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고스트 카이저(4)
고스트 카이저와의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가지고 있는 회복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전치 2개월.
내가 완전히 개박살 내버린 고스트 카이저의 상태를 보고 제인이 분석한 결과였다.
강력한 치료 계열의 슈페리어에게 치료를 받지 않는 이상, 회복에 2개월 이상은 소모될 거란다.
자경단 활동을 하고 있는 주제에 대형 병원에 가서 당당하게 치료받긴 힘들 거고, 불법 진료하는 의사나 슈페리어에게 치료를 받을 텐데, 그러면 아무리 빨라도 2개월은 걸릴 거라는 거였다.
조금만 손봐주려고 했는데, 나도 생각보다 조금 손속이 과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바뀌었다.
놈이 저지른 사고, 그리고 내가 놈과 싸운 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 ‘카이저’들에 대한 새로운 악성 루머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상제목 : 긴급!! 다크 카이저 VS 고스트 카이저>
<댓글 : 8214개 정렬기준 : 인기 댓글 순>
<우와. 히어로끼리 싸우는 영상은 진짜 귀한데. 얘네 왜 싸웠는지 아는 사람 있나요? 추천 수 : 4284>
└<같이 키메라 약 맞은 약쟁이 제압하다 말고 싸웠다는데?>
└<왜 싸웠지? 둘이 무슨 사인데요?>
└<요즘 나오는 소문들에 의하면, ‘카이저’라는 이름을 단 능력자들은 모두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들이고,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인 만큼 서로 적대하고 있지 않냐는 소문이 있음>
└<카이저라고 해봐야 다크 카이저랑 고스트 카이저 단 둘뿐이잖아.>
└<ㄴㄴ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헬 카이저라는 히어로도 천산시에서 활동 중인 걸로 알고 있음>
아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네. 제인 그냥 꺼버려.
[“네 마스터.”]
내 눈 위에 떠올라 있던 홀로그램이 전부 꺼진다.
새롭게 나타난 고스트 카이저라는 존재 덕분에, 그동안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헬 카이저에 대한 존재까지 알려지며, 루머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다크 카이저, 헬 카이저, 고스트 카이저는 전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고, 다크 카이저가 어비스에서 온 괴물들을 막아냈던 것처럼, 헬 카이저와 고스트 카이저도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들을 막기 위해 이 세계에 나타난 존재라는 소문이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마스터. 덕분에 헬 카이저와 다크 카이저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 긍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일단은 그 고스트 카이저라는 놈,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또다시 사고를 치진 않겠지.
[“사고를 치더라도, 최소한 두 달은 지나야겠죠. 그런데 마스터, 지난번에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하셨잖아요. 또다시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하시게요?”]
그럼 그때부터는 다크 카이저가 아니라, 헬 카이저가 찾아가게 되는 거지.
* * *
“허억!”
병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사하준은, 숨을 허덕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경한 병원 VIP 병동에서 받은 치료 덕분에 싸움에서 얻었던 상처는 이미 거의 다 나았지만, 다크 카이저에게 두들겨 맞던 기억의 공포는 영혼에 박힌 듯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x나 아프네. x발.
아직 바깥이 컴컴한 것을 보고 하준은 방 한켠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3:32]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긴 이른 시간이지만, 악몽을 꾼 탓인지 다시 자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 하준은, 간호사 몰래 숨겨 두었던 노트북을 꺼내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악몽을 꿀 정도로 무자비하게 자신을 두들겨 패긴 했지만, 하준은 아직도 다크 카이저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번 한 번 크게 진 전적이 있는 만큼, 하준은 다크 카이저의 약점을 알아내고 싶었다.
다크 카이저의 전투 스타일, 능력, 규약… 그런 종류의 약점들이 아닌, ‘진짜’ 약점 말이다.
다크 카이저의 가면 안쪽 얼굴.
하준은 그것을 알아내려고 마음먹었다.
보통 이런 일은 성민에게 시키면 더 빨리 알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 하준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하준은 오늘도 밤하늘에 스텔스 드론을 띄웠다.
* * *
똑똑.
“들어오지 마세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정대수는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고 VIP 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덜컥.
문이 잠겨있었다.
정대수는 한번 힘을 꾹 주어 문고리를 부수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오지 말라니까 누가 문까지 부수고 들어오래? 누가 시켰어?”
부랴부랴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사하준이 짜증을 내며 돌아보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보곤 과장된 모습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씨 뭐야… 정대수 아저씨였네. 아, 이제 정 실장님이시던가. 정 실장님이셨으면 어쩔 수 없지. 이 병원의 누가 정 실장님을 막을 수 있겠어요?”
“들은 것에 비해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도련님.”
무언가를 던져버리려고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걸 다시 테이블로 내려놓는 하준을 보며, 정대수는 열었던 문을 닫았다.
“혹시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다행히 정 실장님이 보내주신 슈트의 기능이 워낙 좋아서 말이죠. 쫄쫄이처럼 생겼는데 무슨 방호력이 그렇게 좋아요?”
“…알고 계셨습니까?”
