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킬레이븐(2)
<새로운 빌런 집단 나타남. 빌런 집단의 이름은, 킬레이븐. 킬레이븐. 목적은 다크 카이저의 죽음.>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말한다. 새로운 빌런 집단이 나타났다. 이름은 킬레이븐, 목적은 다크 카이저의 죽음. 다크 카이저의 죽음.>
<구조요청. 구조요청.>
호출기에 떠오른 문장을 보자마자 빠르게 위치추적을 해서 데빌 보이의 위치를 파악했다.
다행히 내가 준 다크 호출기를 사용해준 덕택에, 금방 데빌 보이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제인! 다크윙!
[“네. 알겠습니다.”]
마음이 급했다.
자신의 위치도, 현재 상황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으로 보아 꽤 급박한 상황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가장 먼저 보낸 문장이 구조요청이 아닌, 새롭게 나타난 빌런 집단과 그 집단의 목적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더 쓰리게 만들었다.
[“거기로 가시면 안 돼요! 그 옆 골목입니다 마스터.”]
제인이 홀로그램으로 띄워준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는, 거의 반송장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데빌 보이가 있었다.
나는 허공에서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쓰러져 있는 데빌보이의 상태를 살폈다.
만신창이다.
다크 스코프가 만들어준 튼튼한 슈트는 넝마에 가깝게 변해있었고, 자랑스럽게 내보이던 멋진 도구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마스터.”]
제인의 말대로, 다행히 숨을 쉬고 있는 듯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 위로, 학교에서 매번 보던 한없이 밝던 준석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 때문이다.
한참은 있어야 히어로 활동을 하게 되는 준석이 벌써부터 히어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다크 카이저인 나 때문이었고.
히어로 활동을 하겠다고 나댈 때 제대로 말리지 않고 사이드 킥을 제안했던 것도 헬 카이저였던 나 때문이었다.
[“…고압 감전 상태입니다. 용케도 지금까지 버틴 것 같은데, 최대한 빨리 밀키웨이에게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을 제안 드립니다.”]
내 귓가로 들려오는 제인의 담담한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쓰러져 있는 데빌보이를 앞으로 안아 들고 다크 윙을 펼쳤다.
펄럭.
등 뒤에 만들어진, 두 갈래의 망토가 자연스럽게 날개로 변화한다.
텅!
두 다리에 힘을 줘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곧바로 이어지는 활공.
제인. 최고 속력으로.
[“알겠습니다 마스터.”]
내 머리 옆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몇 개월 전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속력.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속력이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흑염. 이 위로 흑염의 날개를 펼친다면 더 빠른 속력으로 날 수 있을 거다.
내가 흑염의 날개를 펼치려던 바로 그 순간.
[“마스터. 데빌 보이를 구출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위험합니다.”]
제인의 덤덤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직접적으로 파고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 같은 밤에 흑염의 날개는 너무 눈에 띈다.
흑염의 날개가 펼쳐지면 동영상 사이트에 내가 하늘을 날아가는 영상이 수 개씩 올라오곤 했다.
시민들이 매일 같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새롭게 만들어진 빌런 집단의 목적이 바로 나라고 했다.
내가 흑염의 날개를 펼치면 나를 찾고 있는 놈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확 치솟아 올랐다.
분노? 슬픔?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데빌 보이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하루 이틀 만에 회복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에요.”
밀키웨이의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다크 카이저의 눈.
다크 카이저에게서 분노의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분위기를 읽은 밀키웨이는 빠르게 뒷말을 붙였다.
“하지만, 제게 며칠만 시간을 준다면, 아무 일 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만들 수 있어요.”
그제서야 붉게 물들었던 눈도, 분노한 듯한 기색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보며, 밀키웨이는 10분 전, 피떡이 된 데빌보이를 짊어진 채 들어온 다크 카이저를 떠올렸다.
벌컥 열린 문 때문에 밀키웨이는 빌런 집단이 자기를 노리고 쳐들어온 줄로만 알 정도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군. 나요.”
언뜻 담담하게 느껴졌지만, 그 속에는 들끓는 분노가 깔려있었다.
황서현은 과거, 데빌 보이가 다크 카이저와 처음 만났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에도 다크 카이저답지 않게, 꽤 신경을 써준다는 인상이 남아있었다.
혹시, 원래 모습에서 인연이 있는 사이인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밀키웨이는 고개를 돌려 털어냈다.
히어로의 본래 모습에 대해 깊게 알아내려고 하는 것도 실례, 아니 그 이상이다.
같은 히어로 동료로서 히어로의 사생활은 지켜줘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부탁하겠소.”
자신을 향해, 고개까지 숙이고 돌아서 다프네를 빠져나가는 다크 카이저.
“어. 잠깐만요. 혼자 어디 가시게요?”
밀키웨이의 물음에 다크 카이저가 슬쩍 뒤를 돌아본다.
