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킬레이븐(3)
“잭팟! 으하하하! 내가 당첨됐구만!”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는 긴 흑염의 꼬리를 보며, 라이트닝 스파크는 씨익 웃었다.
PZZZZ!
완전히 금니로 바뀐 앞니에 전류가 파지지직 흘렀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제 라이트닝 스파크가 아니라 라이트닝 썬더였던가.
자신을 풀어준, 고스트 카이저라는 놈이 새롭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딴 이름은 그놈이나 부르라고 하지.’
너무 유치찬란한 이름이었다. 그딴 이름을 가져다 쓰느니, 그냥 자신의 옛 이름을 쓰는 편이 더 나을 터였다.
라이트닝 스파크는 다크 카이저, 그리고 다크 스코프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가지고 있던 전력이 깃든 화염의 힘을 모두 빼앗겼었다.
한 줌도 남지 않은 불꽃은, 다시는 라이트닝 스파크의 손에서 피어오르지 않았고, 사형을 선고받고 난 뒤, 그는 그렇게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자신이, 지하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기 전까진.
고통스러운 실험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새롭게 생긴 자신의 능력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불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전격의 힘.
불꽃의 힘을 완전히 거세하는데에 성공했으니, 불꽃의 힘을 흡수하는 퀘이사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으리라.
구출을 약조 받기 전, 그는 고스트 카이저라는 놈과 단 하나의 계약만을 맺었다.
“나간 뒤에 뭘 해도 좋다. 다만, 킬레이븐이라는 이름을 걸고, 다크 카이저. 그놈만큼은 꼭 죽여라. 그걸 약속한다면 널 여기서 풀어주지.”
바라던 바였다.
같이 탈출한 다른 빌런들과 함께 킬레이븐이라는 조직명도 새롭게 받았다.
다만….
“하필이면 내 조직을 뺏어가는 놈이랑 같이 팀을 맺으라니… 그렇겐 못하지.”
놈이 협력하랍시고 만들어준 동료는, 하필 자신의 잿빛망토단을 꿀꺽 삼키려고 했던 그렘린이라는 놈이었다.
다른 한명인, 레드 래빗이라는 놈은 너무 과묵했고.
그랬기 때문에, 출사표를 던지기 위해 히어로 한 명을 손봐준 이후부터는 서로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상황에서 다크 카이저가 지나가는 곳이 바로 자신의 위 상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다크 카이저를 선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ZZZZZZ!
전격의 모습으로 변한 라이트닝 썬더는 다크 카이저가 만들고 지나간, 흑염의 꼬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띠리리리링! 다-크 카이저!
띠리리리링! 다-크 카이저!
텅 빈 골목 안을, 다크 호출기의 호출음이 메웠다.
허리춤에 걸려있는 다크 호출기가 울린다는 것은, 분명 긴급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일 터였다.
평소의 다크 스코프 같았으면 분주히 통신을 확인하고, 긴급 사건이 일어난 곳을 향해 움직였겠지.
하지만, 다크 스코프는, 지금 다크 호출기의 통신을 받을 수가 없었다.
“뭐야? 다크 카이저가 아니네? 잘못 골랐잖아. 남 좋은 일만 시켜버렸구만.”
다크 스코프의 앞에 서 있는 빌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죽여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 먼저 다른 놈부터 죽이고 상대해주면 안 될까? 응?”
기계 슈트로 되어있는 듯, 완전히 쇠로 이루어진 몸. 팔다리에 달려 있는 최첨단 무기.
얼마 전, 아스트로 스타즈들과 함께 소탕하는 데 성공했던 강철 기사단의 보스, 그렘린이었다.
다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완전히 사람이 아니군.”
기계 슈트의 머리에, 실제 본인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머리가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놈이 주축이었나.
다크 스코프의 머리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당시 약화된 놈을 막기 위해서 헬 카이저 님과, 아스트로 스타즈 전체가 달라붙어 싸워야만 했다.
그런 놈을 자신 혼자서만 상대해야 할 상황이었다.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사람? 이런 완벽한 몸을 가지고 대체 왜 구역질 나는 인간의 몸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지? 내 수준을, 한계를 느끼게 될 뿐인데.”
지이잉-칙-
그렘린의 눈이 다크 스코프의 몸을 훑었다.
히어로 네임은 다크 스코프.
다크 카이저의 사이드킥.
정신 계열 단일 슈페리어.
능력은… 보통 인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지능.
하잘것없다. 나약하다.
“보아하니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듯하군. 능력도 하잘것없고… 몸에 덕지덕지 품고 있는 도구들…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하군. 너무 초라해.”
‘다크 카이저라는 놈의 짝퉁이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더 초라하군.’
그렘린은 다크 카이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가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그렘린, 아니, 자신을 홉그렘린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허공을 날아가려는 듯 다리를 움츠린다.
“너 같은 놈이랑 허비할 시간이 없다. 너도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테지.”
구부렸던 다리를 펴며, 추진체를 분사하려던 바로 그때.
PZZZZZZZZ!
