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킬레이븐(7)
“뭐야? 끝난 거야?”
“쉿. 조용히 있어. 악마 놈이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되면 어쩌려고.”
라이트닝 스파크와 헬 카이저의 전투는 천산시보단, 시외에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공터로 데려가기 위해 유인했던 것인데, 실제로는 꽤 많은 빌런들의 이목을 끌고 말았다.
예상보다 더 많은 빌런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궁금해하며 싸움이 일어난 공터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시외는 브루트 집단인 불곰파의 영역이었고, 불곰파의 빌런들은 공터에서 일어난 라이트닝 스파크와 헬 카이저의 전투를 방관하며 지켜보기만 했다.
라이트닝 스파크는 슈페리어 우월 집단인 잿빛 망토단의 보스였고, 헬 카이저는 천산시 내부를 지키는 히어로다.
어느 쪽이 이기든 지켜만 봐도, 불곰파의 입장에선 득이면 득이지 손해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감 있게 헬 카이저를 도발했던 라이트닝 스파크의 기세와는 다르게, 전투의 양상은 시시하게 돌아갔다.
헬 카이저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흑염과 관련된 능력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 압도적인 신체능력만으로 라이트닝 스파크를 쓰러트린 것이다.
“헬 카이저가 저 정도까지 강한 히어로였나….”
“골치 아프군. 천산시 안으로 진입하려면 저 히어로를 뚫어야 한단 말이지?”
상황을 지켜보던 빌런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잠깐, 저길 봐라.”
터벅. 터벅.
머리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헬 카이저.
장내에 있던 빌런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빛냈다.
압도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라이트닝 스파크에게 상처라도 입었던 걸까?
털썩.
불안하게 비틀거리던 헬 카이저가 결국 바닥에 쓰러진다.
헬 카이저가 쓰러진 뒤에도 장내의 빌런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빌런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모습을 드러내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빌런은, 최소한 이 안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대치하길 한참, 지켜보고 있던 불곰파의 빌런들이 가장 먼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마무리하겠다. 이 겁쟁이들아.”
라이트닝 스파크가 쓰러졌고, 그와 싸우던 히어로마저 쓰러졌다.
불곰파의 입장에선 이 상황에서 헬카이저를 마무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기에 이 주변은 자신들의 영역. 습격과 후환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금방 지원 요청을 시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불곰파의 빌런들이 천천히 헬 카이저를 향해 손을 쓰려던 바로 그때.
SHOOOOOOOONG!
“뭐… 뭐지?”
“콜록 콜록… 무슨 먼지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돌개바람이, 헬 카이저 주변을 감싸 안았다.
빌런들은 잠시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 헬 카이저가 쓰러졌던 곳을 살펴보았지만, 그곳에 헬 카이저는 없었다.
* * *
“허억… 허억… 이놈의 히어로 일… 내가 은퇴하든가 해야지.”
페이퍼 백, 아니 래피드 스타는 헬 카이저를 짊어지고 나오며 숨을 헐떡였다.
래피드 스타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히어로가 아니다.
시간을 천천히 흘러가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혼자 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이용하는 이능계열 슈페리어였다.
그러니까, 본래 같았으면 빠른 속도로 먼지바람을 일으킨다는 식의 능력은, 사용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온 래피드 스타는, 자신의 능력을 빠른 속도인 것처럼 교란하는데 능통했다.
일부러 모아놓은 모래 먼지를 흩뿌린 뒤, 천천히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을 살짝 조종하는 것으로 그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타이밍이 아슬아슬했다. 자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헬 카이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잠시 골목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던 래피드 스타는,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했다.
* * *
“…그래서, 이번 일을 끝으로 이제 은퇴를 해볼까 합니다. 뭐… 은퇴 운운할 정도로 히어로 활동을 길게 한 건 아니지만… 제 손으로 누군가 죽었으니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밀키웨이의 앞에서 치료를 받으며 누워있던 다크 스코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은퇴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크 스코프는 빌런을 죽였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형의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다크 카이저의 사이드 킥으로서, 다크 카이저의 의지를 잇는 것이 다크 스코프의 규약이었다.
