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15).
* * *
“말이 죽어버려서 이제부터 걸어야 할 것 같아.”
마차 입구의 천을 들추고 애쉬가 머리를 내밀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와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애쉬의 레벨이 얼마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계획보다 늦을 수밖에 없어.”
애쉬는 짐짝인 인원들을 흘겨봤다.
그 시선의 종착점은 바로 나.
우리의 이동속도가 마차보다 빠를 리가 없으니까.
동행하면 흑마술사 사냥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 인원들은 애쉬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방해에 가까웠다.
용사의 동료라고 말하기가 쪽팔리고 미안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 가려고 하거든? 짐 챙겨서 밖으로 나와.”
애쉬가 명령하자마자 우리는 각자의 짐을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잔뜩 긴장한 상태라서 머뭇거림 없이 움직였다.
마차 주변에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가시 까마귀 용병대의 흔적밖에 없다는 것.
말 근처를 제외하면 마차 주위로는 얼씬도 못했다.
애쉬는 그들의 접근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빈센트랑 라베루스로 돌아가. 유테론까지 가는 건 너무 머니까.”
애쉬가 빈센트에게 금화 주머니를 건네줬다.
블루로즈 상단에게 뜯어낸 주머니였다.
“라베루스로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있어. 기다리는 게 지루하면 돈 들고 도망쳐도 좋아. 대신.”
애쉬는 빈센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서 경고했다.
“강아진 확실하게 라베루스에 데려다주고 꺼져. 알겠어?”
“…그렇게 겁주지 않아도 된다네. 도망갈 생각도 없고…. 나는 지금 파티가 마음에 들어. 행보를 보고 있으면 너무 화끈해서 용병 시절 스트레스가 풀려. 그리고 용사의 동료가 되어보는 게 젊은 시절 내 소원이기도 했고.”
애쉬의 살기어린 말에 빈센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금화를 확인해보는 둥 애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강아지.”
애쉬가 내게 오라며 손짓했다.
애쉬는 아련하면서도 다급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뭔가 거부하기 애매한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어 얌전히 애쉬에게 다가갔다.
“읍…!”
나와 가까워지자 애쉬는 내 머리를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벗어날 수 없도록 꽉 붙들어 잡고 제 입술을 내게 부딪쳤다.
“쪽, 쪼옥. 하웅….”
말랑한 입술이 맞닿고 포개졌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싶은지 애쉬가 힘으로 더욱 찐득하게 달라붙어왔다.
적극적으로 내 숨을 빼앗아갔다.
“강아진, 쪼옵, 강아진….”
“억…!”
밀리고 밀렸다.
애쉬에게 키스 당하며 뒤로 물러나던 중 애쉬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포근한 연둣빛 바람이 나를 감싸준 덕분에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쓰러질 수 있었다.
“…….”
내 위에 올라탄 애쉬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시선이 내 입술에 진득하게 머물렀다.
희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애쉬는 참지 않고 내 입술을 덮쳤다.
“하음, 츕…. 하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둬진 상태로 애쉬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애쉬는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애타게 키스했다.
능숙하게 내 입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침이 마구 섞였다.
“애쉬, 대체 왜, 훕…!”
나는 이도저도 못한 채 애쉬에게 입술을 내어주었다.
애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고 발기하려는 자지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애쉬가 만족할 때까지 입술을 범해졌다.
격한 키스에 이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애쉬는 입술을 떼고 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의지나 집념은 내 이해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강렬했다.
“하아, 하아…. 강아진. 너 도망가면, 끝까지 쫓아간다. 분명히 말했어. 너는, 절대 내 품에서 도망 못가.”
“…….”
애쉬의 손길이 내 뺨에 닿았다.
분명히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데 어째서 질척질척하게 느껴지는 걸까.
“라베루스로 찾으러 갔을 때 안 보이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그러니까 라베루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애쉬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내 바지 앞섶을 어루만졌다.
정조대 때문에 발기도 못하고 있는 자지를 애틋하게 손 안에 쥐었다.
애쉬가 속삭인다.
“대답.”
“…알았어….”
애쉬에게서 진심어린 소유욕을 확인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활짝 미소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게이. 너는 따라올 수 있지?”
“…최선을 다하겠다.”
애쉬는 루기우스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현역 용병인 루기우스 정도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사흘 뒤에 보자.”
애쉬가 루기우스를 데리고 바리아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내 눈으로 쫓을 수가 없었다.
레벨1의 용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차마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흑마술사와의 전투가 무섭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
수준도 모자라고 의지도 부족한 것이다.
“어휴.”
내 참담한 상태에 한숨만 나왔다.
용사 동료로서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빌붙어 있는 현실이 쪽팔렸다.
애쉬에게 자지랑 불알 내주는 것이 내 역할의 전부라는 게 우습기만 했다.
그런데 어쩌랴.
이 세상으로 날아온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
일주일은 시골 마을에서 일손이나 도왔고 나머지 시간은 애쉬의 노리개로 있었다.
시간의 양은 물론이요 질도 별로인데 강해졌을 리가 없었다.
“우리도 어서 라베루스로 돌아가도록 하지. 야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라베루스와 가까우면 더 안전할 테니….”
빈센트가 임시적으로 파티장이 되어 우리를 이끌었다.
‘도망갈까?’
애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금이 기회다.
라베루스에 도착한 후, 따로 여행을 준비할지 말지 고민해봐야겠다.
그 때까지는 빈센트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걸음을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았다.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빈센트를 불렀다.
“빈센트 할아범.”
“왜 부르나?”
“그냥 걸어가는 건 심심하니까 얘기나 하면서 걷자고요.”
