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강철기사단(1)
“뭘 하더라도 밥은 굶지 말고… 춥지 않게 난방 항상 잘 틀고 자고… 항상, 몸조심하고.”
매번 듣던 잔소리를 또 들으며, 정학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런데 우리, 이혼한 거 아닌가? 너무 자주 찾아오는 거 아냐?”
정학근의 말에, 정학근의 전 아내, 홍경란은 정학근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는 끝났지만 진이가 성인되기 전까진 아직 당신 진이 아빠야. 우리 진이 결혼하는 건 보고 가야 할 거 아냐? 진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당신의 역할이고. 나만 나쁜 년 되고 싶지 않으니까 진이한텐 당신이 말해야지.”
정학근은 자신의 빈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는 경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와. 이렇게 갈라진 거 너도 네 인생 살아야 할 거 아냐?”
학근의 그 말에 경란은 집안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장비들과 냉장고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걱정 안 되게 혼자 잘 먹고 잘살아야지! 집안 꼴 좀 봐! 여기 봐봐. 냉장고 안에 꼴을 좀 봐! 제대로 먹어야 뭐라도 할 거 아냐? 알겠다. 알겠어. 혼자 살 알아라. 난 갈련다!”
경란은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학근의 작은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정학근은 아내가 놓고 간 반찬들을 냉장고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평소, 자신이 잘 먹던 음식들이었다.
“이혼하길 잘했네. 아주 그냥 같이 살 때보다 더 잘 챙겨준다 그냥.”
아내에게 매몰차게 말은 했지만, 정학근은 아내가 매번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죽어버릴까 봐, 이 썰렁한 아파트 안에서 누군가에게 죽고 말까 봐 걱정하는 걸 테지.
그리고 학근은 아내가 정말 자신의 인생을 찾아 살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 속에 쌓인 정이라는 게 그렇게 순식간에 떨어질 수는 없다. 점점 멀어지다 보면, 경란이 자신을 잊고 새로운 인생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정학근은 믿었다.
정학근은 아내가 오기 전까지 만지고 있던 장비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품의 수급이 어려웠던 탓에 제대로 된 테스트를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정학근은 자신이 만든 장비가 작동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은 지금까지 정학근이 장비를 만들면서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정학근은 만든 장비의 마지막 나사를 꽉 조였다.
* * *
“보스…? 말씀하신 곳이… 저기 맞습니까?”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헬멧, 튼튼해 보이는 가죽 재킷, 그리고 붉은색의 야구배트.
데빌 보이, 박준석이 내 쪽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데, 얘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바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수가 없네.
“그래. 내가 말했던 빌런들의 아지트가 바로 저기다.”
내 말에 쥐고 있는 붉은색 야구 배트를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박준석.
“드디어 빌런 아지트의 전투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뽀스! 그런데….”
정말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을 가리키며 준석이 헬멧을 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평범하고 작은 집 아닙니까? 빌런들이 이런 곳을 아지트로 삼기도 합니까?”
준석이의 지적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벌써 들켰나?
【“나강림! 정신 차리고 연기 똑바로 해!”】
“데빌보이!!! 네 이놈!!!”
나는 일단 준석이에게 호통쳤다.
“네…넵! 보스!”
“히어로의 사이드킥이 그렇게 편견에 사로잡혀서야 되겠느냐?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사로잡혀서는 안 돼! 일견 평범해 보이는 집이지만, 빌런들의 진짜 아지트는 이 집의 지하에 있다.”
“‘비밀 아지트’ 말씀이십니까?”
숨겨져 있는, 비밀, 이런 단어에 환장하는 오타쿠답게 헬멧으로 가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준석의 눈이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옳지. 바로 이거다.
“그래. 우리의 목표는 바로 그 지하의 ‘비밀 아지트’에 있다. 그리고 그 지하에 들어가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제… 도움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하에 숨어있는 빌런들이 도망칠 구멍이 없을 리가 없지 않느냐. 최대한 조심스럽게, 조용히 빌런들의 아지트에 잠입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알아들었나?”
“자… 잠입! 네! 알겠습니다 보스!”
