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태양 체육관(2)
“지나야. 상대는 일반인에 네추럴이다. 너무 힘쓰지 말고 살살 해줘.”
“네~ 알겠어요~ 관장님!”
팡팡!
양손에 글러브만 찬 채 두 주먹을 두드려 보는 지나 그리고,
헤드기어와 방호구까지 찬 채 지나의 앞에 서 있는 나.
【“나강림! 상대는 여리하게 생긴 여자아이다. 살살 봐줘 가면서 하도록 해라.”】
“이래 봬도 내가 프로 히어로 연습생이거든? 이미 계약도 끝나서 성인이 되자마자 프로 히어로로 활동할 거야. 그러니까 여자라고 살살 해줄 필요는 없어.”
지나가 마치 벨제뷔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받아친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개구리야. 내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상대는 육체 계열 슈페리어에 프로 지망생이야. 살살 봐주면서 할 여력은 없어.
“3분 동안 가볍게 탐색하는 느낌으로. 상대가 프로 히어로 지망이긴 하지만 쫄지 말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봐. 네가 어떤 성향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넵.”
내게 두 손을 뻗어오는 지나에게 나도 똑같이 두 손을 뻗어 툭 부딪힌다.
톡.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 지나를 보며 나도 두 손을 올려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호오.”
내 파이팅 자세를 보며 감탄사를 살짝 내뱉는 관장님.
내 눈앞에서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나는 쉽게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쫄지말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보라고 했으니까.
나는 평소 히어로 활동을 하던 때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쉭-!
역시나 지나는 내가 뻗은 주먹을 스텝을 한번 밟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버렸다.
툭-
그와 동시에 내 허리춤을 툭 하고 건드리고 빠지는 지나.
“한 대.”
그러면서 씨익 눈웃음을 흘린다.
쟤 지금 나 도발하는 거야?
【“어허…. 저 간악한 것 보게.”】
후우.
나는 크게 호흡하고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역시나 스텝 한 번만으로 내 공격을 피해낸다. 이번에는 재차 공격해 들어가며 틈을 줄여본다.
스텝을 밟아 살짝 비스듬하게 선 상태로 고개만을 젖혀 내 주먹을 피해낸다.
그리고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지나의 주먹.
나는 날아오는 주먹을 막아내기 위해 손을 올렸지만,
툭-
반응이 느렸다. 이미 내 뺨을 툭 건들고 빠지는 지나의 글러브.
“두 대.”
툭!
“세 대!”
툭!
“네 대!”
“다섯 대!”
잠시 오간 공방에서 지나는 내가 휘두르는 모든 주먹을 피하고 내 어깨나 뺨, 허벅지 등을 툭툭 건드려댔다.
이거 당하다 보니까 오기가 좀 생기네.
【“나강림! 평소 슈트를 입고 활동하던 때처럼 생각하고 몸을 움직여선 안 된다! 지금 너는 슈트를 입지 않은 상태야!”】
내가 하는 모양이 답답했는지 훈수를 두기 시작하는 벨제뷔트.
하지만 좋은 훈수였다.
싸움 같은 건 슈트를 입고 있을 때나 하던 일들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슈트를 입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원래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보자.
지나는 아직도 눈웃음을 흘리며 나를 지켜보고만 있다. 지금까지처럼 내가 먼저 공격해 들어오길 기다리는 모양.
그렇다면 일단 원하는 대로 해준다.
다시 한번 내뻗는 내 주먹.
스텝으로 회피하는 지나.
이번에는 일부러 한 주먹 만에 빈틈을 남겨둔다.
노리는 타이밍은 지나의 양어깨가 움직임을 보이는 바로 그때.
지나의 오른쪽 어깨가 움직인다. 어깨를 보며 뻗어질 주먹의 경로를 예측한다. 주먹이 노리는 곳은 내 이마.
이마를 노리는 거라면, 고개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피해낼 수 있다. 예측한 대로 고개를 살짝 비틀어 움직인다.
내 이마를 건들지 못하고 내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지나의 주먹.
