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히어로로 살아간다는 것
“당장 나가라고!”
좀처럼 화낸 적 없는 강수아의 목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져 나온다.
유진은 그 분노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화를 내면 사과하면 된다곤 했지만, 수아가 진심으로 자신들을 향해 화를 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진도 친구들에게 알려주기 힘든, 입을 열기 힘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강림이 자신의 사정을 알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줬었던 것처럼, 유진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힘들어하는 수아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던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유진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분노한 수아의 목소리를 들은 소연도 놀라 몸을 움츠렸다.
실수였구나.
소연은 친구가 무엇인지, 친구끼리의 예의가 어떤건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래서 유진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 사실, 유진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다만, 친구의 정의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유진도 소연도 간과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수아의 할머니께 수아의 과거를 들은 이후론,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던 참이다.
할머니께 들었던 수아의 과거는 충격적이었다.
빌런에 의한 협박, 납치, 그리고 결국 빌런에게 살해당한 부모님.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 완전한 속사정을 듣진 못했지만,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할 만한, 아픈 이야기였다.
‘고것이… 수아가 국민학교 2학년이나 됐을까? 햇수로 치면은 10년은 더 된 일이지. 그때 이후로 그러는 게야. 눈을 가리면 자꾸 그때 생각이 나는가 보다.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
유진도, 그리고 자신도, 수아가 가지고 있을 아픔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어? 그게 수아야… 난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이야기? 무슨 이야기?”
도유진의 말에 곧바로 날 선 말투로 받아치는 수아를 보며, 소연은 곧장 옆에 있는 유진의 팔을 잡았다.
다혈질적인 성향이 있던 유진이 갑자기 싸움을 벌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수아네 할머니가 계시는 곳이다. 싸움이 크게 번지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
유진의 얼굴을 본 소연은 다시 한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유진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수아야.”
* * *
원래 같았다면 눈물 흘리는 유진의 모습에, 강수아도 조금 슬픔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묘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런 유진의 눈물에도 슬픔과 안쓰러움은커녕, 짜증만이 치솟아 오를 뿐이었다.
오늘 겪었던 일들 때문일까?
눈물 흘리는 유진의 모습을 본 강수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너만 잘못한 거 아니야. 나도 잘못했어.”
〔“사실 알고 있잖아?”〕
갑자기 수아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네가 화난 이유는, 너 스스로가 나약해 빠졌기 때문이야.”〕
‘내가… 나약해 빠져?’
〔“그래. 그까짓 어린 날의 사고 때문에, 넌 오늘 네 동료 히어로를 죽일 뻔했잖아?”〕
수아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 위에서 떨어지는 건물 파편을 막아주던 다크 카이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았다.
자신이 깨어나는 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다크 카이저도 그렇게 크게 다치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 애초에 자신이 거기서 기절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자신이 나약해진 탓이다.
최근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스스로가 진짜 고등학생이 돼버린 거라 착각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분명, 강수아가 아니라 퀘이사로서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었을 텐데.
강수아는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나 이제 너희랑 친구 놀이 같은 거 더 이상 못할 거 같아.”
수아는 어제 일어난 일로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히어로에게 동료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는 필요 없다.
“미안… 미안해… 난… 난 몰랐어….”
수아의 말을 듣고 나서, 가방을 집어 든 채 몸을 돌려 바로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도유진.
“어? 어?”
잠시 멍해져 방안과 바깥으로 나가버린 도유진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소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가보겠습니다. 오늘 일은 미안해, 수아야….”
할머니와 수아에게 인사를 한 뒤, 소연은 도유진을 찾기 위해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그런 소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아의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수아야. 내가 미안허다. 저 아이들은 잘못 한 게 없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던 수아가, 몸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왜 할머니가 사과해? 할머니는 잘못한 거 없어.”
“내 살면서 네 친구들이 나한테 전화를 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게야.”
할머니의 말을 들은 수아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수아는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잠시 심호흡한 뒤 말했다.
“할머니.”
수아가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내 친구들이랑 있었던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말고 쉬셔.”
강수아는 방문을 닫았다.
쾅!
분노를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도 문을 닫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퀘이사가 아닌, 슈트를 입지 않은 강수아로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나?
지금은 언제 진심으로 화가 났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강수아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엎어치기 한 것도 자신이고, 친구들이 걱정하는데도 전화도 연락도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도 자신인데….
좋은 마음으로 온 친구들에게 화를 낸 꼴이었다.
내일부터 학교는 또 어떻게 가야 하나?
강수아는 그대로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피곤한 하루였다.
* * *
여긴…?
