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거짓말쟁이
남자답게, 기세 좋게, 멋지게 경한그룹과의 일전을 선언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너네 뭐야? 왜 여기 와서 깽판이야?”
“더러운 흑사자회 놈들아. 우리 구역을 뺏어놓고 발 뻗고 잘 수 있을 줄 알았냐?”
“망령당 놈들이군! 망령당놈들의 습격이다!”
역시,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게 가만히 있질 않는다.
한번 대소탕 작전을 통해 세력이 많이 줄었던 잿빛 망토단은 밀키웨이와 퀘이사의 노력으로 거의 소탕이 완료된 듯하다.
기본적으로 잿빛 망토단의 슈페리어 우월주의는 전염력이 좋은 사상이라 또 언제 어떻게 살아날지 모르는 범죄 집단이긴 하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멀쩡한 집이 오랫동안 비어있으면 도둑이 꼬이기 마련이다.
잿빛 망토단의 세력이 감소하자 잿빛 망토단이 남기고 떠난 구역을 두고 천산시 내의 빌런 집단들끼리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다.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싶지만, 빌런 집단끼리의 전투가 길어지면 그만큼 주변 치안이 안 좋아지고 다른 범죄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나저러나 히어로들 입장에선 빌런 집단들끼리의 전투도 막아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막아야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zie-youu!
한참 전투 중, 흑사자회의 조무래기 하나가 광선을 맞고 쓰러진다.
“드론! 전투 드론이다! 흑사자회 놈들이 전투 드론을 가지고 있다!”
“이 새끼들 이거 진짜 둘 중 하나 죽을 때까지 해보자는 거지? 어?”
망령당 놈들이 어떻게 얻었는지 플럭스 공학회의 물건들을 확보해서 전투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플럭스 공학회 물건들을 이용한 범죄가 많이 늘었긴 했었다.
자신의 물건과 기술에 애착이 강한 플럭스 공학회 놈들이 물건을 팔아넘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최근 큰 자금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천산시에서 가장 돈이 많은 빌런 집단인 흑사자회가 사용하고 있는 거겠지.
원작의 설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반쯤 돌아버린 플럭스 공학회라도 팔아넘기는 물건들에 지키는 선은 존재한다.
무기나 도구들을 이용한 범죄가 생기더라도, 기본적으로 사회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막을 수 있게 구성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을 이용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플럭스 공학회뿐이어야 하기 때문에.
【“대체 그 큰 피해의 기준이 어떤 정도지? 지난번에 만난 외골격 슈트들도 전부 은행에 큰 피해를 줬다만.”】
자기들 나름의 내부 기준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거까지 알고 있으면 히어로가 아니라 플럭스 공학회 소속 빌런이죠.
그래도 그 외골격 슈트가 광선총으로 무장한 전투 드론보다는 훨씬 덜 위험한 거 같기도 하고.
광선총 전투 드론 같은 걸 흑사자회한테 팔아넘길 정도면….
【“혹시 플럭스 공학회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지도 모르겠군.”】
이번 일이 끝나면 다프네에 가서 관련 정보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는데.
이대로 있다간 저 광선총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 죽어 나가게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보니, 드론들을 제외하면 수준이 전부 높지는 않은 모양이다.
전투 드론들만을 우선적으로 섬멸하면, 나머지 인원들은 손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강림! 그걸 해라!”】
네. 네. 알겠습니다.
제인 오기 전까지만 맞춰드리겠습니다.
나는 흑염을 몸에 두르며 전투 상황 한 가운데로 뛰어 내렸다.
떨어지며 내 몸에 맺혀 있던 흑염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내 화려한 등장에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몰린다.
“지옥에서, 나 강림.”
“이건 뭐야?”
“히어로다!”
“헬 카이저야!”
내 등장에 당황한듯 전투 드론들이 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zie-! zie-!
zie-! zie-! zie-!
zie-! zie-!
빔 공격은 쉴드로 막을 때 리스크가 크다. 최대한 회피 위주로 전투 상황을 구성하는 편이 낫다.
래피드 데빌 모드를 사용하면 쉽게 회피할 수 있겠지만, 허공에 떠 있는 전투 드론들을 공격하기 위해선 블래스트 모드를 사용해야만 한다.
나는 일단 블래스트 모드로 전환하며 온몸에 흑염을 둘렀다.
도지훈과의 일전에서 얻은 흑염의 새로운 사용 방법이었다.
흑염이 흐르는 내 신체 부위는 일정 시간 가속화된다. 이 능력을 온몸에 사용한다면, 가속화 능력을 극한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세상이 느리게 보이게 된다.
내게 날아오는 광선들이 느리게 보인다. 나는 광선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블래스트를 연속으로 쏘아보냈다.
블래스터에서 쏘아진 흑염이 전투 드론 네 개를 정확하게 맞춰 터트린다.
허공에서 폭발해 흩어지는 드론 파편들.
나는 몸을 돌려 남은 조무래기들을 바라보았다.
너넨 이제 다 뒤졌다.
* * *
“플럭스 공학회에서 내분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어요.”
“내분?”
“네. 자금난으로 시작된 논쟁이 내전으로 발전한 모양이에요. 그 틈을 타 내부의 물건들이 바깥으로 빼돌려지고 있는 모양이구요.”
원작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들이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
아무래도 당분간 플럭스 공학회를 조금 주목해야 할 듯싶었다.
