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외면할 수 없는 것
“여기가 강림이가 다니는 학원이구나? 예전에 보여준 학원이랑 이름이 다른 것 같긴 한데….”
“아. 원장님이 바뀌셨거든요. 아하하….”
나는 이모에게 그렇게 말하며 이마로 흐르려는 땀을 훔쳤다.
제인! 어떻게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제인?
[“마스터!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왼쪽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오세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어요!”]
알겠어 제인…! 믿는다! 벨제뷔트! 내게 힘을 줘…!
벨제뷔트를 불러보았지만, 왜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벨제뷔트?….
…벨제뷔트?
두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 번은 부르지 않는다. 세 번까지 부르면 건방져지거든.
요즘 내가 너무 제인만 챙겨줬더니 심통이 조금 난 모양이다. 이놈의 악마고 ai고 몸이 없기 때문에 비위 맞춰주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몸이라도 있었으면 맛있는 음식이라도 맥이던지 해서 풀어줬을 텐데… 골치 아프구만.
“강림아. 여기로 올라가면 되는 거니?”
“네! 이모 거기 말고 왼쪽!”
나는 제인의 말대로 왼쪽 계단을 타고 학원으로 향했다.
“등록해드릴 테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셔요.”
“아니… 내가 등록을 하겠다는데 왜 안 되는거냐고! 내가 이 나이 먹고 학원 다니겠다니까 무시하는 거야? 지금?”
“안 된다고 한 적 없다니까요? 자꾸 이러시면 저희도 신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신고? 신고? 인간들 주제에 나를 신고해? 어디 신고해 봐라! 내가 지옥을 맛보게 해주마!”
계단을 타고 학원의 복도로 올라오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무실에서 들려왔다.
뭐야? 여기 무슨 일이래?
“어머…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보니까 학원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이모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잠깐 얼이 빠져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동안, 마침 사무실의 앞에 서 있던 여자 한 명이 우릴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모습. 내가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대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인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안녕~ 강림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제가 강림이를 담당하고 있는 강사, 황세연이라고 해요. 강림이가 오늘 이모랑 같이 올 거라고 했었는데… 이모 맞으시죠?”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제인이구나.
“어머. 안녕하세요. 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죠?”
“아이구… 말도 마셔요… 가끔 저런 분들 있으시거든요. 원래 같았으면 사무실에서 이야기 해야 되는 건데 지금 사무실 상황이 이래서… 1층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일단 거기라도 같이 가실까요?”
제인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를 1층으로 다시 안내했다.
이런 방식으로 연기를 하는 거였어? 제인 대단한데? 그럼 저기 안에 있는 것도 너야?
[“저라고 한 번에 홀로그램을 두 개를 움직이는 건 쉽지 않거든요? 저 아니에요.”]
설마…?
[“그 설마 맞아요. 저기서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건 벨제뷔트랍니다.”]
세상에….
“악마? 그래 내가 바로 악마다! 아하하하하!”
세상에… 학원 선생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제인… 저 진상 빨리 치워… 진짜 너무 심하게 민폐다.
[“카페로 내려가면 바로 치울게요. 걱정하지마세요.”]
제인 너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죄송해요. 당장 생각 나는 방법은 이 수 밖에 없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학원 선생님들께 용서를 빌며 1층의 카페로 향했다.
* * *
“오시느라 고생이 너무 많으셨죠? 이런 곳에 데려와서 이야기하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휴. 아녜요. 보니까 선생님 때문도 아닌데요.”
“다행히 이야기할 때 필요한 것들은 제가 다 챙겨왔거든요. 일단은 강림이 지금 성적 정도면….”
정말 학원 선생님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한 제인을 보며, 나는 내심 안도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더니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긴 했던 모양이다.
【“…젠장.”】
그때 마침 돌아온 벨제뷔트.
야… 너 진상짓 하루 이틀 해본 느낌이 아니더라… 진짜 대단해.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제인과의 계약 때문에 한 거다! 지옥의 악마인 내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수모를 당하게 될 줄이야!”】
그래… 고생했다.
이모와 제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대충 벨제뷔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행스럽게도 거기서 깽판을 친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10분이라고 해도 선생님들 되게 힘드셨을 거야… 나중에 음료수라도 몰래 갖다 놓든지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대체 제인이랑 언제 무슨 계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미안하지만,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발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보도록.”】
뭐. 그래. 나중에 제인한테 직접 물어보지 뭐.
제인과 이모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천천히 제인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이는… 30대 중후반 정도?
아까도 생각했지만 어디서 자꾸 본 느낌이긴 한데….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겠네.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들어내긴 힘들 테니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조합했을 가능성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쩐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합쳐놓은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스스로 납득했다.
