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09화 (209/236)

209화

망령당(2)

강담비의 머릿속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갔을 때 자주 보는 새하얀 공간이 아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검은 공간.

이런 공간을 예전에도 한번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식물인간이 된 도지훈의 머릿속이 이랬었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그래. 지훈이 형의 머릿속에 들어갔던 바로 그때.

그때랑 비슷한 상황이라면… 강담비의 머릿속도 지금,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걸어다니게 만든 꼴이다.

멀쩡한 사람의 정신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가지고 놀다니….

순간 머릿속으로 분노가 확 차올랐지만, 심호흡하며 억눌렀다.

지금은 분노에 잠겨 불타오르는 것보다, 차갑게 식어 주변을 살펴볼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조금 걱정이군.”】

어떤 점에서?

【“식물인간이 된 도지훈의 머릿속에서, 우린 몇 날 며칠을 헤매지 않았나? 이곳에서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랬지. 그러지 않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보자고.

【“그리고… 어쩐지 나는 그때의 일도 떠오르는군.”】

그때?

【“네 친구 소연의 머릿속에서 심연을 헤맸던 때. 어쩐지 지금 이 공간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 중이다. 누군가 강제로 만들어낸 듯한, 그런 불쾌한 공간의 느낌을.”】

결국 우리가 미닝리스가 정신 지배를 통해 만들어낸 공간을 탐험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이상하진 않아.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는 두 상황 모두를 겪고도 지금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지.

그렇다면 이곳도, 분명 우리의 힘으로 해낼 수 있을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더 깊은 어둠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망령당의 당주, 미닝리스는 다크 카이저가 자신이 판 함정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며 씩 웃었다.

원래는 정신 안으로 들어온 다크 카이저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었지만….

‘정신에 틈을 만들 수가 없어.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흥미롭군.’

사람에겐 각자 가진 특출난 재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말인즉슨, 반대로 말하자면 재능이 없는 분야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신 지배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미닝리스가 보기엔, 다크 카이저에게 강한 정신력의 재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약한 정신력에 히어로 활동으로 인해 겪은 스트레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정신인데….’

심지어는 이전에도 강력한 정신 공격을 받은 듯한 흔적마저 남아 있어, 더욱더 정신은 나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다크 카이저의 정신을 뚫고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정신을 단련한 탓에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질긴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히어로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굳이 다크 카이저에게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정신을 뚫고 지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신 내부에 침입해 몇 가지 정보를 얻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그중 하나는, 미닝리스가 찾아 헤메던 연백산에 열려 있는, 영계의 문의 위치였다.

구역을 넓히기 위해 천월군을 둘러보던 미닝리스는, 자신이 찾던 영계의 문이 연백산 어딘가에 열려있다는 사실을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생을 찾아왔던 영계의 문이, 사실은 자신이 살고 있던 도시의 바로 옆 산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천산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법한 타이밍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계의 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망령당을 만들었던 것도, 영계의 문을 비집고 열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의 미련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닝리스는 영계의 문을 찾기 위해 연백산을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지만… 미닝리스는 영계의 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닝리스에게 들어온 한가지 보고.

현재 천산시에서 가장 강한 히어로인 다크 카이저가, 매번 주기적으로 연백산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인터넷 등지에서는 그런 소문이 떠돌았었다.

다크 카이저와 헬 카이저, 고스트 카이저.

이들은 이 세상에 열려있는 다른 차원과 이어지는 문을 닫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한 것이라는 소문.

이런 소문은 다크 카이저가 심연의 문을 닫으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괴물들을 쓰러트리고, 열려있던 문을 폭발시키는 영상은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유명한 영상이었다.

완전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것은 아니었던 거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다크 카이저가 연백산에 드나들 이유는, 영계의 문을 닫기 위함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미닝리스는 다크 카이저에게서 영계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어떤 방식을 통해야 정신 속에서 그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미닝리스는 다크 카이저가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크 카이저가 공장장의 정신을 지배해 자신들의 정보를 얻어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미닝리스는 천월군을 급하게 삼키고 싶어 하는 척하며 다크 카이저가 자신이 파놓은 덫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지금, 미닝리스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서 다크 카이저가 다른 이의 정신세계에서 헤메고 다닐 수 있는 시간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함정 안으로 들어간다면, 꽤 오랜 시간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미닝리스는 연백산으로 향했다.