나는 팔짱을 끼고 집을 가리켰다.
“자 오늘은 너 혼자 해보도록. 위험이나 문제가 있으면 섀도우-통신기를 이용해서 내게 보고하도록 하고.”
다크 카이저 모드를 사용하는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 바쁜 와중에도 정학근 아저씨는 이런저런 장비들을 내게 만들어 주었다.
“네? 저 혼자요?”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알겠습니다!”
잔뜩 긴장한 태도로 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하는 준석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마를 쓱 훔쳤다.
【“다행히 안들켰군.”】
준석이가 지금 들어가고 있는 집은, 몰래 마약을 제조하고 있는 작은 마약 제조소다.
준석이 혼자서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고?
전혀 위험할 일 없다. 이미 이곳에서 마약을 만드는 놈들이 어느 정도로 잔챙이인지는 확인이 끝난 상태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멍청이들이 조직의 하청이나 받아서 만들고 있는 곳이다.
이 정도 애들은 경찰 선에서도 수없이 체포당한다. 그럼 귀신같이 꼬리 잘린 채 교도소로 직행하는 거고.
이 안에 있는 잔챙이들 대다수는 누군가를 위협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
보통 이런 곳을 발견 했을 땐, 그냥 경찰 선에 넘겨도 문제 없이 해결될거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준석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최근 준석이가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험한 일엔 절대 준석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걸 알아차리고 말았거든.
“보스… 그런데 최근 중요한 일이 있을 땐 항상 제게 연락을 안주시는 것 같네요… 저… 사이드킥 맞는 거죠?”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엔 항상 준석이를 부르지 않고 다른 히어로들과 함께 하는 내게 준석은 서운함을 드러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오늘, 이 마약 제조소다. 크게 위험할 일 없이 준석이에게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곳.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준석이가 위험할 일이 없게 계속 지켜볼 생각이긴 했다.
벌써 집의 지척에 다다른 준석이를 보며, 나는 오른쪽 눈의 힘을 개방했다.
<“보스! 아지트의 벽에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네게 모든 걸 맡길 생각이다. 어디 네가 생각하고 판단해보도록.”>
<“네 보스!”>
준석이 품 안을 뒤져 히어로 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준석은 창문 틈 사이로 그것을 쑥 집어넣었다.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진 카드.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드가 떨어진 곳에 순간이동 되어 있는 박준석.
창문 틈으로 들어갔던 카드는 어느새 준석이 있던 자리로 옮겨져 있다.
저것이 준석의 능력이다. 준석은 자신이 던진 작고 가벼운 물체와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보스…! 아지트의 입구에 잠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통신을 시도하는 박준석.
<“그래. 잘했다. 비밀 아지트는 그 집의 서재에 있다는 정보다. 서재를 찾아라.”>
<“네… 알겠습니다…!”>
몸을 숙이고 천천히 이동하는 박준석의 등 뒤에 나도 붉은 기운을 따라 붙였다.
혹시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진다면, 곧바로 뛰어들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아오. 진짜 개피곤하네. 야 오늘은 얼마나 남았냐?”
“야 오늘 할당량 채울려면 한참 남았어. 오늘도 밤새야 돼.”
“아오. X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야 그 새끼 개 X밥처럼 생겼던데? 걍 내가 조질까?”
“야 깝치지마라. 그 새끼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야 그 새끼가 윗선한테 연결해준다잖냐.”
“아오. 진짜 내가 꼬와도 한 번만 봐준다. 야 나 한 대만 피고 온다. 피곤하니까 집중력이 떨어져.”
“오냐. 갔다 와라.”
마침 서재에서 빠져나와 담배를 하나 입에 꼬나물고 불을 붙이고 있는 양아치.
“아오. X발… 먹고 살기 X나게 힘드네. 후….”
놈은 벽에 딱 달라붙어 숨어있는 준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데빌 보이. 제압해라.”>
내 명령이 떨어짐과 준석이 쏜살같이 튀어 나가 막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불을 붙이던 놈의 등 뒤로 돌아가 야구 배트를 이용해 목을 조른다.
“으어…억…억!! 억!!”
