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고스트 카이저(3)
“야, 안 되겠다. 너 좀 맞자.”
내 말에 실실 웃던 고스트 카이저가 웃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거, 같은 카이저끼리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심지어 컨셉도 깨부쉈네? 그래도 되는 거야?”
거 참 웃기는 놈이네. ‘같은 카이저’라고? 내 카이저 유니버스에 너 같은 놈은 없어 이 자식아.
그래도 놈이 한 지적이 완전히 쓸모없는 지적은 아니었다. 컨셉이 무너졌다는 지적 때문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조금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히어로치곤 꽤 위험한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놈이다. 괜히 흥분한 채로 전투에 들어갔다간 크게 상처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흥분을 가라 앉히며 입을 열었다.
“같은 카이저?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는다고 다 같은 편이 되는 줄 아나?”
“똑같이 범죄자와 맞서 싸우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똑같은 히어로 아닌가?”
기껏 가라앉았던 흥분이 다시 머리끝까지 솟아오른다.
…이거 자꾸 말하는 게 열받네. 손 좀 봐줘야겠는데
[“마스터. 참아요.”]
“아하. 하긴, 나라도 어디서 튀어나온 줄 모르는 놈이 개기면 일단 실력부터 확인해보자, 그렇게 생각할 거 같긴 하네. 이거 입단 테스트. 뭐 이런 거지? 좋아, 한번 보여주지.”
스르릉-
뽑았던 검을 등 뒤의 검집으로 집어넣으며, 고스트 카이저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덤벼. 다크 카이저. 선공은 양보하지.”
얼씨구.
[“아니네요, 마스터. 참지마세요. 아주 그냥 묵사발을 내주라고요.”]
그놈의 입단 테스트. 한번 거하게 해줘야겠네.
“그래. 그놈의 허세가 언제까지 가나 한번 지켜보지.”
나는 양 주먹을 말아쥐었다.
* * *
연이은 자신의 도발에 붉은 눈을 번뜩이며 분노한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크 카이저를 보며, 하준은 마음이 들뜨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만났을 땐 마치 귀찮은 꼬맹이를 보는 듯한 눈초리였던 다크 카이저가, 지금은 진심으로 분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크 카이저’가 자신에게 진심을 다해 분노하고 있다.
하준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준은 지금 이 상황이 미치도록 재밌었다.
하준은 천천히 다크 카이저에게로 다가가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방금 자신의 손속이 과하긴 했던 모양인지, 겁을 집어먹고 가까이 오려고 하진 않았지만, 몇몇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자신들의 싸움을 찍으려고 하고 있었다.
좋아. 좋아.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상황이야.
예전에 계획했던 위기에 빠진 다크 카이저를 구해주는 상황 연출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다크 카이저를 이기고, 그런 다크 카이저에게 가르침을 내린다는 상황 연출은 그보다 배는 더 좋았다.
성민이 조종하고 있는 드론으로 찍고 있는 전투 영상이 올라간다면, 새로 만든 채널, 영혼 검사 고스트 카이저는 순식간에 성장할 거다.
고스트 카이저의 슈트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미 이런 상황을 대비해 다크 카이저의 전투 스타일에 대한 분석은 끝내놓은 참이었다.
몇 개월 사라진 동안 배운 것 같은, 복싱 스타일까지 전부.
애초에 천재 소리를 듣고 살았던 하준은, 자신이 파악한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다크 카이저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전은 상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BOF!
“윽!”
BAM!
“컥!”
POW!
“크흑!”
직접 마주하며 만난 다크 카이저의 주먹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주먹도 제대로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들어오는 연속 공격에 하준은 숨도 못 쉰 채 속절없이 얻어맞고 맞았다.
전투 스타일의 분석? 머릿속으로 분석한 것만으론 실전에서 날아오는 다크 카이저의 주먹을 도저히 피해낼 수 없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컥… 커헉…”
숨을 쉴 수 없는 탓에 머리가 핑 돌았다. 하준은 잠깐 무릎을 부여잡고 나오려는 헛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자신만만했던 것에 비해 너무 약한데. 이거 그 정도 수준으로 카이저를 자처하다니. 히어로부터 되고 오는 게 어떨는지.”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하준의 귀로 다크 카이저의 비웃음섞인 조롱이 들렸다.
“아직… 컥… 끝이… 아니다….”