그런 그렘린의 다리를 묶어 끌어내리는 전깃줄 하나.
다크 스코프의 손에서 뻗어 나온, 제압줄이었다.
바지지직!!
전기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그렘린이 분사하려던 추진체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렘린은 제압줄에서 뻗어 나온 전력이 자신의 몸을 휘돌며 기계 장치들을 멈춰 세우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그렘린의 옛 몸이 무너지던 때, 한번 겪어본 적 있던 상황이었다.
“너였구나. 지난번 싸움에서 나를 묶어뒀던 게.”
파지지직-!
그렘린의 다리에 묶여있던 전깃줄이 팍하고 끊어진다.
“네가 지난번에 했던 수작이 또 내게 먹힐 것 같나? 상대해주지. 육체의 차이를 똑똑하게 느끼게 해주마.”
* * *
슈우우웅-!
[“마스터. 한 명 따라 붙었습니다.”]
긴 꼬리를 만들며 허공을 날고 있는 내 머릿속으로 제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제인의 띄워준 화면을 보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PZZZZZZZZZZ!
파직거리는 전격이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진심이었네.
놈들의 목적이 나를 살해하는 거라는 소리를, 이미 한번 듣긴 했었다.
데빌 보이가 죽을 각오를 하면서도 호출기로 보내주었던 정보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놈들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만 했다.
내게 따라붙은 놈은… 아직 한 놈뿐인가?
역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끔씩 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봐둔 공터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전투라면, 일반 시민들에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싸움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지난번 총기테러 사건 때엔, 도심지 한가운데에서 폭탄이 터질뻔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칠뻔했었다.
그때의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따라잡았군….”
나와 완전히 따라붙은 놈이 천천히 내 맞은편에 멈춰 선다.
라이트닝 스파크?
탈옥했나?
분명 사형을 선고받고 빌런 교도소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놈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죽어야 할 놈이면 첫 시작으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야? 너… 다크 카이저가 아니잖아.”
놈이 나를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린다.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헬 카이저의 슈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입에 박혀있던 금니에 전기가 번쩍이며 흐른다.
내가 깨부숴버려서 밥은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었군.
아니, 어차피 앞으론 밥을 먹을 일이 없으려나?
“다크 카이저는 어디 가고 너 같은 놈이 서 있는 거냐? 다크 카이저는 어딨지?”
놈이 분노한 기색으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다크 카이저는, 너 같은 놈이 만날 수 있는 히어로가 아니야. 네 상대는 나다.”
“그럼 됐다. 널 죽이면 다크 카이저가 나타나겠지.”
“네가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주먹을 말아쥐었다.
화륵.
내 주먹에 흑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내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서서히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노일까?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 기운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을 뿐이었다.
억제력.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억제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 * *
콰앙!
다크 스코프는 자신의 얼굴로 떨어지는 그렘린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했다.
놈의 주먹이 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간다.
BOOOM!
놈의 주먹이 벽에 틀어박힌 틈을 타 놈의 몸에 건틀렛의 폭발탄을 먹인다.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먼지.
다크 스코프는 곧바로 한참을 뒤로 물러나며 상황을 살폈다.
먼지가 걷히며 드러나는 그렘린의 육체에는, 가벼운 상처조차 생기지 않았다.
“놈! 평범한 인간인 주제에 생각보다 재빠르구나!”
씹어뱉듯 말을 꺼낸 그렘린이 손을 뻗어 레이저를 뿜어낸다.
지이잉-철컥!
다크 스코프가 몸에 입고 있던 갑옷이 빠른 속도로 방패의 모양으로 바뀌며 다크 스코프의 몸을 덮는다.
BOOOM!
그렘린의 레이저와 부딪힌 섀도우 쉴드에 작은 폭발이 일어난다.
삐-삐-삐-
다크 스코프의 눈 위로 방패의 손상률이 떠오른다.
30퍼센트 이상.
레이저 한번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방패의 내구도가 30퍼센트 이상 손실되고 말았다.
가히 가공할만한 위력이었다.
그동안 다크 스코프의 장비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다크 스코프는 상대에 따라 장비를 다르게 갖춰야만 제 위력을 갖출 수 있는 히어로였다.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싸움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계. 한계라니.
다크 스코프는 고개를 저어 떠오른 나약한 생각을 흩어버렸다.
한계라는 말을 떠올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그렘린이라는 놈이 계속해서 지껄이는 단어가, 바로 한계라는 말이었기 때문에.
다크 스코프에게 히어로 활동은 항상 한계와 직면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한계, 가족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한계, 그리고 나약한 육체 능력 때문에 느껴지는 한계.
다크 스코프는 항상, 그런 한계를 뛰어넘으며 히어로 활동을 유지해왔다.
조금 강한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듯, 오늘도 분명 놈을 상대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다시 한번 날아오는 그렘린의 레이저를 피하며, 다크 스코프는 다시 한번 그렘린의 육체를 살폈다.
완벽한 기계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항상 기계와 씨름하고 있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그렘린의 육체에도 결함이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