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여행(3)
내가 기억하는 원작의 내용에 따르면, 연백산에는 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절이 하나 존재한다.
이 절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연백산 근처에 있는 강력한 악령들을 봉인해둔 동굴을 하나 지키고 있다.
원작에서는 그 동굴을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스님이 빌런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악령이 풀려나고 만다.
내가 이 연백산에 온 김에 해야하는 일은, 연백산 내부에서 그 절과 동굴을 찾아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나는 오늘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다행히도 여행을 온 첫날이라 그런지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친구들과 계곡에서 잠깐 물놀이를 하고, 고기를 구워 먹고, 아까 만났던 꼬맹이와 다시 한번 조금 놀아주기도 하고. 나도 간만에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계곡의 밤은 정말 순식간에 찾아왔다. 저녁 8시가 겨우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말았다.
지나치게 어두워진 주변 덕분에, 우리는 남은 저녁 시간을 방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공포물 마니아인 소연의 주도하에 우린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여 앉았다.
사실 나도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보다 더 무서워하는 듯한 수아의 표정을 보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소희이모. 강수아랑 나강림, 둘 중에 누가 먼저 비명 지르는지 내기할까?”
“내가 아직 수아는 잘 모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강림이가 수아보단 잘 참지 않을까?”
【“나강림이 먼저 소녀 비명을 지른다는 것에 헬 카이저의 저작권을 걸지.”】
거기에 나를 두고 내기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또한 참기 힘들기도 했고.
“…자세히 보니까…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흰 맨발이…!”
“꺄악!”
“아하하하! 나강림이 먼저 비명 질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강림. 겁쟁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번갈아 가며 자신이 아는 무서운 이야기를 번갈아 하던 때,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우리 이모가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이런 분위기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10년도 전의 이야기니까. 이모가 겪었던 이야기를 오늘 한번 해볼게.”
“와~ 실화다!”
원래부터 공포물을 좋아하는 소연이와 원래부터 활발한 성격인 탓에 분위기를 잘 타는 도유진은 신나 했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겨우겨우 이야기를 버틴 수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린 건 너도 마찬가지다. 나강림.”】
그나저나, 이모가 해주는 무서운 이야기는 나도 거의 처음인데.
“내가 스무살,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란다.”
우리 이모가 스무살 때면, 내가 다섯 살때 쯤이군. 이 때의 이야기면 내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때의 이야기이다.
“마침 내가 막 들어갔을 때가 신축 기숙사가 거의 완공되기 직전이었어. 완공 시기가 1학기 여름방학이 다되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된 옛날 기숙사 건물에서 살아야만 했단다. 내가 들어간 기숙사는 방 2개짜리 4인실이었는데….”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이모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이모와 같은 1학년 단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 같은 방에 2학년과 3학년의 이름이 같이 적혀 있었음에도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은 입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모와 이모의 룸메이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좋아했고, 서로 각자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은 입실하고 나서 일주일 후 부터였다. 새벽마다 갑자기 화장실의 샤워기가 제 마음대로 물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이모와 이모의 룸메이트는 샤워기 소리에 잠이 깨 물을 잠그고 자야만 했고, 그것은 샤워기 수리를 몇 번이나 시도하고 나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은 이모가 주말 동안 집에 돌아왔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일어났다.
주말 동안 이모의 룸메이트가 말도 없이 짐을 싸고 방을 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불길함을 느낀 이모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고, 룸메이트가 선배에게서 들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은 그 화장실에서 새벽에 샤워기의 물을 틀어놓은 채 목을 매달고 자살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을.
“꺄아아아악!”
“아아악! 무서워!”
“진짜야? 이거 진짜예요? 소희이모?”
“응. 나도 그 방에 혼자서 살 자신이 없어서 그날로 방을 빼고 나왔는데, 내가 나온 이후론 다른 방에서도 자꾸 새벽에만 물이 틀어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더구나.”
“에이 뭐야. 그냥 수도 고장 아니에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땐 나도 정말 무서웠단다.”
【“악령일수도 있겠군.”】
뭐? 악령?
【“그래.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군. 수도 고장이라면 매번 새벽에만 물이 틀어지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겠나? 마침 새로운 건물을 만들고 있었다니 다행이지. 계속 거기서 사람이 살았다면 그 악령이 그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힘을 키웠을 테니까.”】
나는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벨제뷔트에게 궁금했던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이 악령들은 왜 만들어지는 거야?
【“보통은 강한 원한이 영혼을 바꾸는 거지. 죽기 전에 원통한 일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못 이룬 소망이 한이 되었다던가.”】
야, 근데 솔직히 이 세계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원한 없이 죽는 사람이 더 적을 거 같은데… 그럼 그 사람들 모두가 악령이 되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이 세상엔 악령이 수두룩했겠지. 보통은 정신적으로 강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 죽었을 때 악령이 되곤 한다. 너네 말로 하자면, 정신계열 슈페리어들. 그중에서도 아주 일부만이 악령이 되겠지.”】
그럼 그 악령들이 이 세계를 마구 돌아다니고 그러는 건가?
