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설국
수도에 차디찬 불청객이 찾아왔다. 때아닌 한파였다. 적요한 황궁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 전역이 백색 비단을 켜켜이 쌓은 것처럼 두터운 눈에 둘러싸였다. 언제나 찬란하게 빛날 것 같던 금기와는 설국에 짓눌려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완벽한 설국이었다.
하늘에 늘어져 있던 잿빛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차근차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어린 황자 한 명이 드넓은 화원에서 놀다가 길을 잃어 미아가 되었다는 소식이 드문드문 퍼졌으나 대부분 관심이 없었다. 어린 황자는 보림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여자의 자식이었다. 어처는 심지어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하니 내관들이 황자나 그녀를 신경 쓸 리가 만무했다. 비빈에게 할당된 내관들은 자기 몫의 황자, 황녀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여유가 있다 해도 그녀를 도와줄 의향은 없었다. 그녀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황제의 비빈이 되었지만, 초야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안긴 적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결국 여 보림은 사가에서 가져온 담비 털옷을 입고 화원에서 잃어버린 어린 아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강아!”
그녀의 목소리가 하얗게 얼어붙은 추위 속을 유영했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가느다란 목소리는 강한 바람에 파묻혀 아스라이 사그라졌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화원 중심에 서서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야, 강아….”
여 보림이 자신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것도 모르고, 어린 강은 금단의 구역인 설원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곳은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황족들의 놀이 공간이었다. 늑대로 변신하고 싶을 때면 그곳에서 변신한 후에 언덕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서로의 목덜미를 물곤 했다. 또 혀를 내밀어 상대방의 귀나 턱, 배 등의 부위를 핥아주기도 했다. 체취를 남기고, 확인해서 동족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건 늑대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황족 중에서도 특별한 자들만이 노는 공간이었기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특히 황제가 늑대로 변해서 들어오는 날이면, 관리는 한층 심해졌다.
하지만 강은 워낙 체구가 작고 아담해 황궁의 빈틈을 파악해 돌아다녀 들킬 일이 없었다. 걸린다 해도, 본인은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르고 해맑은 웃음을 지을 아이였다. 강은 이제 4살에 불과했다.
“우읏, 차가워.”
언덕에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던 강은 눈 한복판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속살거렸다. 여 보림이 정성껏 묶어준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에 젖어 엉망이 되었다. 아이의 하얗고 보드라운 뺨은 성긴 바람에 붉어졌다. 마치 얇고 긴 생채기가 여러 개 겹쳐진 듯 보였다.
짐승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겨울용 장의가 젖어갔다. 가죽신도 다른 바 없었다. 짐승의 털을 안에 덧대긴 했으나 매서운 한파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앙증맞고 작은 몸을 일으켰다. 한 올, 한 올 살아있던 짐승의 털이 눈에 젖어 아이의 머리카락처럼 달라붙었다.
“끄응….”
아이는 굴러 내려온 언덕을 올려다보며 끙끙거렸다. 내려올 땐 걱정 없이 돌멩이처럼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으나 올라갈 때가 되니 막막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능선에 아이는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늘 보던 어머니도, 귀가 먹어가는 내관도,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도 보이지 않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설국이 낯설게 아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동서남북을 모조리 살펴보아도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급기야 아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냉엄한 황궁에서 자라난 아이치고 성품이 순박하고 여린 아이인지라, 이런 낯섦은 아이에게 무서운 것이었다.
“히잉…. 어머니…, 안 내관….”
아이가 어미를 잃은 짐승처럼 낑낑거렸다. 울음은 바람에 묻혀 눈 속에 처박혔다. 코가 시뻘게진 아이는 훌쩍거리면서 언덕을 올라가려 노력했다.
“앗!”
그러나 한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눈을 밟은 아이가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 넘어졌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아플 거야! 강이 속으로 지레 겁을 먹고 속삭였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무언가가 듬직한 기둥처럼 아이를 받쳐주고 있었다. 아이는 차갑게 얼어붙은 뺨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투명한 눈물이 맺혀 있는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했다. 아이는 바람이 불어, 눈이 쓸리는 언덕을 보다가 자신을 받쳐주고 있는 그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히익!”
엄청나게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강을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궁의 기와를 녹여 만든 것보다 더 아름다운 금안이 강의 작은 몸을 살폈다. 금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마치 사람처럼, 고뇌라도 하듯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짐승이 킁킁거리며 축축한 코를 목덜미에 갖다 대었다. 훌쩍거리던 때는 언제고, 아이는 작은 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짐승의 숨을 견디어냈다. 무서운데 신기했다. 눈이 자꾸 힐끔힐끔 짐승에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짐승과 눈이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늑대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봉긋 솟아난 통통한 뺨에 콧등을 씰룩거렸다.
그새 강은 작고 어린 머리로 나름대로 생각에 빠졌다.
어머니가 유원에 데려가 황제가 키우는 동물들을 보여주곤 했지만, 이렇게 거대한 짐승은 처음이었다. 강은 지레 겁을 집어먹은 채 고개를 숙이고 짐승의 발을 보다가 머리를 골똘히 굴렸다. 저 짐승은 도대체 무엇일까. 순진무구한 호기심이 겁을 이겨냈다. 아이가 눈을 들어 올려 짐승의 고귀한 자태를 살폈다.
은색 바늘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한 무성한 털은 눈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강의 팔다리보다 훨씬 두꺼운 팔다리는 나무에 맞아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소같이 크고 검은 눈이 짐승의 두터운 발에 꽂혀 있다가, 서서히 올라가 눈에서 멎었다.
아이 주먹과 비슷한 크기의 금안이 강을 쏘아보고 있었다. 동공이 가늘고 긴 금안이 빛을 빨아들이면서, 그 틈에 아이의 온몸과 정신까지 앗아갔다.
“사, 사, 사….”
살려달라고 말하려는 조그만 입을 보던 짐승이 고개를 숙였다. 짐승의 긴 주둥이가 뺨에 폭 닿았다. 생각보다 축축하고, 따뜻한 감촉에 울먹거리던 강이 눈을 크게 떴다.
짐승이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연강의 눈물 자국이 남은 새빨간 뺨을 핥았다. 연강은 놀라움에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짐승의 커다란 얼굴만 응시했다. 짐승이 왠지 웃는 거 같았다. 금안이 눈웃음을 짓는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짐승은 경계를 푼 아이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비비적거리더니, 아예 혀로 아이를 밀쳐 눕히고 구석구석을 샅샅이 핥아주었다. 추위에 발갛게 얼어붙은 뺨과 목덜미가 짐승의 온기로 녹아내렸다.
“앗, 간지러워!”
연강은 짐승의 혀가 목 안으로 들어오자,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짐승은 그 웃음소리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눈에 파묻혀 있는 아이를 빤히 보았다. 짐승의 금안이 다시 한번 위아래로 아이를 훑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이게 도대체 뭐야. 짐승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은 순진무구하게 눈을 반짝였다. 무시무시한 크기에 비해, 착한 행동과 유순한 눈빛에 아이는 경계를 풀고 짐승의 얼굴을 작은 손으로 어루만졌다.
“부드럽다….”
아이의 손이 짐승의 주둥이에 닿았다. 검은 코를 콱 잡아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짜증 같았다. 짐승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으나 아이는 호기심에 눈을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강아지 같아. 강아지 코를 만졌을 때랑 같은 느낌이다.”
아이는 어느새 짐승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물기가 묻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곤 짐승과 자신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짐승도 그런 아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짐승이 코를 킁킁거리며 목덜미와 머리에서 나는 달콤하고 풋풋한 냄새를 맡았다. 짐승의 눈이 가늘어지며 어떠한 것을 찾아냈다. 짐승이 긴 혀를 내밀어 뺨을 느리게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렸다. 연강이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늑대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턱 잡았다.
“이제 알았다. 큰 강아지로구나?”
아이는 짐승을 황궁 유원에서 키우는 개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짐승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는지 꽉 다물린 입을 꿈틀거렸다. 연강은 그것도 재밌는지, 아직도 추운 눈밭에 누워 짐승의 털을 미숙한 손길로 만져주었다. 짐승의 금안에 짜증이 한가득이었지만, 차마 어린 것을 함부로 할 수 없는지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아지야, 여기에 오면 혼난다? 여기는 아바마마의 궁이야. 네가 온 걸 알면 아바마마가 혼낼 거야.”
병아리 부리 같은 입에서 흘러나온 ‘아바마마’란 소리에 짐승이 입을 벌렸다. 헥헥, 거리는 숨소리가 아이의 얼굴에 확 쏟아져 내렸다. 아이는 더운 숨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가만히 누워 눈을 깜박거렸다.
짐승은 아이의 몸을 자신의 기둥 같은 다리로 가두었다. 여린 육체가 늑대의 몸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몸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해맑게 웃었다. 순수한 얼굴에 늑대가 끙끙거렸다.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넌 다른 강아지들보다….”
강아지, 란 얘기에 불쾌해졌는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혀로 아이의 입술을 핥았다. 간지러움에 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간지러워. 그만 핥아.”
아이는 짐승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소매로 야무지게 닦아냈다. 짐승이 잠시 아이를 보다가 앞발로 아이 어깨를 잡아 휙 돌렸다. 아이의 몸이 순간 옆으로 굴러, 오른쪽 다리에 부딪혔다.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발이 닿은 왼쪽 어깨가 아릿하게 아팠다.
“아파…. 앗!”
아이가 아프다고 울먹거렸으나 금세 탄성으로 바뀌었다. 늑대가 아이의 의복을 입에 물고 들어 올린 것이다. 아이의 짧은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무, 무서워! 내려줘! 강아지야, 내려줘!”
아이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짐승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늑대는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달랑달랑 입에 매달고 사뿐히 눈 위를 걸었다. 아이의 몸이 바람에 휘날리는 이파리처럼 흔들거렸다. 처음에는 훌쩍이며 울던 연강이었지만, 그네를 탄 것처럼 몸이 흔들리자 신났는지 조금씩 울음을 멈추고 앞을 보았다.
등은 짐승에게 잡힌 상태로, 팔다리와 고개는 아래로 강변에 사는 나뭇잎처럼 축 늘어져 있었으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갇혀 있던 궁에서 몰래 빠져나와 겪어보는 자유에 아이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강아지야. 넌 정말 착하구나.”
아이는 달랑달랑 매달린 채인데 너무나 편안한 기색으로 짐승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덕을 총총 지나 나무가 우거진 입구로 향해 가던 짐승이 의아한 듯 금안을 깜박였다. 아이는 겨우 손을 뻗어 늑대의 풍성한 털을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착하다, 착해. 궁에 돌아가면 너에게 당과를 줄게. 착한 아이는 당과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물론 안 내관이 단 걸 많이 먹으면 혼내겠다고 했지만….”
한쪽 귀가 먹었어도, 감각은 귀신같은 안 내관을 떠올리던 연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됩니다. 당과는 하루에 두 개입니다.’
안 내관이 단호하게 손가락을 저으며 당과를 단지에 숨기던 걸 기억해내고, 연강이 조심스럽게 소리를 죽이며 짐승에게 말했다.
“하루에 두 개 주니까, 하나는 강아지 너에게 줄게. 많이는 못 주니까….”
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한 듯 보였다.
“나도 먹어야 해서….”
짐승이 콧김을 마구 뿜어냈다. 금안이 접힌 게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짐승의 발은 언덕을 벗어나자 더욱 빨라져, 황궁의 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연강은 처음 겪어보는 속도에 꺅, 꺅 소리를 내며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짐승은 언덕을 벗어나 내정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섰다. 눈이 사라진 돌에 두툼한 발이 닿기가 무섭게, 주변을 지키던 내군들이 바닥에 엎드려 짐승을 맞이했다. 짐승이 연강을 매달고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바깥에 있는 내군, 빈, 내관들은 짐승의 등장에 혼비백산이 되어 바닥에 납작 붙어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얼굴의 안 내관까지 그렇게 하자, 연강은 의아함에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런 행동은 이 세상에 단 한 명에게만 해야 했다. 하늘의 아들이자, 연나라의 지존이며, 연강의 하나뿐인 아비인 황제에게 말이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강아지가 아니었다. 연강이 먼발치에서 보았던 아바마마는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바닥에 엎드려 황제를 맞이하느라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연강이 제대로 본 건, 바닥에서 움직이는 황제의 신과 땅에 닿을 듯 말 듯 길게 내려온 용포 자락이었다. 짙은 청색에 은실과 금실로 신성한 사물들이 수놓아진 용포가 아주 짧은 순간, 연강의 시야에 머물렀다가 떠나갔다.
우연히 보았던 황제의 눈이 떠올랐다. 틀어 올린 은발보다 시선을 확 사로잡던 보석 같던 눈. 그의 눈은 빛 가루가 살아 숨 쉬는 금색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강아지도 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소리를 삼키며 고개를 바짝 올렸다.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짐승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거리다가 웃었다.
“눈이…. 아바마마와 같아.”
짐승이 콧김을 푸으으으응, 쏟아냈다. 연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같지? 강아지는 강아지고, 아바마마는 아바마마인 것을.
그렇게 궁금증이 뭉게구름처럼 커져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랗고, 쉴 새 없이 떨리는 연약한 목소리였다.
“강아!”
“어머니. 어머니야. 강아지야, 어머니가 왔어!”
연강이 눈을 크게 뜨고 해맑게 웃으며 몸을 버둥거렸다. 짐승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아이의 몸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짐승에게 매달려서 내정의 화원에 도착한 아이는 어지럼증이 도졌는지 몸을 비틀거렸다.
작은 몸이 기우뚱거리자, 짐승이 큰 얼굴로 아이의 몸을 받쳐주었다. 아이는 짐승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작은 발로 선 아이는 달려오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연강을 보고 처음에 안심해서 웃더니, 아이 뒤에 선 짐승을 보고 창백하게 질려 바닥에 엎드렸다. 몸에 익힌 습관이 나온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짐승은 태연하게 지켜보다가 연강을 보더니, 코로 아이 등을 밀었다.
어서 가봐. 짐승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걸 알아들은 아이는 짐승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짧은 두 팔을 벌려 짐승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짐승의 부드러운 털이 아이의 목과 팔에 마구 닿았다. 아이가 안은 것이었지만, 짐승의 털에 아이가 파묻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마워, 강아지야. 나중에 꼭 청궁에 오렴.”
약속한 당과를 너에게 줄게. 아이가 짐승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짐승이 간지러웠는지 고개를 숙였다. 힘을 줘서 짐승을 끌어안은 아이가 몸을 돌려 여전히 찬 바닥에 엎드린 어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어머니!”
아이의 작은 몸을 유심히 지켜보던 짐승이 몸을 돌렸다.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폐하…. 폐하, 좌도독이 패를 올렸사옵니다….
짐승이 되었기에 들을 수 있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 소리에 잠시 멈춰서 숨을 내뱉던 짐승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이가 어머니로 추정되는 가녀린 여인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여인은 짐승의 금안과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사람처럼 짧게 웃은 짐승이 달렸다. 은빛 호선이 허공에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
‘이 어미가 말하지 않았느냐? 함부로 궁에서 몸을 놀리면 안 된다는 것을! 감히 폐하의 설원에서 놀았다니! 폐하가 넓으신 아량으로 널 봐주셨으니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여 보림이 매섭게 소리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얇고 날렵한 회초리가 강의 여린 살을 채찍처럼 찰싹찰싹 때렸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바들바들 떨던 강은 결국 으앙, 하고 울었다. 드러난 엉덩이가 따가웠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강이 귀여운 얼굴로 울어도 여 보림은 코웃음만 칠 뿐 결코 봐주지 않았다. 늑대로 변신해서 강을 물고 온 황제가 아량을 베풀어준 덕분에 살아났으니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호되게 혼내줘야 했다.
얼마나 때렸는지 강의 엉덩이가 시뻘겋게 변하다 못해 핏방울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걸 지켜보는 유모는 안절부절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었으나, 안 내관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서적을 읽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아이의 울음이 거세질수록 여 보림의 손은 더 잔혹하게 변했다. 처음 아이가 사라졌을 땐, 정말 금궁에서 아이가 어딘가로 사라져 못 찾을 줄 알았다. 가슴이 철렁이며 벌렁벌렁 뛰었다. 손이 불안으로 떨리고, 호흡마저 불안정하게 변해갈 때 아이가 황제에게 매달려 청궁까지 왔다. 불안함이 기쁨으로, 다시 아래로 고꾸라지며 불길함으로, 황제가 아이를 두고 사라졌을 땐 분노로 변했다. 연강의 잘못으로 여 보림뿐만 아니라 안 내관과 유모까지 다 목이 잘릴 뻔했다.
오늘 연강이 저지른 죄는 모독죄였다. 늑대로 변하지 못하는 황자가 늑대로 변할 수 있는 황족들이 거니는 언덕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죄였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뻔한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연강이 여 보림에게 얻어맞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황자나, 황녀가 6살이 되기 전까진 전적으로 육아는 친어미에게 달려 있었다. 그 후는 친어미가 얼마나 권력이 있는가, 황제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는가에 따라 달라졌다. 그 기본을 충족하지 못한 여 보림이니 최소한으로 밉보이지 않게 아이를 교육할 생각이었다.
강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황제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어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아이가 밉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얌전히 살길, 쥐 죽은 듯 숨을 멈추고 바닥에서 기어 다니길. 친왕이 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태자는 바라본 적도 없었다.
여 보림이 바라는 건,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장수가 되어 출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은 여기서 죽어간다 해도, 아이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살길 진심으로 바랐다.
‘도저히 널 용서할 수가 없다. 너의 잘못 하나로 모두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이야!’
여 보림이 소리치며 아이의 엉덩이를 정해진 횟수만큼 때렸다. 결국 회초리가 뚝, 소리 내며 부러졌다. 연강은 얼굴을 손에 파묻고 엉엉 울고 있었다. 여 보림은 숨을 헐떡이면서 연강의 떨리는 등을 보았다.
아이의 엉덩이가 한겨울의 바람을 맞이한 뺨보다 더 붉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무르익었다. 새빨갛게 부은 엉덩이를 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안 내관을 보았다. 유심히 지켜보던 안 내관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들고 있는 서적을 내려놓고는 느리게 다가와 연강을 안아 들었다. 연강이 울먹거리면서 안 내관에게 안기려 했으나, 안 내관이 매서운 얼굴로 연강을 노려보았다.
아이가 히끅, 거리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아이는 몹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아이처럼 구실 겁니까? 이제 곧 다른 황자 마마님들과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곳에 가서도 우실 겁니까?’
‘하, 하지만….’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닦고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몰랐어. 그곳이 아바마마가….’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어법을 사용하실 겁니까?’
안 내관이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흘러내린 바지를 입혀주며 나긋나긋하게 다그쳤다. 연강은 쓰라리고 홧홧한 엉덩이 때문에 신음하며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안 내관은 그제야 아이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식은땀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도 안쓰러웠고, 하도 울어서 부어오른 붉은 눈가도 처량했다.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붉게 상기된 뺨은 겨울바람을 맞아 거칠게 올라왔다. 입술은 부르튼 지 오래였다.
안 내관이 땅에 무릎을 대고 연강과 눈을 마주쳤다. 서럽게 눈물을 삼키던 연강은 안 내관이 한결 누그러진 눈으로 자신을 봐주자, 울음을 터트렸다.
‘알겠으니 그만해주게.’
강이 황제에게 사랑받는 비빈의 아이였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안 내관도 자신이 섣불리 나섰다는 점을 깨닫고,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으십니까?’
안 내관의 물음에 연강이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통통한 볼은 붉고, 축축하다. 속눈썹마다 눈물이 엉겨붙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광경에 안 내관은 연강을 데리고 어선방으로 향했다.
당직 때문에 남은 내관들만 있는 어선방은 조용했다. 안 내관은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내관을 앉히고, 단지를 꺼내 들었다. 황자, 황녀들에게 하루에 정해진 양만큼 주어지는 당과를 줄 생각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당직 내관이 붓을 꺼내 들어 기록했다. 시간과 연강의 이름, 당과를 준 자의 이름까지 모조리 다 적었다. 꺼낸 장소, 어떤 단지를 꺼냈는지도 꼼꼼히 적었다. 만약에 황자나 황녀가 음식을 먹고 잘못된다면, 그 기록에 따라 음식을 준 사람에게 벌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오늘 당과를 드시지 못했지요?’
내관이 다정하게 말하며 연강의 조막만 한 손에 당과를 들려 주었다. 평상시라면 좋아서 덥석 베어 물었을 강이지만, 무슨 영문인지 강은 당과를 손에 쥐고 다리를 꼬았다. 여 보림에게 얻어맞은 엉덩이가 아픈 것일까. 하지만 검은 구슬 같은 눈을 도록 굴리는 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안 내관의 늘어진 눈이 의심으로 꿈틀거렸다.
