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절반(2).
* * *
비앙카는 일부러 애쉬를 자극했다.
애쉬가 충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비앙카를 제외한 모든 흑마술사가 죽었다.
애쉬는 그들을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비앙카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아 제압됐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여유가 가득했다.
자신이 죽을 거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강아진과 이어진 영혼공유 술식 탓이었다.
쿠구구구궁.
마법진이 마기를 빨아들였다.
흑마술사들이 죽으면서 술식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비앙카가 그렇게 술식을 세워두었다.
악마 소환이 진행된다.
양질의 마기는 마법진의 원료로서 작용했다.
마법진이 보랏빛을 뿜어냈다.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흔들렸다.
애쉬는 악마 소환을 가만히 지켜봤다.
비앙카의 목에 성검을 갖다 대고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무슨 속셈이야?”
“용사님, 용사님을 위한 선물이에요. 제가 용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쓸모 있다는 증명이요.”
비앙카는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애쉬에게 제압당한 상태인데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던졌다.
“씨발, 미친년. 영혼공유 술식만 해제되면, 죽고 싶어서 미치게 될 거다.”
“그 때가 되면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지 않을까요? 너무 정 들어서.”
“입 다물어, 좆같은 년아.”
“넹.”
비앙카의 뻔뻔한 태도에, 애쉬는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흙바닥에 비앙카를 마구 문질렀다.
영혼공유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애쉬 자신이 죽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었다.
벌써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공유 술식의 대상자는 비앙카와 강아진이었다.
애쉬가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강아진에게로 향한다.
그것만큼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강아진이 다치는 것보다 애쉬 본인이 다치는 것이 나았다.
강아진의 아주 사소한 자상과 애쉬 자신의 치명적인 절단.
애쉬는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절대….’
강아진이 베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애쉬 자신의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는 게 더 편했다.
그래서 애쉬는 비앙카를 건드리지 못했다.
악마 소환을 가만히 지켜봤다.
“악마 소환을 벌이고 있는데,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병신이야?”
“진짜 용사님을 위한 선물이에요.”
비앙카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애쉬를 위한 선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선물이라는 걸까.
애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말했다.
“용사님, 용사님은 어차피 마왕 바알을 소멸시킬 생각이잖아요. 그렇죠?”
부정하지 않는 애쉬를 보며, 비앙카는 말을 이었다.
“흑마술사들이 악마를 소환하면, 뒤늦게 그 장소로 가서 악마를 잡아야겠죠. 용사는 원래 그런 족속들이니까요.”
“죽이면 돼.”
“그조차도 엇갈리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거예요. 용사님의 평판만 나빠져요.”
“내 평판이나 명성을 신경 써줄 필요는 없는데.”
비앙카가 낄낄 웃었다.
제 남자를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비앙카를 붙잡고만 있다.
죽이지 않는 선에서 성검으로 화풀이를 할 법도 하건만.
애쉬는 비앙카 위에 올라타서 사납게 짖어대기만 했다.
비앙카의 눈에는 그런 애쉬가 그저 귀엽게 보였다.
“딱히 신경 써줄 생각은 없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
“그런데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악마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세요?”
애쉬의 대답이 없다.
나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악마 소환을 하겠다고 쪽지를 보내, 진실만을 말했다.
비앙카는 날짜, 시간, 장소, 무엇 하나 속이지 않았다.
왜? 무슨 이유로?
골똘히 고민한 끝에 그 대답이 나오려고 한다.
“…악마를 나보고 잡으라는 건가?”
“예.”
애쉬가 비앙카의 의도를 알아맞히었다.
속내까지 간파하진 못했으나, 비앙카가 당장 벌이는 짓거리의 이유를 알아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비앙카는 애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애쉬가 머리를 누르고 있어서 말을 할 때마다 입에 흙이 들어갔지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악마가 소환되자마자 죽이면, 다치는 사람 하나 없이 마계를 약화시킬 수 있어요. 프레소 백작령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죠.”
대륙을 악으로 물들이려는 흑마술사들만 죽으면 된다.
소환에 필요한 마기를 채우고, 악마 소환을 발동하는 것으로 그들의 역할은 끝이다.
용사가 악마를 이긴다는 가정 하에, 그 외의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악마 하나를 잡는데 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건 관심 없는데.”
애쉬는 관심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 말든, 강아진만 살아있으면 그걸로 됐다.
수천, 수만을 희생시키더라도.
