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용사답지 않은 용사(2).
* * *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휴식 없는 행군에, 노예 후보들이 지쳐가고 있을 때쯤.
휴식 아닌 휴식 시간이 생겼다.
“크흐흐흣, 어디 덜 떨어진 년이 무식하게 움직이고 있나.”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면, 따먹어주십쇼 하고 광고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는 걸 모르나봐?”
산속에서 도적들이 튀어나왔다.
꾀죄죄한 옷차림의 도적들은 탐욕과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애쉬를 훑었다.
위아래로 스쳐지나가는 눈길, 애쉬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으흐흐…. 젖가슴이 잘 무르익었구나. 눈빛을 보아하니, 애를 낳은 적은 없어 보이고…. 좋다, 좋아!”
“박을 만한 구멍이 많아 보입니다, 대장!”
“덜 여문 년들은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웬만하면 건드릴 생각하지 마라. 딱 저 년 정도만, 돌려 먹어.”
도적들은 각자 무기를 빼들고 이쪽을 에워쌌다.
무리하게 군장행군을 이어온 탓에, 노예 후보들에겐 도망칠 기력조차 없었다.
['해제'가 실패하였습니다.]
은근슬쩍 개목걸이에 ‘해제’를 발동했다.
가지고 있는 바늘로 열쇠구멍을 열심히 쑤셔봤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실패했다.
“…….”
낌새를 눈치 챈 애쉬가 나를 흘겼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바늘을 낚아채갔다.
“얌전히 있어.”
“…….”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이라면, 그냥 접어. 어떻게든 다시 잡아올 거니까. 도망쳤다가 잡히면, 그 때부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소매치기’에 실패하였습니다.]
“…미쳤니?”
살기로 그득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다.
“죄, 죄송….”
“다음부터 하지 마.”
나도 모르게 ‘소매치기’를 사용하고 말았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다행히도, 애쉬는 나를 나무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근히 봐주는 것들이 많았다.
‘다음에 확실하게 해야겠군.’
나름 계획을 세우는 동안, 애쉬가 목줄을 놓고 성검을 뽑아들었다.
도적들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성검?!”
“칫, 용사였나…!”
용사의 상징인 성검은 섬마을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용사만이 다룰 수 있는, 선택받은 무구.
“고작 레벨1 성검이야. 쫄지 마!”
“으아아아아압!”
현재 애쉬의 성검은 레벨1.
새내기 용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도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도적무리의 대장이 사기를 북돋으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사방에서 애쉬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에 서있는 노예 후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용사를 제압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촤악!
“……!”
용사는 선하다.
대부분의 용사가 그렇다.
살인을 망설인다.
레벨1의 새내기 용사라면, 경험이 없어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애쉬는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애쉬의 검에, 도적의 팔이 날아갔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단면에 감정이 담겼다.
죽이겠다는 의지가.
“으, 으으…!”
“도망쳐어어어!”
“어디 가냐, 이 머저리 새끼들아!”
애쉬의 성검이 피를 머금었다.
“쯧.”
애쉬는 성검을 짧게 내리 그었다.
뚝뚝 떨어지던 핏물을 바닥에 흩뿌리고는 칼집에 집어넣었다.
느긋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목줄을 다시 쥔다.
“얌전히 있었네? 잘했어.”
애쉬가 내게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시발, 도망갈 생각을 못했다.
날붙이들을 마주 하는 순간, 몸뚱어리가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고라니가 이런 기분이었나.’
치이고 싶어 환장한 것 같은 고라니도,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트를 마주하는 순간 몸이 굳어, 병신 같이 치이게 되는 것일 뿐….
나 또한 그랬다.
칼을 보자마자 움직일 수 없었다.
몸에 흐르던 피가 완전히 응고되기라도 한 듯 굳어버렸다.
치욕적이다.
기회를 붙잡지 못한 나 자신이 쪽팔린다.
그리고, 애쉬의 웃는 얼굴에 설레고 마는 내 마음이 부끄럽다!
“안 도망쳤으니까, 나중에 상 줄게.”
“…….”
“대답.”
“예….”
“…뭐, 짧기는 한데. 천천히 길들이면 되니까.”
애쉬는 그리 중얼거리며 노예 후보들을 부리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도적무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털었다.
“그럼 그렇지, 빈털터리잖아.”
“후유우….”
“…….”
노예 후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난뱅이 도적들 덕분에 더 무거워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도적무리를 탈탈 털어 확인한 후, 애쉬는 노예 후보들을 재촉했다.
“다시 움직여. 빨리 일어나. 오늘 길바닥에서 자고 싶지 않으면, 안 쉬고 움직여야 해. 병신들아.”
애쉬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고, 노예 후보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가자, 강아지야.”
애쉬가 목줄을 잡아 당겼다.
다시 지옥행군이 시작됐다.
얼마나 걸었을까.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이 노예 후보들을 각성시켰다.
기나긴 시간 동안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았다.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친구들의 의지를 보며, 박수가 절로 나왔다.
“…해 지기 시작하잖아.”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는 아니지만, 마차가 왕래하는 길이라서 잡초 하나 자라지 않았다.
그런 길들 이용 한다고 해가 지는 속도를 늦출 순 없었다.
오히려 숲속이라 더 일찍 저물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애쉬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앞쪽 길목이 조금 더 넓어보였다.
“노숙해야 하니까, 저쪽에 천막 쳐.”
