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98화 (198/236)

198화

불곰파(4)

고태용은 눈을 떴다.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처럼 머리가 욱신거리고 매스꺼웠다.

‘내가 방금 잠에 들었었나? 내가 아까까지 뭘 하고 있었지?’

잠깐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가다듬자 방금까지 겪었던 일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크 카이저를 쓰러트리고 보고를 하려던 도중이었지.’

방금 전, 자신과 같은 조로 배정받았던 스모커와 스핏 파이어가 서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도망쳐 나오던 중이었었다.

그 뒤로… 왜 내가 여기 있게 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오는 머리.

고태용은 고개를 흔들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기억을 지웠다.

그저 잠깐 잠들었었나 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잠이라니. 그럴 순 없는 노릇이지.

고태용은 가물가물해지던 정신을 다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태용은 얼마 걷지 않아 자신들이 아지트로 쓰고 있는 작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명망 높은 강진웅파가 쓰기엔 조금 좁고 초라한 아지트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뭐지? 여기가 이렇게 가까웠나? 아닌 거 같은데….’

고태용은 일단 아지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지트의 안에는 강성한 혼자만이 앉아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다들 어디가고 왜 혼자만 여기 계시는겁니까?”

“기다렸다. 일단 빨리 움직이지.”

화가 난 얼굴로 먼저 아지트를 빠져나가는 강성한.

고태용은 조금 당황하며 강성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생긴거길래….”

“우리 구역에서 깽판을 놓는 놈들이 생겼어. 다들 그놈들을 막겠다고 출발했다. 나는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겠다고 한 거고.”

그 말을 듣자마자 고태용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문철파 놈들이 강진웅파를 찾은 모양이군요!”

달팽이들은 자신들을 불곰파라는 말로 부르지만, 실상 자신들끼리 부르는 이름은 달랐다.

불곰파라는 조직명은 리더인 강진웅이 커다란 곰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따온, 편의를 위해 만든 이름일 뿐이었다.

달팽이들은 뭐든 있어 보이는 이름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작년까진 실질적으로 조직생활을 하는 브루트들은 자신들을 강진웅파라고 불렀다.

끝없는 착취의 고통 속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영웅, 강진웅을 존경하는 의미로.

천산시에서 차별받고 핍박받던 브루트들을 단합시켜 천월군에 자리 잡게 한 것이 바로 강진웅이었다.

강진웅의 이념은 단 하나뿐이었다.

현 사회에서 외면받는 브루트들이 모여 우리들을 지킬 힘을 얻자.

우리끼리 뭉쳐서 산다면 이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에서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처럼, 강력한 초능력을 가진 브루트인 강진웅의 보호 아래에서, 브루트들은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진웅의 투병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강진웅을 오른팔처럼 보필하던 문철은, 강진웅이 아파 거동이 불편해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란을 일으켰고, 불곰파를 거의 장악했다.

자신이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강성한이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고태용은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헤집고 무언가를 쭉 빨아먹은 느낌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또다시 강성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철파 놈들이 우리를 왜 공격해온거지?”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공격한 뒤 진웅 형님이 어딨는지를 물어보겠죠. 그래야 문철이가 조직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철이는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이는 거지? 진웅 형님이 그렇게 잘 대해주셨는데 말이지.”

“문철이는 원래부터 진웅 형님의 방식에 불만이 많았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온건한 방식으로는 빠르게 인정받을 수 없을 거라고.”

진웅 형님은 조금 더 멀게, 우리의 아이들, 다음 세대의 브루트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를 만드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문철은 달랐다.

문철은 지금 당장,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봐주고 변화하길 원했다.

그래서 지금의 불곰파는 강진웅의 이름을 달고 일하지 않는다.

일부러 자신들을 불곰파라고 칭하며 더욱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사고를 저지른다.

그래야만 이 세상이 브루트들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줄 수 있다는 괴변과도 같은 논리 때문이었다.

실제로 세상은 브루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깊이 외면하고 차별하게 되었지.

그러면서도 문철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불곰파의 이름을 앞세워 강진웅의 이름마저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면 끝이다. 고태용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흑사자회놈들이 원하는 대로 다크 카이저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문철파 놈들의 공격만 잘 받아내고 난다면, 흑사자회가 진웅 형님께 약속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문철을 밀어낼 수 있어요!”

거기까지 말을 하던 고태용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성한은 강진웅의 이복동생이었다. 자신이 말한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붉은색 개구리처럼 변한 강성한의 얼굴을 보며 고태용은 입을 벌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    *    *

“으아아아아아악!”

“앗 깜짝이야! 뭐야? 무슨 일이야?”

고태용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퀘이사가 놀라 따라 비명을 질렀다.

잠시 그렇게 비명을 질렀던 고태용이 순식간에 묶여 있던 의자에서 축 늘어졌다.

“아. 별거 아니오. 악몽이라도 좀 꿨나 보군.”

【“이 녀석도 나약하군. 그렇게 무리한 수준의 정신력을 사용한 건 아닌데 말이지.”】

괜찮아. 얻을만한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까 상관없어.

