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25화 (125/236)

제125화

영원한 비밀은 없다(3)

이곳까지 찾아와서 기어코 영계와 이 세계의 통로를 열게 되는 빌런은, 망령당(亡靈堂)의 미닝리스다.

그저 천산시의 뒷골목에서 하루하루 마약을 하기 위해 살아가던 미닝리스는 어느 날, 마약을 하며 본 환상 속에서 예전에 사별했던 자신의 아내를 만난다.

환상 속에서 죽음과 삶의 공존을 경험한 미닝리스는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다.

마약을 과다복용한 탓에, 사실상 뇌사 상태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게 된 것이다.

미닝리스는 자신이 한번 죽었다 살아 돌아왔고, 자신이 다녀온 곳이 진짜 영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부터 미닝리스에게 이 세계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 되었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든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때부터 미닝리스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이곳까지 찾아와 영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 과정에서 여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머지않은 날, 이곳에 잠든 괴물들을 이 세상에 풀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겁니다.”

나는 내가 본 원작 만화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며 내가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 해주신 경고, 헛되이 듣지 않고 잘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아… 네.”

적당히 수긍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태도는 쌀쌀맞다. 더는 대화를 잇고 싶지 않아 그저 듣는 척하는 것이리라.

만약 그녀가 진정으로 대화를 하기 원했더라면, 이곳의 미래를 어떻게 아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확신하는지, 그걸 증명할 수 있는지 등을 물어봤을 것이다.

“정혜야. 내 의도를 모르는 것도 아닐 터인데, 뭐가 그렇게 마음이 급한 게냐?”

“율사님!”

어느새 우리의 옆엔 나이 든 스님이 뒷짐을 진 채 절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옆에 계셨지?

내 당황한 표정을 읽은 소연이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강림아. 혹시 너도 보이는 거야?”

“어? 그럼 혹시….”

“응. 저분이 우릴 여기까지 안내하신 스님이셔.”

우리가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천천히 걸어 닫힌 문 앞에 섰다.

“문을 열거라.”

“…….”

“어서!”

낡은 문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에는 회색 승복을 입은 비구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잠깐 들어와서 이야기라도 하고 가시게.”

사람 사는 흔적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절간 안쪽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이라면 응당 무언가를 먹고, 자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을 위한 무언가가 단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긴 사는 건가?

“소연아. 괜찮겠어?”

내 만류에도 싱긋 웃으며 먼저 낡은 절간 안으로 올라서는 소연.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나는 먼저 절간 안으로 들어선 소연이를 보며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소연이는 내가 지켜야 한다.

나는 절간 안으로 올라섰다.

“앉으시게.”

우리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저절로 닫히는 문.

노승이 빈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앞에 무엇이 보이시는가?”

나에게 있어서 그 벽은 완전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벽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소연이는 달랐던 모양이다.

“큰 구멍이 보여요.”

소연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노승.

“아까 전에 사용했던 쇠사슬을 내게 다시 한번만 보여줄 수 있겠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노승의 말에 나는 일단 체인을 만들어내 손에 쥐어 보였다.

내 체인을 한참 들여다본 노승이 크게 대소하며 입을 열었다.

“정혜야. 네 짐을 덜어줄 귀인들이 나타난 듯하다.”

“율사님! 안 됩니다!”

“이놈아. 슬슬 우리의 힘이 한계에 다다랐다. 방금 귀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대로 갔다간 영계의 힘이 악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둘 것이냐?”

“힘이 다다랐다니요. 전 아직 멀쩡합니다.”

“네 놈이 멀쩡하다면, 이 귀인들이 막아준 영계의 구멍은 어떻게 설명할 게냐?”

“…….”

정혜라는 여자 스님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율사라고 불린 노승이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우리의 일을 도와준 은인들에게 미안하네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해도 되겠나?”

“어려운 부탁이요?”

“아까 전에 폐가에서 했던 것처럼, 이곳에 있는 저 문을 닫아줄 수 있겠나?”

노승의 부탁에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전에 했을 때도 제 힘으로는 부족했어요. 강림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까 전에도 실패했을지도 몰라요.”

“당연히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 허나 한 달, 일 년, 십 년의 시간을 사용한다면? 그래도 문을 닫을 순 없겠는가?”

“율사님!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율사님은….”

“정혜야. 언제까지 내가 이곳에 묶여 있을 순 없지 않겠느냐? 나도 이제 이 고리를 끊고 윤회의 길에 들어서야지.”

