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52화 (152/236)

제152화

가족(2)

“지나가 골라준 옷, 다 맘에 들어. 정말, 만나길 잘했어.”

“진짜요? 다행이다. 제가 너무 어려서 취향에 안 맞으실까 봐 좀 걱정했는데….”

“어머, 아니야. 너 보는 눈이 엄청 좋던걸. 이미 회사랑 계약한 프로 히어로라면서? 어쩐지 패션 감각이 보통이 아니더라. 내가 조카 친구 덕을 다 봤네.”

“에이, 사실 제 패션 감각이 좋은 게 아니죠. 솔직히 모델이 워낙 좋아서 아무거나 대봐도 다 예뻤을걸요?”

“어머. 얘는.”

이모와 지나가 하하호호 웃으며 앞에서 걸어간다.

그리고 나는, 쇼핑백을 잔뜩 들고 진이 다 빠진 채 털레털레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하아… 진짜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구만. 여자들이랑 쇼핑한다는 거, 쉽지 않은 일이었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따라 움직이던 나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발견했다.

슬슬 해가 떨어지며 오늘이 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오늘 이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엔, 아무런 사건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최근, 천산시의 낮은 꽤 조용한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트로 스타즈라는 히어로 팀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점점 히어로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키메라 약물 사태로 인해 경찰들도 잔뜩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겁날 게 없는 천산시의 빌런들이라도, 지금 같은 때는 조금은 숨죽여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아 정말요?”

“진짜 그렇다니까?”

앞서가던 두 사람이 하하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근데 저 두 사람은 뭐가 저렇게 친해진 거야?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거고, 제대로 대화해본 건 오늘 처음 아니었어?

뭐가 저렇게 재밌고 즐거운 거야?

[“마스터. 혹시 친구한테 질투하시는 거에요?”]

뭐? 질투? 허~ 참. 내가 이모랑 지나 사이를 왜 질투해? 이모 남자친구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우리 이모 남자친구가 생기길 바라는 사람이야, 내가. 질투는 무슨 질투야?

[“아님 말구요.”]

“저… 죄,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아 넵.”

내가 멍하게 있는 동안, 택배 상자가 잔뜩 올려진 수레를 끌며 브루트 두 명이 내 앞을 지나갔다.

성진택배.

택배회사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택배 기사였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깜짝 놀랄뻔했네.

브루트 같은 존재가 없는 곳에서 살아온 나의 눈에는, 털이 잔뜩 난 브루트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버릴 때가 있었다.

보통 이런 번화가에선 브루트들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저들에게 있어서 실례일지도 몰라.

무거운 택배 상자를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는 두 브루트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치웠다.

슬슬 시간이 시간이니까… 이쯤되면 이제 저녁을 먹고 집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낮 정도는 이모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저녁을 지나 밤이 되고 나서까지 사건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사건 알람이 울리지 않더라도, 지금은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도 하고.

“이모 이모. 여기, 이 가게는 어때요?”

어라? 저게 갑자기 누구보고 이모래? 너네 이모 아니고 우리 이모야!

【“질투 하는 거 맞구만 뭘…”】

【[“내 말이… 저래서 이모를 어떻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뭐? 너희 뭐라고 했어?

[“네? 아무말도 안했는데요.”]

“어머. 진짜 예쁘네. 잠깐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내가 잠깐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악귀들과 티격태격하는 동안, 이모와 지나 둘이서 팔짱을 낀 채 이번엔 또 액세서리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구경… 그래… 잠깐 구경하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가게로 들어섰다.

*    *    *

강림의 앞을 지나갔던 두 브루트들은 그 많은 택배박스를 들고 한 집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모든 택배 박스에 적힌 주소는 단 하나의 주소만 적혀있었던 것이다.

두 브루트가 들어간 집에는, 추가로 세 명의 덩치 큰 브루트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왔나? 특이사항은?”

“트, 특이사항… 어… 없습니다.”

“오면서 별일은 없었다고?”

“네… 택배 유…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익숙하게 택배 박스를 들고 안으로 들어서서 택배 박스를 모두 열기 시작했다.

택배 박스 안에선 놀랍게도 무기와 탄약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세 브루트들은 덩치도, 생김새도, 들고 있는 장비도 전부 달랐지만, 모두 붉은 빛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불곰파.

천산시의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천월군 일대를 지배하는 것에 그치던 불곰파가, 자신들과 적대하던 잿빛 망토단이 완전히 무너짐과 동시에 슬슬 천산시의 내부로 발을 넓히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천산시에 불곰파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을 터.

그렇게 그들은, 오늘 천산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만한 멋진 사건을 하나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천산시 내부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무시당하고, 핍박받으며 살아온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였다.