그런 규약을 어기게 된 만큼, 그걸 위해 얻었던 능력들도 힘을 많이 잃게 돼버렸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물건도 있고, 기억들도 남아 있는 탓에 당분간은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크 스코프라는 히어로의 특성상, 계속해서 도구들이 발전하지 않는다면 히어로 활동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된 이번 전투의 끝에서, 자신이 히어로 활동을 하기 위해 버렸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도 끊임없이 자신이 혼자 사는 아파트에 찾아와 잔소리를 하던 아내의 얼굴이, 말썽꾸러기로 속을 많이 썩이던 아들의 모습이, 가장 마지막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 얼굴이 떠오른 바로 그 순간, 다크 스코프는 자신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가서 도와드렸어야 하는 건데….”
다크 스코프의 이야기를 들은 밀키웨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든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해피엔딩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밀키웨이는 헬 카이저를 구출해온 페이퍼백이, 조금도 쉬지 못하고 다급하게 바깥으로 빠져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아내가 출산을 힘들어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잘 되었으면 좋겠건만….’
* * *
“허억… 허억….”
헬 카이저의 구출에 성공한 이후, 래피드스타는 또다시 쉬지 않고 달렸지만, 병원의 입구 앞에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히어로 슈트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병원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인적 없는 골목에서부터 병원 입구, 병원 입구에서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서 분만실까지.
“헉… 헉….”
달려오는 래피드스타의 마음속엔 먹구름만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슈페리어라고 해도, 계속해서 능력을 사용할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순간들, 숨을 돌리기 위해 능력을 잠시 해제해야만 하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큰일이라도 일어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
히어로 활동을 하는 자신을 항상 믿어주고 밀어주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
다혁의 아내 가영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가영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들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떠올랐다.
밥 먹는 것 하나, 물 마시는 것 하나까지 조심해왔던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어쩐지 비슷한 일을 겪어본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가영의 죽음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함.
어느새 다혁은, 뛰쳐나갔던 분만실의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분만실 앞은 이전과는 다르게 고요하고 조용했다.
“…….”
불길함을 느끼며 분만실에 들어간 공다혁은, 분만실 안의 광경을 보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헉… 헉… 흑…. 흐흑… 흑… 끅… 끄윽….”
공다혁은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딸이래. 여보. 아니 별이 아빠.”
“…미안해… 정말… 정말 고마워… 끅… 흑… 끄윽….”
“뭐가 미안한데… 바보야….”
흐르는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아내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공다혁은 아이를 받아들었다.
따스한 느낌이었다.
* * *
“후우….”
정학근이 밀키웨이의 앞에선 은퇴에 대한 결단을 쉽게 내렸지만, 사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깨어난 헬 카이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은퇴를 알려야 하고, 사공모와 자신이 맡고 있는 구역에 대한 이야기도 회의를 통해 다른 히어로들에게 나눠야만 했다.
가지고 있던 슈트와 장비들의 처분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던 정학근은, 무심코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 아내의 집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오래전, 아이와 함께 살던 자신의 집.
히어로 활동을 하기 위해 마련했던, 작은 닭장처럼 생긴 오래된 아파트와 다른, 따뜻했던 자신의 집.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매몰차게 집을 박차고 나왔을진대.
그렇게 히어로 활동을 하고 싶다던 자신은, 결국 힘을 잃고 이 집 앞에 홀린 듯 걸어오게 된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홀린 듯 걸어온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까지 온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아이의 얼굴도, 아내의 얼굴도.
한참을 현관 앞에서 고민하던 정학근은, 기억하고 있던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렸다.
띠리링-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며, 정학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반찬 남는 거 없나?”
* * *
“허억!”
악몽에 시달리던 강수아의 할머니, 정례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픈 손녀를 간호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인데, 그 사이에도 기억 나지 않는 악몽을 꾼 듯했다.
목덜미가 섬뜩하다.
잠이 깨지 않아 멍한 머릿속을 추스르며, 정례는 방금 꿈속에서 느낀 감정을,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 며느리가 모두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알 수 없는 불길함과 불안함이 목덜미를 잡고 누르는 듯한, 묘한 느낌.
그 섬뜩한 느낌을 곱씹으며, 정례는 몸을 일으켰다.
손녀가 잘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덜컥… 덜커덕… 덜컥… 펄럭… 펄럭….
손녀의 방을 향해 가던 정례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금 안심했다.
좁은 방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방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끼이이익-
작은 집, 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정례는 손녀의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아… 아이고 수아야!”
덜컥… 덜커덕… 덜컥… 펄럭… 펄럭….
열린 방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수아가 다음날 입기 위해 다려놓은 교복 한 벌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요란하게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