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80화 (180/236)

180화

은퇴식

외우주의 신을 불러오겠다던 메두사의 계획은 그렇게 끝이 났다.

공식적으로, 메두사가 벌인 일은 모두 정신계열 빌런의 실험에서 만들어진 일로 보도가 되었고, 갑자기 도심지에서 나타난 괴물들 또한 정신계열 빌런이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퀘이사가 정신지배를 당하는 동안에 저지른 사건은 히어로들을 공격했던 것밖에 없었으므로, 히어로들이 일제히 입을 다묾으로써 외부에는 아무런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다.

빌라 안에 머물던 사람들만이, 강림할 뻔한 릴리트의 힘에 억눌려 정신을 잠깐 잃었을 뿐, 큰 사건이 벌어졌던 것에 비해 다친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메두사가 벌이려던 일은 어쩌면 이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만들 수 있던,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인해 오늘도 천산시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렇게 천산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의 은퇴식이 있는 날이었다.

멋진 정장 슈트 대신, 히어로 슈트를 차려입은 나는 내 동료들의 은퇴식에 참여하기 위해 공중을 날고 있던 중이었다.

쉬이이익-

최근 점점 육체 능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허공을 날아가다 보면, 예전엔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거든.

“나, 남자친구 생겼다?”

“뭐? 네가 말했던 그 남자랑?”

친구끼리 하는 사소한 연애담부터,

“어 여보. 지금 과일가게 앞인데… 딸기 먹고 싶다고 했었지?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아내의 심부름을 나온 남편의 통화 소리.

“엄마. 저 오늘 참고서 사야 하는데 용돈 좀 주시면 안 돼요?”

“뭐? 엊그제도 참고서 사야한다고 돈 타갔잖아?”

“어제는 영어고 오늘은 수학이에요.”

가족들의 사소한 잡담까지.

순찰을 하며 이런 사소한 대화들을 스쳐 지나가며 듣는 것이, 요즘 나의 소소한 취미 거리 중 하나였다.

한참을 그렇게 날아가고 있는데, 최근 꽤 조용하던 악마가 내게 물어왔다.

【“서운하지는 않은가? 이렇게 큰 사건을 해결했는데도 아무런 공치사를 받지 못했는데 말이지.”】

“욘석 또 엄마한테 거짓말을 치려고 하네? 어디 참고서 가져와봐.”

“으아악! 엄마 잘못했어요.”

잠시 건물의 옥상에 멈춰서서 평화로운 거리의 모습을 내려다본 내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    *    *

잠시 허공을 날아 내가 도착한 곳은, 다프네가 아니었다.

다프네는 퀘이사의 불꽃에 사실상 전소되어버렸거든.

전소되어버린 다프네 대신, 새롭게 우리의 아지트가 된 곳은….

밀키웨이 황서현이 새롭게 만든 가게였다.

다행히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나 뭐라나.

다프네만큼 크고 멋진 공간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다.

나는 타투 밀키웨이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이제 왔어요? 오늘 같은 날도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아나 봐.”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날카롭게 날아오는 밀키웨이의 핀잔.

“…벌써 다른 사람들이 다 온 거요?”

나름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또 꼴찌였던 모양이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밀키웨이의 모습을 보았다.

이미 오래전 메두사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던 밀키웨이는, 혹시라도 우주의 신이 이 세상에 강림하려고 할 때를 대비해서 자신의 몸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릴리트가 이 세상에 강림해서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자신의 몸에 그려놓았던 것이다.

결국, 릴리트를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밀키웨이의 온몸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은 전부 흉터로 변 말았다.

“뭘봐요?”

“어? 아… 아니오.”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 멍하니 흉터를 들여다봤던 모양이다.

“남은 흉터는 다시 타투로 덮으면 되니까요.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그걸로 됐어요.”

“…동의하오.”

뭐라고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들어가 봐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밀키웨이의 말에 나는 문을 열고 뒤쪽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

“지금까지, 다들 고생해주어서 고맙소.”

우리들끼리 하는 은퇴식은 단촐했다.

뭐… 사실 은퇴식이라곤 했지만 큰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 자주 만날 수 없는 히어로들이 전부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하며 웃고 떠들고 마시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지금껏, 다들 바쁘게 활동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긴 했으니까.

오늘 은퇴를 하는 인원은 총 셋.

초능력을 잃은 다크 스코프 아저씨와 회복이 힘든 부상을 입은 데빌 보이, 그리고 마법의 힘을 모두 소모해버린 밀키웨이.

하지만 그들의 은퇴식에 참여하는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히어로들 중, 우리와 친밀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트로 스타즈의 멤버들과, 나, 다크 스코프와 데빌 보이, 그리고 사공모의 회원들 몇 명까지.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

“우와…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히어로들이 여기 다 있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날이 올 줄이야.”

데빌 보이.

“참… 이런 거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언니. 그래도 해주면 받아.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밀키웨이까지.

“… 그래. 정말 다들 고마워요.”