도대체 저 황자가 무슨 영문으로 저러는 것인가.
연강은 슬그머니 당과를 뒤로 숨겼다. 그렇게 숨기려 해도,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니 눈에 훤히 보였다. 안 내관은 황자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소매에 손을 넣으며 허허하고 웃었다.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안 내관에게 황자 연강은 손자나 다름없었다.
‘누구 주시려고요?’
안 내관이 눈치 빠르게 묻자 연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으응…. 그것이 말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연강은 어선방에 있는 다른 내관이 신경 쓰였는지 몸을 비틀었다. 아이가 부리 같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부탁했다.
‘엉덩이가 아프네. 안아주면 안 되겠는가?’
강이 말간 눈으로 안 내관에게 부탁했다. 강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인 안 내관이 연강을 번쩍 안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이는 사람이 드문 후원에 와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숨을 후우우 하고 길게 내쉬며 안 내관을 보았다.
아이는 엉덩이가 아파서 앉지 못하고, 서서 안 내관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예쁜 아이가 귀엽게 웃으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 안 내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오늘 아주 큰 강아지를 만났다. 그 강아지가 아주 착했어. 날 이곳까지 데려와 주었는데…. 고마워서 당과를 주기로 약조하였다.’
강아지란 단어에서 안 내관은 눈을 굳혔다. 황궁 유원에서 사냥개를 키우긴 했지만 지금 강아지는 없을 것이다. 강아지는 작은 생물이 아니던가. 황제가 기르는 개들이 교미를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강아지라니…. 안 내관이 불안함에 몸을 숙이고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연강은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당과를 꼭 쥐었다.
‘강아지가 아주 착했어. 날 핥아주면서 달래주기까지….’
‘혹시, 그 강아지란 생물의 눈을 기억하십니까?’
안 내관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연강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귀엽게 대답했다.
‘응. 아바마마와 같은 금색이었다.’
안 내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건 저잣거리에서 볼 법한 흔한 강아지가 아니라 황제였다. 눈을 무척 좋아하는 황제가 신이 나서 늑대로 변신해서 설원에 놀다가 아이를 발견한 듯했다.
여 보림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앉힌 다음에 혼내는 광경만을 보았던 터라 미처 전후 사정을 듣지 못해, 누가 연강을 화원까지 데리고 왔는지 알지 못했다. 한발 늦게 연강을 데리고 온 자를 알아낸 안 내관이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여 보림이 그렇게 화를 내었는지 이해가 갔다. 설원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황제를 감히 강아지라고 칭하다니. 청궁에서 일하는 내관들, 궁녀들, 그리고 공동 육아를 도맡아 하는 유모들의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모독죄를 범한 것이다.
‘아이고….’
안 내관이 이마를 짚으며 끙끙 앓자 연강이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오동통한 손가락을 접으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자 아이가 울먹거리며, 안 내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지? 모르겠다. 알려다오.’
안 내관은 벽에 기대어 작은 동물 같은 연강을 보았다. 어미가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태어나서 아비의 품에도 안겨보지 못한 안쓰러운 황자였다. 이름도 받지 못해 태어난 지 1년이 흐른 후에야 한 대신이 청을 올려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황자였으니 아비가 늑대로 변신하는 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황제가 연강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은 안 내관과 여 보림이 잘 알고 있었다. 연강이 황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자식으로 자라난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연강은 늑대의 피를 받지 못했다. 평범한 아이였다. 그나마 어머니의 뛰어난 외모 덕분에 매우 귀여운 아이라는 걸 뺀다면, 이 궁에선 필요 없는 애였다.
실제로 연강처럼 살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간 황제의 자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비빈, 애첩들 사이에서 태어난 애들이 1년도 못 채우고 죽거나, 6살이 되기도 죽으니 내관들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황제는 17살에 황후가 죽고, 자식 둘이 연달아 죽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는 황후와 자식들이 죽은 궁이 불길하다며 없애라고 명령했던 잔인한 사내였다. 그 궁에서 태후가 살았다고 대신들이 만류해도, 황제는 명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황제가 연강을 무슨 연유로 살려둔 것일까. 안 내관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왜 그런가?’
연강은 어둠 속에서 도드라지는 창백한 낯빛을 가진 안 내관을 빤히 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안 내관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뺨을 만졌다. 어제보다 거칠어진 뺨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순박하게 웃는 얼굴은 가슴이 쓰릴 정도로 안쓰러웠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황자였는데, 길거리에 자라난 잡초 같은 대접을 받고 눈치를 보는 황자가 그저 안타깝게 느껴졌다.
‘강아지가 아닙니다.’
‘뭐?’
연강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안 내관은 주름지고, 거친 손으로 아이 뺨을 감싸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분은 고귀한 천제 폐하이십니다. 아셨습니까?’
강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안 내관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옹골차던 마음이 꽃처럼 갸우뚱하는 아이의 모습에 넘어갈 뻔했다. 안 내관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웃는 사이, 강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예?’
안 내관은 강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몰라 되물었다. 강이 당과를 먹기 좋게 반으로 자르려고 노력했으나, 통통하고 작은 손에서 뭉개졌다. 강이 침울해졌다. 강이 안 내관의 얼굴을 살펴보다 제일 짧은 부분을 하나 주었다. 제 나름대로 배려는 해야겠고, 당과는 먹고 싶고. 딱 그 나이 때에 맞는 행동에 안 내관이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안 내관이 뭉개져 예쁜 모양을 다 잃어버린 당과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서, 입을 열었다.
‘폐하가 그 강아지가 아니라고요?’
‘응.’
‘아닙니다. 그분은 폐하이십니다.’
‘강아지야. 폐하는 무섭지만, 그 강아지는 무섭지 않았어. 그러니까아…. 아바마마일 리가 없다.’
강이 추리에 만족한 듯 만족스럽게 웃었지만 안 내관은 하얗게 질려갔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큰일이었다. 결국 안 내관은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아직은 이해가 잘 안 되시겠지만, 그 늑대는 폐하가 맞습니다. 아셨습니까? 다른 곳에서 가셔서 그리 말씀하시면 마마께서 큰일이 나십니다. 그러니 꼭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폐하이십니다.’
‘강아지인데…’
천연덕스러운 강아지 소리에 놀란 안 내관이 서둘러 말했다.
‘강아지라고 말씀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 자체가 모독죄이옵니다. 폐하가 늑대 모습으로 다니시면, 조용히 땅에 엎드리시어 폐하를 모셔야 합니다. 어떻게 엎드리는지 잘 아시겠지요?’
태감이 물었다. 손을 떼어내고 엄격한 눈빛을 보내자 연강이 눈을 도록도록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해가 덜 된 얼굴이었지만, 안 내관이 강아지가 아니고, 폐하라고 하니 암기하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또 어디 가서 ‘강아지!’라고 소리쳐서 불경한 모독죄로 목이 잘리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안 내관에게 훈육을 받고, 막 당과를 먹으려던 강은 바람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세차게 불자 귀신이 온 줄 알고 깜짝 놀라 당과를 떨어뜨렸다.
‘안 내관!’
강이 그를 부르며 덥석 안겼다. 안 내관이 벌벌 떠는 강을 토닥여주었다. 안 내관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그를 무척 따르는 강이 그의 품에 꼼지락거리며 파고들었다. 안 내관은 귀여운 모양새에 허허, 하고 웃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애는 애인가. 안 내관은 마음이 누그러져 강의 등을 연신 쓸어 만져주었다. 진정이 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당과를 찾던 강은 바닥에 나뒹구는 걸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송아지 같은 검은 눈이 충격으로 흔들거렸다.
‘당과….’
연강이 애타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 내관은 단호했다.
‘아니 됩니다. 당과는 하루에 두 개이옵니다.’
‘어찌하여?’
연강이 고개를 바짝 들며 물었다. 안 내관은 손을 내밀었다. 연강이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안 내관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오붓한 모습이었다. 비록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만, 안 내관은 이때만큼은 할아버지처럼 연강을 예뻐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강이 6살이 된다면, 이제 연강은 더 이상 여 보림과 안 내관, 유모와 같이할 수 없었다. 법에 따라 분리되어서 살아야 했다. 아마 특별한 날이 아니면, 여 보림의 얼굴도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법이 그러하니까요. 모후가 귀해야 자식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법에 따라, 모후의 품계에 따라 찬과 당과, 과일이 달라집니다. 그 때문에 황자 마마께선 당과를 두 개 드실 수 있습니다.’
매우 적은 개수이긴 했다. 그러나 그 위의 황자들도 많이 먹지는 못했다. 어릴 때부터 단 것에 노출되면 편식을 하고, 성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또한 늑대로 태어난 아이들은 당과보단 생선과 고기를 더 선호해, 그쪽을 찾았다.
‘그렇구나…. 하지만 송 형님은 당과를 하루에 여섯 개나 드신다고 하셨는걸.’
숙비의 장남 연송은 연강을 그나마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당과나 달달한 과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종종 만나면 숨겨두었다가 건네주는 착한 황자였다. 황자들 사이에 잘 끼지 못하고, 나도는 아이가 불쌍한 마음에 한두 개씩 주다가, 아이가 자신을 강아지처럼 잘 따르니 퍽 귀엽다고 했다.
연송이 잘 챙겨줘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지, 연강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내관은 처량한 어깨가 귀여우면서도 못내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애써 귀여워하는 마음을 억누른 내관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6세가 지나시면 더 좋은 곳에서 좋은 찬과 당과를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는 원한 답을 들었어도 속이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청궁에 들어가자 손을 떼어냈다. 아이가 가장 먼저 앞서서 의젓하게 걸어갔다. 청궁에서 가장 낡고 으슥한 침전으로 향했다. 여 보림보다 더 낮은 품계의 어처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여 보림보다 황제에게 자주 안기고 있으므로 여 보림이 가장 허름한 곳을 사용했다. 여 보림도 딱히 불평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황제의 무관심에 안도했다. 그녀는 황제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소름이 끼쳐 참을 수 없었다.
아름답지만, 그건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앞에 앉은 태후와 같이 자식들을 보는 그 눈은 염라대왕 같았다. 그는 죽일 자식을 고르고 있었다.
*
연강이 호되게 여 보림에게 혼난 뒤, 무난한 며칠이 흘렀다. 연강은 조그만 손으로 문방사우를 챙겨 안 내관과 함께 6세 이하의 황자들과 공부를 하는 소융전으로 향했다.
연강은 교육 담당 내관에게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자그마한 손으로 큰 붓을 쥐고 낑낑거리며 글자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던 훈육관이 짜증을 내며 연강을 다그쳤다. 연강은 혼이 나면 움찔거리면서 눈치를 보았다. 혼나는 강을 보고 키득거리던 다른 황자들도 훈육관에게 혼이 났다. 한순간에 아이들 우는 소리가 가득 찼다. 당황한 훈육관이 ‘뭘 잘했다고 우십니까.’라고 혼내자 으헝, 하고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래서요, 어머니. 형님도 엄청 우셔서 결국 훈육관이 공부는 그만하자고 하였습니다.”
연강은 그날 석반 밥상머리 앞에서 여 보림에게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찬이 형편없었지만, 아이는 다른 황자가 거짓으로 운 사실이 웃겼는지 연신 키득거렸다. 여 보림도 기운을 회복하고 다시 활발해진 아들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참으로 좋은 재주구나. 울어서 공부를 멈추다니. 물론, 강이 너는 그러면 안 된다. 언제나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돼.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장수가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여 보림이 생선 살을 곱게 발라서 아들의 쌀밥 위에 올려 주며 말했다. 연강이 밥을 먹기 전, 여 보림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네, 어머니. 반드시 장수가 되어 이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어머니도 꼭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4살밖에 안 된 아들의 의젓한 다짐에 여 보림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가 이런 허름한 궁에서 쓸쓸히 자라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아이가 사랑받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대로 묻혀, 장수가 되어 하루빨리 출궁하기를 바랐다.
“이 어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미가 건네주는 찬을 오물오물 먹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여 보림이 살포시 웃었다. 까만 눈을 깜박거리던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웃었다.
각자 정해진 상에서 석반을 마쳤다. 아이는 배가 불렀는지 잠이 온다고 칭얼거렸다. 여 보림은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토닥거리면서 재웠다. 유모가 잠든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드디어 혼자가 된 여 보림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손을 올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했던 머리를 풀고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화려한 불이 보였다. 어두운 청궁 창에서도 환히 보이는 불길에 여 보림은 벗으려던 평복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풀어진 상의를 가다듬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여 보림뿐만 아니라 청궁에 사는 어처들이 나와 다소곳하게 바닥에 엎드렸다. 여 보림도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바닥에 양손을 대고, 그 사이에 이마를 대었다.
오늘 밤, 황제의 잠자리를 같이할 어처가 정해진 것이다.
황제를 보필하는 총관 태감이 오늘 황제와 침상을 같이 할 어처의 이름이 적힌 패를 들고 있었다. 총관 태감의 날카로운 눈매가 황제의 꽃들에게 닿았다. 그의 눈이 최종적으로 꽂힌 곳은 가장 후미진 구석에서 엎드려 있는 여 보림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향한 총관 태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바닥 문양만 보았다. 언제나 보던 문양이었지만, 이런 무료한 때 보는 문양은 언제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문양의 연꽃무늬를 하나, 둘 셀 때쯤 총관 태감이 입을 열었다.
“오늘 폐하께서 여 보림을 선택하셨습니다.”
익숙한 호칭에 여 보림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어리숙한 눈을 마주한 총관 태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마에 타시지요.”
초야를 제외하고, 무려 4년 만에 황제와의 잠자리였으나 전혀 설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안았던 지아비를 떠올렸다.
혼례식이었다. 온통 붉은 비단들이 그녀의 시야를 막고 있었다. 그녀는 알몸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엎드려져, 다리를 벌리고 늑대가 된 지아비의 옥경을 받아야 했다. 그건 공포였다. 늑대의 숨이 머리 위로 쏟아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여 보림은 겁을 먹고 눈에 띄게 떨었다.
하지만 총관 태감은 여 보림의 불행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패를 옆에 서 있는 친군에게 건네며 태연하게 말했다.
“끌어내려서 가마에 태워라.”
폐하께서 지루해하시겠구나.
그 말을 덧붙이며 총관 태감이 총총 걸음을 옮겼다. 여 보림은 양쪽 팔이 잡혀 끌려나갔다. 황제의 여인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엔 괴팍했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 또한 황제의 어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산등성이에 걸려 있던 달이 오늘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수줍게 얼굴을 가리는 듯한 태도에 음울한 황궁은 더욱 어두운 잠을 청해야 했다. 기 내관은 그림자조차 제 발을 못 내밀 정도로 깜깜한 길을 등불에 의지해 걸어갔다.
“아이고, 아이고….”
불혹이 다 되어가는 그는 이립의 사내 못지않게 재빠른 걸음으로 돌길을 뛰듯이 걸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뛰어서는 안 되었다. 황제를 제외하고, 이 황궁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은 아주 드물었다. 궁인들이 법도를 어기고 뛰었다간, 엉덩이에서 불이 나는 게 아니라 목이 댕강 잘려나갈 수도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기 내관이었지만, 지금은 사소한 법도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의 생사가 걸린 일이 발에 달려 있었다. 기 내관의 창백한 얼굴이 추위와 다급함에 붉게 달아오르고, 숨까지 거칠어졌다.
“허억, 헉….”
귀비가 머무는 아향궁에 거의 도착했다. 기 내관은 등불을 양손으로 꽉 쥐고, 허리를 굽혔다. 궁인은 늘 바닥을 보고 걸어야 했다. 황궁에 사는 이를 함부로 직시해서는 안 됐다. 모시는 이가 ‘고개를 들라.’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평생 바닥을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향궁이 가까워지는 느낌은 발끝으로 알 수 있었다. 아향궁은 황제를 모시는 총관 태감이 오는 날이 아니면 꺼지는 날이 없었다. 그녀의 외로움이 커질수록 불도 환해졌다.
혹시나 오늘은 황제가 올까 기대한 귀비는 몸을 깨끗이 씻고 아름다운 침의를 입고 불을 밝게 켠 후 다소곳하게 앉아 황제를 기다렸다. 총관 태감이 와서 가마를 타라고 말하면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뻐했고, 총관 태감이 오지 않으면 대낮처럼 밝은 궁에서 보를 입에 넣고 울음을 삼키며 울었다. 사가에서 예쁨을 잔뜩 받고 자란 고명딸인 그녀는 쌀 한 톨만 한 황제의 애정을 나누어 가지는 걸 무척 질투했지만, 대놓고 표현할 수 없으니 울음을 홀로 삼켜야 했다.
기 내관은 발등 위로 기어들어 오는 불빛을 보았다. 아향궁에 켜져 있는 촛불들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마치 귀비의 한과 울음을 달빛이 알고 그린 것 같았다. 분명 밝고 예쁜데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일그러짐을 만들어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그 불빛이 흐트러질 때, 안쓰럽다는 감정이 밀려와 기 내관의 가슴을 적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까워지는 아향궁에서 어흑, 하고 울리는 울음소리에 기 내관은 어깨를 굳혔다. 짜악, 짜악, 하는 둔탁한 무언가가 살을 내리치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안 봐도 무슨 일인이 눈에 훤했다. 귀비가 오늘도 황제가 오지 않는 걸 핑계로 아무나 붙잡고 채찍으로 때리는 듯했다. 채찍 소리에 잇따라 들리는 울음을 삼키는 신음소리를 노랫소리처럼 들으며 기 내관은 무감하게 말했다.
“마마께 내가 왔다고 고하라.”
밖에서 기 내관을 기다리고 있던 어린 내관이 눈에 띄게 풀어진 얼굴로 궁 안으로 들어갔다. 기 내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립도 되지 않은 내관이 감정 표현을 너무 노골적으로 하고 있었다.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 궁에서 저런 애들은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언젠가 귀비에게 꼬투리가 잡혀 뺨이나, 혹은 엉덩이를 두들겨 맞을 것이다.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딴생각을 이어갈 때쯤, 그 앳된 내관이 문을 열어 기 내관에게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마마께서 기다리십니다.”
기 내관은 등불을 어린 내관에게 건네고, 쥐 죽은 듯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귀비가 사가 사람이나 자신이 풀어놓은 사람들을 만날 때 사용하는 안실(安室)이었다. 겉으로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데 사용하는 은신처였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등을 드러내고 바닥에 엎드려 헐떡이는 궁녀가 기 내관의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살이 다 헤어져 피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궁녀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녹색 상의를 움켜쥐고 있었다.
기 내관은 그녀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양손을 소매에 숨기고서 허리를 숙이고 나비처럼 유연한 걸음으로 보석이 박힌 의자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족의가 보였다. 쪽빛 족의에 두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이 그려져 있었다.
쪽빛은 귀비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황제를 제외하고 그녀 외의 그 누구도 쪽빛이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황제가 ‘그대가 입으니 참으로 어여쁘다.’라고 한마디 했더니, 귀비가 그 이후로 쪽빛 옷은 아무도 못 입게 한 것이다. 황제는 귀비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들었어도 픽 웃고 넘겼다.
“마마, 신 기 내관 명을 이행하고 왔사옵니다.”
기 내관이 쪽빛 족의에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나긋하게 말했다. 대답 대신 피 묻은 채찍이 바닥에 벼락처럼 떨어져 굴러갔다. 궁녀의 피가 묻은 가죽 채찍이 바닥에 흉측한 점을 남겼으나 귀비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귀비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에 턱을 댄 채, 요염한 자세로 기 내관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라.”
기 내관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귀비를 보았다. 귀비는 무척 아름답고 교태로웠다.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 평생 고자로 산 기 내관의 없는 아래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색기가 흐르는 자태에 기 내관은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순간 귀비에게 흔들린 걸 깨달은 기 내관이 황급히 눈을 내렸다. 한심한 모습에 귀비는 입술 끝을 비틀어 웃으며 의자에 등을 대고 나른히 앉았다.
흑단 같은 머리는 황제의 취향대로 반은 묶고, 반은 흘러내려 봉긋 솟아오른 가슴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쪽빛 침의는 한겨울에 입기엔 지나치게 얇았다. 그녀의 상앗빛 피부가 고스란히 불빛 아래에 드러나 음심을 자극했다.
성격과 다르게 둥글고 아래로 처진 순한 눈망울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갓 스무 살을 넘었지만, 다른 여자들보다 작고 고운 손이 주먹을 꽉 쥐더니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오늘 폐하께서 부른 년은 누구더냐?”
