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정신지배(3)
다시 정신이 돌아온 강수아는, 자신이 낡은 빌라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궁전 빌라.
천산시에 흔히 보이는, 이런 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빌라들 중 하나였다.
수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여전히 몸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마치,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작은 티비로 바깥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몇 번 더 용을 써보던 강수아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낡은 빌라 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움직이던 메두사가 빌라의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메두사의 등 뒤를, 자신의 몸도 천천히 따라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메두사가 복도 안으로 들어서자, 201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복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강수아는 그런 모습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신은 아직 히어로 슈트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 일반인을, 이 악독한 빌런이 어떤 짓을 해버릴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흠큼흠… 에이씨. 옆집 아줌마 대체 뭐 하고 사는 거야? 진짜 냄새 너무 고약한데. 여기다 쓰레기 버렸나?”
하지만, 그 남자는 메두사와 퀘이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줌마! 여기다 쓰레기 버리지 말랬죠! 아줌마!”
아니,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몇 개의 방을 지나치는 동안 강수아와 메두사는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마치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마치, 그들이 이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402호.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작은 빌라의 꼭대기층 중앙방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메두사와 강수아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
퀘이사를 끌고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온 메두사는, 가장 먼저 오늘의 전투로 얻은 수확을 확인해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시험관을 몇 번 흔들어본 메두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의 규모가 작았음에도 생각보다 꽤 많은 양의 혼돈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퀘이사라는 이 어린 히어로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작은 규모의 짧은 전투로 이 정도의 혼돈력을 모을 수 있었다면, 더 많은 히어로들과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더 많은 혼돈력을 모을 수 있으리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터였다.
자신의 오랜 목표였던, 악신 릴리트의 강림을.
“음?”
생각에 잠겨있던 메두사의 완드가 품속에서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동하는 완드를 손에 쥔 메두사는, 여기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 손님 맞이를 준비해야겠어.’
메두사는 품에서 완드를 꺼내들었다.
‘내 아이야.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렴.’
* * *
찾았다.
오른쪽 눈의 능력을 통해 빌라 안을 들여다본 나는, 퀘이사와 메두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여기였잖아?
[“90프로의 확률로 여기가 맞다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나머지 10프로는?
[“이 건물 아래의 지하에 다른 공간이 존재할 확률이요. 지하 공간이 존재했다면 찾기 더 골치 아팠을 텐데. 다행이네요.”]
빌런이 아지트로 삼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한 곳이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그래서 이런 곳을 더 골랐을까?
나는 나를 믿고 따라오던 일행들에게 분석 결과를 알려주었다.
“다크 스코프가 내게 알려준 정보, 그리고 진행 방향과 속도를 파악한 결과, 9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저 건물 안에 있을 거라는 결과가 도출되는군.”
내 설명을 들은 소연과 밀키웨이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감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유진이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이에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유진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음?”
“갑자기 동료 히어로에게 급박한 일이 생겨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알겠는데요. 저희는 사실 제 친구를 찾으러 왔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퀘이사의 정체가 친구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퀘이사와 강수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야 당연히 이곳까지 오는 게 맞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밀키웨이와 강수아의 할머니뿐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수아도 분명, 여기서 구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잠시 당황한 탓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본 밀키웨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 소개가 늦었죠? 저는 수아의 가장 친한 언니인 황서현이라고 해요.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보니, 함께 빌런의 타겟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친구를 잃은 여러분껜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밀키웨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깜짝 놀란 도유진이 손을 휘휘 젓는다.
“어? 어? 아… 아니에요. 수아의 친한 언니시면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있나요? 도우려고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안해요. 정확한 사정에 대한 설명은 내 입으론 지금 할 수 없어요.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혹시 알아차린 사실이 있더라도 모른 척해주시면 더 좋구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상황을 오해했는지 밀키웨이가 짧게 문자 통신을 보내왔다.