해봐야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하려는 히어로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지금껏, 고생해주셔서 감사해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히어로들이었어. 이젠 우리에게 뒤를 맡기고 편하게 쉬라고.”

“고마워요. 여러분.”

“다들… 감사합니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인사를 받다가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다크 스코프.

저거… 저 아저씨 저러다가 우는 거 아니야?

그래도 저 아저씨 나이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 펑펑 울면 안 되지.

조금 걱정 스러워진 내가, 다크 스코프 아저씨에게 다가간 바로 그때.

“다… 다크 카이저님… 지금… 지금까지… 정말… 감사… 감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내 얼굴을 본 다크 스코프 아저씨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더…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는데….”

“…지금껏 이미 많은 사람들을 구했소. 할 만큼 한 거야. 고생 많았소.”

“안 그래도 인원도 부족하고… 할 일도 많고… 제가 없이 이 도시를 전부 관리할 수 있으실지….”

참… 별 게 다 걱정이네. 이 아저씨.

“그런 건 걱정 마시오. 그런 걸 해내려고 있는 게, 바로 히어로들이니까.”

“다크 카이저님… 가끔 연락해도 됩니까?”

“그래. 언제든지.”

“그럼… 가끔 놀러와도 됩니까?”

“…그래 언제든지.”

“어헝헝헝.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다크 카이저님.”

철커덕 철컥

내 말에 무거운 슈트를 철컹대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 다크 스코프 아저씨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정 많은 아저씨라니까.

*    *    *

“어허헝헝헝.”

데빌보이, 박준석은 울음이 터진 다크 스코프에게 시선이 쏠린 틈을 타, 건물의 바깥으로 나왔다.

싸늘한 가을 공기가 뺨을 스쳤다.

그래도, 자신이 은퇴할 때에는 와줄 줄 알았는데….

사이드킥인 자신이 은퇴한다는 데에도 와주지 않는 헬 카이저가 오늘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뭘 기대했단 거지?”

“어?”

잠시 숨을 돌렸으니, 자리로 돌아가려던 데빌 보이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올려 바라본 곳엔….

헬 카이저가 망토를 휘날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해결해야 할 사건이 있어서 조금 늦고 말았군. 미안하구나.”

쉬익-

자신을 향해 날아온 물건 하나.

데빌 보이는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다크 카이저가 나눠주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호출기였다.

“지금껏 고생했다. 나의 사이드킥, 데빌 보이여. 이 도시는 내게 맡기고 푹 쉬어라. 언제나 네가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할 테니.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걸로 나를 불러라.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

데빌 보이는 삐져나오려던 눈물을 꾹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감쌈다!! 뽀쓰!!”

지지직-

마치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헬 카이저의 모습이 흩어졌지만, 데빌 보이는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헬 카이저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고 있었다.

*    *    *

잘 하고 왔냐?

눈이 퉁퉁 부은 채 안으로 들어오는 데빌 보이를 보니, 잘한 것 같긴 하지만.

알면서도 한 내 질문에 벨제뷔트가 똥 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른다.”】

저거 또 이런 일 시켰다고 화났나?

야 어떻게 해. 내 몸이 두 개가 아닌데. 너가 좀 도와줘야지.

【“알겠다. 됐다. 알았으니 앞으로 나한테 이런 창피한 일 시키지 마라. 얼굴이 화끈거려서 원.”】

뭐야? 악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러는 거야?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다들 은퇴하면 뭘 하고 지낼 거야?”

한참을 먹고 떠들고 있던 찰나에, 퀘이사가 입을 열어 은퇴하는 인원들에게 질문했다.

“음… 저는 타투 가게도 새로 열었으니, 타투도 계속 그릴 거구… 히어로들의 치료활동은 계속하려고 마음 먹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은퇴했다고 다들 너무 걱정 안 하고 언제든 놀러 와도 될 것 같아요.”

밀키웨이의 말.

“저는… 호신 장비를 만들어서 장사를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시민들의 치안에 도움이 될 것도 같구요. 가족들도 많이 도와줄 거라고 합니다.”

다크 스코프 아저씨의 말.

“어… 나는… 공부 열심히 해야지. 아직 나는 어리니까.”

데빌 보이의 말까지.

“다들… 잘 되었으면 좋겠네.”

“그러게요. 다들 잘됐으면 좋겠다.”

“자. 자. 언제 사건이 일어날지 몰라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그래도 건배 한번 하는 게 어떤가?”

슬슬 동료들이 떠나간다는 것이 실감 될 때쯤, 페이퍼백이 음료수가 든 컵을 들고 일어섰다.

“건배를 할 거면 건배사도 해야죠.”

“은퇴하는 우리 친구들을 위해. 어때?”

밀키웨이의 말에 퀘이사가 의견을 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다크 스코프 아저씨가 입을 열어 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히어로라면 그 말도 나와야지.”

“좋아. 멋진 말을 해준 다크 스코프가 건배사를 하자고.”

히어로들이 모두 자리에서 잔을 들어올렸다.

“은퇴하는 우리 친구들을 위해, 그리고 이 도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도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이 도시를 지킨 히어로들의 은퇴의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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