“또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 다크 카이저. 당신이 뭔가 한 거잖아. 대체 숨겨놓은 능력이 얼마나 되는 거야?”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영업비밀입니다. 뭐 그렇게 말하려고 그러지? 참나.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아? 남자가 비밀이 그렇게 많으면 인기 없어.”

퀘이사가 내 말에 툴툴댔다.

[“아니요. 우리 마스터 사실 여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은데요.”]

제인!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마! 창피하니까!

나는 제인의 주책에 빨개지려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생각에 잠긴 척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타개할만한 정보는 얻었어? 얘네 우릴 왜 공격해온 거래?”

“다들 잠깐 뭐라도 먹고 하는 게 어때요? 일단 속이라도 좀 채워요. 다들 힘들었잖아.”

퀘이사의 질문을 적절하게 끊고 나타나는 밀키웨이.

그러고보니 갑자기 라면냄새가 좀 나는 듯 하네.

어쩐지 조금 출출하긴 하던 참이었다.

[“출출할 만도 하죠, 마스터. 오늘 하루종일 몇 번을 싸운 거예요?”]

나는 밀키웨이가 끓인 라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지금 놈들을 심문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 위해 밀키웨이가 데리고 온 또 다른 안전가옥에 숨어있는 중이었다.

“유통기한이 조금 지나긴 했는데… 그래도 못 먹을 수준은 아닐거에요.”

“괜찮아. 내가 평소에 많이 먹어봤는데, 라면은 유통기한 조금 지났다고 탈 안 나더라.”

퀘이사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도 라면을 한 젓갈 집어 입에 넣었다.

조금 흐물한 것 같긴 해도 맛은 나쁘지 않았다.

라면을 먹으며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활동하던 히어로가 죽고 남긴 공간이라고 했던가? 얼마나 부자였으면 이런 공간을 몇 개씩 남긴 거람?

“제가 알고 있는 주인 없는 안전가옥은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마치 내 생각을 잃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해주는 밀키웨이.

밀키웨이는 종종 이렇게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답을 해주곤 했다.

이게 연상의 연륜… 뭐 그런 건가?

그나마 다행히, 이전에 숨어있던 공간보다 훨씬 넓고 시설은 많은 편이었다.

밀키웨이가 자연스럽게 시설들의 위치를 전부 알고 사용하고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여기는 밀키웨이가 예전에 아지트처럼 사용했던 적이 있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가 원래 생활하던 타투 다프네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데 말이지. 왜 그런 데서 지내고 있던 거지? 다프네가 부서진 이후엔 여기를 사용해도 되었을 텐데.”】

벨제뷔트. 역시 악마라서 그런지 인간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밀키웨이가 예전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걸 보면, 전부 어떤 결말이 났는지는 명확하잖아.

【“원치 않은… 이별이었다. 그런 건가?”】

예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이모가, 결국 그 집에 깃들어있는 부모님의 흔적들을 견디다 못해 이사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아무튼… 여기가 알고 있는 안전가옥의 마지막이라는 소리는….

“여기가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말이군.”

“말하자면 그렇죠….”

어차피 영원히 숨어다닐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어찌저찌 지나갔겠지만, 또 다시 내일이 온다면 놈들은 우리를 습격해오겠지.

결국 놈들이 우리를 주 타겟으로 설정한 상황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 레드 래빗님? 이리 오셔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그럴 순 없지. 범죄자인 내가 당신들과 함께 겸상할 순 없어.”

포박되어 안전가옥안에 있는 감옥안에 들어가 있는 레드 래빗이 밀키웨이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레드 래빗은 여기에 오자마자 스스로 감옥 안에 들어가 자리 잡은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렇게 세상과 나를 미워하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된 거지?

“그래도… 자 좀 들어요.”

밀키웨이가 그릇에 라면을 조금 옮겨담아 레드 래빗에게 건넸다.

“으음….”

“겸상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고맙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레드 래빗.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 다음 단계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빌런을 때려잡는 일을 하고 있는데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이기면 되지 않냐고?

지금 가장 무서운 것은, 놈들이 전투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다.

지금 당장은 우리를 쓰러트리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우리의 본래 정체를 위협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지금껏 정체를 제대로 숨기고 있는 나는 좀 낫다.

하지만 밀키웨이는 본래부터 자신의 인생 자체를 히어로 활동에 온전히 내던진 사람이었다.

밀키웨이의 이야기는 조금만 조사하려고 하면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밀키웨이는, 평생 숨어 지내야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나 퀘이사의 본래 정체를 캐내게 될지도 모르고.

아마 벌써 우리의 사생활을 캐기 위해 조사하고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본 결과, 놈들의 동맹은 정말 느슨하기 그지 없다.

어느 한 곳에 구멍이라도 뚫리게 된다면 금방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한쪽이 더는 동맹을 유지할 이유가 없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모양이다.

안전가옥에 작게 난 창문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남은 라면 국물을 모두 꿀꺽꿀꺽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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