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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33화 (33/109)

〈 33화 〉 돼지들의 울음소리(2).

* * *

서른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만찬이 차려져 있다.

린과 소우타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빈센트만이 비교적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애쉬는 시큰둥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해댔다.

“어서 앉으시오, 용사여.”

풍채 건장한 남자, 아마도 유테론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착석을 권유했다.

부드럽게 뻗는 손짓에 교양이 가득했다.

애쉬가 내 목줄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았다.

유테론의 주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내 자리는 자연스럽게 애쉬의 옆이 되었다.

애쉬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도 조심스레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림이 이상하게 연출 됐다.

“아하하, 쑥스러운 것인가? 그럴 수 있네. 귀족들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용사들도 간혹 보아왔으니까 이해 못할 것은 아니야.”

“뭐래.”

애쉬는 그냥 따로 앉고 싶어서 이 자리를 고른 것뿐이다.

딱히 다른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용사가 온다 하여 열심히 차려봤소. 바리아에서 악마를 잡은 초신성 애쉬 양을 위해…. 유테론 최고의 요리사들을 불러 모았지. 그 맛은 하나의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오.”

유테론의 주인, 이름은 모르겠다.

라베루스 때와 마찬가지로 남작 직위인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당당하게 음식을 자랑했다.

만찬으로 용사를 대접하는 자신을 자랑스레 여겼다.

시골 동네나 여관에서 먹는 음식과 차원이 다르긴 했다.

린은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간식을 눈앞에 둔 강아지 마냥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냄새도 고소하고 향긋하니 얼른 맛보고 싶었다.

애쉬는 유테론의 주인에게 대강 인사하고 나이프를 들었다.

“잘 먹을게.”

스테이크를 써는 애쉬를 필두로 호화스런 식사가 시작됐다.

린과 소우타는 평소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누렸다.

빈센트는 늙은이답게 깨작깨작.

“이거 먹어.”

“…나도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일단 이것부터.”

먹음직한 요리들이 많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내 자리 앞에는 애쉬가 권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쓰고 맛없다.

얼굴 표정이 펴지질 않는다.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빈센트 영감처럼 깨작거리게 된다.

애쉬는 그런 나를 흘기더니 한 마디 던졌다.

“정력에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야.”

“…나 정력 좋아.”

시운전도 안 해본 자지가 정력이 좋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일단 좋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을 섞어보기 전까지는 좋은지 나쁜지 몰라 괜찮다.

정력은 곧 수컷의 자존심이니까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애쉬가 눈빛을 게슴츠레하게 좁히며 나를 바라본다.

썩 믿어주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가 순혈 인간이 아니라서 네 정력으론 어림도 없어. 그러니까 먹으랄 때 먹어.”

“…….”

이유는 모르겠지만 애쉬가 자기 배 아파서 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천사와 인간의 혼혈인 애쉬.

임신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애쉬의 난자에 도달하기 위해 내 정자들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 태양초 보여? 이게 진짜 좋다고 하더라.”

애쉬는 계속해서 정력에 좋은 요리들을 선별해서 갖다 주었다.

그 배려에 감사하며 입에 쑤셔 넣었다.

고기 위에 얹어진 풀만 골라 먹고 다음 접시로 넘어갔다.

식사예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행위였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유테론의 주인,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존나 쓴데?”

“몸에 좋은 거니까.”

애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눈길이 내 고간 쪽에 고였다.

노골적인 시선처리 때문에 자지가 찌릿찌릿하다.

“맛있게 먹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영광이오. 나, 고라 유테론에게, 데몬슬레이어 애쉬 양을 위한 만찬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

고라 유테론은 감정에 북받친 듯 쥐어짜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물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니 진심으로 감동한 듯 보였다.

“데몬슬레이어…?”

유치찬란한 칭호에 입을 틀어막았다.

교단 측에서 벨리알을 잡은 애쉬에게 붙인 칭호인 듯했다.

애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번만 더 그, 데몬슬레이어 같은 칭호 덧붙였다가는….”

애쉬가 애처롭게 떨었다.

수치심인지 부끄럼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부들거렸다.

고라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쉬의 애원은 고라에게 닿지 않았다.

“오늘은 축제요! 유테론을 방문해준 데몬슬레이어 애쉬 양을 위한 축제!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라오!”

