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여름방학의 끝(1)
오늘은 방학이 끝나기 전, 내가 체육관에 와야 하는 마지막 날이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태양 체육관을 드나들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먼저 태양 체육관의 박관장님이 설지나의 말대로 부자인 건 맞았지만, 체육관 운영비를 아예 거둬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요 한 달 동안 체육관을 다니며,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손이경 사범님 밑에서 배웠는데, 이 체육관의 진짜 실력자인 관장님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 소속사의 프로 히어로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명 소속사에서 받는 프로 히어로 지망생들을 훈련해주는 대가로 받는 돈이, 절대 적은 돈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뜻 체육관 내에서 도는 소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유명 소속사의 지망생 중에서도, 한 달도 못 채우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청 좋은 관장님이 사무실에서 하는 통화 소리가 바깥까지 모두 들렸으니까.
목청을 높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하는 통화 대부분은, 도망간 놈이 내일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더라도 받아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규모에 비해 관원이 적은 이유가 바로 그런 부분들 때문이었다. 이곳의 운영비 대부분은 프로 히어로 소속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태양 체육관에서 딱 한 명뿐인, 일반인 관원이었다.
“자. 오늘은 거기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
손이경 사범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체육관에 올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정말 올 때마다 지옥같이 힘들다.
아침마다 일어나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등허리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너 정말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는구나. 웬만한 프로 지망생들보다 훨씬 빨라. 내가 직접 트레이닝 시킨 게 아니었다면, 네가 정말 네추럴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거야.”
그래도 이곳에서 배우는 만큼, 내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걸 몸소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힘든 트레이닝도 꾹 참고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약해서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잃는 것보단, 내가 조금 더 고통스러운 게 나았으니까.
“헉… 감사합니다… 사범님이 워낙 잘 가르쳐주셔서 그렇죠.”
“어쭈.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아부도 할 줄 아니?”
내 아부에 손사범님이 싱긋 웃었다.
“오늘로 방학이 끝나기 전에 오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나? 그럼 오늘로 마지막인가?”
손이경 사범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 원래 생각은 방학 동안 잠시 체육관에서 단련해보는 것이었지만, 이젠 달랐다.
“헉… 아니요… 주말… 주말반으로 바꿔서 계속 다니고 싶어요.”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앞으로는 주말에 와서 트레이닝 하는 걸로 할게.”
처음에는 깍듯하게 존댓말을 해주던 손이경 사범님도, 한 달간 같이 트레이닝하며 내게 편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럼 강림아. 다음 주 주말에 보자. 오늘도 고생 많았어.”
그나저나, 손이경 사범님의 트레이닝만으로도 이렇게나 힘든데, 관장님의 트레이닝은 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지망생들이 전부 도망칠 정도인 걸까?
한 번씩 나를 봐줄 거라던 손사범님의 말과는 다르게, 요 한 달 동안 관장님은 첫날 이후론 단 한 번도 내게 트레이닝 해주지 않았다.
가끔 찾아와서 내가 트레이닝을 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손사범님 옆에서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듯한 모습을 보긴 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는 정확하게 듣진 못했다.
계속해서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트레이닝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경아!! 손이경!!”
사무실에서 관장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관장님! 지금 가요!”
손사범님이 관장님의 부름에 자리를 옮긴 사이, 내 트레이닝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설지나가 드러누운 내 옆에 다가와 앉는다.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게, 트레이닝이 끝난 지 한참 되었는데도 내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강림이 안녕. 오늘도 고생 많았어.”
[“어머. 그 여자애가 바로 쟤예요? 슈팅노바의 동생?”]
【“그래. 그 여자의 동생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하는 짓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지난번엔 말이지….”】
[“어머. 진짜 잘됐다. 정말 많이 건강해졌네요.”]
【“…제인. 내 말은 듣고 있긴 한가?”】
아직까진 다크 카이저의 복귀 타이밍을 잡기 위해 헬 카이저로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나를 서포트 해주는 일의 대부분은 제인이 다시 맡아 하고 있었다.
제인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할 일이 없어진 벨제뷔트는 제인이 없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만 제인에게 이야기해주는 정도의 소일거리만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제인이 들어주지 않지만.
“후욱… 어 그래. 넌 진작 끝났는데 집에 안 가고 뭐 해?”
“오늘 너 방학 끝나는 날이잖아.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기다렸지~롱.”
그러고 보니 얜 내가 학교 다니는 게 부럽다고 했었지. 지금은 꽤 건강해졌는데 아직도 학교엔 못 나가나?