“어처 중 여 보림이라고 하옵니다, 마마.”
“여 보림?”
황제의 수많은 처첩 중 누구인지 고민하던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오늘 폐하께서 구해줬다는 황자의 어미이냐?”
귀비가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까 무서워, 내관이 서둘러 대답했다. 늦게 대답하나, 빨리 대답하나 뺨 맞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빨리 맞고 끝내고 싶었다.
“그렇사옵니다, 마마.”
태감의 대답에 귀비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고뇌에 사로잡힌 듯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고, 손은 연신 보석이 박힌 팔걸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황제가 미아가 된 황자를 늑대 모습으로 구해 청궁까지 데려다줬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퍼져, 다들 알고 있었다. 늑대로 변하지 못하는 황자가 설원으로 마음대로 들어왔음에도 혼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에 대다수는 경악했다. 귀비는 그 소식을 듣고 화병을 내던지고 패악을 부렸다.
‘폐하께선 단 한 번도 내 아들 주를 안아준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 황자는…!’
황제는 첫아들이었던 태자 연황이 죽은 후로, 단 한 번도 아들을 예뻐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애정은 오로지 딸들에게 향해 있었다.
귀비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황제가 공평하게 모든 아들을 예뻐하지 않으니, 황자 연주가 사랑을 받지 않아도 태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황제가 첫딸인 예리 황녀를 무척 예뻐하니 예리 황녀의 옆에 연주를 데려다 놓으면 연주도 예쁨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획까지 있었다.
그러나 귀비의 안심과 계획은 난데없이 등장한 어리숙한 황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아이가 이대로 예쁨을 받아서 태자가 되면 어쩌나, 그렇다면 그 아이의 어미가 황후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러면 나는 평생을 비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내 아들은 황자로 끝나고?
귀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정돈이 잘된 손톱으로 보석을 긁어내리던 귀비는 예리 황녀를 돌보는 유모를 불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모가 귀비의 말을 전해 듣고 달려와, 바닥에 공손하게 앉았다. 귀비는 턱을 괸 채 유모를 보며 아름답게 웃었다.
“예리의 옷을 벗겨 눈에 담가라.”
“예?”
유모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귀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뺨을 때릴까 봐 무서워 유모가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마마….” 하고 사죄했다. 귀비는 나른한 숨을 내뱉으며 흘러내린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녀의 눈은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개구지게 변했다.
“죽지 않을 만큼, 고뿔에 걸릴 정도로만 눈에 담그면 된다. 폐하께선 예리를 무척 어여삐 여기시니 예리가 아프다고 하면 나에게 와주실 거다.”
그녀의 말엔 딸을 향한 측은지심보다 황제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당당함이 가득했다.
“마마, 하오나…. 황녀 마마는 이제 돌을….”
유모가 겁에 질린 채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예리 황녀는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었다. 귀비와 황제를 닮아 인형같이 예쁜 아이였다. 비록 어미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황제의 사랑을 받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사랑이 있다면 귀비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리란, 암묵적인 보장이 있었으니.
하지만 유모의 예측과 달리 귀비는 황제의 관심과 이목을 받기 위해 예리 황녀를 택했다. 무려 자신의 친딸인데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너무 아름답고 우아해 가슴이 떨렸다.
“어차피 예리 황녀는 그런 일이 아니면 아무런 쓸모도 없지 않느냐. 아들도 아니고 딸에 불과한 것을….”
귀비가 혀를 찼다. 안실에 자리한 궁인들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였다. 눈에 어린아이를 담그라는 말을 들은 유모만이 허망한 얼굴로 귀비를 보고 있었다.
귀비는 의자에서 유모를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내 아들 주는 나를 황후로 만들어 줄 귀한 아이지만, 예리는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그 아이의 쓸모는 폐하의 애정을 이쪽으로 가져다주는 수준이다. 오히려 그 아이를 이용해 연주가 관심을 받고, 재능을 인정받아 태자가 된다면 좋은 일 아니더냐?”
“마마….”
유모는 아향궁 구석에서 곤히 자고 있을 예리 황녀를 생각하며 울먹거렸으나, 귀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궁녀에게 연초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궁녀가 연초에 불을 붙여 가져왔다. 귀비는 느긋한 태도로 연초로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어내며 허공을 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은 한결 누그러진 채, 저 멀리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닿지 않는 시선이었다. 시선 끝에 있는 한 사람은 그녀의 애정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걸 아는 그녀의 눈 끝에 눈물이 슬쩍 맺혔다. 황제가 오지 않는 밤의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우물처럼 깊어졌다.
“그래도 불안하구나. 폐하께서 예리가 아픈 걸로 얼마나 와 주실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녀가 기 내관을 보았다. 연초를 반 정도 뻐끔뻐끔 피우던 그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성질 나쁘던 미소보다 한 떨기의 꽃처럼 피어오르는 미소가 더 무서워 기 내관은 몸을 굳혔다.
“그대는 확실히 내 사람이지?”
여기서 고민하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그 생각에 기 내관은 얼어붙어서 대답했다.
“예, 마마. 소인의 하찮은 목숨은 마마를 위해서 존재하옵니다.”
반사적으로 나온 아부였지만, 귀비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만족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연초를 궁녀에게 건네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의 쪽빛 침의가 하늘거리며 기 내관의 시선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가까워질 때마다 쭉 뻗은 다리가 선명하게 보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기 내관이 눈을 아래로 두려 하자, 그녀가 조막만 한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소녀 같은 손이 기 내관의 수염 없이 매끈한 턱을 잡아 올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기 내관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빛을 등지고 웃는 그녀는 구름에서 막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흔들거리는 검은 머리, 그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빛나는 하얗고 선한 얼굴. 그녀의 손이 기 내관의 뺨에 닿자, 기 내관의 이성은 조금씩 흐트러졌다. 조금씩, 미세하게, 균열이 갔다. 균열을 확인한 귀비가 목소리를 일부러 낮추고 살갑게 말했다.
“침전의 기록을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예…?”
“멍청하기는.”
귀비가 혀를 쯧, 차며 기 내관의 뺨을 때렸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도로 때린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아팠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기 내관이 이성을 차리고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침전의 기록은 소인이 손댈 수가 없사옵니다. 기록은 오로지 사관만이….”
“그럼 사관을 이용해라.”
귀비가 너무나 당연하게 말했다. 기 내관이 다시 멍청하게 “예?”라고 되묻자 귀비가 짜증을 내며 뺨을 또 때렸다.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듣느냐! 기록을 가져와. 사관을 시켜서.”
“마마!”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이지?”
귀비가 천연덕스럽게 물으며 내관의 턱을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잡았다. 자신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 탓에 내관은 귀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아야 했다. 후각을 사로잡는 향에 내관은 숨을 멈추었다.
귀비는 내관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날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그대가 그러지 않았느냐? 단 한 번이면 된다. 폐하가 그년에게 씨를 남겼는지, 안 남겼는지 그것만 알아와.”
씨를 남겼다면 씨가 틔우지 못하게 없애면 그만이었다. 씨를 남기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든 황제에게 사랑받지 못하게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다른 이도 사랑을 받을 수 없게 해야 했다. 그래야 했다.
*
황제의 금안이 여 보림의 얼굴 구석구석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금가루가 알알이 박힌 듯한 눈에 사로잡힌 여 보림은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침상에서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손을 보에 대고 있었다. 그의 두텁고 긴 손이 움직여 여 보림의 달아오른 뺨에 닿았다. 좀 더 안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그의 손이 닿은 곳은 여 보림의 눈이었다. 황제는 허리를 숙여 여 보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입을 대는 것인가. 깜짝 놀라 여 보림이 눈을 꾹 감는데,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닮았는데, 안 닮았구나.”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여 보림이 눈을 뜨고 용상을 보았다. 황제가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퍼지는 감미로운 미소에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황제의 손끝이 눈가 아래, 그 아래의 살이 오른 뺨, 턱에 닿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체취도 강해졌다. 가슴이 더 세게 뛴다.
“앗….”
그녀가 간지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신음을 냈다. 황제는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댔다. 너무나 다정한 입술이라, 그녀는 순간 황제의 손끝이 닿은 게 아닌가 착각했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이 지척에 있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쑥스러움도 좋다는 듯 피식 웃은 황제가 뺨에 연달아 입을 맞대며 중얼거렸다.
“향도 그대의 아이와 달라.”
입을 맞댄 게 아니라 그저 향을 맡기 위해서 코를 댔는데 우연히 입술까지 맞닿은 건가? 여 보림이 엉뚱하게 머리를 굴렸다. 황제는 널브러진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맞잡았다. 그의 날렵하고 오뚝한 코가 이제 목덜미에 닿았다. 향이 가장 진하게 나는 곳이었다. 황제는 그곳에 코를 박은 채, 나른한 숨을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그 아이와 달라. 얼굴은 그대와 비슷한데, 느낌이나 향, 모든 것이 달라.”
“강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여 보림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황제는 목덜미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은발이 흘러내려 여 보림의 쇄골에 닿아 물처럼 퍼졌다. 황제는 고아한 눈을 깜박거리더니 선연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 이름이 강인가?”
“예, 폐하.”
폐하께서 지어주셨사옵니다. 여 보림이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황제는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귀여운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황제는 여 보림의 날씬한 허리를 움켜잡았다. 그가 여 보림을 단단하고 사내다운 팔로 휘감아 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에게 제대로 안겨보지 못했던 여 보림은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의 눈이 그녀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아이와 쏙 빼닮았다. 아이가 좀 더 순하게 생긴 편이었다.
“아이가 당과를 좋아하던데 무슨 당과를 좋아하는 것이지?”
황제의 물음에 여 보림이 신음하면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다, 단 것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그렇군.”
단답으로 중얼거린 황제가 내관을 불러들였다. 내관이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제는 무감한 눈으로 내관의 굽은 등을 보며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하명했다.
“어선방에 일러 모든 당과를 만들도록 하라.”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내관이 공손히 대답했다. 황제는 달아오른 여 보림과 달리 평온한 얼굴을 들어 올려, 내관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여 보림을 내보내도록.”
*
추위는 날이 갈수록 세기를 달리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면 다음 날 살이 틀 것 같은 바람과 함께 이 세상을 아예 얼게 할 기세로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은 평복만 입고도 잘 다녔지만, 평범한 황족들은 동물의 털과 가죽을 덧댄 동복을 입어도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다.
“에취!”
곧 5살을 맞이하는 연강도 담비 옷을 입고 떨었다. 연강은 궁녀들이 가져다준 화로에 얼어붙은 작은 손을 갖다 대었다. 온기가 부슬부슬 올라와 손을 녹였지만 몸까지 데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연강이 추위를 못 이기고 떨었다. 청궁에서 가장 협소한 곳에서 머무르다 보니, 바람이 들이닥쳐 종종 고뿔에 걸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고뿔에 연강이 콧물을 흘렸다. 여 보림이 걱정스러운 손길로 연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런, 뜨겁구나.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어의를 부를까요?”
연강의 보육을 도맡아 한 유모가 바느질하던 의복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여 보림은 연강을 품에 끌어안으며 손발을 문질렀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지, 연강이 으슬으슬 떨면서 어머니의 가슴팍에 얼굴을 대었다.
“어머니, 추워요….”
아이의 칭얼거림에 힘이 없었다. 처음엔 추위만 타는 줄 알았으나, 여린 목덜미에 손을 대보자 열이 제법 느껴졌다. 여 보림이 덜컥 겁을 먹었다. 이쯤 해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겹쳤다. 연나라의 추위는 고문처럼 추웠고, 그걸 견디기에 아이들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연약했다. 며칠 전에도 어처 중 한 명의 자식이 열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어처가 아이를 품에 안고 오열하던 광경이 생생했다. 여 보림은 아이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어의를 부른다 해도 바로 와줄 것인지…. 그것이 걱정이다.”
“그래도 불러봐야지요, 마마. 제가 태감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모가 의젓하게 일어났다. 막 나가려던 그녀를 여 보림이 붙잡았다. 그녀는 침대에 몰래 보관하던 주머니를 꺼냈다. 그곳에선 여 보림이 할당된 용돈 일부를 모아서 만든 여윳돈이 있었다. 잠시 주머니 안을 보던 그녀는 결심한 듯, 돈을 꺼내서 유모의 손에 쥐여 주었다.
“태감에게 이걸 주면서 부탁하게.”
“예, 마마.”
유모가 궁 밖으로 나가 내관을 찾았다.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여 보림은 궁녀를 시켜 따스한 차에 꿀을 타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궁녀가 가져온 차를 아이에게 먹여보았지만, 아이는 으슬으슬한지 계속 여 보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 보림은 이불을 끌어당겨 아이 위에 덮었다. 연강은 여 보림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죄송해요.”
연강이 송아지 같은 눈을 들어 올려 여 보림을 보았다. 여 보림은 겨울바람 때문에 거칠어진 뺨을 매만지며 이마를 맞댔다. 아이의 이마가 뜨끈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괜찮다. 곧 어의가 올 것이야.”
그녀의 품에 아기처럼 안긴 연강이 여 보림의 옷깃을 꽉 잡으며 덧붙여 말했다.
“6살이 되면… 더 이상 어머니랑 살 수 없다고, 이렇게 지낼 수 없다고 안 내관이 그랬습니다. 정말 어머니를 볼 수 없는 건가요?”
연강은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불쑥 서글펐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름 의젓하게 여태까지 버텨온 연강도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여 보림은 말없이 아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쩔 수 없단다. 폐하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 너는 폐하를 위해 살아야 해. 폐하가 무슨 말을 하시든 따라야 한다. 알았느냐?”
“하지만 폐하껜 송 형님도 계시고, 주 형님도….”
연강이 중얼거리는 걸 여 보림이 검지로 입술을 눌러 막았다. 그녀는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연강이 입을 다물고 꼼지락거렸다. 아이 입에 담차를 흘려 넣어주자 넙죽 받아먹었다.
차를 다 마신 연강은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졸기 시작했다. 안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열기와 밖에서 퍼져오는 불기운에 졸음이 밀려온 듯했다. 여 보림은 아이가 상체에 완전히 기댈 수 있게 안은 후, 일어났다. 유모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고뿔이 더 심해지기 전에 어의에게 진료를 받고 싶었으나, 날이 워낙 우중충해서 그런지 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어찌해야 할까. 아이를 안은 채, 홀로 일어나 생각에 잠겼던 여 보림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열기가 있는 애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기보단 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듯했다.
아이를 침대에 눕힌 여 보림은 유모가 만들던 의복을 보았다. 숙비의 아들 연진이 태어난 지 어느새 돌이었다. 연강이 돌이 되었을 땐 이름도 없었는데, 숙비의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하사받았다. 의복의 비단 또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들을 제외해도 할당받는 것들 모든 것이 다 달랐다.
자신은 뿌리가 비천했다. 화관을 만들어 파는 상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부를 누렸지만, 황궁에서는 지나가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황제의 옆에는 항상 사랑받는 여인들로 넘쳐났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 혼례였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름을 받고 도둑맞듯 가마에 실리는 그녀를 보며 부모는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떠나가는 딸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황궁에선 툭하면 죽거나, 미쳐가는 여인이 수없이 많았다. 그게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야금야금 미쳐가 죽을까 봐.
“그래, 죽지만 않으면….”
여 보림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아들의 의복을 만지다가 고개를 돌렸다. 밖에 나갔던 유모가 추위에 떨며 들어오고 있었다. 여 보림이 서둘러 털옷을 덮어주고 화로로 끌어당겨 얼어붙은 손을 만져주자 유모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현재 청궁을 담당하는 어의도 바쁘다고 하옵니다. 예리 황녀 마마께서 심한 열병에 걸리셔서 의식을 못 차린다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숙향 황녀 마마가….”
거기까지 얘기하던 유모가 물끄러미 여 보림을 보았다. 유모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현비의 딸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돌도 채우지 못하고 말이다.
“현비께서 무척 슬퍼하시겠구나. 벌써 자식을 둘이나 잃었으니.”
“예에, 며칠째 숙향 황녀의 시체를 끌어안고 우신다고 합니다.”
현비는 14살에 황제와 혼례를 치렀는데, 벌써 자식을 둘이나 잃었다. 첫아들이 독을 먹어 허무하게 죽은 지가 엊그제 같았다. 안쓰러움에 혀를 차던 여 보림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자는 강을 보았다. 잘 먹어 오동통한 뺨이 보였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 자는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여 보림은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검고 탐스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자신의 옆에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이 귀여운 모습을 평생 눈에 담고 싶었다. 황제는 정말 지아비로서 최악이었지만, 그가 남겨준 씨로 낳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자식이었다.
“강아, 꼭 장수가 되어서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주렴. 그것이 어미의 유일한 소원이란다.”
그녀는 아이의 복숭앗빛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이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조그만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우웅,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강이 사랑스러워서 여 보림은 한참 아이의 자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아이가 잠을 곤히 잔 것에 마음을 놓아서일까. 강은 새벽에 갑자기 오른 열에 시달렸다. 뒤늦게 연강이 “아파요… 어머니, 아파요….” 하고 우는 걸 들은 유모가 깨어났을 때, 이미 연강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졸린 얼굴로 연강의 얼굴을 보던 유모는 깜짝 놀라 황급히 아이를 안고 안 내관에게 달려갔다. 안 내관은 청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육림에 있었다. 허락 없이 소육림에 가서 안 되는 궁녀였지만, 같은 사람을 모시는 궁녀와 내관은 비상시에 허락을 받고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소육림을 담당하는 궁인에게 부탁해 안 내관을 부르자, 잠에 취한 안 내관이 나왔다. 그도 유모와 마찬가지로 열에 끙끙 앓는 연강을 보고 놀랐다.
“아니, 어제까지 괜찮으셨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내관은 유모를 보며 말했다. 그는 울먹거리는 유모와 달리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어의는 불렀는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마마께서 주신 돈을 주었지만, 예리 황녀 마마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시간이 날 때 오겠다고 했습니다.”
“우선 마마께 가세.”
“내관께서는 어의를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마마와 청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겠네. 내가 어떻게든 어의를 모셔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안 내관은 손자 같은 연강을 위해 조금은 빠르게 걸었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유모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 보림을 깨우러 가야 했다. 황궁에서 꺼져가는 불꽃 같은 그녀였으나 기댈 곳은 그녀밖에 없었다. 연강을 그나마 아끼는 연송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연송도 고작해야 5살이었다. 고만고만한 황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하아, 하아….”
아이 입에서 밭은 숨소리가 나왔다.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뺨이 안쓰러웠다. 유모는 자신이 입고 있던 동복을 벗어 연강 등에 둘렀다.
“아흐, 추워라….”
유모는 추위에 부르르 떨며 눈길을 파헤쳤다. 내군과 내관들이 힘을 합쳐 눈을 쓸었으나 새벽에 내린 눈이 또 쌓여있었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처음에 눈은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이젠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정도로 수도에서 눈은 골칫덩어리였다.
그녀는 얼어붙은 길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밟으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바늘 위를 걷는 사람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듬성듬성 길을 비추는 새벽빛은 청궁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얇게 이어지고 있었다.
새벽빛이 흐릿한 점을 남기고 사라지는 부근에 왔을 때, 그녀는 안심했다. 불이 켜진 청궁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여 보림에게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안심하며 발을 뻗는데, 순간 신이 미끄러지며 그녀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넘어져서 황자가 다치면, 황자를 다치게 한 죄로 적어도 곤장형이었다. 그 순간 황자의 건강보다 자신의 안위가 머리를 돌풍처럼 스쳤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엇…?”
그러나 그녀의 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억세게 붙들고 있는 힘에 유모는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하얀 눈에 짙푸른 빛이 흠뻑 뿌려진 세상을 등지고 서서, 자신을 꽉 잡아주고 있는 이가 보였다.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는 황제의 친군이었다. 무감한 눈이 보내는 시선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서, 친군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친군이 여기 있다는 건, 황제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삼켰다가, 황자를 안은 채 차가운 눈에 무릎을 대었다.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숨소리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지나갈 때까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제발, 빨리 지나가기를. 속으로 애타게 기도하며 황자를 끌어안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구름처럼 떠올랐다.
“그대가 안고 있는 아이는 누구의 아이지.”
황제가 황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궁녀는 눈 속에 거의 파묻히듯 앉아 바들바들 떨면서도 충실히 입을 열었다.
“고귀한 처, 천제 폐하를 미천한….”
“소개는 되었다.”
황제가 짜증을 내며 유모의 소개를 단칼에 잘랐다. 가볍게 숨을 내뱉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품에 안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고 물었다. 누구의 아이냐?”
