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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31화 (31/109)

〈 31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17).

* * *

“하아! 하아!”

이벨린의 몸을 한 벡은 흑마술사들에게서 풀려난 이후로 쉬지 않고 달렸다.

잿빛 머리를 한 용사 애쉬를 불러오기 위해서 멈추지 않았다.

흑마술사에게 농락당한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용사 애쉬 한 사람뿐이었다.

“이벨린, 이벨린…!”

벡은 어린 딸을 위해 용병 일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 딸을 데려오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완수해냈다.

용병 길드에 신뢰도를 쌓아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벡의 실력으론 절대 불가능한 의뢰가 있었다.

마지막이라 크게 벌고 용병을 그만두려 했던 벡은 그 의뢰를 무리하게 받아들였고, 결국 죽고 말았다.

딸에게서 떠나온 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미 죽은 그를 언데드로 부활시킨 것이 바로 흑마술사.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생전 기억 일부가 사라진 벡과 계약을 맺었다.

삶에 대한 미련을 적당히 주물러 수족처럼 부려먹었다.

벡은 천천히 생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승에 머물면서 자연적으로 기억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흑마술사가 눈치 채고, 벡의 기억을 다시 지워버렸다.

그 때, 딸에 대한 정보를 읽은 흑마술사는 이벨린을 납치했다.

영혼을 빼내고 육체만 남겨두었다.

벡을 위한 선물로.

그 모든 전말을 알게 된 벡은 절규했다.

벡의 몸에선 순수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레이프와 흑마술사는 정제된 마기를 통해 제물소환 술식을 전개했다.

─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 보고 싶습니다. 딸의 몸으로 비굴하게 삶을 이어갈지…. 아니면 깨끗하게 삶을 끝내고 딸을 보내줄지….

─ 크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흑마술사들은 끝까지 자신과 딸을 모욕했다.

어린 아이의 손에 들린 인형처럼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렸다.

벡은 이를 악물고 도망쳤다.

어떻게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의 몸으로 구차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끝까지 뛰었다.

숨 쉬기가 힘들어도 다리를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하아, 하아!”

그 뜀박질이 멈추었다.

누군가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검은 장막을 깨부수는 것을 보았다.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용사!’

벡은 결계가 깨진 바리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났다.

용사 애쉬가 아닌 다른 용사를.

철퍽­! 철퍽­!

“하앙, 아앙! 앙! 용사님, 누, 누가 왔어요오…!”

“상관없어.”

* * *

“용사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리아 마을 사람들이 애쉬에게 다가왔다.

양단된 마족과 흑마술사를 보며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애쉬가 미간을 좁혔다.

사람들의 감사인사가 불쾌했기 때문이다.

“…전부 꺼져.”

애쉬는 방심하지 않았다.

흑마술사들이 얼마나 간사하고 비열한 놈들인지 알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놈들은 겉으로만 죽은 것처럼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죽지도 않고 살아남아 끝까지 용사들을 괴롭히는 것.

흑마술사라는 새끼들이 잘하는 짓거리 중 하나였다.

쿠구구구궁­.

“그럼 그렇지.”

그레이프를 중심으로 보랏빛 마법진이 펼쳐졌다.

무슨 마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레이프가 술식을 전개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당장 가서 끝내버리고 싶지만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이후 소환될 존재까지 끝장내는 것으로 이익을 확실하게 뽑아낼 생각이었다.

“윽…!”

“웁, 수, 숨이…!”

“용사님…!”

기쁨에 젖어있던 바리아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무너졌다.

무거워진 공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꺼지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듣고 있네.”

애쉬는 그런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바리아 마을 사람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농기구나 도끼 등을 챙겨 반 갈라져 죽은 그레이프를 향해 쇄도했다.

최선을 다해 아스모데우스와 그레이프를 죽이는 것.

용사로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파삭­!

“쯧.”

파삭­!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순식간에 깨져나갔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그 찰나의 순간도 버티질 못했다.

쿠키처럼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에라이, 시발.”

애쉬는 성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실버 오러가 활활 타오르며 일렁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애쉬 본인의 실력을 믿고 있다.

그것이 크게 준비해오지 않은 이유였다.