“나를 끌어내기 위해 도발했으니, 도발에 응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소?”
“혼자 가게요?”
끼익- 턱.
밀키웨이의 대답도 다 듣지 않고 다프네를 빠져나가는 다크 카이저.
저 사람… 괜찮을지 모르겠네.
밀키웨이는 방금 들었던, 데빌 보이가 보냈다는 메시지의 내용을 생각해보았다.
새롭게 나타난 빌런 집단. 킬레이븐. 목적은 다크 카이저의 사망.
새롭게 나타난 빌런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빌런 집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크게 다친 사람이 보낸 메시지라지만, 분명 상대 빌런이 한 명은 아닐 터였다.
자신이 한 손 거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데빌 보이의 치료에만 전념해야 할 상황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밀키웨이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 * *
♪♬
강수아는 자신의 오래된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깨어났다.
뭐지? 아직 꿈인가?
정신이 몽롱했다.
어제, 친구들과 싸운 뒤, 억지로 잠을 청했던 강수아는 다음날인 오늘, 이부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느껴지는, 몸에서 펄펄 끓는 열기 때문이었다.
38.7도.
방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강수아의 체온을 잰 할머니가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해주었었다.
바로 어제, 큰 사고를 당했기 때문일까?
히어로 활동을 시작한 뒤로, 처음으로 몸살을 앓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등교하는 것 자체가 걱정되고 있던 참이었다.
거짓말도 하지 않고 학교에 나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
수아의 머리 편에서 다시 한번 벨소리가 울렸다.
그제서야 강수아는 반쯤 잠든 상황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서현 언니♡>
밀키웨이의 번호였다.
무슨 사건이라도 생긴 걸까?
삑-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강수아, 자신이 들어도 놀랄 만큼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머. 수아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 언니… 오늘 몸살 기운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이야? 혹시 사건이라도 생겼어?”
<“어? 아니야. 오늘따라 연락이 안 되길래 혹시 해서 그랬지. 아픈 거면 말을 하지 그랬니?”>
“아… 몸살이 간만이라 정신이 없어서… 언니한테 말하면 언니 걱정만 끼칠 것 같기도 하고.”
밀키웨이의 초능력은 회복능력이지만, 대부분 외상과 관련된 치유능력에 치중되어있다.
몸의 내부를 갉아먹는 병을 치료하는 데에 쓰는 능력이 아니다.
<“…응 그래. 푹 쉬고 몸 관리 잘해.”>
“응… 고마워 언니….”
뚝.
전화가 급하게 끊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강수아의 침전하는 의식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 천천히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 * *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 래피드 스타 공다혁은 지금, 천산시 병원 분만실 안에서 두 손을 잡은 채 기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끄아아아악!”
오늘 점심, 아내 가영이 진통을 느낀 이후로 꼬박 12시간 동안 이어진 사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못난 남편 때문에 항상 고생만 하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끄… 으으으윽!”
가영의 침통한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띠디디- 띠디디-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공다혁의 옷에서 스마트폰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하지만 공다혁은 그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미안하지만, 이쪽도 긴급상황이야. 최대한 빨리 끝내고 그쪽으로 가볼게.>
마지막으로 연락해본 슈팅 노바한테서까지 거절의 메시지가 날아오는 것을 본 밀키웨이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스트로 스타즈가 전부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직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확정인 상황은 아니라 억지로 끌어내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밀키웨이는 분노한 채로 바깥으로 걸어 나가던 다크 카이저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미 이쪽으로는 다크 카이저가 연락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혹시 모른다.
밀키웨이는 마지막으로, 다크 스코프의 호출기로 통신을 걸었다.
<“넵! 다크스코프! 통신 받았습니다!”>
* * *
나는 다프네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킬레이븐.
노골적인 네이밍에서부터 헛웃음이 나왔다.
히어로 활동을 하며 꽤 업보를 쌓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일찍 자신을 적대하기 위한 세력이 만들어질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마스터. 아직까지 잡을 수 있었던 흔적은 없습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인의 보고에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던 분노가 들끓었다.
들끓는 분노가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 아니면 킬레이븐이라는 놈들을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은 마음속에 들끓는 이 분노를 토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화륵!
나는 허공위에서 흑염의 날개를 펼쳤다.
다크 윙의 위에 흑염으로 만들어진 날개까지. 총 네 장의 날개가 내 어깨 위로 피어올랐다.
“우와! 저기 하늘봐!”
“다크 카이저! 다크 카이저다!”
“야 찍어 찍어!”
“또 무슨 일이 생긴거야?”
“와 날개가 네 장이야!”
허공에 펼쳐진 흑염의 날개가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놈들도 내 위치를 금방 발견했을 터.
SNS, 미튜브에도 순식간에 이 영상이 올라갈 터였다.
와라 이놈들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상대해주마.
나는 놈들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흑염으로 긴 꼬리를 만들며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