유모는 아이의 등을 덮은 동복을 슬그머니 내리며 들어 올려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모는 땅에 시선을 고정해서 알지 못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자신의 얼굴을 보여선 안 되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마차의 창문을 연 상태에서 아이를 지켜보던 황제가 몸을 움직였다. 황제가 마차에서 내려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들은 태자를 제외하고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는 황제였다. 태어난 딸들을 품에 안아보고, 입을 맞추고, 또 저승길로 보내본 황제였지만 이번만큼은 뭔가 어색했다. 품에 안긴 아이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에 달궈진 돌처럼 뜨거웠다. 식은땀에 푹 젖어 검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유독 창백하고 붉은 뺨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강도 고뿔에 걸렸군. 요새 아이들 사이에 고뿔이 유행인가?”
황제가 혀를 차며 손등으로 연강의 뺨과 목을 만졌다. 후끈한 열기에 황제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열이 매우 높은데, 그동안 황자를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이냐?”
황제가 아이를 익숙한 자세로 안아 보듬어 주며 유모에게 호통을 쳤다. 벼락같은 호통이 쩌렁쩌렁 울렸다. 겁에 질린 유모는 얼어붙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아, 아니옵니다! 어, 어, 어의를 불렀지만 예리 황녀 마마께서 생사가 오가신다며 황녀 마마께서 쾌차하시면 온다고 약조를 하셨사옵니다!”
유모의 설명을 들은 황제는 불을 들고 걷던 내관에게 말했다.
“당장 청궁을 담당하는 어의들을 조사해라. 황자가 이리도 아파하는데 방치하다니. 천자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황제답게 나긋하고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안에 깃든 감정은 거열형 선고보다 섬뜩했다. 유모는 눈을 감고 확신했다. 청궁을 담당하는 어의들의 손목이 목처럼 잘리겠구나. 그들의 곡소리가 연기처럼 울려 퍼질 걸 상상하니 오금이 저려왔다.
황제는 유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어린 아들을 보았다. 강이 축 늘어져 헐떡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아슬아슬하게 숨을 내쉬는 아들을 보던 황제가 흥미롭게 눈을 깜박였다. 그의 눈가에 짧은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천금궁으로 간다.”
황제가 눈길에서 얼어가는 유모를 내버려 둔 채 가마에 올라탔다. 그는 아이의 뺨에 자신의 온기를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손바닥을 갖다 대고서 떼지 않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아이의 얼굴을 다 가려버렸다.
“태의를 불러라.”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천금궁으로 향하는 내내, 황제는 한 팔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두 명의 아이도 양팔로 안고 다닌 적이 있는 황제에겐 이 정돈 매우 쉬운 일이었다. 다만,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들의 무게였다. 4살인데도 못 먹고 자랐는지 가벼웠다.
그는 “아파요…. 어머니….”라면서 뒤척거리는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아들이 황제의 널찍하고 탄탄한 어깨에 뜨거운 뺨을 대었다. 열 때문에 맺힌 눈물이 황제의 평복에 닿아 스며들었다.
황제는 궁녀들이 소리 없이 여는 12개의 문을 지나 침전으로 들어갔다. 신을 벗은 황제가 침상을 가린 휘장을 거두었다. 붉고, 투명한 휘장들이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며 황제와 연강의 몸을 가렸다. 황제는 천천히 아이를 침상에 눕혔다. 아이가 입을 벌리고서 힘겹게 숨을 색색거리고 있었다. 풍성한 속눈썹에 엉겨 붙은 눈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답게 통통한 뺨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뺨 위를 투명한 눈물이 기어갔다. 반짝거리고 투명한 길이 남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황제는 엄지로 닦아냈다. 매우 조심스럽고, 진중한 손길이었다. 잘못 건드리면 깨질까. 그리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황제의 손끝에 달려있었다.
아이가 황제의 체온을 감지하고서 눈을 스르르 떴다. 열에 잠식된 검은 눈은 황제를 보고도 황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아이는 황제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금안을 뚫어지게 보다가, 혼미한 정신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강아지….”
아이의 손이 황제의 뺨에 닿았다. 뜨거운 손이 차가운 뺨을 슬그머니 적신다. 온기가 핏줄을 타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황제의 표정은 처음에 찌푸려졌다가, 아이의 손이 계속 피부에 머물수록 다정하게 녹아내렸다. 그는 그때처럼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아이도 그게 좋았는지 열에 달아오른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당과 먹으러 와… 청궁으로…. 그곳에 내가 있다. 내 이름은….”
아이가 열 때문에 정신을 잃어간다. 황제는 아이의 손이 의식을 잃고 떨어지는 게 아쉬워, 손목을 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너무 작고 여린 손목이 손에 공간을 남긴 채 잡혔다. 황제는 아이의 손바닥에 코를 파묻고서 농염한 입술을 열었다.
“이름은? 네 이름은 무엇이지?”
황제가 조곤조곤 물었다. 아이가 감았던 눈을 반쯤 떴다. 겨우 의식을 차린 듯했다. 열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이가 황제의 뺨을 매만지며 확실하게 말했다.
“강.”
이름을 알려준 아이가 정신을 잃었다. 황제는 뺨에서 떨어져 툭, 침대에 닿은 손을 하염없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뺨에 녹진하게 자리 잡은 열기를 만졌다. 뜨겁다. 피부가 녹을 것 같다. 황제는 하염없이 뺨을 만지며 기절한 아이를 보았다.
“강…. 내 아기.”
그렇게 중얼거린 황제가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구나. 아들이란 존재도.”
그가 허리를 숙여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다가,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평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아이에게 팔을 내어준 황제가 온몸으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너무 소중해서 세게 안을 수도 없어, 어정쩡한 힘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의가 천금궁 침전으로 와서 연강을 진료했다. 황제의 예상에 맞게 요새 유행하는 고뿔이었다. 고뿔에서 열병으로 이어졌다며 태의가 한동안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당연한 진료였지만, 황제는 귀담아들으며 아이의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주었다.
태의는 당황한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녀에게나 하던 행동을 아들인 연강에게 하고 있었다. 아버지로서 응당 해야 할 애정 표현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이야. 다정한 황제의 눈길이 닿은 아이를 보던 태의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료 도구를 정리했다. 태의의 눈에 섬뜩한 이채가 서렸다.
아마 조만간 황궁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태자가 되지 못해도 아마 거기에 비슷한 자리가 연강에게 주어질 것이다.
궁에서 30년을 넘게 일한 태의는 확신을 가지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해가 서서히 얼굴을 지상에 들이밀 때쯤, 비보가 천금궁 침전에 전해졌다. 며칠 동안 심한 열병에 시달리던 예리 황녀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현비의 딸 숙향 황녀에 이어 귀비의 딸마저 연달아 목숨을 잃었으나, 황제는 연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이 없었다.
평상시 황제라면, 황녀가 죽었다는 사실에 울지는 않았어도 안타까워했을 테지만 오늘은 유달리 이상하게 보였다. 그는 손에 넣은 옥구슬처럼 어여삐 여기던 예리 황녀의 죽음에 짧은 말을 남겼다.
“예리의 시체는 숙향처럼 태워라.”
사관은 그 말을 적어 내렸고, 그 명을 받들 대신은 허리를 숙였다. 황제는 전날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새근새근 자는 연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열병이 유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느니라. 열병으로 죽는 아이는 숙향과 예리면 족하다.”
“귀비 마마껜 아니 가십니까, 폐하?”
대신이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그래, 하고 그 말을 건성으로 넘긴 황제는 뒤척거리며 눈을 뜨기 시작하는 연강을 보았다. 정신을 차린 연강은 청궁의 낡은 침전과 다른 호화롭고 넓은 침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황제와 눈을 마주친 연강이 의아한 듯 눈을 깜박이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귀비에겐 기다리라고 하거라.”
의아한 빛을 감추지 않는 대신을 무시한 황제가 아들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꽂아 안아 올렸다. 어지러웠는지 연강이 고개를 숙였다. 연강의 이마가 닿은 곳은 황제의 가슴팍이었다. 벌어진 침의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탄탄한 근육에 연강이 흠칫 굳었다. 연강이 당황해서 눈을 들어 올려 황제를 응시했다. 겁에 질렸지만, 호기심도 만만치 않게 팽배해 있는 눈이었다.
아이다운 그 검은 눈을 보며 황제가 더없이 아름다운 웃음을 덧그렸다.
“아비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게냐?”
연강의 눈에 서린 호기심이 발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황제의 웃음에 깨끗이 씻겨나갔다.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관에게 수없이 들은 예법이 왼쪽 귀를 시작으로 오른쪽 귀로 통과해서 나갔지만 아이는 그저 멍하니 황제의 용안만 보았다. 심전에서 시작되는 울렁거림에 아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예전에 유모가 몰래 입에 넣어준, 밀가루에 설탕을 넣어 기름에 튀긴 과자를 너무 많이 먹고 구역질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모르고, 손끝을 오므린 채 울먹거렸다.
처음 보는 황제는 수묵화 속에서 춤추는 신선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의 아름다움이 인간답지 않았기 때문일까. 설원에서 보았던 늑대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일까. 혼란스러운 아이의 마음이 난데없는 파도를 맞이한 배처럼 심각하게 흔들렸다. 심전에서 시작되는 울렁거림이 갈수록 강도를 달리하자 아이는 몸을 살짝 떨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황제가 자신의 몸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있으니 내려갈 수 없었다. 붕 뜬 몸이 무서워서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고귀한 황제이니 도통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의 또렷한 금안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 같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커서 무척 귀엽던 강아지와 황제가 동일 인물이라는 건, 거짓이었다.
“흑….”
연강이 결국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구기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양팔로 높게 들어 올렸던 황제는 당황해서 아이를 침대에 앉혔다. 아이는 으엉, 하고 울면서 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곡식을 모으는 다람쥐 같은 형태였다. 마냥 귀여웠지만, 뭔가 속이 비틀렸다. 살갗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간지러움은 처음이었다. 계속 웃음은 픽픽 터지는데 지는 것 같았다.
저런 하찮은 귀여움에 함락당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황제의 아미는 찡그려졌지만, 입술 끝은 신난 사람처럼 활짝 올라가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아이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아이는 이불에 얼굴과 작은 몸을 숨기고 울다가, 히끅히끅 거리면서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으헝….”
다시 황제와 눈이 마주친 연강이 울음을 서럽게 터트렸다. 보다 못한 궁녀가 다가와 연강을 달래려 했지만, 황제가 오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궁녀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황제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태도로 아이가 하는 짓을 줄곧 지켜보았다. 아이는 작은 등을 바들바들 떨면서 울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힐끔 보고, 얼굴을 미미하게 붉히고 고개를 이불에 처박았다. 붉어진 얼굴과 목덜미를 보며 황제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였다. 설마 또 열이 오른 것인가. 아버지로서 가지는 마음으로 손을 뻗는데, 아이가 흠칫 놀라 침대에서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 구석으로 도망쳤다. 무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연강이 하는 건 하찮아서 그런지 귀여웠다. 또래보다 유독 작은 몸짓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여 보림을 닮아 인형 같은 외모 때문일지도.
아이의 귀여움에 현혹당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 손가락을 접던 황제는 끙끙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이불을 밧줄 삼아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4살짜리 아이에게 침상은 높아서 어른의 도움 없이는 올라올 수 없었다. 보통 상황이라면 다가와서 도와줬을 테지만, 침전에 황제가 있으니 다들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는 흥미로운 듯 금안을 깜박이며 아이가 하는 모습을 집요하게 보았다. 아이는 황제가 앉은 덕분에 이불이 움직이지 않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두 발로 선 아이는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빙글 돌았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딱 섰다. 황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팔뚝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툭, 툭 움직여 주름을 만들어냈다.
아이는 눈물이 남은 눈가를 손으로 훔쳐냈다. 올망졸망한 얼굴이 울어도 사랑스러웠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황제는 턱에 손을 대고서 아이가 하는 모습을 놓칠세라 일일이 눈여겨보았다.
“폐, 폐…. 폐하.”
백치처럼 말을 더듬거리던 아이가 헐렁한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아이가 순박한 눈을 깜박거리며 황제를 보았다. 낮은 위치에서 황제를 본 아이는 침대에 있을 때보다 안심한 얼굴로, 바닥에 엉성하게 무릎을 대고 손을 붙였다. 고개를 내리는데 엉덩이가 같이 들렸다. 절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꾸라지는 것인지 모를 행동에 황제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이는 내관에게 배운 예법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뭔가 이상한지 연신 뒤를 보고, 고개를 재차 숙였다. 그러다 엉덩이로 넘어질 뻔해서 황제의 상체가 움찔했다.
그러나 아이는 빠르게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황제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신 연강…?”
아이는 혼란스러운지 바닥에 대었던 이마를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예법에 황제가 소리 내서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신을 붙일 신분은 아닐 텐데….”
아이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잘못한 점을 황제가 지적했다. 내관이 누누이 말했던 경고가 머리에서 연거푸 반복되었다.
죽을지도 몰라. 죽음도 모르면서 강은 오들오들 떨었다.
“소, 소자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자가, 그, 그러니까 소자가….”
4살치고 말은 잘했지만 4살답게 엉성했다. 하하, 하고 유쾌하게 소리 내서 웃은 황제가 침대 밑으로 내려와 아이와 눈을 비슷한 위치에서 마주쳤다. 아이의 얼굴에 피어오른 발간 기운에 황제가 걱정스러운지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붉은 기운이 확실히 진해졌다.
황제는 온기가 희미하게 감도는 바닥에 닿은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잡아 올렸다. 저절로 아이 몸이 당겨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선 아이를 번쩍 안았다. 황제의 널찍한 품에 덥석 안긴 연강이 돌처럼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말이 많더니 오늘은 말이 없구나. 설마, 아바마마가 강아지로 변해야 입을 여는 건 아니겠지?”
황제가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건넸다. 아이는 설원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황제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까처럼 촉촉해지는 눈망울에 황제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웃고 있었다. 황제의 어여쁜 미소가 이제 익숙해졌는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두 뺨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닭똥 같은 눈물이 귀엽고, 우스워서 황제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소자는 가, 강아지… 아니, 늑대가 아바마마인 줄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지극한 아량을 베풀어 소자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눈물이 한 음절마다 다 박혀서 발음은 뭉개졌다. 그래도 아이의 진심을 읽은 황제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용서해줄 테니 제발 그만 울어라. 그리 울면 이 아비가 어떡하라고?”
황제는 승천하는 늑대가 새겨진 의자에 앉아, 아이를 허벅지에 앉혔다. 아이는 그사이 황제의 품이 익숙해진 듯 힘 빠진 손으로 황제의 소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황제는 한쪽 소매는 아이에게 건네주고, 남은 손은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오동통한 허리와 엉덩이를 감쌌다. 아이는 황제의 허벅지를 의자 삼아 앉아 고개를 돌리며 호화로운 침전을 물끄러미 훔쳐보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행동을 했다. 쉽게 울고, 쉽게 다른 곳에 이목을 집중했다. 황제가 ‘저길 보렴.’이라고 말하자 아이가 눈물 젖은 얼굴을 돌려 사방을 본다.
강은 사실 황제보다 편한 곳을 찾고 있었다. 어디라도 좋으니 몸을 숨기고 싶었다. 청궁 내부는 숨을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는데 침전은 시야가 탁 트여 숨을 곳이 없었다. 침대를 제외하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없었다. 겁을 먹은 강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흑….”
재차 그렁그렁해지는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수묵화였다. 농담을 달리해 설산을 표현했다. 설산은 연나라의 황궁을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월하산이었다. 음기와 양기가 조화롭게 뭉쳐져서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월하산의 신비로운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눈이 쌓인 산턱에 당당히 자리 잡은 소나무와 그 위를 날아다니거나 자리 잡은 화조가 보였다. 영생을 상징하는 화조 여러 마리가 무리 지으며 월하산 주변을 날고 있다. 화조는 하늘에서 날면서, 지상을 군림하는 한 존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존재는 연나라의 군주였다. 월하산 중앙에서 당장 뛰어나올 것처럼 안광을 번뜩이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한이 들고 등골이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안광에 사로잡혀 숨이 덜컥 멎었다.
어둠 속에서 만나면 저 안광에 질식해서 졸도하리라.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야산을 혼자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이의 온 신경을 꽉 잡았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다리가 겁에 질려 후들거렸다. 아이는 겁에 질린 눈을 돌려 황제를 보았다.
“아바마마….”
황제는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짙은 미소를 띄웠다.
“무서워할 것 없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지 않으냐?”
아이는 황제와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했던 설원을 떠올렸다. 자신이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던 착한 늑대. 물론 그때 늑대의 안광도 공포를 자아냈지만 분명 늑대와 연강은 꽤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만난 늑대였던 황제는 무서웠지만, 실은 다정한 강아지였다. 그걸 스스로 깨달은 연강은 황제의 옷깃을 더욱 꼭 잡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가 늑대인 거지요? 그럼 소자를 지켜주시는 거지요?”
황제가 웃으며 아이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여 보림을 안을 때처럼 향을 느리게, 힘껏 빨아들였다. 황제의 숨이 안온해지고, 그에 맞춰 강의 벌렁거리던 심장도 신기하게도 안정을 찾아갔다. 사내답게 넓고, 단단한 품이 주는 안정감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그의 섬찟한 금안에 사로잡혀 엉덩이를 호되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으나 황제가 따스하게 안아주고, 예뻐해 주자 조금씩 희석되었다.
“그래.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아비가 널 이리 지켜주고 있으니.”
“예.”
아이가 똘똘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숨결이 따스했다. 그의 음성은 숨결보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겨울용 금침에 둘러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제는 아이를 좀 더 안쪽으로 잡아당겨 안고 목덜미와 뺨, 이마, 머리에 코와 뺨을 부비며 말했다.
“어미와 향이 무척 다르다.”
무슨 말인지 몰라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됐다.”라고 얼버무리고서 두 손을 맞잡고 있던 궁녀를 보았다.
“당과를 가져오너라. 황자에게 먹여야겠다.”
“차도 같이 올리는 것이 어떨지요, 폐하?”
궁녀가 다소곳하게 물었다. 황제는 아이의 뺨을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아이들은 단 차를 좋아하겠지?”
연강이 고개를 휙 돌려 황제를 빤히 보았다. 유난히 눈자위가 큰 검은 눈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말해보라는 듯 웃었다.
“소자는 쓴 차도 잘 마십니다, 아바마마.”
연강이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뿌듯하게 웃었다. 쓴 차를 잘 마시면, 여 보림이 칭찬을 해준 모양이었다. 황제는 겨우 쓴 차를 잘 마신 걸로 칭찬을 받는 4살 아들이 귀여워서 체면도 잊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황제는 비단으로 느슨하게 묶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머리카락이 무척 부드러워서, 쓰다듬는 재미가 있었다.
정말 다람쥐를 갖고 노는 기분이었다.
“기특하구나. 그래도 아직 아가이니, 조금은 덜 쓴 차를 마시렴. 당과를 먹고 차를 마시면 입이 개운해질 것이다.”
아가라는 칭호에 연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좀 더 얼굴을 갖다 대었다. 검고 큰 눈이 갑자기 지척에 다가오자 황제가 놀라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아이가 더 가까이 왔다. 황제는 생각보다 대범한 아이의 행동에 뒤로 물러나, 의자에 머리를 대고 있어야 했다. 연강은 아예 황제의 가슴팍에 양손을 대고서 고개를 슬쩍 숙였다. 황제는 자신이 왜 도망가는지도 모르고, 난감해져서 웃고 말았다.
“어머니는 저더러 이제 아기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아바마마는 제가 어리게 보이십니까?”
“그럼.”
황제는 아이를 배 위에 앉혀서 포동포동한 뺨을 검지로 푹 찔렀다. 얼마나 포동한지 손가락이 쏙 들어갔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중독성이 있었다. 황제는 급기야 양손으로 아이 뺨을 아프지 않게 꼭 잡고서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4살이면 아바마마에게 아가지. 안 그러냐, 아가?”
*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냥감의 목을 노리는 촉이 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먹잇감의 목덜미에 꽂힌 시선은 새벽 호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햇빛을 빠짐없이 흡수한 금안이 사냥감의 움직임에 맞춰 가늘어졌다. 사냥감은 내관이 뿌려놓은 고기를 찾아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처음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던 사냥감도, 주변이 고요해지자 마음을 놓고 한 발자국씩 느리게 다가왔다. 욕심이 많은 여우가 입을 벌려 고기를 먹으려던 찰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황제가 놓았다.
캐앵! 캥!
