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태양 체육관(3)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해야만 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슈페리어일수록, 더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미즈 컴뱃은 잿빛 망토단의 그 같은 이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신보다 약한 주제에 자신을 깔보던 중대장의 머리를 부숴버리고 탈영한 이후로 항상 고민하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에.
이 세상은 불합리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힘을 가진 자는 힘이 없는 자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대체 왜?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자를 위해 양보하고 굽혀야만 한단 말인가?
탈영 이후 밤거리로 숨어든 미즈 컴뱃에게 있어서 잿빛 망토단의 이러한 슬로건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강할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미즈 컴뱃은 잿빛 망토단에 투신했고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 덕분인지 충분히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히어로들이라는 족속들 때문에 잿빛 망토단이 몰락하기 전까진.
히어로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잿빛 망토단의 본부는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많은 수의 단원들이 히어로들의 추격으로 인해 수감되고 말았고, 거기에는 클록 헤드인 라이트닝 스파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잿빛 망토단은 무너졌었다.
새로운 리더, 그렘린 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진.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최첨단 기계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온다.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주변.
<“아아. 제군들.”>
기계 슈트 안에서의 목소리가 마치 스피커를 키운 것처럼 크게 공간을 울린다.
미즈 컴뱃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최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는 전 잿빛 망토단의 단원들이 보였다. 아니, 이젠 강철 기사단이라고 해야 옳겠지.
모두 그렘린 님이 단원들을 위해 직접 공수해 온 최첨단 장비들이었다.
“우리는 오늘, 작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주변의 단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강력한 슈페리어들이 모여있는 잿빛 망토단에 뛰어난 기술력의 장비들까지 보급되었다.
그로 인해 생긴 잿빛 망토단의 전투력 상승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최근 있었던 전투들로 잿빛 망토단의 옛 구역들은 물론이고, 망령당과 흑사자회의 알짜배기 구역들마저 뺏어왔다.
그런데 작은 승리라니?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은 썩었다. 천산시의 모든 이들은 전부 경한 그룹의 눈치나 보며 그들이 던져준 찌꺼기나 핥아먹는 개들일 뿐이다. 망령당, 흑사자회 전부 좁은 골목길에 숨어서 찌꺼기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개들일 뿐이다.”
술렁이던 주변이 다시 고요해진다.
“그리고 우리보다 나약한 자들은 경한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선망을 받으며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 우리의 목표는 달라야 한다. 이 도시의 썩어빠진 부분을 도려내고 새 살을 채워야 할 것이다. 오늘의 승리는, 그 썩어빠진 부분을 도려내는 작은 승리였을 뿐이다.”
주변 단원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 * *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이 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 이 주일 동안의 내 삶은, 학교에 다니던 1학기에 비하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오전에 집에서 쉬며 공부, 점심에 체육관에서 트레이닝, 저녁엔 잠깐 이모와 저녁을 먹은 후, 밤에는 슈트를 입고 활동한다.
중간중간 사건사고를 해결하러 가긴 했어도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바빴던 학기에 비하면 정말 편안한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그런 편안함에 취해선 안 된다는 걸, 나는 요 몇 개월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지금 사대희, 아니 경한 그룹이라는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울 힘을 기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 세계에선 언제 어디서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적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 순간 치열해져야만 한다.
퍼억-!
콰당!
제대로 맞았네.
보호대를 잔뜩 차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 제대로 얻어맞으면 이렇게 꽈당 쓰러질 때가 있다.
그나마 이 체육관에 있는 장비들이 모두 고급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엇? 강림아! 괜찮아?”
설지나가 내게 도도도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쟨 발걸음이 꼭 고양이 같네. 뭐랄까, 뛸 때도 소리 안 내고 천천히 뛰려고 하는 듯한 느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눈앞에 내밀어지는 하얀 손.
나는 설지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워… 머리가 핑 도네.
“미안해. 그렇게까지 제대로 들어갈 줄 몰랐어.”
“어. 아니야. 스파링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잠깐 쉬어야겠다 싶어서 나는 차고 있던 보호대를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동안, 내 옆에 슬그머니 앉는 설지나.
내가 구해낸 목숨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원작에서의 설지나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설지나가 남긴 유언으로 인해 설지원은 진짜 히어로가 된다.
나는 한때, 그런 설지나를 구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설지나가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순간,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내가 한 선택이 자랑스러워졌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강림. 또 여자를 꾀어냈군…. 네 학교 친구들이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야? 여자를 꾀다니. 그냥 같은 체육관을 다니는 친구일 뿐이잖아.
【“하지만, 저 여자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만…. 저 저 저 요망한 눈웃음을 봐라! 저게 어떻게 그냥 친구로 생각하는 눈웃음이란 말이냐?”】
제인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대체 왜 여자애마다 다 나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거 착각이야. 대부분 여자는 나한테 관심 없다고! 그건 지난 세계에서의 23년의 인생이 알려준단 말이야! 쟨 그냥 친구가 필요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왜 네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동정이었는질 이제야 제대로 알겠군.”】
“강림이 너 참 대단하구나? 그 트레이닝을 매일같이 다 소화하면서 스파링까지 부탁하는 네추럴은 네가 처음이야. 대부분 3일 차에서 도망간 다음에 안 돌아오거든.”