“…….”

고라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하녀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술을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와인 라벨들을 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솔직히 어떤 와인이 맛있는지 전혀 모른다.

애쉬는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고라를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히 살벌했다.

식사자리가 끝났다.

고라 유테론은 우리를 암살하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배, 배 터져 죽을 것 같아요.”

린이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웅얼거렸다.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고라는 늘어진 우리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소, 용사. 유테론의 요리사들도 만족했을 것이오.”

“…….”

“그나저나 애쉬 양은…. 귀족들의 식사예절을 배운 것이오? 아니면 나고 자란 가문이 있소? 들어본 적 없는데, 어찌 이런 완벽한 예절을 선보이는 것인지….”

귀족 앞이라고 고상한 척 식사하는 애쉬를 보며 기함을 토했다.

애쉬에 대해 알고 있기에 더욱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고라가 감탄하고 놀라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쓸모없는 얘기는 됐고.”

애쉬는 고라의 말을 끊었다.

“조금 쉬고 싶은데.”

“내가 용사를 피곤하게 했나보오. 편히 쉴 수 있는 방을 준비 해뒀으니 푹 쉬시길.”

애쉬의 태도를 고깝게 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의를 보인 것이다.

“용사님, 이쪽입니다.”

유테론 가문의 사용인들을 따라 이동했다.

대저택 본채에서 별채로 정원을 구경하며 걸었다.

라베루스 리오스 남작의 저택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사랑방이라고 해야 할까.

용사 파티를 위해 마련된 객실은 보통 수준을 넘어섰다.

별채가 통째로 용사를 위한 공간이었다.

“현재 머무르고 계신 용사님은 애쉬님 뿐이십니다.”

“조용하고 좋네.”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하녀는 애쉬를 향해 90도 폴더 인사를 박고 조심스레 물러났다.

그 인사에서 극한의 공손함이 느껴졌다.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

원작에서도 뛰어난 용사는 누구보다 대우를 받았다.

왕족을 향한 것보다 더 극진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무려 악마를 사냥해낸 용사다.

온갖 편의를 봐주는 게 당연했다.

별채 구경에 여념 없는 일행을 애쉬가 불러 모았다.

“일주일 정도 쉴 거야. 알아서 지내. 도망치든 말든 관심 없으니까.”

애쉬는 빈센트에게서 돈 주머니를 빼앗았다.

그리고 각자 개인에게 동화 열 닢씩 넘겨주며 통보했다.

1이라 새겨진 동화 한 닢 당 1루나.

총 10루나였다.

“꺼져, 이제.”

린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더 있어봤자 혼만 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소우타도 그런 린을 뒤따랐다.

린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

빈센트만 남았다.

애쉬는 뚱하게 서있는 빈센트를 노려봤다.

“뭐.”

“돈을 좀 더 줬으면 좋겠네만…. 아무리 그래도 내 나이가 있는데, 애들이랑 똑같이 10루나는 조금….”

애쉬의 손이 가죽 주머니를 뒤적였다.

금화 한 닢을 추가로 꺼내서 건넸다.

새겨진 숫자가 달랐다.

단위가 한참 높아진 것이다.

“됐어?”

“…고맙군.”

금화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 빈센트가 히죽 웃었다.

보상이 마음에 드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채를 나섰다.

110루나는 꽤 많은 돈이니까 알아서 잘 쓰고 돌아다니리라.

‘1루나가 천 원이야.’

1루나가 동화, 10루나가 은화, 100루나부터는 금화로 순환한다.

따라서 100루나는 십 만원이다.

“찝찝하니까 일단 씻고 외출하자. 따라와, 강아지.”

애쉬는 내 목줄을 잡아 끌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귀족 나리들은 저택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용사들을 위한 별채에도 당연히 대형 목욕탕이 있다.

남탕여탕이 구분되어 있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목욕, 도와드리겠습니다.”

탈의실에 들어가자마자 하녀들이 나타났다.

어디에 숨어있던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은밀했다.

“됐으니까, 그냥 꺼져.”

“…….”

애쉬는 하녀들을 단박에 물리쳤다.

시중 따위는 필요 없다며 으르렁거렸다.

하녀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어물쩍댔다.

“아.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니까? 전부 꺼지라고.”

“흐, 흐아앙…!”