황제의 취향에 맞춰 매우 뾰족하게 갈아놓은 촉이 여우의 목덜미에 팍 박혀 들어갔다. 황제는 생명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에 수려하게 웃었고, 황제의 앞에 앉은 황자 연강은 울먹거리며 황제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사냥에 불편하지 않게 끈으로 소매를 고정한 터라, 황제를 잡을 순 없었다. 연강의 짧은 팔이 멍청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일부러 팔을 내주지 않았다. 황제에게 매달리는 걸 포기한 연강은 부쩍 커진 손으로 눈을 폭 가렸다. 아들이 하는 걸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는 가리지 않을 셈이냐? 눈만 가린다고 해서 여우가 죽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황제의 가벼운 지적에 연강이 손을 슬쩍 떼었다. 저 멀리 있던 여우가 내관들에 의해 끌려오고 있었다. 푸른 생명을 흠뻑 적시는 붉은 비가 연강의 시야에 가득 찼다. 날카롭게 솟은 초록 잎에 매달려 있던 붉은 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여우가 캥캥거리며 몸부림쳤다. 여우가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화살촉은 몸 안에서 더욱 여우를 괴롭혔다. 가만히 있는 게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방법이었지만 여우가 알 리 만무했다.
“모, 못 보겠습니다….”
연강은 한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7살 된 아들의 건방진 행동을 눈여겨보던 황제는 버릇처럼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제가 연달아 머리와 뺨이며 등을 다정하게 만져주었으나 연강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귀에 닿는 여우의 울음이 점차 멎어들고 있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멈춰가는 소리였다.
소리가 거의 땅에 기어들어 갈 때쯤 연강이 눈을 떴다. 여우가 입을 벌리고 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통에 부릅떠진 검은 눈이 연강을 보고 있었다. 감길 생각 없이 떠진 검은 눈이 연강을 단숨에 꿰뚫었다.
연강은 생경한 공포에 여우처럼 캥캥 울지 못하고, 고삐를 억세게 잡은 채 미세하게 떨었다. 아들이 떠는 이유를 몰라 황제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언제나처럼 아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연유를 골똘히 생각하던 황제는 슬쩍 웃었다.
“저 눈을 파줄까?”
연강은 봄날 바람처럼 따스하지만 솜털이 바짝 서는 저의에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연강의 울음소리에 사냥터를 관리하는 내관이 속으로 한탄했다.
황제가 또 어설픈 다정함을 보여서 어린 아들을 울리고 말았다. 황제는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절대 시체를 훼손하지 않았다. 가죽을 뜯어낼 때야 눈을 파내도록 명령했는데, 지금은 아들이 눈을 보고 놀라서 헐떡거리며 울자 친히 눈을 파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연강은 난처해서 황제만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황제에게 매달렸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면 황제는 늘 그렇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의 친절이 아들에게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면, 바로 죽여줄까?”
황제가 달콤하게 물었다. 연강은 눈물을 닦아내며 소심한 목소리로 “네, 아바마마.”라고 부탁했다. 더 이상 여우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황제는 발가락을 오므리는 여우를 흘깃 보았다. 미련이 없는 눈으로 여우를 찰나의 순간 지켜보다가, 눈물이 흠뻑 젖은 앳된 뺨에 입술을 맞대었다. 얇은 잎맥 같은 핏줄이 입술에 닿았다. 그 순간이 찬란하고 황홀해서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들이 울음을 삼키며 애타게 “아바마마, 아바마마….” 하고 황제를 찾았다. 애달픈 울음이 무척 듣기 좋아서 황제는 여우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언제까지 아가처럼 울 것인지….”
말로는 훌쩍거리는 연강을 타박하면서도 입은 실실 웃고 있었다. 소매를 고정하던 끈을 풀어 내관에게 건넸다. 내관이 손을 내밀어 받아들였다. 황제는 말에서 훌쩍 내려온 후, 고삐를 꼭 잡고 있는 연강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아이를 번쩍 올렸다. 황제의 것과 비슷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행복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능숙하게 연강을 한 팔로 안자, 연강이 두 팔을 이용해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녀조차 엄두를 못 낼 행동을 연강은 서슴없이 저질렀다. 황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는 죽은 여우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여우 머리가 완전히 풀 속에 파묻혔다. 황제는 감흥 없는 얼굴로 목에 꽂힌 화살을 단번에 뽑아냈다. 여우의 몸은 아직 신경이 살아있었는지 푸득, 하고 떨다가 축 늘어졌다. 황제는 행복과 얼굴에 튄 피에 불쾌한 기색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내관이 달려와 용안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아주고 나서야, 황제는 편안해진 얼굴로 연강을 보았다. 연강은 황제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가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내며 웃었다. 황제의 미소가 대놓고 유혹적으로 변하자 연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저하며 고개를 바짝 갖다 대었다. 연강은 황제가 자신에게 하던 것처럼, 똑같이 입술을 뺨에 맞대었다. 쪽, 소리가 나며 떨어졌다. 황제는 흡족해서 환하게 웃었지만, 연강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황제의 어깨에 작은 얼굴을 숨겼다.
“허어… 천제께서 참 너그러워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던 태보가 새 깃털로 만든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옆에서 잡은 사냥감의 수를 세던 지홍왕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소 한 번에 태후를 닮은 새치름한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건 사 황자에 한해서입니다. 황녀에게도 저런 행동은 절대 보이지 않으십니다.”
불혹의 끝자락에 서 있는 태보가 부채로 턱을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태보의 눈은 한때 황궁을 활보하던 그때처럼 날카로워져 연강의 전신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태자가 하늘로 돌아가신 지 어느덧 팔 년입니다.”
태자와 황후가 함께 죽었기 때문에 황후의 자리가 빈 세월도 8년이 되었다. 비는 넷이었고, 그 아래 빈들은 열 명이 훌쩍 넘어갔다. 주경이나 야경에 만날 때, 삼공들이 은근슬쩍 태자와 황후에 대해 얘기해도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대신들이 대놓고 얘기해도 황제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사 황자를 태자로 만들 속셈으로 그리 나오신 건가. 태보는 사 황자의 어머니인 여 미인을 떠올렸다. 이제야 미인이 되었지만 그녀는 고작해야 어처 출신이었다.
여 미인을 황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화관을 만드는 상인의 딸이었다. 출신 자체가 태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핏줄을 돈으로 어떻게 상승시켜 보려 한 작자의 딸을, 귀한 황후 자리에 앉힐 수 없었다.
태보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수록 기괴하게 변했다. 태보를 물끄러미 보던 지홍왕이 황제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형님께선 딱히 그럴 생각이 없으십니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시는 편이시니, 사 황자가 아무리 어여쁘고 사랑스러워도 태자로 만드시진 않겠지요.”
그렇게 말한 지홍왕은 고개를 돌려 황제와 연강을 보았다. 꽤 달달하게 흘러가던 둘 사이가 무슨 영문이지 틀어져 있었다. 어느새 땅으로 내려온 연강이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었다. 황제는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아들의 둥근 머리통을 보았다.
“너무 하십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못 보겠습니다. 여우가 너무 불쌍해요…. 흑, 흐윽….”
“여우 털로 겨울 예복을 만들어주겠다는데 왜 그리 불만인 것이야.”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나 연강이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도리질했다.
“싫습니다. 그 여우로 만든 옷은 싫습니다!”
황제는 연강이 왜 여우 털로 만드는 예복을 싫어하는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황제의 얼굴이 너무 선하고 예뻐서 지홍황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허탈하게 웃었다. 연강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따스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황제가 공과 사를 구분 못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선연하게 몰려왔다.
“…사 황자가 태자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중얼거린 지홍왕이 태보를 보았다. 태보는 부채로 바람을 살랑살랑 부치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쨍하고 맑았다.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건, 어쩔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었다. 하늘이 신관을 통해 내려와 최종 결정을 내려줘야 황후든, 태자든 명목을 가지고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살짝 말끝을 늘리던 태보가 지홍왕과 눈을 마주쳤다.
“폐하께서 사 황자를 태자로 삼아도, 하늘이 거부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마치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지홍왕도 같은 뜻이었다. 지홍왕은 태보처럼 하늘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거부하면 모든 것이 끝이지요.”
둘의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데 저 멀리서 사냥터를 가르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친군이었다. 친군은 지홍왕과 태보에게 꾸벅 절하며, 곧장 황제에게 달려갔다. 얼굴이 붉어진 친군은 황제의 앞에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연강을 안고 아기처럼 다루던 황제는 달콤함이 깨진 게 불만인 듯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폐하! 재린 황녀께서 반 식경 전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말이 지독히 무덤덤해서, 사냥터에 오순도순 모였던 소수의 무관과 태보, 지홍왕은 자신들이 뭘 들었는지 곧바로 자각하지 못했다. 바람이 한차례 느리게 불고 나서야 현비의 셋째 딸 재린 황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음했다. 재린 황녀가 자신의 형제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지홍왕은 현비의 절망에 찬 울음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아 손으로 귀를 만져보았다.
비보를 전한 친군은 황제가 너무 평온한 얼굴로 반문하자 몹시 당황하여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잘 훈련 받은 친군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무관들은 연강을 안으며 홀로 행복해하는 황제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더 언급했다간,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태보는 정치에서 발을 뗀 지 오래되었기에 먼발치에서 황제를 지켜보았다. 태보는 이 자리에서 황제가 초대한 객이었지, 나서서는 안 되는 자였다.
“폐하, 현비 마마께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아가와 함께 사냥을 즐기고 있지 않으냐?”
황제가 연강의 볼에 남아있는 물기를 엄지로 닦아주며 말했다. 지홍왕은 당황한 친군에게 눈빛으로 물러가라고 했다. 친군이 물러가고, 무관들은 황제의 뒤를 병풍처럼 지켰다.
지홍왕은 땅에 한쪽 무릎을 대고, 반대쪽 무릎은 세운 상태로 손을 올렸다. 그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황제와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지홍왕은 태후를 닮아 선이 부드러운 편이었다. 아우의 곱상한 얼굴을 보던 황제가 한 팔로 강을 안아 들며 손을 내밀었다.
“현아, 일어나라.”
어릴 때처럼 지홍왕을 ‘현아.’ 하고 불렀다. 황제의 손을 잡아 일어난 지홍왕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폐하. 현비 마마는 폐하의 비가 아닙니까? 가서 달래주심이….”
“비라고 해서 천자가 일일이 가서 안아주고, 달래줘야 한단 말이냐? 만약 안아주고 달래주는 게 필요한 거라면, 네가 가서 해주면 되겠구나.”
“형님!”
지홍왕이 놀라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황제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으나 극진히 아끼는 아우인지라 부드럽게 넘어갔다. 연강은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당황해서 황제의 옷을 살며시 잡았다. 연강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황제를 찾았다. 황제는 동공이 잘게 흔들리는 연강의 눈을 지그시 보다가 웃으면서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어찌 이리 귀여운 것이야. 응? 주머니가 있다면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 아비가 참질 못하겠다.”
재린 황녀와 연강은 엄연히 같은 자식이었다. 지위와 혈연, 권력을 놓고 따진다면 재린 황녀가 약간 더 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건을 다 제외한다고 해도, 아버지로서 죽은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멀쩡할 수 있을까. 지홍왕은 친형의 이상한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폐하, 하늘로 돌아간 황녀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 황자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형님의 자식이지 않습니까.”
지홍왕이 안타까운 어조가 갈수록 힘을 잃었다. 황제의 태도가 얼음보다 단단하고 차가워, 도저히 뒷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죽은 자식을 안고 서럽게 울던 현비가 떠올랐다. 짐승 같은 울음이었다. 그녀는 흙더미에 묻히는 자식의 관을 보며 가슴을 뜯었다.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울던 그녀는 기어서 아이를 안으려고 했다. 궁녀들이 달려들어 뜯어냈지만 그녀는 궁녀를 몰아내고 자식에게로 기어갔다. 이미 죽어서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그녀만이 부정하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니야! 내 딸이 죽었을 리 없다! 아니야, 아니야…! 아아, 아가! 아가!’
그런 그녀를 달래준 건, 딸의 장례를 보던 황제였다. 황제는 그녀의 아픈 목소리에 응답하듯 달려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지아비의 품에 안겨 현비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황제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며 귀찮다는 듯 허공을 보았다.
‘폐하… 폐하…. 어흐흐….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어찌하여 신첩의 자식만 이리 허망하게 데려가신답니까… 이렇게 소중한 걸 주셨으면, 빼앗지 마셨어야죠! 왜 소중한 걸 깨닫게 한답니까!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폐하, 폐하…! 제 아이가…!’
‘그만해라.’
황제는 울어서 엉망이 된 현비의 얼굴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는 이미 죽었다. 보내주게. 하늘께서 뜻이 있으니 데려가셨을 것이다.’
현비는 울다가, 웃었다.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울음에 웃음이 섞여 들어갔다. 웃음은 다시 광증에 사로잡힌 울음으로 변했다. 황제도 달랠 수 없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음을 깨닫고, 황제는 물러났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같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날을 생각만 해도 가슴에 살짝 통증이 느껴지는데 황제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 것인가. 지홍왕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저 멀리 청궁에서 홀로 슬픔을 토해내고 있을 현비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아바마마, 재유가 하늘로 돌아간 겁니까?”
조용히 지홍왕과 황제의 대화를 듣던 강이 물었다. 지홍왕과 황제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따가운 시선에 연강이 어깨를 움츠리며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청궁에서 냉대를 받으면 자라났던 기억 탓에 연강은 날 선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황제가 지홍왕을 노려보았다. 지홍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연강에게 밀린 듯해서 불쾌했으나 현비의 일이 겹쳐있는 상태라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정말 재유가 하늘로 돌아간 겁니까?”
강의 눈망울이 촉촉했다. 울먹거림은 곧 진짜 울음으로 변할 것 같았으나 강은 울음을 참아냈다. 강은 황제의 금안을 똑바로 보며 중얼거렸다.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재유에게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자도 아플 때 아바마마가 오시면 무척 좋았는데, 재유도 그럴 것입니다.”
“재유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는데도?”
황제가 일부러 하늘로 돌아갔다는 말을 언급했다. 연강의 여린 어깨가 굳어졌다. 언제 보아도 느끼는 것이었지만, 강은 죽음에 많이 슬퍼했다. 쓸데없이 정이 넘치는 아이였다. 황궁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성정은 여 미인과 흡사했다. 연강보다 딱 한 살이 더 많은 연송은 죽음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는데. 문득 연송과 사냥을 나갔던 몇 안 되는 기억을 떠올리던 황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로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할지….”
“예?”
연강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되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줄곧 바닥에 있던 지홍왕의 등을 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황제는 연강을 먼저 안장에 앉힌 후, 자연스럽게 아이의 뒤에 올라탔다. 연강의 작은 몸을 단단하고 긴 팔로 고정하고서 그는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현비에게 가겠다.”
“폐하….”
지홍왕이 감격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재린 황녀의 죽음에 슬퍼하던 이가 저리도 기뻐하는 걸 보자 황제는 묘한 기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일어나서 말을 타려는 지홍왕을 보며 투덜거리는 아이처럼 말했다.
“누가 보면 네가 현비의 지아비인 줄 알겠구나.”
그 말을 남긴 황제는 연강을 데리고, 사냥터를 벗어났다. 지홍왕은 생소한 취급에 예쁘장한 얼굴을 구겼다.
*
황제는 사냥터에서 벗어나자마자 말에서 내려 가마에 올라탔다. 줄곧 황제와 같이 있던 강도 황제와 함께 가마에 타야 했다. 강은 연달아 보고 들은 죽음 탓인지 어린아이치고 상당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넓적다리에 앉혀놓고 인형을 보듯 관찰을 하던 황제는 턱을 괸 상태로 물었다.
“어찌하여 세상의 근심을 다 안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황제가 농을 치듯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4살이나, 7살이나 변함없이 빵빵한 볼이었다. 어선방에서 막 구운 밀가루 음식 같았다. 반으로 쪼개면 달콤한 꿀이 흘러내릴 것 같은 뺨을 어루만지던 황제는 아이가 살짝 떨어지자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는 황제가 조금만 짜증을 내도 겁을 먹고서 한달음에 안겨왔다. 지금도 아이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품에 자진해서 안겼다. 그제야 황제가 얼굴을 풀고서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궁녀들이 신경 써서 감기고, 빗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강은 황제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채 얌전히 있었다. 황제는 아예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끈을 풀고서, 아이의 머리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었다. 둥근 뒤통수를 슬슬 만지고, 등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잡고 갖고 놀기도 했다. 강은 귀를 스치는 어른스러운 살갗의 느낌에 몸을 비틀었다.
“가, 간지럽습니다….”
강이 끙끙거렸다. 황제는 손을 떼어내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수줍게 눈을 내리뜬 눈이 무척 컸다. 어떻게 저런 조그만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 있는지, 늘 보아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황제는 여인들이 바르는 연지를 볼에 바른 것처럼, 복숭앗빛으로 물든 통통한 뺨이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다. 종종 뺨에 입술을 비비다가 참지 못하고 깨물기도 했다. 너무 세게 깨물면 강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연약한 피부가 금세 붉어져 황제는 당황했다. 아이란 존재가 이렇게 약한 것인지 강을 통해 처음 알았다. 붉은 기운이 안 없어져서 태의를 불렀더니, 태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별거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황제를 보며 ‘앞으론 살살 깨무십시오. 아주 살살.’이라고 덧붙일 뿐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태의의 말을 격언으로 삼았다.
살살 깨물어야지. 아이는 약하니까.
“아!”
살살 볼을 깨물었는데 아이가 아프다고 소리를 냈다. 황제는 놀라서 아이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는 따끔하기만 했는지, 뺨을 감싸고 있었다. 황제는 안심하고서 아이를 꼭 안았다. 황제에게 덜컥 안긴 강도 머뭇거리다가 황제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황제는 강이 직접 안겨오는 것을 좋아했다. 묵직해지는 무게감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티고도 남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앞으로 아이가 품에 폭 안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통통한 뺨도, 뾰족하고 촉촉한 입술도, 향긋한 봄 내음이 묻어나오는 목덜미도 어른처럼 커버릴 것이다. 아이가 크면 자신의 곁을 떠나갈 것이다.
“아바마마?”
아이가 조그만 얼굴을 옆으로 젖히며 자신을 부르자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황제는 파도처럼 연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못 이기고 아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파요, 아바마마.”
아이가 칭얼거렸지만 놔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삼켜버릴까? 씹어버릴까? 그냥 안에 두고 고이고이 자신만 보고 싶었다. 황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힘껏 빨아들였다.
그곳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단내가 날 수 없었다.
“달다.”
“예?”
“네가 달다는 뜻이다.”
“소자는 달지 않습니다.”
아이가 힘껏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는 아이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황제의 손을 감추었다.
“달아서 미칠 지경이야.”
“…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이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황제가 뺨이며 목, 손등, 손바닥, 곳곳에 입술을 찍었다. 옥새를 서한에 찍던 것보다 진중하고 섬세했다. 아이는 간혹 살갗을 애태우는 간지러움과 가슴을 울렁거리는 애틋함에 몸을 떨었다. 벗어나려고 몸을 꼼지락거리던 아이는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눈을 반쯤 감은 강은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황제가 안아줄 때마다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이 시무룩하거나, 질투하는 걸 알기에 가끔은 멀리하고 싶었다. 황제가 예뻐해 줄수록 형제들이 멀어져가는 게 싫었다. 연송을 제외하고 강에게 호의적인 형제는 없었다. 같이 놀던 견습 내관들도 이젠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지 1년이 되어가는 어머니도 그리웠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와중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황제의 품은 단단함을 넘어서서 딱딱했으나 온기가 넘치고 다정해서 잠이 쏟아졌다. 강은 어느새 경계를 풀고 꾸벅꾸벅 졸았다. 황제는 옷깃으로 들어오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으나, 겨우 잠이 들기 시작한 아들이 깰까 봐 가만히 있었다. 목에 감겨있던 강의 팔이 툭 떨어졌다. 새근새근, 안정된 숨소리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렸다.
황제는 현비의 궁으로 가는 내내 고민했다. 아이가 잠들었으니 천금궁으로 갈까. 오랜만에 아이를 침전에 데려다 놓고 재우고 싶었다. 궁인들은 기겁하는 행동이었지만, 황제는 아이에게 팔을 내어주고 같이 잠들고 싶었다. 귀엽게 잠든 모습도 크면 사라질 테니, 조금이라도 눈에 새겨 넣고 싶었다.
내관을 부를까, 생각했던 황제는 손을 내렸다. 현비가 먼저라는 판단이 섰다. 몇 년 전처럼 장례에서 울던 현비보다 현비의 뒤에 있는 승상이 걸렸다. 자신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도 모르고 조정에서 움직이는데, 한 번쯤은 기를 꺾어줄 때가 되었다. 승상 같은 자를 아버지로 둔 현비를 황후로 삼았다간 조정이 승상의 입맛대로 기울어질 게 훤히 보였다.
