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영계의 틈
나는 차원의 틈이 열리려고 하는 것을 보자마자 체인을 풀어 던졌다.
이게 어떻게 닫은 차원의 틈인데 이걸 누구 마음대로 열려고 들어?
아슬아슬했구나.
나는 등허리로 주룩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꼈다.
그래도 정혜스님이 조금 더 오래 버텨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당해버리셨다.
내가 봤던 원작 속 미닝리스의 정신지배는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원작 속 미닝리스가 누군가를 정신지배하기 위해선, 마약을 이용해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 후에나 가능했었다.
하지만 내가 원작의 내용을 비틀어 버린 탓일까?
미닝리스의 능력도 성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차원의 틈을 붙들고 있어 주마. 걱정하지 말고 놈을 막아!”】
드드득 드득-
말과는 다르게 천천히 비틀어 열리기 시작하는 영계의 틈.
“끄으어어어억-”
안에 있던 영혼들이 점점 바깥으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물이 가득한 댐을 억지로 막는 듯한 광경.
틈을 열어 젖히는 것이, 닫는 것보다 훨씬 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연이 손을 뻗어 올렸다.
쿠구구구구구-
벌어지려던 차원의 틈은 소연이 힘을 보태니 벌어지는 속도가 조금 더 줄어들기 시작했다.
관건은, 지금 틈을 계속해서 열어젖히려고 하는 정혜스님을 막아내는 것이지만….
그전에 내 앞에서 나를 막아서고 있는 미닝리스를 막아내야만 하리라.
나는 눈앞에 서 있는 미닝리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본 스포크들의 가면에는 전부 눈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지만, 내 눈앞의 미닝리스의 흰 가면에는 눈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흰 가면 속 검은 눈동자.
혹시 모를 정신 지배를 대비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지만….
스스스스-
내 눈앞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미닝리스의 모습.
뭐지? 놈에게 다른 능력도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바로 그때.
내 눈앞에서 마치 분열하듯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미닝리스.
처음엔 둘, 그다음엔 넷, 그다음엔 여덟….
순식간에 늘어나는 미닝리스의 신형.
분신술? 초능력으로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단 말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내 눈앞에 있던 미닝리스들이 나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내게 달려드는 미닝리스들을 막아내기 위해 양 주먹을 쥐고 놈들을 상대하려는데.
BangBangBangBang!
뒤쪽에 있던 미닝리스들이 쏜 권총탄이 나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다.
나는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 허공으로 망토를 집어 던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망토가 넓게 펼쳐지며 권총탄들을 막아내기 시작한다.
잠시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사이, 내 코앞까지 치달은 미닝리스들 중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며 나이프를 휘두른다.
천산시의 히어로 다크 카이저로서, 나이프를 들고 덤벼오는 사람은 정말 수도 없이 상대해보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내게 칼을 휘두르는 이 빌런의 나이프 파이팅은….
허술했다.
자세가 엉망인지라 속도도 위력도 나오지 않는다. 예전의 나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공격에 절대 당하지 않는다.
나는 품 안에서 셰도우와 셰이드를, 뒤쪽에서 총탄을 쏟아내는 미닝리스들에게 던지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쉬이이이익-
허술하고 느릿하게 휘둘러져 오는 나이프를 손으로 잡아 빼며 그대로 미닝리스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는다.
펑-
아까 전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리는 미닝리스의 모습.
펑- 펑-!
내가 던진 셰이드와 셰도우에 맞은 미닝리스들도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린다.
…가짜?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 머릿속에서 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지금쯤 제인이 이 상황에 대한 서포팅을 해줬어야 맞는 상황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건….
내가 이미… 정신을 빼앗겨 버린 모양이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걸 의식한 그 시점에 이미 내 정신을 일부 지배해버린 모양이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러는 와중에도 나를 향해 쏟아지는 미닝리스들의 총공격.
언뜻 보아도 방금 내가 줄인 숫자는 전혀 놈들에게 타격이 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면, 나는 이것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는 대신 눈을 감았다.
정신지배 덕분에 내 정신 속에 살고 있는 제인과 대화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제인은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나와 함께 싸워준 파트너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런 제인이라면, 내가 눈을 감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려 줄 터였다.
내가 눈을 감자, 선명하게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제인의 카메라로 찍은 홀로그램 화면.