“아~ 어쩐지. 안 그래도 일 많아서 허리 휘는데, 자꾸 이상한 물건 들고 다니는 애들이 많아지더라니. 받는 돈이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위험도는 너무 올랐어.”
최근 다프네에 거의 서식하다시피 하는 슈팅 노바가 밀키 웨이 옆에서 껌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슈팅 노바는 최근 금연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자기 여동생이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한다나 뭐라나.
【“으음. 여기 올 때마다 저 여자가 있는 게 가장 거슬리는군. 앞으론 오기 전에 저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을 하고 오는 게 어떤가?”】
벨제뷔트는 헬 카이저의 컨셉을 볼때마다 깜찍하다고 비웃어대는 슈팅 노바를 싫어한다.
헬-호출기가 없잖아. 헬-호출기. 너가 헬-호출기 만들어주면 미리 확인할 수 있겠지.
【“…….”】
제인이 없어지니까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 기왕 온김에 다른 소식이 더 있는지도 물어보는 게 좋겠다.
“뭐. 또 다른 소식은 없나?”
“지금 천산시 내부 상황이 안 좋잖아요? 원래부터 주시하던 거대 집단들 외엔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요.”
“알겠네.”
당분간은 빌런 집단간의 전투만 주시하고 있다가 처리하면 되겠네. 겸사겸사 플럭스 공학회의 물건들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아보고.
“깜깜이랑 깜깜이 아저씨는 요즘 뭐한데? 그 아저씨도 못 본 지 좀 된 거 같은데.”
옆에서 풍선껌을 불어재끼던 슈팅 노바가 갑작스럽게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소식을 물었다.
“글쎄요. 다크 카이저는 아직도 등장했다는 소식이 없고… 다크 스코프는 최근에도 가끔 혼자 히어로 활동을 하긴 하는 모양인데… 예전에 비하면 활동 빈도도 줄고, 시간도 줄은 모양이에요.”
“그래? 그 아저씨 슬슬 그만 둘지도 모르겠네.”
헬 카이저로 활동하는 기간이 길어지며 다크 스코프 아저씨에게 따로 언질을 줄까 고민했었지만, 나는 결국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내심 나는 이제 슬슬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활동을 그만두길 바라고 있었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레드 래빗에게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에 더불어 아저씨의 가족이 아저씨의 히어로 활동에 대해서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족에게 정체를 들킨 히어로는 스스로도, 또 주변에게도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활동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보단, 일상생활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정보는 이 정도면 됐다.
나는 다프네를 떠나기 위해 창문을 열어… 어?
“자꾸 창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창문 잠가놨어요. 앞으론 문으로 왔다 갔다 하세요.”
* * *
“강림이 안녕! 수아도 안녕!”
언제나와 같은 등굣길.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소연이를 보며 나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강림아. 시험 공부 많이 했어?”
“어? 아니 별로 못했어.”
“나강림. 또 거짓말.”
내가 시험 공부를 못했다고 말하자마자 실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강수아.
뭐? 거짓말?
“무… 무슨 거짓말?”
“맨날 공부 안 했다고 하지만, 시험 때마다 피곤해하잖아.”
“맞아. 맨날 공부 안 했다면서 중간고사 때도 그렇고 모의고사 때도 그렇고 항상 피곤해 죽으려고 하잖아.”
그렇게 따지면 할 말 없긴 하네. 난 공부하느라 피곤한 게 아닌데… 뭐라고 말도 못 하겠고, 쩝.
“그래그래.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안 나와서 창피해서 그랬지. 그러는 너희는 시험 공부 좀 했고?”
“나는 항상 열심히는 하고 있지. 성적이 안 올라서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소연이는 전교 10등 안쪽에 들어가 있는 모범생이다.
“시험 공부는 평소에 학교에서 하는 거야. 밤새면서 공부하면 몸 상해.”
강수아도 소연이 정도는 아니지만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어갈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편이다.
이거 좀 억울하네. 쟤도 나랑 똑같이 밤마다 슈트 입고 밤거리 쏘다니는데.
타고난 머리의 차이인가. 부럽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얘들아~~ 같이 가~”
벨제뷔트가 말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한 사람.
“어? 유진이 왔다! 유진아! 어서와!”
【“드디어 왔구나. 도유진.”】
달려오는 도유진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어주는 소연이.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나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는 벨제뷔트.
이런 때라면 제인이 없어서 다행일지도….
“도유진. 내가 찝어주는 부분 제대로 공부했어?”
“어! 당연하지. 지난번에 네 덕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지난번 도유진의 고백을 나는 끝까지 듣지 않고 거절했다. 하지만 도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래. 알겠다. 그래도 앞으로 어색해지진 말고 평소처럼, 친구로 지내자.”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정말 평소처럼, 아니 어쩌면 평소보다 더 소탈하게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글쎄다. 매번 지각하던 애가 너랑 등교 시간을 맞추고, 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데?”】
야 등교 시간은 공부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 거고, 내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건 얘네가 좋은 애들이라 그런 거지.
도유진이 옛날에 어울려 다니던 황채경의 친구들은 황채경이 빌런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로 도유진과는 단 한마디도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황채경이 그렇게 된 걸 소연이의 탓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소연이랑 어울리는 도유진을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과 멀어진 도유진을 소연이와 수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로 받아들였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는지 홱!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도유진.
“야, 나강림. 뭘 봐?”
“너 본 거 아닌데?”
도유진은 내게 혀를 낼름 내밀었다.
“메롱이다. 이 거짓말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