【“피해냈다!”】
“헛?”
지나가 당황할 때가 기회. 곧바로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다리는 어깨너비로, 등보다는 허리를 이용해서.
몸이 기억하는 대로 주먹을 뻗는다.
처음과는 다른 소리를 내며 뻗어지는 내 주먹.
지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속도로 뻗어지는 내 공격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가드를 들어 올려 내 주먹을 막아낸다.
서로 손에 차고 있는 글러브 때문인지 생각보다 커다란 소리가 체육관을 울린다.
【“잘했다 나강림! 한 방 먹여줬구나!”】
벨제뷔트가 재잘거리는 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으로 슈트를 벗은 채 하는 전투이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머리에 열이 오른 모양이다.
머릿속에서 도지훈이 내게 썼던 기술들이 떠오른다.
나는 주먹이 막힘과 동시에 몸을 숙여 지나에게 태클을 걸어 들어갔다.
어? 근데 이거 복싱인데 이런 기술 사용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순간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엇!”
쿵!
쓰러진 지나의 몸 위로 내 몸이 겹쳐진다. 지나의 머리에서 나는 샴푸 냄새가 내 코를 간질인다.
“너 이건 반칙인 거 알지?”
지나가 날 보며 특유의 눈웃음을 짓는다.
【“맘에 들지 않는 여자아이로군.”】
“그만! 그만하면 됐다!”
관장님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눈이 일류군.”
내가 숨을 고르길 기다린 후에 나를 향한 평가하기 시작하는 관장님.
“몸이 안 따라줘서 그런 거지 지나의 공격을 눈이 모두 따라가긴 하더군. 마치 신체 계열 슈페리어처럼…. 확실히 네추럴이라고 했느냐?”
유일하게 눈만 슈페리어라고 하던 제인의 말이 떠올랐다.
와, 이 할배 괜히 체육관 하는 게 아니네.
“네? 네…. 네추럴 맞아요.”
당연하지만 여기선 알아도 모른 척해야겠지.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익숙해. 타고났다기보단… 배운 느낌인데…. 이 전에 다른 도장을 다닌 적이 있느냐?”
“아… 아니요. 그런데 평소에 관심이 있긴 했어요.”
“눈이 좋아서 금방 따라 배우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만하면 깡도 있고, 배우려는 열정도 있고, 거기에 투지도 있더구나. 너라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이경아!”
“네!”
어느새 관장님 옆에 붙어 있던 빼어난 외모의 30대쯤 돼 보이는 여성이 대답했다.
“등록 도와주고, 간단한 안내도 해주 거라.”
“네.”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를 향해 입을 여는 이경이라는 여성.
“따라오세요. 등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 *
“일단 여기, 이 캐비넷 쓰시면 되구요. 대부분의 트레이닝은 저랑 하게 되실 거고, 가끔씩 관장님이 와서 봐주시기도 할 거고. 원하시는 시간대는 있으시구요?”
“네? 네. 일단은 낮에 하고 싶은데요.”
“네 그럼 2시쯤에 오셔서 트레이닝 받고 가시면 될 거 같아요. 주 3회는 제가 트레이닝 봐 드릴 거고, 그 외 시간에 나와서 운동하는 건 자율이구요. 운동복은 저희가 지원해드리구요. 등록비는 여기로 보내시면 되구요. 질문 있으실까요?”
“네. 그럼, 저기….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 제가 여기 사범이에요. 손이경 사범. 손사범님 하고 부르시면 돼요.”
아 사범님이셨구나.
그제야 팔짱 끼고 있는 손이경의 팔 근육이 눈에 보인다.
옷을 펑퍼짐한 걸 입고 계셔서 몰랐는데 엄청나게 단련하신 느낌이네.
“옷 갈아입고 나오시면 바로 트레이닝 시작할게요.”
후우. 드디어 시작이구만.
* * *
“네. 오늘 트레이닝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헉-. 헉-.”
드디어 끝났다고?
나는 끝났다는 말에 뒤로 쓰러졌다.
이 체육관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첫 트레이닝만에 깨닫고 말았다.