제인의 카메라로 찍은 화면에는 나에게 총탄을 쏘아내고 있는 미닝리스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미닝리스를 향해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감고도 정확하게 뛰어오자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는 미닝리스의 몸짓.
sheeeeeek!
BangBangBang!
Tudadadadada!
그와 동시에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훨씬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놈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 내 눈을 뜨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놈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라 그런지, 눈으로 보던 거랑 거리감에 차이가 조금 있긴 하지만….
나는 그대로 놈의 얼굴에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귓가에서 울려대던 수많은 소리가 사라진다.
* * *
다크 카이저에게 얻어맞은 미닝리스는, 자신이 정혜에게 걸어두었던 정신지배가 풀려나는 것을 느꼈다.
이젠 틀렸다.
정신지배가 풀리면 셋이 힘을 합쳐 다시 틈을 닫을 테고, 틈이 닫히고 난다면 이 세계에 다시 영계의 문이 열릴 일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바로 코앞에 나의 아내가 있는데….
미닝리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쿠오오오오-
미닝리스는 볼 수 있었다.
“으하… 으하하하하!”
살짝 열린 영계의 틈에서, 영혼들이 바깥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는 모습을…!
“으하하하하! 내가 이겼다 다크 카이저!”
미닝리스는 눈앞으로 날아오는 자신의 아내의 영혼을 느끼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아… 아아아아…!”
* * *
“커억…!”
미닝리스를 쓰러트림과 동시에 정신이 돌아온 듯 피를 왈칵 쏟아내며 무릎을 꿇는 정혜스님.
하지만….
“으하하하하! 내가 이겼다 다크 카이저!”
이미 열려버린 영계의 틈에선 악령들이 세상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해 미안하군…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했는데….”】
“미안해요… 제 마음이 약한 탓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를 향해 말하는 정혜 스님.
“지금은 누구를 탓할 때가 아니오. 이미 벌어진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지.”
영계의 틈이 결국 열려버리긴 했지만, 아직 방어선이 완전히 뚫려버린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게 결계가 되어있는 것처럼, 이곳에 있는 악령들도 결계가 뚫리기 전까지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순 없다.
그렇다면, 이 결계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고개를 돌려 율사님을 찾았다.
나는 영계의 틈을 바라보며 합장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율사님을 찾을 수 있었다.
* * *
“정혜야… 미안하구나. 결국 나의 미련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구나. 죽은 사람은 미련을 가지지 않고 떠났어야 했거늘….”
율사는 결국 열려버린 영계의 틈을 보며 후회했다.
정혜만이 율사를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율사 또한 정혜를 두고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혜에게 율사가 유일한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율사에게도 정혜는 유일한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율사는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아 영계의 틈을 지키고 있을 정혜가 안타까워 쉽게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정혜의 마음에 미련이 남게 되었고, 정혜의 마음에 남은 미련 때문에 결국 영계의 틈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구나.’
최소한, 강림과 소연이 이곳에 왔을 때쯤에는 자신이 떠났어야 했다.
그것을 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룬 자신 덕분에 결국 이 사단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율사는 눈을 감았다.
* * *
율사님이 합장한 채 눈을 감자, 율사님의 몸에서 천천히 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있던 영혼들이 다시 영계의 틈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영혼의 힘을 모두 끌어다 사용하고 있군. 저렇게 한다면 윤회를 포기하게 될 텐데….”】
“율사님! 안 돼요!”
그 모습을 보며 울부짖는 정혜스님.
윤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영혼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듯했다.
벨제뷔트! 제인! 저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벨제뷔트! 너는 지옥의 왕이잖아. 문을 닫는 방법. 다른 방법은 없어?
【“이미 늦었다 다크 카이저. 율사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튕겨져 나온 체인을 다시 한번 집어 던져 영계의 틈을 묶었다.
“정혜스님! 소연!”
지이이잉-
내 부름에 나와 함께 영계의 틈을 닫는 데 힘을 더해주기 시작하는 소연.
“안돼!! 이러면 율사님의 영혼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혜스님은 아직도 선뜻 손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혜야. 산자는 모두 고통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이 세상을 학대하지도, 죽이지도 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해하도록 노력하여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이신지 모르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율사님을 바라보는 정혜스님.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이 세상을 학대한 채 윤회한다면, 내 어찌 부처님의 모습을 보겠느냐?”
“율사님….”
율사님의 말을 들은 정혜스님이 맑은 눈물을 흘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