그러는 사이, 이모와 제인의 대화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강림이의 성적이 유지가 된다면, 이 정도 대학까지는 가능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제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이모의 모습을 보자, 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따지고 보면 세계를 구하고 이모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선의의 거짓말일 텐데,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네가 선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계속되는 거짓말에 지칠 만큼.”】
왜인지 분명 제인과 이모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나와 관련된,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인과 이모의 대화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다 잘 들었습니다. 제가 딱히 어떤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건 없구요. 그저 강림이가 스스로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됩니다.”
“아휴. 그럼요.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이 다 그럴거예요.”
“부모님이요?”
“어머. 죄송해요. 보통 어머님들이랑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래도 강림이한텐 어머니 같은 분이라고 생각해서요. 실수했다면 죄송합니다.”
와… 제인 무슨 연기를 저렇게 잘하냐? 진짜 학원 선생님 같네.
“그럼… 앞으로도 우리 강림이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아유. 아녜요. 저야말로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이야기를 마무리한 제인과 이모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은 강림이 좀 데리고 갈게요. 요즘 공부한답시고 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서. 오늘 같은 날은 맛있는 거라도 좀 사 먹이고 그러고 싶거든요.”
“아휴. 그럼요. 그러세요.”
나는 이모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 * *
이모와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 안은 조용했다.
이모는 이모 나름대로 오늘 하루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나도 나 나름대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 한구석에 있는 불편함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했다.
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면서까지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격이다.
나는 내가 이 세계에서 히어로 활동을 시작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히어로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아파서 돌아가신 우리 이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에는 동화율이 다 모이고 난 후에 히어로 활동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었다.
하나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연 동화율을 다 모은다고 해서 히어로 활동을 그만둘 수 있을까?
모든 걸 다 잊고, 이모와 둘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내 주변의 히어로들을 생각해보았다.
슈팅노바, 래피드스타와 다크 스코프.
그들은, 히어로 활동을 떠날 마음을 가졌다가도 결국은 다시 슈트를 입고 히어로 활동을 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히어로 활동을 한다는 것은, 마치 고무줄에 묶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고, 또 떠난 적이 있더라도 잠깐 힘을 놓게 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있게 되는.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힘들어진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인생을 바쳐 목숨을 잃을 때까지 하게 되는 것.
나는 얼마 전, 내가 평생을 다해 히어로 활동을 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달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모에게 평생 이런 거짓말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내가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을 거짓말하며, 이모를 속일 순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길을 보며 운전하고 있는 이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이모….”
“응? 왜?”
“사실은 나, 이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무슨 말? 집에 거의 왔는데, 집에 가서 하면 안될까?”
그럼 그래요, 라고 답하려던 나는, 그랬다가는 지금의 마음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이모. 나 지금 꼭 해야 할 것 같아.”
“…응. 뭘까?”
“이모. 오늘 다녀온 학원에 다닌다는 거 사실 다 거짓말이야.”
“…갑자기 무슨 말이니?”
차갑게 굳어진, 이모의 얼굴.
“오늘 만난 선생님도 사실은 가짜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리니? 이모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모. 나 사실, 밤마다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어.”
끼이이이익-!
자동차가 급정거하며 길가에 멈춘다. 차를 멈춘 이모가 내 눈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이니?”
“사실, 나 밤마다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어. 엄마 아빠가 남겨준, 히어로 슈트를 입고.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그런 슈트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슈트를 입으면 빌런들과 싸울 수 있는 초능력이 생겨.”
“…….”
“뉴스에 나오는, 다크 카이저라는 히어로가 사실은 나야. 지금까지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모.”
빠아아앙! 빵!빵!
갑자기 멈춘 이모의 차 때문인지 지나가는 차들이 우릴 향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차의 경적과 함께, 이모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알고 있었어 강림아.”
* * *
이소희는 자신이 사는 집에, 그 히어로 슈트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죽기 직전, 자신에게 유언처럼 남겼던 말이 있으니까.
“소희야… 옷장 안에….”
“언니! 말하지마! 지금 119 불렀으니까. 조용히… 조용히… 조금만 더 버텨… 참아봐 제발….”
“슈트… 옷장안에… 강림이… 부탁….”
하지만, 언니가 죽었을 때에 강림이는 아직 너무 어렸고, 소희는 강림이 어른이 되는 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강림이를 키우며 이소희의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강림이가 언제나 안전하게 자라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소희가 강림이가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건, 언니 부부의 기일이었다.
강림이와 함께 언니를 보러 다녀오던 날, 이소희는 언니가 남겨둔 히어로 슈트를 폐기해버리려고 했었다.
슈트가 숨겨져 있는 옷장 문을 열었을 때, 이소희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다.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엔 평생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강림아….”
쏴아아아-!
갑작스럽게 여름 소나기가 내려 차창을 세차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