퍼억!
헛구역질 하고 있는 하준의 배에 다크 카이저의 발이 날아들었다.
“끝이 아니긴, 나처럼 ‘신사적인’ 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었다면, 넌 지금 이미 목숨을 잃었다. 애송아.”
저벅저벅.
자신을 내버려둔 채 다크 카이저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안돼…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이렇게 끝나선 안 됐다.
하준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야! 다크 카이저! 다시 해! 다시 하자고! 나 일어났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채 등을 보인 채 걸어 나가고 있는 다크 카이저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무시해? 나를? 그래도 내가 경한그룹의 회장, 사대희의 아들인데?
하준은 등 뒤의 검집에 꽂아 넣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다크 카이저를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다.
하준은 검을 들어 올려 다크 카이저의 등 뒤를 향해 휘둘렀다.
쉬익-!
마치 등 뒤에 눈이 달려있는 것처럼 자신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피해버리는 다크 카이저.
틀렸다. 나 정도 수준으로는 절대 다크 카이저를 이길 수 없었다.
“이번 걸로 정말 넌 선을 넘었다.”
가볍게 자신의 검을 피한 다크 카이저가 자신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두르던 바로 그때,
치이이잉-!
슈트 안에 있는 기계장치들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혼자 움직여 틀어지며 다크 카이저가 뻗은 주먹을 멋들어지게 피한다.
몸을 비틀어 피함과 동시에 몸이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른다.
자신을 얕보고 있던 다크 카이저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는 자신의 검을 보며, 하준은 씨익 미소지었다.
뭐야? 슈트 기능이야? 이거 미쳤는데? 역시 이성민한테 시키길 잘했어. 좋은 물건 가져왔네.
하준은 피가 흐르고 있는 다크 카이저의 어깨를 보며, 들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비껴 들었다.
“컥… 쿨럭… 내가 말했지. 아직 끝난 거 아니라고.”
* * *
나는 후끈 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스트 카이저를 바라보았다.
뭐지? 갑자기 몸놀림이 달라졌다.
어쩐지 처음에 칼을 휘두를 때 느꼈던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진 힘을 숨긴건가? 아니면 연기? 그럼 왜 지금까지 두들겨 맞고 있었지?
[“아까부터 개 X라이 같은 소리를 자꾸 지껄이던데, 진짜 변태 사이코 같은 거 아니에요?”]
어깨에서 흐른 피가 순식간에 뚝뚝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끔찍하게 아프구만.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칼은 몇 번이나 맞아보았지만, 칼을 맞았을 때의 고통 만큼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양을 보니 꽤 상처가 깊을 모양이다.
이거 또 밀키웨이한테 잔소리 듣겠는데.
“커억… 쿨럭 쿨럭… 이제… 이제 알았다. 네 전투력. 푸헉… 쿨럭… 이게 전부냐?”
그 대사를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말해봐야 하나도 안 멋있단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맨주먹일 때야 설렁설렁 봐줘 가며 상대했지만, 상대가 이젠 내게 진검을 휘두르며 들어오는 참이다.
상대가 무기를 쥔 채 내게 덤벼온다면, 나도 전력을 다해주는 수 밖에.
마침 칼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을만한 방식이 하나 있지.
제인. 다크 아머 모드로 변형시켜줘.
[“네 마스터.”]
SUIT MOD
The Dark Kaiser
내 슈트 위를 검은색의 두꺼운 갑옷이 뒤덮기 시작한다.
헬 카이저의 헬 나이트 모드가 마치 기사 같은 느낌의 갑옷이었다면, 다크 카이저의 아머 모드는 마치 외골격 로봇 슈트 같은 느낌이었다.
쉬익!
모드를 변형하고 있는 내 슈트의 틈 사이로 놈이 휘두른 칼이 비집고 들어온다.
[“마스터!”]
“나왔군. 신체 변형 능력! 신체가 변화되고 있는 바로 이때가 당신이 가장 취약한 타이밍이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황이거든.”
가까스로 피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놈의 검에 의해 왼쪽 옆구리의 아머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온몸을 아머가 덮고 있지만, 왼쪽 옆구리에만 구멍이 휑하게 뚫려있는 상황.
“처음 보는 신체 변형이군. 아쉬워. 속도 타입으로 변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방금 일격으로 치명상을 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다시 여유가 생긴 모양인지 놈이 더러운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두 번 정도 공격을 성공시켰다고 저렇게 신날 수 있나?