첫날이라 살살 해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바람이었을 뿐. 가차 없이 진행된 두 시간여의 트레이닝은 내가 거의 초주검이 될 때까지 진행되었다.
이게 네추럴을 위한 트레이닝이라고? 그럼 슈페리어들은 뭘 얼마나 하고 있는 거야?
“어? 트레이닝이 끝나긴 했는데 스트레칭으로 근육 풀어주셔야 해서 지금 누우면 안 되세요.”
“네? 헉- 스… 스트레칭이요? 헉-.”
일어나기도 힘든데 스트레칭까지 더 해야 한다고?
“네. 지금 그대로 누우시면 내일 일어나지도 못하실 거예요. 살고 싶으면 스트레칭을 하셔야 해요.”
손이경의 말에 등허리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던 초반에 매일 같이 근육통으로 고생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진짜 죽을 뻔했었는데, 이번에는 슈트도 없이 시작한 트레이닝이다.
당장 오늘 밤에도, 또 내일도 히어로 활동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근육통이 심하면 결국 고생하는 건 내가 될 거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손이경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네 고생하셨어요. 샤워실에서 샤워하시고, 옷 갈아입고 집에 가시면 돼요.”
드디어 진짜 끝났다.
“드디어 끝났네. 안녕?”
내가 뒤로 넘어가길 기다렸다는 듯 쓰러진 내 위로 얼굴을 내미는 여자아이.
조금 전에 나랑 스파링했던 지나라는 여자애였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시작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꼬맹이로군.”】
“허억… 허억….”
대답할 기력도 없어 멍하니 보고 있자 톡 내 옆에 주저앉는 지나.
“야 너 생각보다 잘 버티더라. 세트 수가 줄긴 했어도 그거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이경 언니가 시켰던 트레이닝인데. 이경 언니도 네가 그렇게까지 버틸 줄 몰랐을걸?”
“헉… 헉… 그렇구나.”
뭐? 이게 신체계열 슈페리어가 하던 트레이닝이라고? 어쩐지 X나 힘들더라.
“그… 왜 반말이야?”
“아~ 미안. 나 너 알고 있었거든. 천산고 나강림. 맞지? 너도 고등학교 1학년이구? 나도 고1. 동갑이야.”
뭐? 나를 어떻게 알지?
나는 천천히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좀 오래 아프던 때가 있어서 학교에 못 가구 집에만 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너랑 네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어 보였는지… 본 건 한두 번이었지만 그 대화가 계속 생각이 나더라. 나는 학교가 너무 가고 싶었거든.”
그럼 나랑 수아, 소연이가 등교할 때 본 적이 있다는 뜻이네. 어쩐지 좀 창피한데.
“너도 와봐서 알겠지만 여긴 사람도 별로 없구,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나보다 훨씬 오빠 언니들이라 재미가 별로 없었어. 그래서 말인데, 나랑 친구 하자.”
싱긋. 눈웃음 지으며 내게 손을 뻗어온다.
그래. 뭐, 같은 체육관 다니는 친구 정도면야.
나는 지나가 뻗어온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막상 보다 보니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같은 동네 사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봤으려나?
“어. 그래. 알겠어. 근데 좀 불공평한데. 넌 나를 아는데 난 너를 아예 모르거든? 적어도 이름 정도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래?”
“아. 그렇겠네. 미안. 난 아는데 넌 나를 모르겠구나. 좋아. 나도 내 소개를 할게. 난 히어로 지망생 설지나야. 나이는 너랑 똑같이 17살이구, 이래 봬도 정식으로 계약서도 쓰고 데뷔를 기다리고 있는 히어로 연습생이거든? 그러니까 친해져서 너한테도 나쁠 건 없을걸? 앞으로 잘 부탁해.”
‘아.’
싱긋. 또다시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며 나는 이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내가 히어로들 인생이 불행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 구해준 적 있던 사람.
【“그 여자의 동생이었군. 어쩐지 마음에 안 들더라니.”】
슈팅 노바, 설지원의 동생, 설 지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