“네? 당연한 거 아녜요? 제가 왜 성민이한테 그런 일을 시켰겠어요? 정 실장님한테 보고해서 받아오라고 그런 거죠. 아. 그래도 성민이는 아직 쓸만하니까 괜히 빼돌리지 마시구요.”
한숨이 겉으로 새어 나가려는 것을, 정대수는 꾹 참았다. 사대희 회장의 유일한 자식 아니랄까 봐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똑 닮았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오늘처럼 대책 없이 큰 사고를 자주 벌이곤 한다는 점이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일 아빠한텐 말하지 마세요.”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 몰라요. 아무튼 말하지 마.”
결국 정대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골치 아픈 꼬맹이로군.
“알겠습니다. 다만,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보내드린 슈트는 항상 옷 안에 입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알겠어요. 저도 겪어보니까 알겠어. 와 근데 이번엔 진짜 제대로 만들었던데요? 위험해지니까 막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공격을 피하던데? 역시 괜히 경한 경한 하는 게 아니더라니까?”
제멋대로 움직여? 그런 기능을 만들었다는 보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정대수는 잠시 후에 관련 서류들을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번쩍.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검에서 회색빛이 번쩍였지만, 정대수와 사하준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 맞아. 정실장님. 혹시 지금 슈퍼 빌런 교도소에 수감 되어 있는 빌런 명단 좀 가져다주실 수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 사대희 회장을 싫어하는 탓인지 자신에게 무언가 직접 부탁하길 극도로 꺼려하는 사하준이 하는 부탁에 정대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네? 그건 어디다 쓰시려고…?”
“아.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사람은 기회가 있다면 바뀔 수 있다고. 그래서 확인 한번 해보게요. 그 사람 말이 맞았는지.”
* * *
“이모.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강림아. 몸 조심히, 꼭 별일 없이 돌아와야 한다?”
“네! 걱정 마세요, 이모!”
내가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니? 강림아….
또다시 범죄와 싸우기 위해 밤거리로 향하는 자신의 조카, 강림이의 뒷모습을 보며 이소희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후론 단 한 번도 신을 믿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린 조카, 강림이 밤마다 히어로 슈트를 입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소희는 매일 밤, 떠나는 조카의 등을 바라보며 항상 자신이 아는 모든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지난 한 달간, 이소희는 자신의 조카를 막아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보았다.
하지만, 이소희 혼자만의 힘으로는 조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언니. 아들을 나한테 맡길 생각이었으면, 저런 물건은 만들어뒀으면 안 됐어.’
이소희는 자신의 어린 조카가 저런 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완전히 커버린 조카의 행동을, 이소희는 막을 힘이 없었다.
지이잉-
집의 창문에 붙어있는 홀로그램 생성기에서 알 수 없는 기계음이 계속해서 들렸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달아두었다는 장치였지만, 이소희는 왠지 그 장비에서 나오는 아주 미세한 작은 소리가 거슬렸다.
어쩌면, 그냥 자신의 조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집의 창문에 걸려 있는 홀로그램 생성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이소희는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다.
위이이이잉-
창문을 닫은 강림의 집 옆으로 드론이 한 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 *
【“오늘은 지옥의 황제가 돌아오는 날이로군… 오랜 기다림이었다.”】
알겠으니까 벨제뷔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헬 카이저 슈트나 작동시켜.
【“…알겠다.”】
화르륵.
흑염이 순식간에 내 몸 주변을 감싸고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스러졌다.
나는 내 몸 주변에 검붉은 빛의 슈트가 입혀져 있는 것을 확인하곤 몸을 밑으로 날렸다.
오늘은 좀 편하게 쉬도록 해, 제인.
[“그럴 순 없죠, 마스터. 이 멍청한 악마에게 완전히 맡겼다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구요.”]
【“뭣이? 네가 쓰러져 잠이나 자고 있는 동안, 나와 나강림은 헬 카이저로서 레드 래빗을 제압하고, 나강림의 오랜 친구 도지훈도 구해낸데다, 무려 강철 기사단의 그렘린을 무찌른 전적도 있다.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레드 래빗은 내 희생이 없었다면 무찌르는 게 불가능했을 거고, 그렘린은 내가 위치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을 텐데? 정말 그것들을 너 혼자 해결했다고 말하는 거야?”]
【“크으으윽…!”】
아 제발. 싸우려면 둘 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서 싸우도록 해! 둘 다 음소거 해버린다?
[“…….”]
【“…….”】
오늘은 다크 카이저가 아닌, 헬 카이저로서 활동하는 날이었다.
헬 카이저라는 슈트는, 제인이 먹통이 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만들게 된 슈트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까 벨제뷔트가 말한 것처럼, 헬 카이저로서 해결한 굵직한 사건들이 꽤 존재하는 탓에 완전히 버릴 수 없게 되기도 했고.
거기에 지옥에서 온 황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헬 카이저를 제대로 사용할만한 계획을 하나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 카이저로서 관리 해야하는 사이드킥, ‘데빌 보이’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뽀쓰!!”
내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내게 경례를 올려붙이는 준석이의 모습을 보고,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