거 더럽게 말 많네. 정말.
내 모드 변환을 노리고 공격해오려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모드 변환은 무의미할 듯 싶었다.
나는 검을 든 채 내게 덤벼오는 고스트와 2차전을 시작했다.
쉬익! 쉭! 쉬이이익!
검을 든 채 상대하는 고스트 카이저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거기다 몸놀림이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만난 빌런들은 대부분 휴대하기 용의한 나이프들을 가지고 다녔었기 때문이다.
긴 무기라고 하면, 기껏해봐야 파이프, 야구 방망이 같은 거였지.
저렇게 무식하게 생긴, 길쭉한 검을 든 사람이랑 싸워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공격 범위를 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왼쪽 어깨가 멀쩡했다면, 이렇게 고전하진 않았을텐데.
“아하하하! 다크 카이저도 내 검 아래에서는 애송이구만 그래.”
내가 애송이라고 불렀던 게 그렇게 억울했냐?
다행히 아머 모드를 사용하고 있는 탓에 큰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검에 베인 갑옷 이곳 저곳은 이미 상처 투성이었다.
뚝뚝. 왼쪽 어깨에서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인지 내 몸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나. 승부수를 띄우는 수밖에.
나는, 사범님께 배운적 있었다. 이런 흉기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기를 든 사람이랑 싸워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도망치는 거지. 그런 사람이랑 싸우면 손해 보는 건 너거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싸워야하는 상황도 있잖아요. 가령, 누군가를 지켜야한다거나.”
“아하. 요놈 이거. 벌써부터 여자친구를 사귈 때를 대비하는구나?”
“아하하하….”
“그런 경우엔 말이지….”
무기를 든 사람을 제압할 땐, 완전히 피해 없이 제압하기란 어렵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는 곳을 예측하는 것.
하지만 검을 든 고스트 카이저의 몸놀림은, 생각보다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일부러 공격을 유도하는 수밖에.
나는 지금까지 최대한 공격 당하지 않게 조심했던 왼쪽 옆구리 부분을, 일부러 노출 시켰다.
“여기다!”
쉬이이익!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왼쪽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러 들어오는 고스트 카이저를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 성격이 너무 급해.
나는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체인을 뻗어온 칼에 걸었다.
회전하던 힘을 그대로 이용해서 끌어올린다.
“앗!”
고스트 카이저의 손아귀에서 검이 빠져나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놈이 놀라 허공으로 날아오른 칼을 보고 있을 때, 나는 그대로 빈 왼손을 뻗어 놈의 멱살을 잡았다.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여,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그대로 놈의 얼굴에 계속해서 주먹을 박아 넣었다.
퍽-!
퍽-!
퍽-!
“그…! 그만! 그만!!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
놈의 입에서 드디어 졌다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퍽-!
나는 마지막으로 놈의 얼굴에 한 대를 더 박아넣었다.
이빨 한 두 개 정도는 깨부숴놔야 정신을 차릴 놈인 것 같거든.
“퉤.”
놈은 빠진 이빨을 바닥에 내 뱉으며 독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화가 잔뜩 났군, 다크 카이저. 왜 이렇게 화가 난거지? 진짜 내가 악당들한테 손을 좀 과하게 썼다고 화내는 거야?”
아니네. 하긴, 이빨 좀 깨졌다고 정신 차릴 놈은 아닐 것 같긴 했다.
【“놈의 말에 휘말리지마라 다크 카이저. 너를 동요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이거, 잘 생각해보면 당신이 손해 볼 부분이 아니야. 당신이 컨셉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못하는 일을 내가 대신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거라고! 자신들을 죽이는 히어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악당들에게 겁을 집어먹게 할 수 있다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렇지?”
“사람은, 특히 악당은 바뀔 수 없다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걸?”
“하지만 그런 내가 바뀌어보니 알겠더군. 사람은 바뀔 수 있어. 그럴 기회만 있다면. 그러니까.”
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두들겨 맞던 기억 때문인지 놈이 움찔했다.
나는 고스트 카이저의 얼굴 대신, 머리 옆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CLASH!
요란한 소리가 나며 벽에 큰 구멍이 하나 뚫렸다.
“너한테도 한번은 더 기회를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