“…좋은 생각일세. 그러면 내 용병 시절에 있었던 얘기를 해줄까?”
“아뇨. 저희 내기한 거 있잖습니까. 그거 대가를 치르셔야죠.”
“아.”
빈센트가 실망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그거 별 거 아니야. 자네와 애쉬의 관계를 보면, 그다지 의미는 없어 보이네.”
“그래도 듣고 싶네요. 그날 밤 애쉬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말해주시죠.”
“…….”
빈센트는 린과 소우타를 흘겼다.
애들이 앞에 있어서 말하기 껄끄러운 듯이.
“…이미 애쉬 때문에 못 볼꼴을 봤으니, 크게 의미는 없을 듯 하구만.”
“애들도 웬만한 거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소우타는 뒷골목 동료들의 시체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런데도 멀쩡하게 뽈뽈뽈 잘 다니고 있다.
린은 내 발기한 자지도 모자라 애쉬 보지 빠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만 부끄러워했을 뿐이지 안 어색하게 잘 지냈다.
“말해주겠네. 그날 용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빈센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겨우 자위한 게 전부야?’
애쉬가 회귀자란 것을 눈치 챘고 그녀의 보지까지 맛나게 빨아재꼈다.
나 몰래 자위했다는 사실은 크게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자네들의 관계라면, 별 의미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었네. 그런데 듣겠다, 라고 한 건 너….”
“이렇게 시시한 내용일 줄은 몰랐죠.”
“…….”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빈센트.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앞서 걸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계속 나아갔다.
노숙을 두 번이나 하고 나서야 라베루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엄마, 엄마! 하늘이 빨개졌어!”
“뭐라는 거니. 상상력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아들이 마법사 클래스를 각성하는 게 아닐까.
그런 행복하고도 불안한 상상을 했다.
“진짜야!”
아들은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며 빼액 소릴 질렀다.
다급하게 뛰어와 엄마의 손을 잡고 창문으로 이끌었다.
엄마는 창문 밖을 살폈다.
집 밖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시뻘건 빛이 마을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문 밖으로 나섰다.
꾸물꾸물.
검은 장막이 천천히 차올랐다.
흑마술사의 결계 마법이 바리아를 가두기 시작했다.
“루이스! 밖으로 나와!”
창문에 찰싹 붙어있는 아들을 다급하게 불렀다.
상황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흑마술사에 대한 정보교류가 나름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
여자는 흑마술사의 짓이란 것을 눈치로 알아차렸다.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장막 안에 갇히는 순간, 흑마술사에 의해 괴로운 일을 당하게 되리라.
간절하게 아들을 불렀다.
그러나 아들은 무지했다.
본능에 기대 눈앞의 공포를 회피하려 했다.
“왜애? 나가기 싫어, 무서워.”
“빨리!”
여자라고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흑마술사라는 존재들을 실제로 겪은 적 없었다.
그저 용병이나 모험가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소년은 엄마의 말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소년의 본능도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숨기를 강제했다.
“어디냐! 어디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아, 아아! 여보! 루이스가 집에서 안 나와요!”
“숨어 있어! 당장 이 놈들을 죽이고….”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나오고 있었다.
각자 나름의 무장을 갖추고 흑마술사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가능할 리가 없다.
“커헙…!”
“아, 아아…!”
흑색 장막이 바리아의 하늘을 가리고, 그들을 세상과 고립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제물소환 술식이 발동됐다.
그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새빨간 빛을 뿜어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
절규한다.
온몸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다.
상처를 짜내 생으로 피를 받아내듯 술식은 마을 사람들의 생명력을 뽑아냈다.
바리아가 먹혀간다.
악마, 벨리알을 위한 제물로서 바리아가 사라진다.
“루이스, 루이스…!”
힘없는 어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들에게로 기어갔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아들 곁으로 나아갔다.
“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 엄마아아아!”
루이스는 바닥에 엎어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생명력을 강제로 뽑아내는 술식이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어미는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보며 고통조차 잊어버렸다.
그 때, 검은 장막이 크게 출렁거렸다.
제물소환 술식의 진행이 잠깐 멈추었다.
─ 이 빌어먹을 용병 새끼가….
─ 그레이프님, 당장 놈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 절망의 감정을 뽑아내고 그냥 죽이라고 말했잖아. 순수하게 정제된 마기에 빠지면 안 된다니까, 이래서 아랫것들은….
─ 죄송합니다.
그레이프와 흑마술사의 집중이 풀렸다.
술식을 통해 장막 내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틈을 타, 어미는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루이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루이스! 루이스…! 아아…!”
살아있다.
기절했을 뿐, 아직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흑마술사들이 제물소환을 이어서 진행한다면….
아이는 물론이요 어미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 굳이 쫓아갈 필요 없다. 놈을 쫓을 시간에 악마를 소환하는 게 맞아. 술식 전개를 안 했으면 모를까….
─ 죄송합니다.
─ 엎질러진 물이다. 집중해.
우우우웅.
제물소환 술식이 다시 전개된다.
“커흡…!”
어미는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온몸의 생명력을 쥐어짜이는 고통보다 제 새끼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쓰라렸다.
콰아아아아아앙!
“……?”
무언가가 검은 장막을 후려쳤다.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오며 제물소환 술식이 다시 멈추었다.
─ 이번엔 대체 뭐야!
─ …용사…. 용사입니다.
─ 도대체, 왜 용사의 접근을 몰랐지? 주변에 구울들을 세워둔 거 아니었나?
─ …하늘. 공중에서 접근했습니다.
콰아아아앙!
쩌저적.
검은 장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