“잠깐. 잠깐만요.”

나는 스님들의 대화를 끊고 들어갔다.

여기서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지내라고? 그렇게 할 순 없다. 위험한 사건은 여기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닫힐지 모르는 문을 닫기 위해, 우리들이 여기에서 계속 살 순 없어요.”

“이곳에서 살아달라는 게 아니네. 통로를 닫은 뒤엔 방비도 필요해.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힘들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와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소연이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 세계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인생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소연이에게 있어서 이 일은 그냥 두렵고 어려운 일일 뿐일 테니까.

하지만,

“네. 한 달에 한 번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소연이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더니, 이내 우리를 향해 허리를 구십도로 숙여 보였다.

“율사님!”

“목소리를 낮추거라, 정혜야. 이 아이가 귀인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제대로나 했는지 모르겠군.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이곳은 밤만 계속돼, 온기라는 게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지. 하나 두 분이 와주신 덕분에 시간이란 게 조금은 흐른 거 같소…. 새벽이 오는 게 얼마 만인지. 귀인들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문지방 너머로 빛이 들어오는 게 조금씩 보였다. 시간이 어느덧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숙소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 방문으로 미루고 우린 절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이동한 다음,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하늘을 날아 이곳까지 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언제 영계와의 사건이 터질 줄 모르는 상황에선 나도 이 주변의 상황을 계속해서 살필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봉인의 사슬의 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소녀인 소연이의 선택은 조금 의외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내게 소연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아. 정말 마음이 편해졌어.”

“응? 마음이 편해?”

“응. 난 내게 왜 이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항상 고민하고 있었거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서 무슨 이유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아서.”

소연이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러면 나도,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는 것 같잖아.”

꼭 범죄와 빌런과의 사투만이 히어로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선행을 하는 모든 사람은 히어로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연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도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된 거야.”

*    *    *

강수아는 잠에서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 자신의 오래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6시 반. 황서현에게 연락이 온 건 없었다. 슬쩍 확인해본 히어로 호출기도 마찬가지였다.

간밤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평소보다 30분이나 늦잠을 잤다.

친구들과 함께 편한 곳에 왔더니 마음도 조금 풀어진 모양이다.

‘아니야. 수아야. 오늘은 그냥 쉬러 온 거니까 30분 정도는 괜찮아.’

수아가 너무 벌떡 일어난 탓인지, 옆에서 자고 있던 도유진이 몸을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강수아는 도유진이 깨지 않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소연이가 의외로 아침잠이 없는 모양이네.’

자신보다 일찍 일어난 소연이 방을 떠난 것을 확인하곤, 수아는 소연을 찾아 거실로 내려왔다.

“어. 강수아 일어났네.”

“수아야 안녕. 이리 와서 같이 이것 좀 먹자. 어? 강림아 너 얼굴에 크림 묻었어.”

“어 정말? 나 거기 티슈 좀.”

“어? 여기. 내가 닦아줄까?”

이미 먼저 깨서 거실에 앉아 무언가 간식거리를 깨작거리고 있는 소연이와 강림이의 모습이 보였다.

여행. 오길 잘했네.

둘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친해진 것처럼 느껴져 수아는 여행을 왔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꼈다.

*    *    *

여행을 추진시켰던 도유진에게 있어서 이 여행은 새롭게 만난 친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오빠인 도지훈과,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였던 황채경은 모두 좋지 않은 일에 연관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황채경이 그렇게 된 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자신을 외면하고, 미워한다.

그런 도유진에게 있어서 강림이의 친구들인, 수아와 소연이는 은신처와 같은 것이었다.

특히 소연이는, 자신이 황채경의 친구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친구로서 받아주었다.

그런 수아와 소연이가 너무 고마워서 유진은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했던 여행이었는데….

“어머. 소연이랑 강림이 좀 봐요.”

“쟤네 둘이 여행 와서 사이가 많이 좋아졌네요.”

이번 여행 동안 유독 친해진 모습을 보이는 소연이와 강림이를 보며 도유진은 깨닫고 말았다.

‘…….’

도유진은 항상 스스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느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강림이에게 고백을 거절하고 나서도 그랬다. 도유진은 뒤늦게야 자신이 강림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도유진은, 이제는 소연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연이가 강림이를 보는 눈빛, 강림이와 함께 했을 때 나오는 몸짓, 목소리… 모두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의 것이었다.

도유진은,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이 관계가 자신의 은신처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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