강아진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회귀하기 전, 악마보다 더 악한 존재가 강아진을 살려주었다면.
애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마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만큼 애쉬가 느끼는 생명의 무게가 달랐다.
사람을 구하고자 악마를 잡는 게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강아진과 함께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애쉬는 최선을 다해 악마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때문에 매력적인 제안이다.
애쉬가 고민을 했을 만큼 괜찮았다.
그 증거로, 비앙카를 억누르고 있던 팔에 힘이 약간 빠졌다.
비앙카는 흙에서 입을 뗄 수 있었다.
“악마를 단칼에 베어낼 수 있는 최강의 용사 입장에서, 코앞에 악마를 소환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다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데 굉장히 편하지 않을까요?”
“…….”
“교단 병신들이 하는 서포팅?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던가요?”
애쉬는 교단의 지원을 떠올렸다.
텔레포트 마법사는 확실히 든든한 지원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가치가 없었다.
성기사단을 전투에 데리고 가면 오히려 걸리적거린다.
사제들의 축복으로 얻는 강화 효과는 정말 티끌만큼도 안 된다.
그들이 오기 전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자본적인 도움도 전무하다시피 해 무의미였다.
애쉬는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귀족들에게 뜯어 썼다.
그나마 지부에서 방을 빌려 쓸 수 있다는 점.
자잘한 심부름을 대신 해준다는 점이 괜찮았다.
‘그런 것들도 일 잘하는 노예를 하나 사면….’
애쉬와 강아진을 대신해서 가사를 책임져줄 노예를 하나 구하면 된다.
교단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애쉬는 비앙카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텔레포트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그 간악한 여자의 말을 듣지 마세요! 교단은 용사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대륙 평화를 수호해주시는 용사님이 악을 멸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입 닥쳐.”
“…….”
애쉬가 텔레포트 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네 앞에 악마를 소환해주겠다는 제안에, 갈등하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비앙카는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꺼냈다.
“제가 흑마술사가 된 이유는 복수 때문이에요. 대륙 멸망에는 취미가 없다고요. 오히려 이 대륙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에요. 복수를 끝마치자마자 죽을 게 아니라면, 그게 당연한 거죠.”
“…….”
애쉬는 비앙카의 최후를 보았다.
자신이 직접 죽이기는 했으나, 그 직전에 보여준 표정은 허무함이었다.
복수를 끝마치고 흐르는 대로 살아가던 비앙카.
복수는 남는 것이 없다며, 멋모르는 비앙카 자신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부탁이 거슬렸다.
이뤄주지 못해서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비앙카에게 또 좌지우지 당하는 이 상황에 짜증이 났다.
‘일단 이 관계 자체를 어떻게 해야겠어.’
거만하고 여유 있는 태도가 꼴 보기 싫었다.
이대로 가다간 실수로라도, 비앙카의 입 꼬리를 찢어버릴지 모른다.
그런 애쉬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앙카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용사님을 도와드릴게요. 용사님도 저를 도와주세요. 딱히 요구하는 건 없을 거예요. 그냥…. 제 복수는 제 스스로 할 테니, 상대를 죽이지 말고 놔둬주세요.”
“누군데?”
“…말 안 할 거예요. 말하면 죽이러 갈 거잖아요.”
애쉬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깝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야.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구분하지? 아무나 죽였을 뿐인데, 네가 복수하려는 사람일수도 있잖아.”
“안 죽이면 돼요. 막무가내로 찌르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죽일 수가 없어요. 용사님은 흑마술사와 악마들만 베면 되는 거예요.”
“…….”
비앙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쉬가 아무나 찌르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건드릴 일이 없었다.
정곡을 찔린 애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앙카는 기세를 타고 자신의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강아지에게 영혼공유 술식을 건 이유는 용사님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어요. 다른 의미는 없답니다.”
“강아지?”
“강아진이요. 용사님이 잘못 들으신 거예요. 강아진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용사님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영혼공유라는 과격한 방법을 썼어요. 어쩔 수 없이요.”
애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앙카의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절묘하게 숨 쉴 구멍은 남겨주었다.
혹시라도 강아진에게 고통이 전해질까 싶어서, 애쉬가 수를 쓰고 있었다.
비앙카는 그 배려 아닌 배려가 진짜 어처구니없었다.
“제 눈에는 용사님의 욕망이 보여요. 흑마술사라면, 마기를 추출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욕망에 익숙해져야 하죠.”