“…….”
“야영지 만들라고.”
“네, 넵!”
잔뜩 지친 상태라서 반응이 느렸다.
으르렁거리는 애쉬의 압박에, 노예 후보들은 정신을 차리고 어설프게나마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수인 소녀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노예 후보들이 천막을 치는 동안, 애쉬는 불을 피웠다.
나를 질질 끌고 다니며 땔감을 모아 모닥불 옆에 쌓아두었다.
나는 애쉬를 얌전히 따라다녔다.
거부감이 들 때마다 도적무리를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애쉬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겨우 한줌 남은 자존심이 바람에 흩날리듯 훨훨 날아가 흩어졌다.
타닥, 타닥.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애쉬는 정말 능숙하게 모닥불을 만들어냈다.
‘부싯돌 컨트롤이 수준급이네.’
원작에서도 애쉬가 알아서 다 하던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 나를 찾아서 데리고 다니려는 것 자체가, 원작파괴인데….’
이미 뒤틀렸다.
애쉬 성격은 이렇게 다정하지 않다고, 원작 전개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도 나로서는 바꿀 수 있는 게 없다.
“엑…!”
멍하니 모닥불 앞에 웅크리고 앉아 천막 치는 것을 구경하는데,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연히 애쉬가 당기고 있었다.
“강아지, 이리로 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애쉬가 더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잠자코 곁으로 다가갔다.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묘한 운치가 느껴졌다.
수련회 캠프파이어보다는 못한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애쉬가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맨살은 아니지만, 말랑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거, 이거…!’
불꽃이 얼굴 면면을 비추고, 온기가 닿지 않은 뒤편에 은은하게 그림자가 드리운다.
애쉬의 촉촉한 입술에 내 시선이 고정됐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고서, 애쉬를 향해 다가갔다.
오늘 처음 만났어도, 뭐 어때.
이 년은 허락도 없이 내 첫 키스를 가져갔잖아.
뭔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도 내 주둥이를 막을 수가 없다.
“크흡.”
“……?”
아무리 기다려도 입술이 닿지 않아,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애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올라간 입 꼬리, 웃고 있는 것 같다.
“흐흫, 입술 내밀고 뭐해?”
“에…?”
“강아지는 키스 좋아했구나? 좋은 거 알았어.”
“…….”
자살 말린다.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금 죽으면 될 것 같다.
“나중에 해줄 테니까, 일단 지금은 바지나 내려.”
“예?”
“바지 벗으라고.”
애쉬가 무언가를 쥐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싸늘한 은색의 도구.
엄지에 씌우면 어울릴 듯한, 그런 느낌적인 느낌.
자세히 보니까, 엄지에 씌우기에는 살짝 큰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손목에 걸기 위한 고리도 약간 작은 것 같고….
‘아니야, 아닐 거야. 이 미친년이…. 에이 설마.’
애쉬는 쓰임새를 알고 싶지 않은 도구의 작은 자물쇠에 열쇠 같지도 않은 열쇠를 넣고 돌렸다.
철컥, 하는 소리와 동시에 악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안 벗어?”
“그게 뭔지…. 어디에 쓰시려는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용사님…?”
“정조대야. 남성용 정조대. 내가 널 위해서 특별히 주문 제작했어.”
애쉬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 사정권한을 통제하겠다는 말을 너무도 뻔뻔하게 해댔다.
마치 자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게.
“빨리 입고, 코오 자야지?”
“잠깐…!”
“반항하지 마. 힘쓰기 싫어.”
“에이, 이건 아니잖아요. 용사님, 제발요.”
애쉬는 내 눈을 슥 바라보고는, 힘을 쓰기 시작했다.
“교육이 덜 됐구나?”
“이런 시발…! 이 미친년이…!”
“말버릇, 여전히 험하네. 잘못 했으니까, 벌 받을 준비하고 있어.”
강압적으로 나를 짓누르고 내 바지를 내렸다.
반쯤 벗겨진 바지와 속옷.
키스할 생각에 잔뜩 발기했던 자지가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푹 죽어버렸다.
“강아지 고추, 귀여워.”
애쉬가 내 자지를 톡톡 두드렸다.
외간 여자의 손길에, 금방 발기 되려고 한다.
애쉬는 발기의 자유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냉큼 정조대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쇠가 자지에 닿고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흐읔…!”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지만, 내 힘으론 용사 애쉬를 떨쳐낼 수가 없다.
자지와 불알이 쇠고리를 통과하고 밀착된다.
그것도 모자라, 흐물흐물한 자지에 정조대가 씌워진다.
내 자지가 갇히고 말아…!
철컥.
“됐다.”
자물쇠까지 채운 후, 애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풀어주었다.
정조대 때문에 아랫도리가 묵직해진 것 같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밤에 풀어줄게. 그 때까지만 참아.”
“애미 시발….”
우울하다.
자지가 봉인당해서 그런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수인 노예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다, 다 했습니다! 용사님!”
“그래, 이제 꺼져.”
뚝딱뚝딱, 노예 상인이 가지고 있던 천막이 완성됐다.
완전히 해가 저물기 전에, 노예 후보들이 해내고야 말았다.
“강아지, 들어가서 자자.”
“…….”
애쉬는 정조대 열쇠를 벨트 가방에 챙겨 넣고, 목줄을 잡아당겼다.
나는 힘없이 애쉬를 뒤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