악마 서열1위 마왕 바알도 베어낸 용사다.

고작 하위 악마를 못 잡을 리가 없다.

애초에 원래의 역사대로만 흘러가게 둬도 무난하게 벨리알을 잡을 수 있다.

바리아 근처에 머물고 있는 용사가 제물소환 술식을 보고 알아서 정리하러 올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두지 않았다.

애쉬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용사는 어딜 가도 대우를 받는다.

황제 앞이든 여왕 앞이든 고개 숙이지 않는 무례를 저질러도 된다.

하지만 용사끼리는 통하지 않는다.

순수한 명성과 강한 무력만이 용사 사이의 급을 나눈다.

그것은 용사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명성을 쌓아둘 필요가 있었다.

착하고 선하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거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대의를 위해 사명을 다하는 영웅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애쉬는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바알을 죽일 용사는 자신이니, 누구도 내 남자를 무시하지 말라고.

“저거 좀 좋아 보이네.”

아스모데우스와 그레이프가 무슨 짓을 꾸미는 동안,

애쉬는 널브러진 것들 중 쓸 만한 무기를 주웠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장검이었다.

한 사내가 애쉬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힘겨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우, 우리 집 가보…!”

“잘 쓸게.”

“제발, 놈들을 죽이고…. 살려주시오…!”

“그래.”

가보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품질이 썩 좋은 검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됐지.’

명검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애쉬는 자신의 강기를 1초라도 버텨줄 검을 원했다.

그 역할을 해야 할 성검은 아직 레벨이 낮아 애쉬의 마력을 품지를 못했다.

평소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성격이라면 번거롭게 이럴 필요 없었을 텐데.

재능을 믿고 대충 저지르고 보는 성격은 회귀를 겪어도 변하지를 않았다.

쿠구구구궁­.

그레이프의 술식이 전개되고 있다.

그레이프는 애쉬에 의해 패배한 아스모데우스의 마족 하나를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했다.

이미 소환되는 중이라서 그레이프를 죽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악마 서열68위, 벨리알.

“등장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 크흐흐흐흐, 나를 소환하는 버러지가 있구나. 아스모데우스 놈들의 피라미.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별미 중 하나지.

보랏빛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벨리알은 미남자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은 마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악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빛난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흩날리는 머릿결을 보고 있으면 악마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흑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인간은 그의 아름다움에 빠져 모든 의식을 사로잡히게 된다.

어둠에 잠긴 호수 속 그 심연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듯 잔잔한 눈빛에.

애쉬는 벨리알을 보며 떠오른 감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벨리알 특유의 매료를 떨쳐내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뭐, 됐어.”

─ 그래, 무엇을 원하느냐. 아아, 저 여자를 죽여줬으면 좋겠나? 용사, 용사로구나. 좋은 장난감이다. 가지고 놀 맛이 나겠어.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아스모데우스의 마족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벨리알은 그의 흔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잘 먹었다는 듯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 다음은…. 용사를 맛볼 차례로군.

벨리알이 움직였다.

움직이려고 했다.

─ 어…?

발을 굴렀다.

용사의 앞으로 이동하고자 했다.

하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빠르네.”

벨리알의 몸만 움직였다.

벨리알은 여전히 제자리에 떠있었다.

자신의 몸이 애쉬의 앞에 서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벨리알의 시야가 거꾸로 뒤집힌다.

몸과 분리된 목이 뒤늦게 떨어지고 있었다.

검보라색의 마기가 벨리알을 감쌌다.

하지만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용사도 용사인데, 천사의 힘이 참 좋더라고.”

애쉬는 멍청하게 서있는 벨리알의 몸을 베었다.

은빛의 검기가 악마의 육신을 육편처럼 썰어버렸다.

“마족은 물론이고, 악마나 마왕의 마기를 어느 정도 봉인해주니까. 정말 편해.”

─ 이게 어찌 된 일…!

“어찌된 일이긴. 말로 설명해줘야 알아먹어, 이 좆같은 악마새끼야?”

벨리알의 몸을 산산조각 내버린 애쉬가 벨리알의 대가리를 향해 걸어갔다.

벨리알은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했지만 불가능이었다.

옴짝달싹도 못했다.