잠깐 버둥대다 그대로 축 늘어지는 조무래기 A.
준석은 조무래기 A가 제대로 숨을 쉬는지 확인한 후, 바닥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방금 놈이 나온 방. 바로 그 곳이 서재일 가능성이 높겠지.”>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몸을 숨기고 천천히 서재로 향하는 박준석.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공간은 방금 나온 머저리가 무방비하게 열어두고 나온 탓에 활짝 열려있었다.
<“놈들이 아직 네 존재를 모르고 방심하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서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보스.”>
준석은 천천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해 밑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사이에 붉은 기운을 움직여 지하 밑을 순식간에 훑어보았다.
<“입구 바로 옆에 기대서 쉬고 있는 놈이 하나. 그 옆의 소파에 드러누워 폰질을 하고 있는 놈이 하나. 마지막으로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일을 하는 놈까지. 총 셋이다.”>
<“소파요? 입구 바로 옆에 소파가 있습니까?”>
사실은 입구가 아니라 그게 이 방의 전부야.
<“그래. 거기서 쉬는 놈들이 있는 모양이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엔 쇠구슬을 하나 꺼내 손에 쥐는 박준석.
쇠구슬은 붉게 염색되어 있었다.
욘석… 깔맞춤 했구나.
순석이가 쥐고 있던 쇠구슬을 계단 밑으로 굴린다.
틱… 틱… 틱… 티디딕….
쇠구슬은 계단에 부딪혀 통통 튀며 지하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하면 이런 계단에서는 카드보다 훨씬 더 멀리 던질 수 있겠지.
얇은 종이 카드에, 쇠구슬까지... 준석이에게 여러 가지 소재를 사용해보라고 추천한 보람이 있었다.
“뭐야? 뭐가 위에서 떨어지냐?”
“강믿음이 또 장난치나 보네. 야 강믿음. 너 이런 장난 치다가 장비라도 망가지려면 어쩌려고 그러냐?”
강믿음? 부모님이 주신 예쁜 이름 달고 참 믿음직스럽게 사네.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작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준석의 몸이 구슬의 위치와 바뀌었다.
“어?”
갑자기 나타난 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휘둘러진 준석의 붉은 배트가 순식간에 놈들을 제압한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양아치들.
놈들은 순식간에 제압한 준석이 곧바로 좁은 방 안을 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보스! 여기 안에 또 비밀 통로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지트는 보이지 않아요.”>
<“아니야. 잘했다. 데빌 보이. 네가 마지막에 마무리 한 녀석이 이 빌런 조직의 보스였다. 고생 많았다. 방금 경찰을 불렀으니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도록.”>
<“…네?”>
준석의 허망한 목소리가 섀도우-통신기를 타고 나와 내 귓가를 울렸다.
* * *
“저… 보스? 여기 있던 사람들… 빌런 집단은 확실합니까?”
“그럼! 빌런 집단이지! 이 밑에서 약을 만들어서 조직에 공급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당연히 빌런이지. 정말 잘해주었다. 너 덕분에 마약으로 고통받을 피해자들이 줄었어.”
“너무… 나약한 사람들이던데요. 슈페리어는 한 명도 없는 것 같던데….”
당연하지. 일부러 슈페리어가 없는 곳으로 왔는데.
“데빌보이. 놈들은 나약할지라도, 이 도시에 마약을 뿌리고 있던 범죄자들이다. 그런 범죄자들이 빌런이 아니라면, 누가 빌런이지?”
내 날카로운 말에 깜짝 놀라 차렷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준석.
“아닙니다! 보스의 말이 맞습니다!”
삐비빅. 그와 동시에 섀도우-통신기에서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호출이 들려왔다.
<계획하던 장비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자정에 다프네로 가겠습니다.>
드디어 강철 기사단과 맞서 싸울 장비를 완성한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다음번 약속 시간은 언제나와 같이 메일로 보내주도록 하지.”
“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보스!”
준석이에게서 조금 실망한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미안해 준석아. 아직은 너를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할 수 없어. 우리 천천히 해보자.
나는 기운 없는 준석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 다프네로 향하기 위해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