승상은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가 심어준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세력이 커진 이상 이제 쓸모없는 말이었다. 태후가 쥐여 준 사람 중 쓸모 있는 사람은 아우인 지홍왕과 태의, 그 외 몇 명뿐이었다.
“폐하, 도착하였습니다. 가마를 내리겠습니다.”
내관들이 가마를 느리게 내렸다. 황제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었다. 황제는 손수 강을 안고 가마에서 내려와 현비의 궁으로 걸어갔다. 언제나 황제의 옆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총관 태감은 난처한 눈빛으로 황제를 살폈다. 자식을 잃은 현비에게 다른 자식을 안고 가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귀로 몰래 들은 소식이 마음에 걸렸다. 현비가 강과 여 미인에게 죽으라고 사특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는 얘기가 연신 귀에서 맴돌았다.
이걸 말하면 나에게 득인가, 실인가. 궁으로 걸어가는 짧은 순간 고민하던 태감은 입을 다물고 소매로 가렸다. 그는 기울어진 황제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그의 허리가 굽어져 오로지 발끝만 보게 되었다.
현비의 궁에 들어서자마자, 황제의 귓전을 때린 건 현비의 거센 울음이었다. 구슬픈 울음에 한이 한가득이었다. 강도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부스스 얼굴을 들어 올렸다. 황제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산발이 된 머리가 거슬렸는지 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내려주셔도 됩니다.”
강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으나 황제는 아이를 안은 채 궁 안으로 들어갔다. 궁인들, 재린 황녀를 돌보던 어의도 나와 절을 했다. 황제는 어의를 불렀다. 어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땅에 붙을 것처럼 머리를 댔다.
“폐하, 소신 두경후! 재린 황녀 마마의 병을 고치지 못한 죄 목숨으로 달게 치르겠습니다!”
법도에 따라 이름과 소속을 밝혀야 했지만 어의 두경후는 가장 먼저 죄를 고했다.
황자, 황녀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음까지 이르게 한다면 어의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같이 벌을 받아야 했다. 황녀는 지키지 못했지만 가족들만은 지키고 싶었다. 어의는 땀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황제는 흔한 말을 해도 실금을 할 것 같은 기세의 어의를 보며 혀를 찼다.
재린 황녀의 죽음은 어의의 탓이 아니었다. 재린 황녀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늘 원인도 모르는 병을 달고 살았다. 마음도 약해 황제가 안아줄 때면 겁을 먹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현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재린이 잠을 달게 자지 못해 그렇사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황제가 잘 알고 있었다.
재린 황녀가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미운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늘 많았다. 잘 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죽은 아이들도 한 해에 빠짐없이 생겼다. 그렇다 보니 이 일도 마치 의무적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이는 많이 만드셔야 합니다, 폐하. 많이 만들수록, 연나라를 어질게 다스릴 태자를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기실 겁니다. 일찍 하늘로 돌아가는 자식들에게 정을 주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정을 주실 아이는 오로지 한 명이랍니다.’
태후가 속살거리는 말이 귀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단 한 명, 태자뿐입니다.’
태후는 처음 겪는 아이의 죽음에 당황한 황제에게 지나치게 다정했다.
‘폐하께서 친왕이 되고, 태자 자리까지 오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황자들이 죽었습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폐하를 원망하지 않았지요. 원래 그런 겁니다. 존귀한 자리를 위해서 다른 황자들이 목숨을 내놓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미 죽은 태자와 아이들에게 사사로이 애정을 주지 마세요. 그 자식들이 죽은 건 자연의 섭리랍니다. 앞만 보십시오.’
태후가 앞만 보게 했다. 그곳엔 대신들이 서 있어야 할 드넓은 대전이 펼쳐져 있었다. 대전과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양옆에는 우람한 늑대상이 있었다. 늑대들은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아름다움을 폐하에게 주기 위해서 제가 폐하의 친아우들까지 죽였습니다.’
태상황이 사랑하던 첩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또한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자신의 아이 둘을 죽였던 태후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목소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죽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은 반복되고, 시간은 흐르고, 황제는 그사이에 무뎌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무너지기엔 황제의 자리는 지엄했다. 그리고 견고해야 했다. 그깟 개인적인 죽음에 흐트러지기엔 황제라는 권력은 너무 달콤했다.
“재린 황녀가 하늘로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황제가 현비의 침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곤조곤 물었다. 바닥에 엎드려서 어의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는 참지 못하고 낮게 윽박질렀다.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화, 화, 황녀 마마께서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던 어의가 결국 거센 울음을 토해내며 모든 것을 고했다.
“소신이 오기 전에 이미 하늘로 가신 후였습니다. 혀, 현비 마마께서 사가에서 받아온 약이 잘못되어 돌아가셨사옵니다.”
“뭐라?”
궁이 어의의 고백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강을 재우느라 노곤해졌던 황제의 금안에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렸다. 황제에게 졸린 얼굴로 안겨있던 강이 겁을 먹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황제의 눈이 곳곳에 서 있는 궁녀와 내관에게 뻗쳤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며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쳤다. 그러나 황제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냉담했다. 황제는 자신을 지키는 친군들과 궁을 지키던 금군들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궁녀, 내관들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
모시는 자가 자연스럽게 사망하면 상관이 없었지만, 사가에서 들여온 약이나, 치료가 잘못되어 하늘로 돌아가게 되면 죗값을 물어 할당된 궁인들도 처형당했다. 황제는 법도에 따라 그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금군들이 궁 안으로 들이닥쳤다. 궁녀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했으나 금군의 강한 손길에 밖으로 끌려나갔다. 혼비백산이 되어 바닥에 오줌을 지리는 내관들은 멱살이 잡혀 바닥에 내던져졌다.
“폐하! 폐하! 소신들은 몰랐습니다! 마, 마마께서 명의를 데려오셨는지 소신들은 정말 몰랐사옵니다! 폐하,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나마 용기 있는 태감이 나서서 죄를 빌었으나, 황제의 명령을 받은 친군에 의해 목이 도에 뚫려 죽었다. 두 개의 도가 태감의 목을 쑤시고, 벌려 피를 뽑아냈다. 태감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꺽, 꺽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태감이 오줌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잔혹한 모습에 궁녀 몇 명이 졸도했다. 다른 내관은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로 “히익, 힉….” 하며 울었다.
“아바마마…. 무서워요.”
사람 한 명의 목이 뚫려 죽어가던 광경을 보던 강이 황제에게 가련하게 매달렸다. 황제는 강을 안고 서둘러 현비의 침전으로 향했다. 강이 황제의 쇄골 부근에 얼굴을 대고 부들부들 떨었다. 연달아 본 죽음은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사람이 산 채로 목이 뚫려 죽는 모습을 본 강은 두려움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공포에 몸이 잠식되어 간다.
사가에서 약을 받은 것도 큰 죄였지만, 그 탓에 황녀가 죽었다면 황가의 씨를 죽인 것이니 용서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약에 대해 몰랐다면 현비는 죽지 않겠지만, 그 일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응당 죽음으로 죗값을 받게 해야 했다. 법도 앞에 차별은 없었다.
황제가 친군들과 함께 침전으로 들어왔는데도 현비는 죽은 아이를 안은 채 미동도 없었다.
현비가 침전의 창을 모조리 가린 탓에 침전은 달이 뜨지 않은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불을 올릴까요. 태감이 물었다. 황제가 그러라고 말했다.
“폐하.”
태감이 불을 켜려 하는데 가만히 있던 현비가 쉰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얼마나 통곡했는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현비는 죽은 재린 황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아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벼 온기를 나눠주며 말했다.
“이제야 오셨군요. 신첩은 폐하가 영원히 아니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느냐.”
“예, 그랬습니다.”
현비가 눈을 꼭 감았다. 세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가슴에 쌓인 한이 눈물로 나타냈다. 그녀는 짐승처럼 울음을 흘렸다. 눈물은 후드득 빗물같이 시체로 떨어졌다. 아이의 눈꺼풀에 떨어져, 아래로 흘러내리자 마치 죽은 재린 황녀가 우는 듯했다.
“폐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재린을 안아주십시오. 한 번도 폐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지 못한 불쌍한 신첩의 자식이옵니다.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떠나가는 아이를 위해, 안아주십시오.”
현비가 모든 자존심과 명예를 내려놓고, 황제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아이를 내밀었다. 그때 마침 태감이 초에 불을 켰다. 동쪽을 기점으로 현비의 침전이 서서히 밝아졌다. 황제는 동물과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겁을 먹은 강을 안은 채, 죽은 딸의 얼굴을 보았다.
재린은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강보에 둘러싸여 눈을 꼭 감고 잠든 것이 어여쁘게 느껴졌다. 아이의 입술이 새파랗게 물든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미의 젖을 빨았을 보드라운 입술이 푸르게 변질된 것 보고 나서야 황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재린 황녀는 죽었다. 이미 저것은 시체였다. 영혼이 떠나간 육체는 의미가 없었다.
황제는 시체를 안고 싶지 않았다. 차갑게 변해버린 자식보다 지금 품에 안긴 강이 더 소중했다. 황제가 무심코 강의 허리를 힘주어 안자 아팠는지 강이 입술을 벌렸다.
“아바마마, 아파요.”
그 소리에 현비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올렸다. 현비의 말간 갈색 눈이 텅 비어 갔다. 그녀의 눈에 황제보다 황제의 품에 안긴 강이 들어왔다. 강이 칭얼거리자 황제가 “오냐, 아가.”라고 말하며 등을 토닥이는 행위도 보였다. 그녀는 너무나 가벼운 자신의 자식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은 채 잠든 모습이 이리도 예쁜데, 아직도 사랑스러운데 황제의 눈에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생부의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죽은 자식이 셋이었다. 하나라도 사랑을 받았다면, 이렇게 강이 죽도록 밉지 않았을 터인데. 하나같이 황제의 사랑 한번 바람 스치듯 받지 못하고 죽어 불에 태워지고 땅에 묻혔다.
“폐하…”
현비가 백치처럼 황제를 불렀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현비는 죽은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올려 주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신첩의 아이는 폐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천자는 모든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었다.”
“아닙니다!”
현비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현비의 손가락은 황제에게 안긴 강에게 향해 있었다. 강은 자신을 향한 현비의 번들거리는 갈색 눈에 어깨를 떨었다. 난생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저승에서 올라온 귀신인가. 아바마마가 장난스럽게 얘기해주었던 귀신 이야기가 떠오르며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현비의 눈이 너무 무서웠다. 황제가 내려놓기만 한다면, 달려들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아, 아바마마…. 무서워요…!”
강이 현비의 눈빛과 손가락질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며 황제를 덥석 안았다. 정말 무서운지, 아이가 사냥감을 보던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들바들 떨었다. 황제는 아이를 절대 내려놓지 않을 기세로 꽉 안았다.
강에겐 너무 쉬운 것이 재린을 비롯한 다른 자식들에겐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현비의 눈에 핏줄이 섰다. 분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분출하고 있었다.
“폐하. 신첩의 아이들이 사랑을 받았다고요? 아닙니다. 폐하는 단 한 번도 신첩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렇게 다정하게 안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신첩의 아이들을 그리도 사랑해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게 답을 원하느냐.”
황제가 담담히 물었다. 현비가 바닥에 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음을 쏟아냈다. 그녀를 아주 잠깐 안쓰럽게 쳐다본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태자가 되지도 못할 아이들이었다. 천자는 그대의 아이가 살아있다 해도, 태자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현비가 눈물을 툭, 툭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신첩이 미우셔서… 그러셨습니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이 되어버린 현비의 머리를 황제가 어루만졌다. 황제의 몸이 저절로 앞으로 숙여졌다. 황제의 손이 좀 더 내려와 현비의 눈물 젖은 뺨과 턱을 만졌다. 그 상태로 현비의 얼굴을 고정한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지도, 밉지도 않구나.”
속마음을 들은 현비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반대로 황제는 빛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저 그렇다. 물론 그대의 아이들도. 사실 천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든, 살든, 무슨 의미가 있지?”
황제는 현비의 얼굴에서 빠르게 손을 떼어냈다. 잡을 때와 너무나 다르게, 잡기 싫다는 뜻을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황제는 넋이 나가 자식만 끌어안고 있는 현비를 덤덤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황제는 마지막으로 짧게 웃어주고서, 침전에 남은 자들에게 말했다.
“사가에서 받아온 약으로 황녀를 죽인 비정한 어미다. 당장 냉궁에 가둬라.”
이제 그녀는 죽어서야 냉궁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비참한 말로였다.
*
황제와 있을 때면 강의 신은 의미가 없었다. 늘 황제가 소중한 금덩어리처럼 안고 다녔기 때문이다.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번쩍번쩍 안아 들 때마다 화들짝 놀라던 강도, 충분히 황제의 손길에 길들여져 담담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어느 순간, 황제가 손을 뻗지 않아도 알아서 양손을 내밀며 “안아주세요, 아바마마.” 하고 사랑스럽게 말했다. 아이의 얼굴에 만개한 꽃에 황제는 멍하니 아이만 보다가 다리에 매달리는 턱없이 적은 무게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아이를 안아주었다.
평상시에도 스스럼없이 안겨오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아이가 심하게 안겨왔다. 빈틈없이 상체가 서로 밀착해 있었다. 숨통을 조이는 애절한 팔에 황제는 의아한 얼굴로 아이의 등을 보았다. 황자들이 입는 행복을 입은 등이 찬바람을 맞은 이파리처럼 떨고 있었다.
천금궁으로 느릿하게 이동하는 가마 안에서 황제는 아이의 신을 벗겼다. 툭, 소리 내며 가마 구석에 신이 굴러다녔다. 황가 문양이 수놓아진 족의가 드러났다. 황제는 아이 발을 손으로 잡아보았다. 다섯 손가락이 아이의 발을 완전히 감싸고도 남았다. 너무 작은 발이었다. 황제의 손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작은 등이 큰 손에 덮어졌다. 아이는 연신 자신을 애틋하게 만지는 손길에 안심했는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검은 눈은 겁을 먹고 흔들리고 있었다. 강이 왜 겁을 먹은 건지 몰라 황제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뺨을 툭 건드렸다. 새벽이슬이 닿는 것 같은 섬세한 손길이 좋아 아이는 황제의 손을 잡고 자신의 뺨을 만지도록 강요했다.
“왜 그러냐.”
황제가 아이의 요구대로 슬슬 뺨을 만져주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눈을 내리뜨고, 황제의 목에서 움직이는 사내의 상징을 보던 강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현비 마마가 소자를 미워하고 계셨습니다.”
말을 멈추고, 나이답지 않게 한숨을 내쉰 강이 우울하게 말했다.
“소자가 아바마마에게 사랑을 받는 게….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황제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미한 균열이 일어났다. 황제는 아이가 몹시 슬퍼하고 기죽은 것을 알고 놀라서 아이 얼굴을 감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근심이 깃든 검은 눈이 보였다. 황제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었다. 뜨끈했다. 작고 여린 몸이, 햇빛을 받아 달궈진 듯 뜨끈뜨끈하고 말랑거렸다.
“아가, 네가 잘못한 건 없다.”
황제가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강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아이는 눈을 감아도, 떠도 뒤에서 느껴지는 듯한 핏줄이 선 갈색 눈에 뒤를 볼 수가 없었다. 소름 끼치는 눈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숨을 바짝바짝 말리고 있었다. 생을 잃어가며 텅 비어가던 여우의 검고 뾰족한 눈에 현비의 원망 서린 눈이 겹쳐진다.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했다.
그리고 강이 죽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재린 황녀를 죽인 사람이 강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도 현비의 눈빛이 너무나 생생해 강은 유일무이한 안식처에게 안겼다.
“아바마마, 무서워요. 뒤를 볼 수가 없어요. 현비 마마가 소자를 주, 죽일 것 같습니다.”
아이는 정말로 무서웠는지 가마 안에서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황제는 뒤를 보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 아이를 와락 안았다. 아이가 보는 것은 황제의 넓고 각진 어깨였다. 사내답게 떡 벌어진 어깨는 아이가 얼굴을 묻기에 아주 적합했다. 황제는 아이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아이는 황제의 목에 두 팔을 걸고 어깨에 뺨을 댄 채 숨을 힘겹게 토해냈다. 황제는 아이의 등에 달라붙는 흔적을 어떻게 없앨까, 골똘히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건, 자신이 걸치고 있던 장의를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는 것이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은색 장의가 아이를 완벽하게 가렸다. 앞과 뒤가 온통 황제의 신체, 그리고 체향으로 뒤덮여 그 누구도 아이를 눈치챌 수 없게 되었다.
“무서워할 거 없다, 아가.”
황제가 귀에 대고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애틋하고 따스하던지, 들리자마자 눈물이 울컥 솟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특하게 강은 울지 않고 고개를 떼어내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유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어깨에 매달린 조그만 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천자가 널 지켜주고 있지 않느냐.”
강은 황제의 손안에 사로잡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뱉어내는 숨마저 도로 삼킨 강은 황제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신기하게도, 현비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의 체취와 체온이 생생히 느껴졌다. 강이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황제는 아이의 머리를 팔에 대었다. 엉덩이는 허벅지에 닿았다. 두 다리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 황제의 허벅지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황제의 남은 팔은 강이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허리와 엉덩이를 감쌌다. 흠이 없는 자세였다. 황제가 흘러내리는 장의를 잡아 턱 끝까지 덮어주었다. 강은 졸음에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며 황제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황제는 아주 잠시 머무른 미소에 숨을 멈췄다.
“정말 소자를 지켜주실 거죠, 아바마마?”
황제는 우두커니 아이만 보다가 고개를 숙여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내 모든 걸 걸어서 널 지켜주마.”
아이가 그제야 잠이 들었다. 두 눈이 감기고, 입이 벌어지며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걸 어떡하지. 옆에만 두고 매일 보고 싶은데. 황제는 새삼스럽게 황제라는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아들의 양육 과정을 눈에 세세하게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다가 그는 문득 기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예 아이를 천금궁에서 키우면 되는 것을.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황제가 강을 대놓고 천금궁 침전으로 불러들였다는 소식이 발 없는 말처럼 퍼져나갔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들은 귀비는 악,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붉은 자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떨어진 자기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죽은 장인이 만든 마지막 작품이 귀비의 손에서 요절했다. 귀비의 주변에 있는 궁인들은 그녀의 고성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귀비의 광증이 바퀴 돌듯 재차 시작하고 있었다. 황자 연주가 경혜왕이라는 봉호를 받을 때는 세상 얌전하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뜯어버렸다. 단지 귀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어린 궁녀의 머리가 옷처럼 뜯겼다. 궁녀는 두피가 찢어지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기어이 궁녀의 머리에서 피를 보고 나서야 신경증이 가라앉은 귀비가 씩씩거리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년의 애가 도대체 뭐가 특별해서 침전에 들이신단 말이냐!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께 그 애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걸! 아버지는 왜 날 말리시고!”
그녀가 쪽빛 치마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자, 내관이 다가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마마, 밖에도 귀가 있사옵니다. 자중하시지요.”
“자중? 지금 자중하게 생겼느냐? 귀비인 나도 폐하의 침전에서 한 식경 이상 머무른 적이 없거늘!”
그녀는 난데없이 머리채가 뜯겨 허망한 얼굴을 하고서 우는 궁녀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바닥을 구르며 재수 없게 유리 조각을 손으로 짚은 궁녀의 손이 찢겼다. 궁녀가 어흐흑, 하고 청승맞게 울자 듣기 싫다는 듯 숙여진 등을 발로 몇 번이고 때렸다.
“에이잇! 분이 풀리지 않는구나! 안 되겠다, 가서 여 미인을 불러와라!”
“여 미인을요…?”
내관이 되물었다. 귀비가 여 미인을 불러도 상관은 없었지만, 괴롭히려면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귀비는 아직 화가 남은 눈으로 태감을 보더니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녀도 충동적으로 부르라고 했지만 막상 부를 명분이 없는 듯했다. 턱을 괴고서 피우다 만 연초를 집던 귀비는 제법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내고 웃음을 머금었다. 악귀에서 순식간에 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온 귀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새 유행하는 화관이 필요했는데, 여 미인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하지만 그 일은 경서국에서 따로 담당하고 있사옵니다, 마마.”
“경서국에 일하는 놈들보다 화관을 만들기로 소문난 집안의 딸인 여 미인이 더 잘 만들 것 같구나.”
그녀는 어떤 말도 듣지 않을 기세로 코웃음을 치며 연초를 물었다. 궁녀가 다가와 부싯돌로 불을 붙여주었다. 연초를 뻐끔거리며 피우던 그녀는 침상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요염하게 웃었다.