내가 도유진과 밀키웨이의 대화를 통해 퀘이사의 정체를 파악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시지를 본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 안에 거주하고 있는 일반 시민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모양인데요.”]
뭐? 일반시민이?
【“일단은 이 건물 안의 시민들을 전부 대피시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까도 건물 하나를 전소시키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더군.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타당한 의견이다.
나는 제인에게 들은 정보와 벨제뷔트의 의견을 일행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럼, 안에 있는 일반 시민들은 제 능력으로 구출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내 설명을 들은 소연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소연의 능력이라면, 확실히 내부에 있는 시민들을 구출해내는 데 유용할 터였다.
아니, 생각해보니 오히려 전투에 뛰어들겠다는 의견보단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나는 소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탁하지.”
“그렇다면… 메두사는 제게 맡겨요. 퀘이사는 다크 카이저에게 맡길게요.”
밀키웨이의 말에 나는 잠깐 움찔했다. 퀘이사에 이어 밀키웨이까지 정신지배에 빠져 버리게 된다면,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밀키웨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소?”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알겠소. 그럼… 부탁하도록 하지.”
그 이후로 우리가 세운 구출 계획은 꽤 간단했다.
나와 밀키웨이는 시민들을 구출하는 동안 메두사의 방 주변에서 메두사를 경계하고 있을 것.
그사이에 소연과 유진이 일반 시민들을 소연의 능력을 이용해 구출할 것.
최근 활약하는 히어로, 다크 카이저와 아스트로 스타즈의 밀키웨이의 이름값이라면 충분히 아무런 소동 없이 조용히 시민들을 구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전의 명제부터가 틀렸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 * *
“그럼 201호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지?”
유진의 질문에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이 기억하기도 좋고, 실수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럼 201호부터 연다?”
소연의 말에 유진은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사람이 없나 봐. 집 비었어.”
“응. 알았어. 그럼 202호 연다?”
“어 오케이.”
시민의 구출.
경찰을 꿈꾸는 도유진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꿈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소연이 통로를 열고 있는 동안, 시민들을 구출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몫이나 마찬가지였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 주변에 잡혀있다는 자신의 친구, 강수아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래도 히어로들과 함께 친구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친구인 수아는 빌런에게 사로잡혀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유진도 마약 공장에 잡혀간 친구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길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유진은 가끔 그때 상황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악몽을 꾸곤 했다.
히어로를 정신지배해서 나쁜 짓을 벌이고 있는 빌런에게 사로잡혔던 것이 얼마나 무서울지, 도유진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지만… 수아야. 꼭 구해줄게.’
“202호 열렸어.”
자신의 친구, 강수아를 구하려는 어로들을 돕기 위해선, 자신이 맡은 일을 꼭 해내야만 했다.
도유진은 소연이 열어준 통로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큼… 흠… 이게 무슨 냄새지? 좀 무서운데….’
마치 묘하게 썩은 듯한 냄새가 풍겨오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끼며 도유진은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야. 지금 나보다 수아는 얼마나 두렵겠어. 괜찮아. 해보는 거야.’
하지만 그 불길함은, 그 이후로 밀려오는 사명감에 금방 지워지고 말았다.
우적 우적.
무언가를 씹고 있는 듯한, 묘한 소리를 들으며 유진은 안쪽으로 들어섰다.
미묘하게 생긴 괴물이였다.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마치 거대한 살덩어리처럼 보이는 괴물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씹으며 도유진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꺄아아악 소연아!”
도유진은 비명을 질렀다.
* * *
잘하겠지? 좀 걱정되네.
[“걱정하지 마세요, 마스터. 소연이도 유진이도, 전부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구요.”]
맞는 말이야.
제인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다프네에서의 싸움이 지속되었다면 아마 내가 대패하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 당장은 내가 퀘이사를 어떤 방법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402호를 지켜보고 있던 바로 그때.
“꺄아아악! 소연아!”
쾅! 쾅! 쾅!
갑작스러운 비명이, 2층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