철컥.

택배 박스에서 나온 장비들을 조립해 착용한 세 브루트들이 건물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결국 기어이 몇 군데의 가게를 더 ‘구경’하고 나서야 우리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대체 왜… 히어로 활동을 하는 것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지?

[“현재 마스터가 평소 식사해야 할 시간을 조금 넘어선 상태입니다. 공복 상태셔서 더 피곤하신 걸 거예요.”]

돌아다니는 동안은 느끼지 못했는데, 제인의 저 말을 듣자마자 배고픔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맞네. 지금 나 배고픈 거였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어머. 여기 진짜 분위기 좋다.”

“그쵸 그쵸? 여기 우리 언니랑 둘이서 자주 오는 곳이거든요. 진짜 맛도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젠 둘이서만 도란도란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에도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둘이 저렇게까지 잘 맞는 이유가 있겠지.

내가 배가 고프다는 걸 인식하고 나니 주변의 음식 냄새가 슬슬 내 위장을 자극하는 것이 느껴진다.

대체 음식, 언제 나오냐.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마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하는 종업원.

“어머~ 진짜 이쁘다.”

“그쵸 그쵸? 음식이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보기도 좋다니까요.”

이젠 아예 이모와 지나가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배가 잔뜩 고픈 상황에서 바로 눈앞에 음식이 잔뜩 놓이기 시작하니, 절로 입에 침이 고인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의 서빙이 끝남과 동시에 포크를 들어올렸다.

배고파… 밥… 내게 밥을 줘…!

찰싹.

그와 동시에 내 손을 찰싹 치고 들어가는 지나의 손.

“야 잠깐 기다려! 사진 찍으려고 하시잖아.”

“엉? 음식을 앞에 두고 무슨 사진…?”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내 눈에, 폰을 들어올린 채 머쓱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 이모가 보였다.

[“두 사람 왜 그렇게 빨리 친해졌는지 전 알 거 같은데요.”]

【“그렇군. 나강림에 비해 훨씬 눈치가 빨라.”】

“그래. 사진. 사진 중요하지. 사진 찍어야지.”

나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폰을 꺼내 헐레벌떡 사진을 찍는 척 카메라 앱을 켰다.

“알겠으니까 옆으로 좀 비켜줄래? 이모 먼저 찍으시게.”

“어? 어… 그래….”

나는 기가 죽어 옆으로 몸을 비켜주었다.

[“마스터. 마스터는 평생 연애를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조용히 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잠시간의 포토 타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설지나… 음식 맛이 보기보다 안좋기만 해봐라.

잔뜩 실망한 척할 테다.

“…맛있어.”

“…괜찮네.”

하지만 이 혼자만의 대결에서 패배한 건 나였다. 입에 넣은 음식은… 지나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거든.

다행히 배가 고픈 것이 나만은 아니었던 듯, 잠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 평화롭게 식사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DUDADADADADADA!

“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갑작스럽게 레스토랑의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일이래?”

당연하게도 바깥의 소란은 우리가 있는 레스토랑에도 영향을 쥐 시작했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제인. 지금 바깥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은데?

[“네. 마스터 지금 확인 중입니다… 마스터! 테러. 테러입니다. 불곰파의 급진파벌이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에요. 총기, 총기 난사입니다.”]

뭐? 총기난사? 갑자기 왜? 요즘 불곰파 다들 되게 조용했잖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지금 당장 조사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DUDADADADADADA!

아까까지 멀게 느껴지던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은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 당장 저들이 하는 일을 막아야만 한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바로 그때.

덥썩.

이모가 나와 지나의 손을 잡는다.

“얘들아. 바깥에서 무슨 사건이 터진 모양이야. 고개 숙여. 고개 숙이고 테이블 안으로 몸을 숨겨. ”

어. 아니 이모. 지금 내가 가서 상황을 정리해야할 것 같은데… 어 이모?

“둘 다 고개 숙이고 절대 움직이지 마. 곧 경찰이 올 거야. 경찰이 올 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숨어있자.”

나와 지나의 손을 꼭잡은 채 테이블 밑으로 내려간 이모가 이번엔 나와 지나를 꼭 품에 안았다.

아니… 이모….

내가 가야 지금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모?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너희를 지킬게.”

*    *    *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이소희는 가장 먼저 자신의 조카, 강림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은 여기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도 함께 있는 상황이다. 오늘 같은 날에는, 경찰에게 사건을 맡겨도 괜찮을텐데….

“나… 잠깐 화장실 좀….”

하지만 이소희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조카, 강림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결연한 의지를.

그 결연한 표정을 보는 바로 그 순간, 이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강림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바로 지금, 오늘만큼은,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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