“무엇 하느냐. 어서 가서 여 미인을 불러오지 않고?”
“하, 하오나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떡하옵니까? 여 미인은 폐하께서 자주 부르는….”
“폐하께서 그년을 사랑하시지 않으니 걱정 말아라.”
약간의 환각 작용을 하는 연초를 피워서인지 귀비의 태도는 아까보다 느긋해졌다. 머리채가 죄다 뜯긴 궁녀는 홀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떠난 자리마다 피가 떨어져 굳어갔다. 귀비는 새침하게 눈을 접어 웃더니, 연초 연기를 뿜어내며 속살거렸다.
“저년을 독에 가둬라. 감히 내 침전에 피를 흘려? 당장 가둬라!”
막 머리채가 뜯긴 궁녀가 침전을 뜨기도 전이었다. 그 말을 들은 궁녀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나 이미 덩치가 좋은 내관 둘이 궁녀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리고 있었다. 궁녀가 “마마! 마마아! 제,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피를 흘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외쳤다. 귀비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연초를 교태롭게 피우며 웃었다.
“감히 침전에 피를 흘리다니…. 죗값을 치러야 당연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마마.”
다른 궁녀들이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같은 목소리가 같은 어조로 똑같이 끝났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는 대장군의 딸이었다. 황제도 충신인 강호창 때문에 귀비 강유주를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 귀비가 궁녀를 사소한 이유로 죽이고, 툭하면 어처와 세부들을 불러 괴롭히는 걸 알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나, 귀비에게 궁녀나 내관들은 죽으면 또 채워 넣으면 그만인 물건이었다.
귀비는 여 미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지루한 얼굴로 연초를 피웠다. 마음은 끓어오르고, 머리는 차갑게 식어가는 아주 좋은 상태였다.
“마마, 여 미인이 왔습니다. 들라 할까요?”
“보양전에서 기다리라고 해라.”
귀비가 샛노란 장의를 어깨에 걸쳤다. 피부보다 살짝 짙은 상아색 저고리에 아래로 갈수록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쪽빛 치마가 한데 어우러져 청아하면서도 고아했다. 귀비가 궁녀의 손을 잡고 사뿐히 걸어갈 때마다 노란 장의와 쪽빛 치마가 살랑거려,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양전에는 잔뜩 긴장한 여 미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귀비를 보자마자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인사했다.
“마마, 그동안 편찮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워낙 긴장한 터라 목소리가 줄을 타듯 흔들거렸다. 여 미인을 건성으로 바라보던 귀비가 장의를 벗어 궁녀에게 넘겼다. 궁녀들은 귀비를 상징하는 다기를 들고 왔다. 막 차를 우리려던 궁녀의 손을 귀비가 싸늘하게 잡아챘다.
“나가라.”
궁녀들이 머뭇거리다가 줄지어 나갔다. 귀비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 미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서 차를 따르게.”
본래 차를 우리고, 따르는 것은 궁녀의 일이었다. 귀비보다 품계가 낮아도 황제와 침상을 같이하는 여 미인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았다. 여 미인도, 귀비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입을 벙긋하지 않았다.
여 미인은 귀비의 날 선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차를 따랐다. 식용으로 키우는 꽃잎을 차에 띄워 귀비에게 넘겼다.
혹시나 귀비가 꼬투리를 잡지 않을까, 여 미인이 노심초사하며 손끝을 마주 잡았다. 다행히 귀비는 차를 핑계로 여 미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 외로 느긋하게 웃으며 여 미인을 노골적으로 살펴보았다. 여 미인은 황제의 취향이 아니었다. 황제는 숙비처럼 화사하고 교태로운 여인을 몹시 좋아했다. 여 미인 같은 단아하고 서늘한 인상의 여자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 여자의 아들을 그리도 아끼시는 건가. 귀비는 새삼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질투에 주먹을 쥐고 여 미인을 노려보았다. 여 미인이 찻잔을 잡고 있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검은 눈이 수면처럼 떨렸다.
사 황자가 여 미인의 눈을 쏙 빼닮았군.
귀비는 차를 홀짝거렸다. 그녀의 갈색 눈이 이번엔 여 미인의 쭉 뻗은 코에 닿았다. 전체적으로 강은 여 미인의 이목구비를 닮았다. 얼굴형은 황제와 같았다. 황제의 품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안겨 웃고 있던 강을 떠올리던 귀비는 코웃음을 쳤다.
‘한때의 귀여움이다. 사내가 어렸을 때 귀여워 봐야 크면 딱딱해지고 별로인 것을…. 결국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아름다운 여인이다.’
귀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선하게 웃었다.
‘아니면 얼굴에 알게 모르게 흉을 내도 좋을 것 같은데…. 적당히 크면 그리할까. 절대 강에게 태자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태자는 오로지 내 아들이어야 해.’
연강이 황제의 품에서 쫓겨날 때까지, 연주가 무사히 태자 자리에 오를 때까지 자신의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여 미인이 딱 안성맞춤이었다. 연강의 어미이자, 황제에게 안기기만 할 뿐 사랑은 못 받는 여자.
심지어 소심하고 유약해서 황제에게 따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귀비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집안이 화관을 잘 만든다고 들었는데, 혹시 날 위해 어여쁜 화관 하나 만들어줄 수 있겠는가?”
여 미인이 놀라 아무 말도 잇지 못할 때, 귀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원래 동생이 형님을 위해 만들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마마, 하지만 제가 화관을 만든 지가 오래되어 솜씨가 미천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귀비가 양손으로 여 미인의 손을 감싸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대의 집안이 화관으로 봉황의 인장까지 받았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
“마마.”
“왜 그러는가?”
여 미인은 어느새 소심하게 귀비를 관찰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녀는 귀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고 눈을 내리떴다. 허공을 무력하게 더듬던 눈빛이 차츰 올라가 귀비의 시선에 맞닿았다.
여 미인은 귀비를 보며 단아하게 웃고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마마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드려서,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훗날 절 한 번이라도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귀비는 유약한 성정으로 감히 거래를 들이미는 여 미인을 보며 희미하게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는 손등에 올라간 여 미인의 손을 뿌리치며 이어 말했다.
“할 수 있으면 그리 해보게.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내 성심성의껏 그대를 돕겠네.”
귀비가 웃음을 거두고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단, 한 번뿐이야.”
*
황제의 명령 때문에 천금궁 침전에 머물게 된 강은 주경이 끝나면 황제의 화원에 들어갔다. 황제에게 허가받은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강은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됐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강이 짧은 다리를 움직여 들어오는 걸 보던 금군들은 자기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온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는 아이는 황제가 귀여워하는 아이답게 사랑스러웠다. 그 나이다운 순수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금군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강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군은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화원의 문을 열어주었다.
화원의 동쪽과 서쪽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간격을 고려해 심은 초목들과 어우러져 그 자체만으로도 눈이 호강했다. 꽃냄새를 맡으며 돌길을 걷던 강은 황제가 독서를 즐기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의자가 보였다. 몸을 나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져, 눕기만 해도 잠이 오는 의자였다. 황제는 전각에 들어오면 독서를 하기보다는, 의자에 기대고서 강을 허벅지에 앉혀놓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강의 볼을 하염없이 늘리고 꼬집었다. 아무리 힘을 빼고 만져도 여린 볼을 오랜 시간 공들여 만지는 터라, 강의 볼은 쉽게 까졌다. 그러면 강은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우는 강을 넌지시 보다가, 안고서 꽃밭으로 데려가 꽃구경을 시켜주었다.
울먹거리다가도 꽃을 보면 강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니인 여 미인이 알려준 꽃들이 넘쳐난다면서, 짧은 팔다리를 움직이며 황제에게 꽃 이름과 거기에 담긴 뜻까지 알려주었다. 사실 황제는 꽃에 대해 일체의 관심도 없었지만 아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강은 황제에게 자신이 아는 걸 전부 알려주고 싶었다. 황제에 비해 가진 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황제에게 뭔가를 줘야만 할 것 같았다. 황제와 화원에 자주 놀러오던 강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두 발휘해 황제에게 줄 선물을 만들었다.
그 선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각 구석에 숨겨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고 있었다. 강은 금군들이 주변을 다 살펴보고 나가는 것을 전각 창문에서 지켜보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강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강은 전각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 뒤에 숨겨놓은 선물을 찾아냈다.
황제에게 줄 것은 화원에 있는 꽃들로 만든 화관이었다. 어머니가 만들던 것처럼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경서국에서 구한 화관 나무 대에 따라 얼기설기 얽힌 꽃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설펐다. 7살 된 강의 손가락으로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힝….”
강은 화관을 잡고 시무룩했다. 포기해야 하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예쁘게 만들고 싶었는데…. 기운 빠진 얼굴로 화관을 지켜보던 강은 전각에서 내려와, 동쪽과 서쪽에 만들어진 꽃밭으로 향했다. 이미 몇 개 뽑은 꽃들이 보였다. 듬성듬성 보인 꽃들이 양심에 찔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강은 화원에서 가장 어여쁜 자태를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홍염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붉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해서 홍염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꽃말은 끝이 없는 사랑이었다. 강은 홍염에 코를 박고 향을 힘껏 맡았다.
눈이 멀 거 같다. 향이 독해서 코가 무뎌져야 했는데 이상하게 꽃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강은 초점이 멀어진 눈으로 홍염들을 보았다. 햇빛 아래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곳에 모여 있으니 정말로 이곳에 불이 옮겨붙은 듯했다.
강은 황제의 은발에 올라갈 붉은 화관을 떠올렸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강은 화관을 장식하고 있던 시든 꽃들을 뽑아내고, 홍염을 뜯어내 화관에 장식했다. 가시에 찔린 손이 아팠지만, 이걸 쓰고 기뻐할 황제를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은 햇빛이 점차 기울어져서 그림자가 길어지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화관 만들기에 집중했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뒤에서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후 정무와 공부를 마치고 강을 찾기 위해 화원에 들어온 황제는 아들의 뒤에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금군과 내군, 친군, 태감까지 다 물렸다. 아들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황제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강이 만드는 화관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본 것 중에 가장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찬란했고, 황홀했다. 어쩌면 내리쬐는 햇빛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서진 보석처럼 무너져 내리는 빛의 폭포 속에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아름다우리라.
“아가.”
황제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 강을 불렀다. 언제나 같은 음성, 같은 단어, 같은 감정이었다. 강은 그 소리에 똑같은 힘으로 이끌려 황제를 돌아보았다. 강은 황제를 보자마자 홍염으로 만든 화관을 손에 쥐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얼굴이 자신을 보며 웃고, 불렀다.
“아바마마. 소자가 아바마마를 위해 화관을 만들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강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화관을 들이밀었다. 살짝만 건들면 툭,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화관이었지만 황제는 허리를 숙이고 앉았다. 그는 아들과 눈을 마주친 채로 다정한 미소를 은은하게 머금었다. 강이 쑥스러움과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강의 심장이 설렘으로 뛰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황제는 말없이 아들을 지켜보다가 느리게 손을 움직여 턱에 고정된 끈을 풀었다. 스르륵, 소리를 내며 끈이 황제의 뺨에서 흔들거렸다. 황제는 두 손으로 관을 직접 벗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벗고, 쓴 적이 없는 관이었다.
황제는 머리를 고정하는 비녀가 보였다. 강은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아들의 통통한 뺨에 손을 대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직접 씌워줬으면 좋겠구나.”
“소자가요?”
황제의 미소가 진득해졌다. 강은 송아지 같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의 시야에 황제의 선연한 아름다움이 퍼져갔다. 익숙해질 수가 없는 아름다움에 강이 얼굴을 붉혔다. 강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강이 손을 움직여 피를 흘리며 만든 관을 씌어주었다. 황제는 아들이 씌워준 관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어떠냐. 잘 어울리느냐?”
“예, 아바마마.”
강이 양심도 없는지 하찮은 화관을 씌워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연달아 소리 내서 웃었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아들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강이 앗, 하고 소리를 냈다가 황제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황제는 흘러내릴 것 같은 화관을 손으로 고정하고서 천천히 화원을 걸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다. 고맙다, 아가.”
쏟아지는 햇빛과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들을 향유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늑함에 취했다.
*
가락지를 낀 섬섬옥수가 정갈하게 움직였다.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에게 강제로 붙들려 차를 배웠다고 푸념 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차를 따르는 손길이 매우 단아했다. 교본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정무를 보던 황제도 우연히 본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숙비가 차를 따르는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숙비는 황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지하고서 슬며시 미소 지었다. 어머니에게 미소 짓는 법도 따로 배운 덕분에 미소도 그린 듯이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를 고정한 산호색 비녀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자아냈다. 황제의 청각도 은연중에 사로잡겠다는 그녀의 마음가짐이 깃들어있었다.
그 방법이 틀리지 않았는지, 황제는 거의 붙들린 것같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숙비는 낮에 어울리는 정숙한 미소를 짓고서 찻잔을 들었다. 황제가 미소를 지으면서 잔을 받아들였다. 황제는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차를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반 정도 마신 찻잔을 다시 숙비에게 건넸다. 숙비가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아 들었다. 황제는 그녀의 손이 떠나가기 전에,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걸린 세 개의 팔찌가 영롱한 소리를 냈다.
“그대의 손짓도 참으로 어여뻐서 눈을 뗄 수가 없구나.”
칭찬에 그녀가 쑥스러운지 수줍게 미소 지었다. 황제는 손목에서 손을 움직여 그녀의 턱을 잡았다. 아담한 체구와 어울리는 작은 얼굴이 황제의 커다란 손에 다 잡혔다.
“다른 빈들도 그대처럼 행동하면 참으로 좋을 텐데….”
황제는 향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천자가 강을 예뻐하다 보니, 그대를 제외한 비빈들도 강이처럼 행동하려 한단 말이지. 그게 참으로 거슬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강이 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황제는 거기서 말을 잠시 멈춘 후, 동공이 흔들리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마음에 들어. 그대와 강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그렇게 하지 않거든.”
“사 황자는 사 황자고, 신첩은 신첩이니까요. 신첩은 신첩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사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황제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대고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위에서 아래로, 숙비는 아래에서 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결코 동등하지 못한 위치였다.
“그럼 그걸 다른 비빈들에게도 알려주지 않겠는가? 절대 사 황자처럼 될 수 없다고 말이야. 물론, 그대들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야.”
“…진영왕도 마찬가지입니까?”
숙비가 자신의 아들을 언급했다. 진영왕은 숙비가 처음으로 낳은 자식이자, 아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들 연송에게 애정이 쏠렸다. 더군다나 연송에겐 성군이 될 자질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리 말했고, 아버지가 몰래 만난 무속인도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물론 그녀도 자연스레 자신의 아들이 태자가 될 몸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문예, 마술, 검술, 활, 등 성군이 되기 위한 자질 중 모난 것이 없는 아들이었다. 인성까지 어질어, 궁인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끼는 아들 연강이 버림받았던 시절, 안쓰럽다며 몰래 아껴두었던 당과와 과일, 차 등을 쥐여 준 착한 아이였다.
귀비의 오만함과 포악스러움, 황제의 거만함을 그대로 쏙 빼닮은 경혜왕과 차원이 다른 애였다. 그 아이를 제외하고 태자가 될 아이는 없었다고, 속으로 연이어 생각하는데 황제가 숙비의 얼굴을 감싸며 웃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숙비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황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진영왕은 조금 다르지.”
황제가 정신 차리라는 듯, 숙비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너무 가볍고 부드러워서, 쓰다듬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손길이 좋아 숙비는 햇볕을 쬐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긴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웠다.
“그 아이는 강이 좋아하니까. 그것만 의미가 있지.”
“폐하….”
“그러니까 더 노력해봐. 진영왕이라면, 태자가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거기까지 말한 황제가 숙비의 머리에 걸린 비녀를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말했다.
“그대는 옥비녀가 더 잘 어울리니까 다음부턴 그걸 꽂고 천자를 만나러 오게. 알겠는가?”
“…예, 폐하.”
그녀는 “진영왕이면 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희열을 멈추지 못했다. 황제의 입으로 확신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황제의 손이 더욱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살결을 슬쩍 만졌다. 그의 손에 뺨을 조심스럽게 갖다 댄 숙비는 한녕전에 머물고 있는 아들을 생각했다. 연송의 머리에 평범한 관이 아니라 황제가 쓰는 곤관이 있다고 상상하자 가슴이 뛰었다.
황제는 자신을 보는 듯하지만 종국에는 아들을 찾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비빈들의 종착지는 지아비가 아니었다. 황제의 사랑은 봄에 핀 꽃과 같아 시들면 끝이었다. 물도 골고루 가지 않아 피기도 전에 죽는 꽃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들이 황제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들은 어머니를 버리지 못한다. 명분상이라도 어머니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비빈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명예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태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숙비처럼 지고지순한 연인도 끝내 아들을 자신의 지지대로 삼게 된다.
황제는 뼛속까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태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연혼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어머니였다. 연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황제도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태후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귀찮은 명분 중 하나였다.
만약 그 귀찮음이 도를 지나친다면, 언제든 태후의 목을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태상황도 그걸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태후의 관계가 이득으로 맺어진 것처럼, 태상황과 태후도 그러했다.
수줍은 숙비의 모습 위로 어머니를 겹쳐보던 연혼은 손을 저어 그만 가보라고 했다. 은은하게 애정이 흐르던 분위기가 금세 판도를 바꾸자 당황하던 숙비도, 이내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그녀는 다소곳하게 일어나 황제의 앞에 엎드려 인사를 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숙비는 연송의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황제의 냉담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궁녀가 손을 내밀었다. 숙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움직여 천금궁을 벗어났다.
그녀가 천금궁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군 대장 예호영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개인적으로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을 알현할 때 사용하는 모호전으로 들어온 예호영은 황제를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렸다.
“신 예호영, 고귀한 천제를 뵙사옵니다.”
미리 패를 올린 터라 군더더기 없이 이름만 외쳤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명에 예호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친군 대장답게 행동 하나마다 힘이 넘쳤다. 황제가 의자에 앉아,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말하자 예호영이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황제의 발치에 숙비처럼 조신하게 앉아 눈을 반짝였다. 예호영의 과도한 충성심에 황제는 부담스러운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예호영이 순박하게 웃었다.
“폐하!”
목소리도 힘이 넘쳐서 우렁찼다. 황제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잔소리를 하려고 입을 벙긋거리던 황제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고 오해한 듯 예호영이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폐하, 근심이 있으십니까? 왜 그리 한숨을 쉬시옵니까?”
“…됐다.”
예호영 빼고 모호전에 있는 이들은 다 알았다. 예호영은 신장이 황제만큼 크고, 덩치는 더 좋았다. ‘걸어 다니는 산’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눈까지 궁에서 키우는 매처럼 부리부리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해도 땀이 뻘뻘 났다. 원래 예호영의 가문 아이들이 체격이 좋은 편이었지만, 예호영은 그것에서 더 과도하게 좋았다. 충성심도 몸집과 비례했는지, 황제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유명했다.
팔걸이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던 황제는 천칙(황제가 내리는 칙서)을 집어 들었다. 황명이 적힌 천칙을 예호영이 받아들였다. 예호영은 조용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예호영은 천칙에 적힌 한 글자도 빼놓지 않을 기세로, 눈에 힘을 줘서 읽었다. 다 읽은 예호영은 눈을 크게 뜨고 황제를 보며 말했다.
“폐하, 제 아들 담영은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입니다. 음관으로 관직에 들어서기엔, 갖추지 못한 것이 너무 많사옵니다. 무술은 그럭저럭 잘하지만, 마술이나 예법은 부족하옵니다.”
“그건 강과 함께 배우면 되지 않은가?”
황제가 총애하는 황자의 이름을 들은 예호영이 눈을 바보처럼 깜박거렸다. 예담영은 예호영의 장자였고, 아버지처럼 친군이 될 몸이었다. 예호영의 집안은 대대로 친군 대장으로 활약한 집안이었다. 아들로 태어나면, 응당 황제의 오른팔이 되어 목숨을 바쳤다. 예호영도 그 법칙을 따랐다. 그는 13살이 되는 해에 음관이 되어 황제의 뒤를 지켰다. 담영도 친군이 될 준비를 하며, 사가에서 늘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살에 음관이 되어 황자와 나란히 공부를 하라니. 대신들이 탐탁지 않아 할 것이다. 연강이 태자라면 납득이 가는 황명이지만, 연강은 태자도 아니었다. 황제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예호영은 천칙을 잡은 두 손을 내렸다.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눈에 약간의 의심이 서렸다. 황제는 오래된 친우이자 충신의 눈을 즐겁게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침어낙안, 폐월수화에 비견되는 황제의 외모에 눈이 부셔 예호영은 바닥을 보았다.
