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우정(3)
가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오른 눈의 능력으로 교무실을 끊임없이 뒤진 결과 알아낼 수 있던 결론이었다.
그것도 담임 선생님이 지예 부모님과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알아낼 수 없던 이야기였을 거다.
“네네… 제가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경찰에 실종신고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네네. 어머님 심정도 이해합니다만… 보통 지예 같은 아이들이 가출할 때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머님….”
담임 선생님과 지예 어머니의 대화를 요약해보자면, 방학 동안 황채경과의 일로 부모님과 싸운 지예가 그날 이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항상 내 뒷자리에 앉아있는 도유진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 씨. 대체 왜 답이 2번인지 모르겠네.”
도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열심히 문제집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뭘 봐? 뒤질래?”
아무것도 모르고 봤을 땐 평온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던 나는, 도유진이 긴장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도유진은, 무언가 알고 있다.
“서지예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가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알았냐?”
네가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하냐? 까불긴.
지금 상황에선 내가 아무리 캐물으려 해도 알려주지 않을 테지. 하지만,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한 시점에서 도유진은 분명 지예를 찾기 위해 움직일 거다.
예전에 해피 선데이 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뒤를 따라가며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도유진이 무얼 하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도유진 머릿속 정도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난 네 예전 모습을 알고 있잖아. 니가 이렇게 등교 첫날부터 공부하는 게 감개무량해서.”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답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도유진이 피식 웃었다.
“아 X발. 자존심 상하는데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네. 뒤졌다 나강림. 내가 니보다 성적 잘 받는 날이 니가 창피해서 뒤지는 날인 줄 알아라.”
“니 머리론 절대 안 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섭네. 만약 도유진한테 지면 진짜 혀 깨물고 자살하고 싶을 거다.
갑자기 느껴지는 위기감에, 나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 * *
도유진은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이든, 강림이든, 자신을 약하게 만들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도유진이 생각하기에, 요 1년간은 도유진에게 있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 투성이었다.
프로 히어로를 하던 오빠는 큰 사고를 당해 입원했고, 입원한 오빠는 미치광이 의사의 약물 실험 덕분에 빌런이 되어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였다.
빌런이 된 채경에게 습격당한 적도 있었고, 친구들은 채경이 빌런이 되어버린 이유를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도유진의 오빠, 도지훈이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을 때, 도유진은 그런 오빠의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때 자신에게 돈을 벌 방법을 알려준 것이 바로 채경과 지예였다.
뒷골목에 숨어 삥을 뜯는 것도, 선배들을 통해 받은 알 수 없는 담배를 팔아 돈을 버는 것도, 오빠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변명 아래 동참했었다.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늪과도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향해 걷고 있는 동안은 내가 늪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어느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빠져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부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허우적거려도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늪 깊은 곳으로 빠져들기만 할 뿐. 언젠가 있을 파멸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렇게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혼자만의 힘으론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누군가가 꺼내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관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인 채 점점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자신을, 강림이는 일깨워주고 꺼내주었다.
“야. 도유진. 너 아직도 이러고 사냐?”
도유진은 강림이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창피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채경아, 지예야. 이제 우리 이거 더 늦기 전에 그만하자. 생각해봤는데, 이 이상 이런 일들에 관여되면 안 될 것 같아.”
“뭔 개소리야? X발, 도유진 진짜 쫄보 다 됐네. 하기 싫으면 너나 빠져. 분위기 초 치지 말고.”
“…야 도유진. 진짜 가냐? 너 지금 가면 앞으로 평생 우리 볼 생각 하지마라.”
자신은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친구들은 아니었다.
자신이 빠져나온 뒤에도 그들은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온 예정되어 있던 파멸.
채경은 결국 슈퍼 빌런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고, 지예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대가를.
그렇다면 이젠, 그 대가를 도유진, 자신도 받아야 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유진은 자신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주던 ‘선배’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들이라면 지예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빠르게 멘 도유진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강림이 덕분에 무너질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지 알면, 나강림의 성격상 분명 자신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많이 컸네… 나강림.
도유진은 어렸을 적부터 울보에 겁쟁이던 나강림이 이렇게 멋지게 자라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고백받았을 때 YES라고 답할 걸 그랬네.
그랬다면 나는, 이런 상황에 엮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천천히 가방을 싸고 있는 수아를 지나치며 도유진은 자신을 받아준 친구, 소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소연이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 말걸 그랬네.
도유진은 강림이가 다른 친구들과 대화하느라 정신이 팔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빠르게 교실 문을 나섰다.
교실, 복도, 현관을 지나 교문까지. 그 사이에 도유진을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교문을 지나 학교를 빠져나가려는 도유진의 앞에 도유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안녕 유진아. 나랑 이야기 좀 해.”
교문 앞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자신이 오전 내내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소연이었다.
* * *
다행이다. 이 앞을 지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소연은 자신의 생각대로 교문 앞을 지나는 도유진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교에 있는 동안, 소연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소연은, 자신이 강림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친구인 도유진이 강림이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아마, 도유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걸로 보아선, 도유진도 자신이 강림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도유진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 소연은 깊은 고민 끝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도유진도 강림이를 좋아하고, 자신도 강림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도유진과 자신이 친구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연은 강림이 옆에 선 자신을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림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은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연은 수아와 유진과 함께 오랜 친구로 지내는 자신을, 방학 동안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소연은 유진과 자신이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당장 강림이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강림이의 진짜 마음이 어떤지 알기 전까진 자신에게도 승산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강림이 자신이 아닌 도유진을 선택하더라도, 소연은 언제든지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유진이라는 사람은, 그만큼 좋은 친구니까.
그래서 소연은, 자신이 아닌 도유진이 선택받더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둘의 옆에 머무를 수 있었다.
물론 유진이도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지, 자신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도유진과의 친구 관계를 끝맺고 싶진 않았다.
한 번만이라도,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연은 도유진과 단둘이 이야기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교문에서 유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연은 깊은 고민이라도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교문 앞을 지나가려는 도유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안녕 유진아. 나랑 이야기 좀 해.”
소연이 나타난 것에 놀란 듯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소연을 바라보는 도유진.
오전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차가웠던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자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
「“소연! 할 수 있다! 소연! 힘내라!”」
응. 데다야 고마워!
데다이트의 응원을 받고 힘을 얻은 소연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고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하던 바로 그때,
“뭐야? 너 여기서 나 기다리고 있었어?”
평소와 똑같은, 도유진의 따뜻한 목소리.
소연은 도유진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왈칵 눈물을 쏟아낼 뻔 했다.
“어? 응… 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래. 마침 잘됐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 나한테?”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소연은 도유진의 말에 바짝 긴장했다.
“그래. 내가 먼저 할게.”
후읍.
크게 숨을 들이켠 도유진이 소연의 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미안하게 됐다. 오전에 너한테 괜히 차갑게 굴어서. 그거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무 쪼잔해서 그런 거지.”
“어? 응? 아니? 그게 아닌데….”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 사과를 하는 도유진을 보며 소연은 잠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상황은 이게 아닌데.
“아니야.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꼭 하고 싶었어. 머리 모양도, 렌즈도, 화장도. 내가 하자는대로 한거지?”
“어? 응….”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너 지금, 엄청 예뻐. 갑자기 예뻐지니까 심술이 다 나더라 야. 괜히 심술 부려서 미안했다.”
“어… 응… 아니야… 고마워….”
“너도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내 할 말만 해서 미안해. 근데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내일 하자.”
소연에게 그렇게 말한 도유진은 몸을 돌려 교문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미안했다. 한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