*    *    *

메에에엠- 메에에에엠-

“강림아… 강림아?”

으으음… 이모…? 조금만 더 잘게요… 잠깐만요….

메에에에엠- 메에에에엠- 메에에에엠

뭐야… 무슨 매미 우는 소리가 이렇게 시끄러워?

“나강림! 빨리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다 이놈아!”

뭐? 중천? 나 학교 가야되는데?

나는 깜짝 놀라 침대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엇? 뭐야 지금 몇 시야 이모?”

“몇 시긴, 12시가 한참 넘었어. 일어나서 밥 먹어.”

12시가 한참 넘었다고? 제인? 오늘 일요일이야?

어쩐 일인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

나는 부랴부랴 내 옆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8월 12일 5시 30분]

뭐?

나는 눈을 비비고 스마트폰의 시계를 더블 클릭했다.

[2026년 8월 12일 5시 31분 03초]

시간이 6년이나 거슬러….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맴 맴 맴 맴 맴 맴 – 찌르르르-

“아무리 지금이 방학이라지만 너무 나태한 거 아니니? 군대 전역까지 한 녀석이… 어머 얘 봐. 무슨 꿈을 꿨길래 식은땀을 이렇게 많이 흘렸니? 날이 너무 더웠나?”

나는 이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훔쳤다.

차갑게 식은땀이 축축하게 묻어나왔다.

꿈? 아 그래. 꿈을 꿨나 보다.

꿈이라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불안했던 내 마음이 전부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끔 그런 상황 있지 않은가?

무언가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인데, 어쩐지 꿈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 그런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지금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행히 장기 기증자를 만나 병을 고칠 수 있었던 이모가 퇴원한 지 반년 정도 되는 날이었다.

군대를 막 전역하고 나왔을 때, 이모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천운이 따라 나는 아직도 이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하네.

나는 내 인생에 이모가 없다는 걸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이모…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알겠죠?”

“너 술 먹었니? 갑자기 왜 이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이모.

“걱정하지마. 이제 이모 안 아파. 아주 건강해.”

아픈 건 이모인데… 항상 내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다.

나도 이제 성인이고… 이모가 기댈 수 있는 아들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나약해지지 말고 강해져야겠다.

“어머. 엄청 축축하네. 어서 가서 먼저 씻구와. 이모가 점심식사 준비해놓을 테니까.”

이모가 내 방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잠시 멍하니 내 방을 살펴보았다.

졸업사진, 군대에 있을 때 찍은 사진, 도유진과 찍은 사진….

맴맴맴맴맴맴맴맴-찌르르르르르….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매미 소리.

그런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올라오는 묘한 상실감.

내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느낌에 나는 갑작스럽게 엄청난 불안감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해일처럼 밀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우울감에 젖어 있는 것보단, 지금 이 순간 건강해진 이모와 함께 보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모~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    *    *

어비스 위치, 소연은 눈을 감고 있는 다크 카이저를 보며 다짐했다.

이번 일은, 꼭 잘 해내야 해.

그 누구도 강림이의 몸에 손끝 하나 가져다 대지 못하게 할 거야.

지금껏 함께 히어로 활동을 하겠답시고 옆에 있었지만, 제대로 된 도움을 준 적은 없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가야 할 곳으로 문을 열어준다든지, 사람들을 구출하는데 통로를 만들어 도움을 줄 순 있었지만, 사실 소연 그 자신은 강림이의 싸움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소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연의 차원 안에 사는 괴물, 데다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뿐.

하지만 사실, 소연은 데다이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고작 반년 만에 사람 한두 명쯤은 뼈째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로 성장한, 데다이트의 힘을.

지금은 데다이트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면?

그럼 소연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소연은 그것이 두려워 데다이트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연의 힘으로도 할 수 있을 법한, 사소한 임무 하나를 배정받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꼭 해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지잉-지잉-지잉-

소연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호출기에서 진동이 세 번 울렸다.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정혜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신들에게 하기로 했던 신호였다.

연백산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여기서 다크 카이저를 지켜야만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크 카이저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가며 눈을 감고 있는 다크 카이저.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다크 카이저… 빨리 돌아와 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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