애쉬가 목소리에 마력을 담았다.

살기어린 태도에 하녀들이 도망치듯 물러났다.

마음 여린 하녀는 울기까지 했다.

조용해진 탈의실.

옷 벗는 소리만 들려온다.

라베루스에서 유테론으로 출발한 뒤부터 제대로 씻지를 못해서 많이 찝찝한 상태다.

개운하게 씻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묵직한 정조대는 볼 때마다 슬프지만 가끔 풀어주니까 괜찮다.

“안 돼.”

애쉬에게 다가가 정조대를 풀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애쉬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씻으려면 풀어야….”

“또 분위기 타서 싸버릴 수도 있잖아. 일주일 동안 참아. 안 해줄 거야.”

“…….”

귀족이 앞에 있는 식사 자리에서 정력에 좋은 것만 따로 골라서 먹였을 정도다.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얌전히 애쉬와 함께 목욕을 마쳤다.

간단하게 씻고 탕에 몸을 담그고.

발기하지 않기 위해 애쉬를 철저히 외면했다.

애쉬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개운하게 씻은 다음 옷을 입었다.

보드라운 재질에 기품이 느껴지는 장식.

고라 유테론 측에서 제공해준 복장인데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같이 갈 곳이 있어.”

“나한테 뭐, 선택권이 있나.”

애쉬가 가자고 하면 간다.

애쉬가 가지마라고 하면 잠깐 고민해보고 안 간다.

개목걸이와 정조대는 나에게서 자유라는 가치를 빼앗아갔다.

그에 대한 대가로 안정감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원히 이렇게 살 생각은 없다.’

애쉬의 피를 빨아 강해진다.

레벨을 올리고 클래스 랭크를 높여 이 새장에서 탈출하고 말겠다.

애쉬는 나를 데리고 대저택을 나섰다.

유테론 가문의 사용인이 우리에게 유테론의 상징적인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도시 거리에서 유테론 가문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용사님께서는 의미가 없으실 테지만…. 다른 동료분들은 괜한 싸움에 휘말릴 수 있거든요.”

빈센트, 린, 소우타.

셋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고라 유테론은 그들 모두에게 유테론 가문의 상징을 달아주었다.

거리를 걸었다.

라베루스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정돈된 도시였다.

“음….”

애쉬는 그런 도시의 음습한 뒷골목으로 향했다.

“…우효오, 예쁜 아가씨와 남자…. 오오옵….”

찝쩍거리려던 남정네들이 어색하게 뒤로 물러난다.

말을 걸기도 전에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유테론 가문의 브로치 그리고 성검의 조합이 애쉬의 신분을 특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끼익­.

애쉬가 뒷골목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황홀한 꿈을 꾸고 싶은 모두에게 천국을 선사해드립니다.]

자랑스레 세워진 팻말에는 반듯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글이 아닌데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세카이 전생 특전이었다.

어두컴컴한 로비에는 붉은색 은은한 불빛이 반짝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소름이 끼쳤다.

애써 긴장감을 억누르고 앞을 바라봤다.

데스크에 여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용사님.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의뢰할 게 있어서.”

애쉬는 제 집 안방 마냥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 여인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애쉬의 시선을 피했다.

“…참고로 저는 착한 마족이에요. 진짜 악마들이 저를 보면 혐오할 정도에요. 애초에 마족이라고 볼 수도 없죠. 머나먼 조상 중에마족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너 잡으러 온 거 아니야. 의뢰가 있어서 온 거라고.”

“남자들을 해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원하는 꿈을 보여주고 정기를 조금 받아갔을 뿐. 교단에도 봉사하고 있고, 왕국 관계자에게 인증 받은 합법적인 일이랍니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애쉬가 여자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데스크 여인, 딱 봐도 서큐버스의 피가 엿보이는 여자가 울먹거리며 대꾸한다.

“…히끅…. 무슨 의뢰요…?”

애쉬가 내 목줄을 확 잡아당겼다.

내 몸이 저절로 앞으로 튕겨져 나왔다.

“이 남자한테 각인을 새기고 싶어.”

“…남자에게 각인이요…?”

“총 세 군데.”

애쉬는 진지하게 말했다.

여자가 울음을 꾹 참아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따라오세요.”

데스크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은밀한 공간 지하로 내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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