【“그렇진 않다. 일정 이상의 힘을 얻지 않으면 악령은 묶여있는 곳에서 빠져나가기 힘들거든. 자유로우면서 강력한 악령이 되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으면서, 또 거기에 더해 공포심을 줘야만 한다.”】
심연의 여왕이랑 비슷하네.
【“그래. 공포라는 건 인간이 가진 마이너스 감정 중에서 힘으로 바꾸기 가장 쉬운 감정이거든.”】
나는 벨제뷔트의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이번엔 소연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아줌마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이건 좀 옛날 이야기인데… 옛날 옛적에 억울하게 죽은 장수의 이야기인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라면 끓이려고 물 올려 놓았던 걸 깜빡 했네.”
갑작스럽게 이모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어머. 이 이야기는 내일 밤에 또 하도록 하자. 난 너희 이모 도우러 가봐야겠다. 괜찮아요?”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소연이 어머니가 자리를 뜨자, 흥이 다 깨져버렸다는 듯, 도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재밌어지려던 참인데… 갑자기 확 맥이 끊기네.”
“그러게. 그래도 난 재밌었어. 친구들이랑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 하는 거 내 꿈이었거든.”
“그럼 다음 이야기 누가 해볼래? 야 나강림. 너 무서운 이야기 아는 거 없냐?”
“난 아는 거 없다.”
“강수아. 너는?”
“내가 아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니?”
무서운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는 나와 강수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도유진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담력훈련이나 한번 해볼래?”
“뭐? 담력훈련?”
“어. 너희가 이야기가 끝나서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꼴을 못 보겠다. 아까 나랑 소연이가 오래된 폐가 하나 찾았거든. 가위 바위 보해서 진 사람이 거기까지 가서 사진 찍어 오기 하자. 어때? 별로 멀지도 않아. 금방 다녀올 수 있어.”
“됐거든? 밤에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위험하다.”
“그래. 도유진. 그건 너무 위험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절하는 나와 강수아.
이건 거기까지 가는 게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진짜로 이 어두운 산 속에서 다치면 어쩔지 모르겠어서 그런거지.
“나강림 쫄? 쫄? 강수아 쫄?”
도유진이 나를 마구마구 도발하려 들었지만, 이런 걸로 도발 될 내가 아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 그래. 하자. 담력 훈련.”
하지만, 내 옆의 강수아는 도발당해버린 모양이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벌떡 일어나는 강수아를 보며, 나는 입을 벌렸다.
* * *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다녀오기로 했다. 팀은 제비뽑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나랑 강수아가 한팀. 소연이랑 강림이가 한팀이네.”
도유진이 능글 맞은 표정으로 강수아와 팔짱을 낀다.
“강수아, 너 오늘 나한테 죽었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럼… 나랑 강림이가 한 팀이네.”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연이를 보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이 좋았다.
도유진은 함께 움직이면 나를 놀려먹느라 바쁠테고, 강수아는 나와 비슷한 쫄보라 함께 가봐야 의미가 없다.
【“드디어 스스로가 쫄보라는 사실을 인정했구나, 나 강림.”】
그리고 셋 중에 가장 든든한 사람은… 역시 아무래도 소연이 일 수밖에 없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아까 나랑 소연이가 발견한 폐가가 나오거든? 그 앞에 서서 둘이 같이 나오게 셀카를 찍어오는 거야. 알았지? 그럼 강림이랑 소연이 먼저 가.”
내 등을 우악스럽게 미는 도유진.
“야 나강림. 너 소연이한테 이상한 짓하면 나한테 죽는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소연이한테 그런 짓을 왜 해?
“아니 뭐라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할래?”
버럭 화내며 고개를 돌려 본 도유진의 표정에, 묘한 걱정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며. 금방 다녀오면 그만이지.”
나는 민망스러운 마음을 숨기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킨 플래시로 발 밑을 비추며 먼저 앞서 나갔다.
“나 강림! 소연이 챙겨서 가!”
소연과 도유진이 찾았던 작은 폐가까지 가는 길은 멀진 않았지만, 사방이 어두운 탓인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걷고 나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소연이도 여자아이긴 했던 모양이다. 막상 어두운 곳에 오니까 생각보다 겁이 많은 것처럼 내 등 뒤에 딱 달라붙은 채 긴장해서 왔으니까.
“도유진이 말한 곳이 바로 여기구나?”
“응… 맞아 여긴 거 같긴 한데….”
“같긴 한데?”
“…응. 아니야. 밤에 오니까 조금 다른 기분이 느껴져서.”
사실 폐가라고 하기보단, 사람이 살지 않고 비운, 조금 오래된 건물에 가까웠다.
한참 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생각보다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고 싶어졌다.
“셀카 찍어오라고 했으니까, 이리 좀 붙어볼래? 빨리 찍고 돌아가자.”
“어? 응.”
두리번 거리던 소연이, 사진을 찍는 내 등 뒤에 딱 붙었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동안에도, 소연의 눈은 불안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마치 나와는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