지훈과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강림 너 많이 컸다? 생각보다 훨씬 잘 싸우던데?”

“그건 형이 늙어서 그래. 나이 먹으면 은퇴하셔야죠, 형님.”

“어쭈? 이 새끼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이겨놓고 잘난 척은. 야, 한 판 더 뜰래?”

“그래. 나중에 몸 건강해지면 다시 찾아와라. 한 번 더 뜨게.”

의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얼굴이 생각보다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야. 남자 새끼가 그런 표정 짓지 마라. 꼴불견이야.”

나는 도지훈의 말에 이를 악물고 흐르려던 눈물을 참았다.

“고맙다 강림아. 네가 나를 위해 많이 노력해준 거 알고 있다. 여기서 다 보고 있었거든.”

“알면 정신 차려. 형 부모님이랑 도유진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그래. 정신 차려야지. 그런데 정신 차리려면 내가 싸워야 할 것들이 있는 모양이야.”

도지훈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기억의 저편을 가리켰다.

도지훈의 몸속에 들어온 약물. 그것이 도지훈의 기억까지 좀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여기서, 저기 몰려오는 저놈들을 막아낼 거다. 그 뒤를 지켜야 하거든.”

나는 도지훈의 말에 링 뒤를 바라보았다.

도지훈이 히어로를 꿈꾸던 때의 기억, 히어로로서의 훈련을 하던 때의 기억, 여자 친구인 오은별을 만나던 때의 기억, 그리고 히어로로서 사람들을 구출하던 기억.

링 뒤에는 이 세계에서의 도지훈의 기억이 있었다.

“강림아. 너무 미안해하지 마라. 너라고 우리가 이렇게 될 거 알았던 거 아니잖냐. 네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것도, 우리가 너와 함께 이 세계에 오게 된 것도 모두 다 네 탓이 아니야.”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지훈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만이 나이었다. 도지훈도 또렷하게 그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에 우리가 왜 왔는지 형은 알고 있는 거야?”

도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나도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이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곤 도지훈은 뒤를 돌아 이 세계에서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도지훈은 내게 말했다.

“하지만 강림아. 난 이 세계에서 다시 한번 인생을 살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도지훈의 태클. 예상도 하지 못한 공격이라 나는 속절없이 당하고야 말았다.

나를 들어 올린 도지훈은 링 밑으로 나를 집어 던졌다.

“너도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을 후회 없이 살길 바란다.”

*    *    *

짤그락-

귓가에 들리는 짤그락 거리는 체인 소리에 도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왠지 모르게 몸이 무겁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도지훈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짤그락-

한 번 더 들려온 체인 소리에 도지훈은 자신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

자신의 앞에는 검붉은 슈트를 입은 히어로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히어로를 보고 나서야 도지훈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다.

강무영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기억해냈고, 알 수 없을 만큼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던 자신은 강무영을 고통스럽게 죽일 계획을 세웠었다.

강무영의 집까지 찾아가 강무영을 끌고 나왔고, 강무영이 자신을 배신했던 그 건물로 찾아와 강무영을 거꾸로 매달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나타난 이 남자가 자신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장면까지.

모든 기억을 떠올린 도지훈은 다시 한번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외쳤다.

“왜! 왜 이 사람을 구하는 거지? 이 남자는 죽어 마땅할 정도의 악인이다!”

그런 도지훈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히어로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남자를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니다. 당신의 인생을 지키고 싶었던 거지.”

히어로는 도지훈을 향해 핸드폰을 하나 보여줬다.

험하게 다룬 느낌이 나는 핸드폰이었다. 본체 여기저기에는 상처가 잔뜩 나 있고, 액정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핸드폰은 아직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히어로가 보여준 핸드폰의 메인 화면에는, 도지훈과 오은별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배경 화면으로 설정되어있었다.

그 화면을 보고 나서야 도지훈은 오은별과 함께 했던, 그리고 히어로로서 활동했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메인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히어로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당신이 후회할 일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말하는 히어로는, 지훈의 눈에는 왜인지 외롭게 느껴졌다.

*    *    *

- 하준님. 대체 다크 카이저는 어디로 갔나요?

- 하준님은 다크 카이저의 행방에 대해서 모르시나요?

- 다크 카이저는 언제 돌아오나요?

하준은 요즘 미칠 지경이었다.

다시 한번 맞붙은 레드 래빗과 다크 카이저의 전투 장면을 담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레드 래빗과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다크 카이저는 천산시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크 카이저가 사라지자마자 활개 치는 수많은 빌런들.

빌런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사라진 다크 카이저의 행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전부 하준의 채널로 몰려들었다. 하준이 기존에 다크 카이저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다닌 탓이다.

안 그래도 다크 카이저가 사라져서 계획에 차질이 생겨 어긋났는데, 사라진 다크 카이저에 대한 원망까지 자기가 받아야만 한다.

“어 하준아. 네가 좀 봐야 할 게 있는데.”

“어? 뭐? 다크 카이저가 돌아오기라도 했어?”

“어? 아니… 근데 영상감이 될 정도의 제보는 하나 얻었거든? 채널 유지 시키는 정도는 되겠는데.”

성민은 이런 일로 호들갑 떨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충분히 괜찮은 소식이 있으니까 자신을 부르는 것이리라.

“어 메일이냐? 누가 보낸건데?”

“어 어디보자… 이름이…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네.”

하준은 성민이 말한 메일을 찾아 열어보았다.

메일 안에는 최근 있었던 브릴리언트 팀의 리더 밴디저 강무영이 저지른 여러 가지 부정에 대한 정보가 가득 담겨있었다.

“…좋네. 성민아. 이걸로 일단 영상 하나 구성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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