“내 욕망이 뭔데?”
“평화로운 세계요. 보통의 용사라면 이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겠지만…. 용사님은 전혀 다른 의미로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는 거겠죠. 강아진 씨와 함께 하는 평화로운 세상이요.”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마기를 뽑아낼 수 있다.
욕망을 해소하는 중에, 그 희망을 꺾는 것으로 더 순도 높은 마기를 얻을 수 있다.
그레이프가 그 짓거리를 하다가 골로 가버렸다.
비앙카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2세에 대한 번식욕구도 굉장히 크네요. 강아진 씨의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겠죠? 그것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네가?”
“예. 흑마술사가 되기 전에, 저는 연금술사가 꿈이었어요. 어머니가 아프셨거든요. 그것을 낫게 해주기 위해 공부를 했는데, 부질없는 짓이 됐죠. 그 지식들을 용사님께 바칠 수 있다니, 감동이에요.”
“…지랄.”
“우읍…!”
비앙카와 떠드는 사이, 악마 소환이 거의 다 진행되었다.
찢어진 공간을 통해 악마가 머리를 비집어 넣고 있었다.
─ 크크크크큭!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다. 이곳이 중간계로군!
72위의 악마, 안드로말리우스였다.
“용사님께 신뢰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가장 약한 녀석으로 소환했어요. 어때요? 저 놈을 잡아 죽인 다음에,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비앙카가 말했다.
간절하면서도 당찬 목소리에, 애쉬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신 나간 년.”
너무 황당해서, 이제는 욕도 잘 안 나온다.
애쉬로서 최대한 비앙카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강아진을 데리고 물러나.”
애쉬는 텔레포트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실제로 각인이나 권한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텔레포트 마법사는 애쉬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강아진은 얌전히 텔레포트 마법사와 함께 돌아갔다.
교단 아스페라톤 지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단 저 놈 죽이고.”
애쉬는 비앙카를 짓뭉갠 상태로 성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은빛 마력이 뿜어졌다.
비앙카는 그런 애쉬를 느꼈다.
순간 가벼워진 느낌, 애쉬의 등 뒤에는 은색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역시 천사였네요, 용사님. 천계의 일원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용사님은 아마도 하프겠죠. 천사의 피가 절반만 흐르는….”
안드로말리우스의 목이 떨어졌다.
천사의 마력에 의해 본체까지 소멸했다.
악마가 단칼에 소멸하는 그 장관을 보며, 비앙카는 확신했다.
흑마술사 헬 체인은 대의를 이루지 못한다.
애쉬에게 손을 뻗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다.
비앙카가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적셨다.
해야 할 말이 많으니, 미리 준비를 했다.
애쉬를 설득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왔다.
아무리 애쉬여도, 자신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으리라.
비앙카는 그리 생각했다.
모든 말이 끝나고,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찌됐든 비앙카를 죽인다.
당장은 불가능하니, 비앙카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써먹을 생각이다.
“그 대신, 네 몸에 각인을 새겨야겠어.”
“예?”
“내 허락 없이는 텔레포트를 쓰지 못하게 되는 각인이야. 이 정도는 받아들여줘야 네 말을 들어줄 수 있어. 또 강아지를 데리고 도망친다거나 할 수 있으니까.”
합리적인 이유가 기반이 된 합당한 요구였다.
비앙카는 잠깐 고민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 말은 즉, 도망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뭐…. 무슨 일이 있겠어?’
강아진과 영혼공유 술식으로 이어져 있다.
강아진을 죽일 것이 아니라면, 비앙카를 해칠 수 없다.
영혼공유는 현재로서 해주할 수 없는 레벨의 술식이다.
애쉬는 자신을 공격하지 못한다.
애초에, 비앙카는 애쉬와 강아진을 괴롭힐 생각이 없다.
처음에 납치하고 벌인 짓은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최강의 용사가 데리고 다니는 남자, 그의 첫 경험을 가지고 싶다는 장난기가 대부분이었다.
고문을 기본으로 탑재한 흑마술사 사회에서, 비앙카의 강간은 애교였다.
‘나도 첫 경험을 줬잖아. 그럼 비긴 거지.’
물론 영혼공유를 위한 일이었지만.
비앙카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강아진에게 전혀 안 미안했다.
“예, 그 정도 각인은….”
비앙카의 몸에 텔레포트를 막는 각인이 새겨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