나는 어느새, 흰 공간 안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붉은 피로 범벅이 되었던 흰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백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또다시 환각 속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정신을 차리기 위해 허벅다리를 세게 꼬집어보았지만, 환상에서 벗어나지진 않았다.
【“뭐 하는 거냐? 바보같이.”】
그런 내 귀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인데….
생각해보니, 환상을 보았을 때에도 분명 뭔가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산 넘어 산이라고, 무력적인 부분이 강해지니 이젠 정신지배 능력에서 약점이 드러난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 중에서는 정신지배를 주능력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꽤 많다.
앞으로 대적해야 할 적들을 위해서라도, 정신력을 강화시킬 방법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다.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우두커니 있던 바로 그때.
【“날 봐라.”】
또. 또 들리네. 진짜. 미치겠다.
하지만 나도 엄연히 오른쪽 눈에 정신지배와 비슷한 능력이 존재한다.
그렇게 쉽게 패배하진 않을 거다.
나는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천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모습을 드러내.”
【“거기가 아니다. 밑. 밑을 봐라.”】
뭐? 밑?
나는 익숙한 목소리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그곳에는 검붉은색의 개구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알아차리는군. 둔한 놈 같으니.”】
오래전, 한번 본 적 있는 듯한 모습.
“너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다.”】
“지옥 개구리?”
【“…지옥의 군주다.”】
내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개구리는, 내 슈트 안에 봉인되어 나를 보조해주던 지옥의 양서류 벨제뷔트였다.
【“지옥의 군주라고.”】
“그래. 알겠다. 확실하네. 벨제뷔트 맞네.”
정신공격에 당해 환각을 본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지옥의 군주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분명 벨제뷔트가 맞았다.
【“아까 환상 속에서 본 곳이, 바로 여기였나 보군?”】
흥미로워하는 듯한 벨제뷔트의 목소리. 이 녀석, 뭔가 아는구나?
“어 맞아. 여긴 뭐지?”
【“여긴… 네 정신세계다.”】
뭐? 내 정신세계?
나는 황량한 흰색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본 정신세계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거기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세계는, 유일하게 제인이 함께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
벨제뷔트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나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눈치도 빨라지는군. 1년도 안 된 시간 동안 눈에 띄게 성장이 빨라. 아니, 원래는 더 오랜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나랑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나와 계약을 하자. 나강림.”】
“뭐? 계약?”
갑자기 이제 와서 무슨 계약? 원래 계약 없이도 힘 잘 빌려주지 않았나? 제인이랑 따로 계약했다며.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난번 제인이 사라졌을 때 느꼈다. 제인이 또다시 잠드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너를 지키기 힘들어지게 돼.”】
그때 헬 카이저 놀이 하면서 재밌게 즐겼잖아 너.
【“…그랬지. 하지만 그건 내가 힘을 주기 위해선 결국 슈트라는 매개체를 한번 거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게 직접적인 힘을 주고 싶다고 제안하는 거야.”】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벨제뷔트를 보며, 나는 갑자기 강한 의구심과 걱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같이 지내며 본 벨제뷔트는, 괴팍한 면이 있긴 해도 악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내게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래서 봉인을 해제하고 도망갈 빌미를 마련하는 거라면? 그래서 이 지구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는 거라면?
【“…계약 조건에, 절대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걸 명시하도록 하지.”】
화륵.
내 얼굴 위로 떠오르는 계약서.
천천히 읽어본 계약서의 내용은, 사실상 온전히 내게 모든 힘을 빌려주겠다는 내용만이 씌여있었다.
“…대체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해피엔딩.”】
뭐?
【“너와 함께 지내며, 나는 꽤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네가 원래 있던 세상에선 이 세상이 만화 속 세상이었다는 것도, 또 그 세계에선 이 세계가 한번 멸망했었다는 것도.”】
한번 말을 쉰 벨제뷔트가 재차 입을 연다.
【“나는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네게 힘을 주고 싶다.”】
* * *
【“그리고 나는, 나강림, 너의 이야기의 해피엔딩 또한 바란다.”】
나강림이 사라진 곳을 지켜보던 벨제뷔트가 아무도 없는 흰 공간에서 홀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더 말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동화율이 100퍼센트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제인의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그 말을 결국 하지 못했던 것은, 아직 제인과 했던 계약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 스스로도 알고 있을터였다.
자신의 능력이, 점점 제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현재 소년의 상황으로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겠지.
【“나도, 꽤나 감상적으로 변했군. 인간 세상에 오래 지낸 탓인가?”】
점점 무너지는 소년의 정신세계 안에서, 벨제뷔트는 고개를 돌려 ‘그놈’이 숨어있는 곳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여긴 이미 사는 사람이 둘이나 있거든. 미안하지만 여기 네가 있을 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