몸뚱어리는 신체재생이 안 되고 머리에는 마기가 흐르지 않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용사의 앞에 떨어졌다.

─ 이, 이런 미친…!

“잘 생겼네.”

애쉬는 벨리알의 대가리를 발로 밟으며 성검을 조준했다.

인간의 발이 얼굴을 짓누르고 있다.

불쾌한 감각에 벨리알이 표정을 구겼다.

─ 용사, 개 같은 년…! 내 기필코, 네 년을 죽여주마!

벨리알은 눈앞에 겨누어진 성검을 보며 소리쳤다.

─ 계약자! 당장 이 년을 떼어내라! 도와달란 말이다!

“그레이프는 이미 죽었어. 너 소환하고 계약한 후에 바로.”

─ 그럴 리가 없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는 것을 내가 확인 했…. 는데….

불과 몇 초전까지만 해도 잘 느껴졌다.

죽은 척 하고 있던 흑마술사의 마기가 선명하게 맡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도 볼 수가 없다.

흑마술사 계약자의 기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뭐? 나를 죽여? 하.”

애쉬는 벨리알을 마음껏 비웃었다.

강림이 아닌 소환의 경우, 악마는 역할을 다하고 다시금 마계로 돌아간다.

죽더라도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악마가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애쉬가 하려는 것은 그러한 과정 자체를 박살내는 것.

애쉬의 성검에 마력이 뭉친다.

벨리알은 은빛의 검기와 마주하게 됐다.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 힘은….’

용사 자체가 악마에게 꺼림칙한 힘을 품고 있다.

애쉬의 경우에는 다른 용사들과 냄새부터가 남달랐다.

마계에 있는 벨리알의 본체가 움찔거린다.

벨리알은 그 감각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경고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위험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

저 힘을…!

─ 이, 이 년이이이이이…!

애쉬는 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벨리알의 이마를 꿰뚫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찔러 넣었다.

강기가 아닌 검기라서 여러 번 찔러 넣었다.

푸욱­.

─ 꺼, 어어어억…!

용사의 마력, 천사의 마력, 동시에 노출된 벨리알이 녹아내렸다.

마계 권좌에 앉아있던 벨리알의 본체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와, 대박. 2레벨 성검으로 악마를 잡았어? 어떻게?”

또 다른 용사가 박수치며 애쉬를 향해 물었다.

“…드레이크.”

“슈퍼루키! 초신성 용사님이 나를 알아봐줬어? 와, 영광.”

드레이크가 자신의 파티와 함께 바리아 마을에 입성했다.

그들의 뒤에는 이벨린의 몸을 한 벡이 따르고 있었다.

“흑마술사! 로겐은 어디에 있지?”

벡은 흑마술사를 찾았다.

자신과 딸을 이 꼴로 만든 로겐을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

애쉬는 태연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검은 로브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자리였다.

벡이 다급하게 뛰어갔다.

녹슨 검 하나를 들고 무거운 발을 이끌고.

“아….”

이미 죽어버린 흑마술사를 보며 벡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흑마술사에게 원한이 있다나봐.”

드레이크는 자연스럽게 애쉬에게로 다가갔다.

애쉬를 훑는 눈길이 음흉하기 짝이 없다.

애쉬가 곧장 반응했다.

성검에 마나를 실어 드레이크에게 겨누었다.

“눈, 뚫어버린다.”

“…오…. 우리 병아리 용사님, 한 성격 하시네.”

그런 애쉬의 성검을 드레이크의 동료들이 막아섰다.

총 네 명인데 모두 여자였다.

“알았어, 알았어. 불쾌하다는 거지? 안 쳐다볼게.”

드레이크는 방긋 웃으며 애쉬의 성검을 천천히 내리눌렀다.

애쉬는 마력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어서 빨리 강아진을 보고 싶었다.

“…꼴리는데?”

“드레이크님, 저런 무식한 여자애 말고 저희만 봐주세요.”

“저렇게 드센 년들은 한 번 먹으면 맛없잖아요. 네?”

드레이크는 씰룩거리며 흔들리는 애쉬의 엉덩이를 빤히 쳐다봤다.

입맛을 다시면서 제 여자들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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