괜히 물어봤다간 아픈 곳을 건드리는 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 나 금방 정리하고 나올게. 기다려.”
후딱 씻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뒤, 나는 설지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설지나의 집부터 들렸다 우리집으로 향하려면 사실 조금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어차피 설지나와 헤어지고 나서부턴 히어로 슈트를 입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었다.
지나와 집에 간다고 해서 사실, 무슨 대단한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지나는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보통은 내가 이야기하고, 지나가 듣기만 하는, 보통 그런 느낌에 가까웠지만, 오늘은 달랐다.
“네 친구들 중에 머리 묶고 다니는 여자애 있잖아.”
“어… 강수아? 키 큰 친구?”
“어 그래. 맞아. 그 친구 이름이 수아구나.”
“갑자기 수아는 왜?”
“응. 사실 그 여자애, 우리 언니 가게 근처에 자주 오는 애거든. 워낙 예쁜 애라서 기억에 남더라구. 그래서 그런데, 그 애는 프로 히어로 할 생각이 없대?”
미안하지만, 그 친구는 이미 히어로란다. 그 친구 히어로 네임 들으면 깜짝 놀랄걸?
“내가 알기론 그런데엔 관심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왜?”
“응. 사실 골격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같이 활동하면 정말 멋지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혹시 한 번 같이 이야기할 자리 만들어줄 수 없을까?”
퀘이사라는 히어로의 성격상,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히어로 활동을 할 생각은 없을 거다.
“음… 사실 오지랖 부리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친구라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은 한 번 해볼게.”
일단은 둘러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 저 말속에서 물어보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언니의 가게?
원작에선 설지원은 설지나가 죽고 난 후 사실상 히어로 일만을 하며 혼자만의 생계를 꾸려왔다.
실질적으로 설지나와 함께 살며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원작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설지원의 성격에 대체 무슨 가게를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혹시 그런데… 너희 언니가 무슨 가게를 해?”
“응? 응. 우리 언니가 직접 운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어. 갑자기 왜?”
“응. 그래도 친구 가족의 가게니까, 무슨 가게를 하는지 알면 이용해볼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눈웃음을 치는 설지나.
“그러네. 너라면 자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얘가 왜 이런담?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짓는 설지나를 보며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 언니가 너 좀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오늘은 우리 언니 가게로 놀러 가지 않을래?”
아직 저녁때까진 여유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는 지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할게.”
* * *
설지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장의 한 구석이었다.
나도 이모를 따라 함께 시장을 보기 위해 몇 번 온 적이 있던 곳이었다.
아마 수아가 이 주변에 자주 온다는 것도, 주변에서 가장 큰 시장이기 때문일 터였다.
“여기가 우리 언니의 가게야.”
그런 시장에서도 가장 밝고 볕이 잘드는, 좋은 위치에 장소한 가게였다.
하지만 우리는 가게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타 플라워?”]
【“꽃집…?”】
설지원이 운영한다는 가게는 꽃집이었다.
“어때? 앞으로 너가 자주 이용할 만한 가게긴 하지?”
짓궂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거는 지나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엉? 뭐? 뭐라고?”
“너 여자친구 많잖아. 앞으로 꽃 살 일 있으면 여기 와서 사줘. 너가 우리집 제일 단골 되겠더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지나의 목소리는,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었다.
“야. 내가 무슨… 그냥 친구들 중에 여자가 많을 뿐이지. 걔네들이랑은 별 관계 아니야.”
“아 그러셔? 과연 걔네들도 그렇게 생각을 할까?”
【“정말 안 어울리는 군.”】
[“동감이에요.”]
간만에 제인과 벨제뷔트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며 나도 평소 슈팅 노바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았다.
커다란 총, 머리에 쓴 카우보이 모자, 그리고 담배.
평소 꽃집을 운영한다는 사람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모습.
[“가게를 운영한다고 해서, 꼭 자기가 다 일을 하진 않잖아요. 어쩌면 직원을 구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제인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가 직접 일을 하진 않을지도 모르지.
“언니. 나 왔어.”
“어머. 우리 지나 왔구나~”
하지만,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서 들려온 간드러진 목소리에 나와 제인, 벨제뷔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서오세요. 나강림. 맞죠? 우리 지나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우리 지나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진 앞치마, 생글생글 웃는 표정, 단정하게 빗어 묶은 머리를 하고 나타난 사람은, 분명 슈팅노바, 설지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