마침, 지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신경을 건드려대는 벨제뷔트와 대화하는 대신, 나는 지나에게 일주일 동안 생긴 의문들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나 외에 일반인 클래스는 없는 거야? 보통 그런 거 있잖아.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라던가.”
“응. 이 체육관에는 그런 사람들은 안 받아.”
나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기본 트레이닝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헬스 도구들은 물론이고, 슈페리어들의 훈련을 위한 특수 기구들, 심지어는 링도 네 군데나 존재한다.
그렇게 많은 시설에 비해 내가 일주일간 이곳에 나오며 본 사람의 숫자는, 관장님과 사범님을 포함해 채 열 명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비가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럼…. 여기 유지비는 어떻게 버시는 거래? 이 정도 인원 가지고 그게 가능해?”
“응. 여기 관장님. 엄청 부자시거든. 퇴직하고 남은 모은 돈이 많으셔서 취미로 운영하시는 거래. 앗, 이거 비밀이랬는데. 너도 나한테 못 들은 거다? 알았지?”
씨익. 눈웃음치며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다 대는 설지나.
【“어허…. 간악하고 요망한 여자아이로구나.”】
벨제뷔트 제발… 내 머릿속에서 자꾸 남 흉보는 것 좀 그만할 수 없어? 너 때문에 가끔 자괴감 드는 거 알아?
내 말에 일단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벨제뷔트. 삐친 기색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말할 건 해야 했다.
최근 설씨 자매만 보면 흉을 못 봐서 안달이니 원.
그래도 잠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좀 쉬고 나니까 낫네.
나는 다시 보호대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응? 그걸 왜 다시… 너 설마?”
“응. 한 번만 더 부탁할게.”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 * *
“언니. 이젠 지켜볼 수 있는 선을 넘어섰어.”
“그래. 나도 동감이야.”
밀키웨이는 퀘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천산시 밤거리의 판도가 뒤집힌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것처럼 한쪽이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잿빛 망토단의 소탕 이후, 밀키웨이와 퀘이사가 대부분의 잔당마저 정리하고 다니기 시작했지만, 일부 간부들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천산시의 밤거리에서 일어나는 전투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이끄는 강철 기사단이 만들어내고 있다.
잿빛 망토단의 옛 구역들을 다시 돌려받는 선에서 그쳤다면 밤거리의 균형을 위해 오히려 가만히 놔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엔 조금 더 욕심을 내는 모양이다.
어느 한쪽이 욕심을 내 구역 싸움을 걸어가기 시작한다면 균형이 무너지고, 균형이 무너지면 애꿎은 피해자들이 생긴다.
“항상 선 넘는 놈들은 전부 잿빛 망토단이라니까.”
퀘이사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투덜댔다.
흑사자회와 망령당은 사익으로 움직인다. 사익으로 움직이는 빌런 집단은 결국 사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선 넘는 짓을 하면 히어로에게서든, 경한 그룹에게서든 결국 응징을 당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잿빛 망토단은 이념으로 움직인다.
그런 놈들일수록 이념에 취해 큰 사고를 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천산시의 크고 작은 선 넘는 사건들 대부분은 잿빛 망토단에게서 일어나곤 했다.
지난번의 브루트 인신매매 사건처럼.
“더 큰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있겠어.”
퀘이사의 말에 밀키웨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 그래도 최근 우리를 도와줄 만한 사람들이 많이 생기긴 했으니까. 멤버 한번 뽑아볼게.”
“자 내가 한번 예상해볼게. 언니, 그리고 나, 페이퍼 백, 슈팅 노바 그리고….”
“다크 스코프. 얼마 전에 여기 오셨어. 요즘 밤거리가 심상치 않다고.”
“그래? 그럼… 혹시….”
밀키웨이는 퀘이사의 반응에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퀘이사가 다크 카이저와 몇 가지 사건을 함께 한 이후로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크 카이저가 사라진 이후에도 가끔 행방을 찾곤 했다.
밀키웨이는 퀘이사의 그런 관심이 달가웠다. 기본적으로 붙임성이 떨어지는 성격 탓에 밀키웨이 외의 히어로들과 친분을 쌓지 못했으니까.
관심이 생긴 사람이 다크 카이저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컨셉이 이상하긴 해도 좋은 사람인 거 같으니까.’
“안타깝게도 아직도 다크 카이저는 연락이 없네. 호출기도 잠잠하고.”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람….”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퀘이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나, 언니, 슈팅 노바, 페이퍼 백, 다크 스코프. 이렇게 다섯 명인가? 지난번엔 여기에 다크 카이저가 있었는데도 고전했었는데… 이 인원만으로 가능할까?”
“그러고 보니 최근엔 네가 시외로 돌다 보니까 그 사람들을 못 만났구나?”
“그 사람들?”
“응. 있어. 너도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밀키웨이는 그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 퀘이사가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뭐야? 뭔데? 왜 그렇게 웃어 불안하게?”
밀키웨이는 투덜대는 퀘이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헬 카이저와 연결된 호출기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