“폐하, 담영은 저희 집안의 아들들이 그렇듯이 13살이면 음관이 되어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담영은 이제 12살로, 음관이 되기엔 부족한 자질이 많사옵니다.”
“천자를 지켜주는 건 그대가 있지 않은가.”
황제가 턱을 괸 채, 붓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던 예호영은 그 미소에 넋을 놓았다. 반으로 접힌 금안이 눈이 멀 정도로 어여뻤다. 자신의 아내도 예쁘다고 자부했던 예호영이었지만, 오늘 황제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로잡았다.
황제가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인을 보고 물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기러기는 땅으로 떨어지고…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예호영은 얼굴을 확 붉히고서 바닥을 보았다. 황제가 신고 있는 족의가 보였다.
어쩌면 발도 저렇게 예쁘실까…. 예호영은 자신의 시야에서 흔들거리는 황제의 손가락을 보고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폐하.”
“알고 있으니 그만 정신 차려, 예호영.”
황제가 예전처럼 예호영을 대했다. 예호영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예호영을 내려다보았다. 실수를 자각한 예호영은 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얼마나 셌는지 쾅, 소리가 나 침묵을 유지하던 궁인들이 어깨를 떨었다. 황제는 예호영을 보고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짜증을 삼켰다.
“폐하! 소신 예호영에게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천제께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죄를 저질렀사옵니다! 이 죄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사옵니다!”
“벌은 나중에 달게 내릴 테니 지금은 천자가 하는 말을 잘 듣게.”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벼락이 내리꽂히는 듯한 목소리에 궁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제는 어릴 때부터 쭈욱 변함이 없는 예호영의 힘 넘치는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만 보면 넋을 놓고 “아름다우십니다….” 하던 버릇도 똑같았다. 화가 나진 않았다. 예호영은 황제한테만 한결같을 뿐, 공적인 일엔 냉수보다 차가웠다.
황제는 늘 그렇듯 손을 내밀어 예호영의 손을 꼭 잡았다. 예호영이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황제를 빤히 보았다. 황제는 남은 손으로 예호영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금방 차분해진 예호영이 황제를 충직한 눈으로 보았다.
“천자를 지켜주는 건 그대여야 해. 그러나 내 아들 강을 지키는 건 그대의 아들이어야 한다.”
예호영의 눈이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황제는 내관들이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출 것처럼 예호영을 당겼다. 예호영의 귀에 황제의 입술이 닿았다.
“담영은 천자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줘야 해. 내 아이가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다른 황자들에게 무슨 말을 듣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어서 천자에게 들려줘야 한단 말일세.”
황제의 말을 느리고 발음까지 아주 정확했다. 예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예호영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자신을 보게 하며 싱긋 웃었다.
“천자가 왜 그대의 아들을 선택했는지 그대가 잘 알겠지.”
예담영과 연강은 동갑이었다. 성별도 같았다. 그리고 신분도 얼추 비슷했다. 친군 대장의 아들과 황제의 아들.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감시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아이를 선발한 것이다. 태감들은 대놓고 황제의 귀이니 연강이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예담영이 연강과 죽마고우가 되어준다면, 연강은 황제에게 하지 못한 얘기를 예담영에게 할 것이다.
“음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궁법엔 13살이지만, 그 아래 오릉의 공자들도 충분히 음관이 되었으니… 명분만 있으면 그만이다.”
황제는 예호영이 입을 열기 전에 미리 생각해둔 바를 내뱉었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들도 아무 말 못 할 테지. 태자 같은 시시한 자리와 비교도 안 되는 아들인데,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태자는 황제 다음으로 나라에서 존귀한 자였다. 황제가 아니면 그 누구도 태자를 건드릴 수 없었다. 황제가 선택하고, 하늘이 결정한 나라의 아버지였다. 황제의 말처럼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자는 황제가 예비 군주로서 인정한 아들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였다. 황제의 애정과 주변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강도 태자 자격이 있었다. 여 미인의 집안이 관직도 가지지 못한 한미한 상인이라는 점이 걸렸지만, 오히려 그건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 외척이 없기 때문이다. 황후와 태자를 탄생시킨 집안이란 이유로 백성을 괴롭히고, 악질 고리대금을 일삼는 외척은 역사에 돌부리처럼 있었다.
외척이 있는 것보단 없는 편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훨씬 나았으므로, 예호영도 제 나름대로 강을 태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황제를 독대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황제는 아무리 보아도 강을 태자로 만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폐하, 사 황자 마마를 어여삐 여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에두른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황제가 소리 내서 웃었다.
“강을 태자로 만들 줄 알았나 보군.”
황제가 피식 웃었다. 예호영은 부르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닫았다. 담영을 음관으로 만들어 강을 지키도록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인 줄 알고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내 아들 담영은 태자가 되지 못할 황자나 지킬 팔자란 말인가?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인지라 아들 담영이 걱정되었다. 담영은 자신처럼 황제를 지키는 친군 대장이 되어야 했다.
“내 아들이지만, 강은 마음이 너무 약해.”
황제는 턱을 괴고 예호영을 보며 한탄했다.
“황제는 마음이 어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야. 공과 사를 구분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버려야 할 땐 버려야 하는 냉철함을 가져야 하지. 그런 면에서 강은 태자가 되어서 안 돼. 천자가 사랑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이를 태자 자리에 앉힌다면, 저 수많은 백성은 누가 책임지겠는가.”
황제의 느긋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군주란 그런 자리였다. 사사로운 정에 시달리지 않고 언제나 공명정대해야 했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수평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하나로 기울어지면 판단이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거슬리는 외척의 목을 잘라냈다. 외척이란 외척은 9촌까지 찾아내어 도륙을 냈다. 과거의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의지였다. 외척을 죽이고, 태후와 태상황이 심어준 충신 아닌 충신들을 유배 보내고, 황후의 일로 자신을 탓한 태위는 사약을 내려 죽여 버렸다.
깨끗해진 그 자리에 황제가 직접 선발한 인재들이 들어섰다. 황제는 철저하게 현재에 맞게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배경 삼아 음관이 된 공자들도 황제의 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천한 신분으로 과거에 합격한 인재가 그 자리에 맞는다면, 황제는 거리낌 없이 높은 직위로 올려 주었다. 그만큼 황제는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 일을 우선시했다.
예호영은 황제의 안목과 머리를 믿었다. 그가 강이 태자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런 것이다. 태자는 아니 될 테지만, 훗날 황제를 위한 인재가 되리라. 예호영은 그것으로 담영이 사 황자를 지켜야 하는 연유를 납득했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 지키고, 그걸로 충의를 나타낸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사 황자를 지키는 일이 혹여나 가문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하던 시간이 아까웠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부디 그대의 아들과 강이 절친한 친우가 되었으면 좋겠군.”
황제는 의문을 거두고 충직한 신하로 돌아온 예호영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강이 무엇을 하든 다 알 수 있는 아이가 되어주길, 이 자리에서 빌고 있겠네.”
그가 손을 거두며 우아하게 웃었다. 살짝 휜 눈매가 아름다워서 예호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예를 들면 향락가에서 몸을 함부로 굴린다든가, 그런 거 말일세.”
연나라에선 혼례를 치러야 향락가에 갈 수 있었다. 혼례를 치르지도 못한 처녀나 동정의 몸으로 타인에게 쾌감을 느끼면 몸이 타락하고, 훗날 만들어질 가정도 망가진다는 구설 때문에 그들은 철저하게 정통을 지켰다. 물론 혼례와 동시에 초야를 치르면 아무렇지 않게 향락가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 정통에 따라 강도 여인과 혼례식을 올려야만 향락가에 갈 수 있었다. 강이 향락가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황제를 보며 예호영은 의문을 가졌다.
“폐하, 어차피 사 황자 마마께서도 곧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처를 들이고, 자식을 낳고, 향락가에서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그것이 싫단 말일세.”
황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강의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확 돌변했다.
“강이 혼례를 한다고? 이 아비를 두고?”
그는 간신히 화를 욱여넣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전혀 웃는 거 같지 않았다. 그는 강이 혼례를 치르고, 여인과 침소에서 뒹구는 걸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화를 내고 있었다. 마치 여인에게 질투하는 풋내기 소년 같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설프고 뒤틀린 감정에 예호영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가면처럼 쓰고 있던 웃음을 지운 황제는 문을 보며 토라진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도, 세상에서 천자가 가장 좋다고 말했으니 아직 혼례는 생각 안 하겠지.”
질투였다. 예호영은 먼 곳을 보는 황제가 묘하게 철없는 아이 같아서 쓰게 웃고 말았다.
야심한 시각에 대저택으로 돌아온 예호영은 안실로 아들을 불렀다. 예담영은 반 식경도 되지 않아서 예호영이 기다리는 안실로 들어섰다. 궁에 다녀온 터라 예호영은 여전히 관복 차림이었다. 등이 걸린 방 중심에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아버지를 발견한 예담영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예호영은 이제 근육이 잡히기 시작한 아들의 작은 등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아들을 그 험난한 궁에 보내려니까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황제의 아들을 지키는 천칙을 받아서 기뻐해야 했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충신인가, 아니면 아비인가. 그 불분명한 경계에 서 있던 예호영은 천천히 아들에게 걸어갔다.
“담영아.”
예호영의 부름에 담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올렸다. 젖살이 아직 남은 뺨에 생기가 넘실거렸다. 손가락을 대자 아이다운 열로 뜨거웠다. 그의 손은 흐트러진 아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예호영은 아들을 일으키고,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숨을 느리게 흘리며 아들을 놓아주었다. 예호영은 허리 뒤춤에 걸어둔 한 자루의 도를 풀어주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도를 받아 든 예담영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예호영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담영은 남아있던 졸음을 모조리 쫓아내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웠다. 담영도 눈치챈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이제부터 넌 천제의 친자이신 사 황자를 지켜야 한다. 그분이 어딜 가시는지, 누굴 만나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하고 천제께 가서 다 고해야 한다.”
말을 멈춘 예호영은 비단에 감싸인 마패, 명패, 황제의 친군임을 상징하는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는 직접 아들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명패에는 ‘친 예담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호영은 담영의 손바닥에 명패를 올려 주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 황자 마마는 일 년 후면 봉호를 받고, 왕부로 가게 되실 터이다. 꼭 사 황자, 훗날 전하와 친분을 돈독히 쌓아 그분이 사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것도 알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그건 감시가 아닙니까, 아버지?”
예담영이 불쑥 물었다. 예호영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황제가 내린 황명은 감시였다. 그 어떤 황자도 이런 식으로 감시를 당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우직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예호영은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천제께서 그걸 원하신다. 넌 천제께서 원하는 대로 해드리면 되는 거야.”
담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아버지의 냉혹한 눈빛에 수그러졌다. 예호영은 담영 외에도 따로 사람을 불렀다. 그들도 친군이었다. 친군 대장인 예호영은 황제를 지키는 호위 중 가장 말이 없고 민첩한 자들을 불러 사 황자를 지키도록 명령했다.
아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혹시나 하는 일말의 여지가 있기에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부른 것이다.
“그분이 너처럼 혼례를 치를지는 모르겠지만…. 혹여나 사 황자 마마가 향락가를 가시게 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막거라.”
담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호영은 아들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면서, 덧붙였다.
“여자와 털끝도 못 만나게 해야 해.”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아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랬다간 천제께서 무척 슬퍼하실 테니까.”
슬퍼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삼키며 예호영은 등을 껐다.
순식간에 저택이 어둠에 잠겨 들었다.
*
세찬 바람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어 한동안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바람이 멎고, 결코 따뜻하다고 할 수 없는 햇빛이 얼굴을 내리쬘 때쯤 강은 슬며시 눈을 떴다.
강은 설원에 서 있었다. 바람에 붉어진 뺨을 여린 손바닥으로 감싸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뒤덮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미간을 찌푸린 강은 다른 이를 찾기 위해 눈을 파헤치며 걸어갔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강이 어리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강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나와.”
그러나 또다시 바람에 뒤섞인 힘없는 메아리만 들린다. 강은 두 손을 늘어뜨리고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의 눈이 차츰 가늘어졌다. 사람을 찾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이 넓은 설원이 불러일으키는 고독이 무서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색 들판도 눈이 시려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바마마와 같이 호수를 보던 때와 같았다. 푸르다 못해 시커먼 호수가 무서워 아바마마에게 매달렸다. 그는 배 위에서 울음을 와앙, 하고 터트린 강이 귀엽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뒤에 있는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초조하게 강을 보고 있었다.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어서 어머니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잘 보였다. 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 어머니한테 갈래요. 아바마마, 어머니한테 보내주세요.’
그때, 황제는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고작 아들이 어미를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왜?’
강은 바다보다 파랗게 느껴지는 황제의 분노에 몸을 굳혔다. 황제는 어느새 강을 바닥에 내려놓고, 어깨를 세게 잡았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강은 울고 싶었으나, 자신의 심장을 옥죄는 금안에 정신이 팔려 울지도 못했다. 황제는 강이 딸꾹질을 하며 겁을 먹자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았다. 이번엔 아예 어머니도 못 보게 시야를 막아버렸다.
‘아비가 있는데 어찌하여 어머니를 찾는 것이냐.’
그 후로 강은 절대 어머니를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며 ‘왜?’라고 묻는 황제의 얼굴이 선뜩하게 남았다. 차라리 화를 내고, 때렸으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신만 지그시 보는 그 시선이 무서웠다.
‘자, 잘못했어요….’
강은 눈물을 삼키고서 황제의 옷자락을 잡으며 용서를 구했다.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만….’
황제가 웃었다. 거기에 마음이 놓인 강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황제에게 직접 안겼다.
‘화내지 말아주세요.’
‘화낸 적 없다.’
단아하게 말한 황제가 강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정말 우는 게 너무 사랑스럽구나. 늘 울리고 싶은데…. 그러면 아기가 힘들어할 테니까.’
“아바마마.”
강은 황제의 교육대로 아바마마를 찾았다. 이 넓은 설원은 그의 것이었고, 눈이 왔으니 어딘가에 황제가 있을 것이다. 눈을 엄청 좋아하는 황제였다. 얼마나 좋아하냐고 물으면, 강 다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눈이 오는 날이면, 그는 강을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도 지금쯤 눈에 등을 비비면서 헥헥거리고 있으려나…. 강아지를 무시하지만 영락없이 개처럼 행동하는 황제를 떠올리던 강은 어느새 두려움을 잊고 웃고 말았다.
“아바마마!”
강의 외침이 멎어갈 때쯤, 저 멀리서 뭔가가 달려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처음에는 점이었는데, 빠른 속도로 형체를 갖춰갔다. 황제였다. 역시나 늑대로 변신한 황제가 이곳에서 놀고 있었다. 황제가 등장하자 반가워서 웃었는데, 범만 한 덩치로 달려오자 겁이 났다. 강은 어느새 황제를 피해 달아났다. 저 덩치를 자신의 몸으로 받을 자신이 없었다.
“악!”
그러나 인간이 짐승의 나는 듯한 속도를 이길 리가 만무했다. 늑대는 단숨에 강의 몸을 들이박았다. 강의 몸에서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강의 작은 몸이 데굴데굴 도토리처럼 굴러갔다. 꽤 짧은 거리를 빠르게 굴러간 강은 겨우 멈추고서, 눈에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늑대와 부딪힌 곳이 얼얼하게 아파서 순간 눈물이 맺혔다. 그걸 황제도 알아채고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낑낑거리면서 울기도 했다. 약간 화났던 마음도 황제가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풀어졌다. 강은 자신의 앞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를 슬쩍 잡았다. 늑대가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금안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황제였다. 강은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잡고, 쓰다듬어 만지며 외쳤다.
“아바마마, 꼬리가 너무 부드러워요!”
황제는 싫은 듯 눈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걸 알고 가만히 있었다. 조물조물. 강은 황제의 엉덩이 쪽에 앉아 꼬리를 만지고 얼굴을 비볐다.
아아, 부드러워. 기분 좋아…. 강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얼굴을 파묻고 숨을 내쉬는데 아주 좋은 향이 났다. 황제의 몸을 늘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향유에서 나는 것이었다.
“간지러운데….”
그런데 늑대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 즉 황제 특유의 나른하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발음도 아주 정확해서 귀에 쏙쏙 박혔다. 강은 머리 위에서 나부끼는 달콤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황제가 자신의 밑에 깔려 있었다. 심지어 침의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침상에 황제의 은발이 가득했다. 눈보다 반짝반짝거리는 은발에 넋을 놓던 강은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강이 허둥지둥 내려가려 몸을 움직이는데 황제가 허리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이제 강이 황제의 두터운 신체에 가려졌다. 강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용안에 겁을 먹었다. 강이 움츠러들고, 고개를 돌리자 황제는 웃음을 고혹적으로 흘리며 강의 뺨에 입술을 댔다. 황제의 은발이 시야를 장막처럼 가렸다.
“아, 아바마마. 잘못했습니다. 함부로 침전에 들어와서….”
“괜찮다.”
황제가 짐짓 유쾌하게 말하며 강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강은 송아지 같은 눈을 굴려 장막 너머를 보았다. 궁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 광경을 다 보고 있었다. 강은 얼굴을 붉히며 황제의 상체 쪽으로 꾸물꾸물 몸을 옮겼다. 이런 모습을 못 보게 할 작정으로, 황제의 몸을 방어책으로 쓸 생각이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리도 아비를 찾은 것이지?”
“아, 그것이… 꿈에 아바마마가 늑대가 되어서 설원에 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꼬리가 정말 풍성하고 귀여워서 소자도 모르게….”
황제가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이었다. 강은 그 웃음에 긴장을 풀고 황제를 보았다.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입술 끝은 마음껏 올라가 있었다. 정무가 끝나고 돌아오면 피곤에 눈도 제대로 못 뜨던 황제가 저렇게 웃으니 뭔가 뿌듯했다. 강은 폭포처럼 흘러내려 자신의 어깨에 고인 은발을 거두었다. 황제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눈이 호강했다.
“만졌느냐?”
황제가 소곤소곤 물었다.
“좋았느냐?”
이럴 땐 정말 평범한 부자 같았다. 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웃음을 머금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상에 나른하게 앉아, 턱을 괴고 누워있는 강을 보았다. 이제 12살, 곧 13살이 되는 강이지만 아직도 작고 어렸다. 여 미인을 그대로 닮아 부드러운 선을 가진 얼굴이 순진무구했다. 다른 형제들은 혼례를 치르거나, 왕부에 나가 따로 살고 있었는데 아직 강은 황제와 함께했다. 순전히 황제의 욕심 때문이었다. 슬슬 바깥에서 말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까지 황자를 데리고 천금궁에서 살 것이냐는 대신들의 말을 더 이상 넘길 수 없었다. 권력을 써서 강제로 붙들 수는 있었으나, 그럴수록 위태로워지는 건 강이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외척은 도움도 안 되고…. 그렇다고 어머니인 여 미인도 유약해서 어떤 것도 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황제는 아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강의 입지를 견고히 다지기 위해선 이만 보내야 했다. 황제는 몸을 움직여 침상에서 꼼지락거리는 아들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배어있다. 활을 쏘고, 도를 쓰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흔적이었다.
그는 아들의 예쁜 손가락에 남은 흔적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예뻐야 했는데. 그는 충동적으로 아들의 손가락에 입술을 댔다.
“아… 아바마마.”
강이 조르는 듯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살 냄새를 맡았다. 강이 4살 때, 맡았던 그 향이 더 진해져 있었다. 사람마다 가지는 고유의 향이었다. 황제는 무아지경에 빠져 살 내음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던가.”
황제가 검지로 강의 볼을 푹 찔렀다. 애라서 볼이 말랑말랑했다. 4살 때는 조금만 힘을 줘서 만지면 살이 빨개졌는데, 지금은 12살이라 그런지 어느 정도 탄탄해져서 안심이 되었다.
“다람쥐 같구나. 꼭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 같아.”
“…예?”
“눈이 동그래서 그런 듯하다. 그리고 볼도 오동통한 것이, 꼭 동면 전에 먹이를 모으는 것 같아.”
황제가 워낙 진지하게 말한 탓에 강의 얼굴은 더 해괴하게 변했다. 황제는 강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걸 알았지만, 딱히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람쥐 같은 걸, 다람쥐 같다고 말하지 그럼 무엇으로 말할까. 그는 늘 그렇듯 아이를 번쩍 안았다. 어릴 때처럼 황제에게 달랑달랑 안기게 된 강이 포기한 듯 조용히 있었다.
다리 사이에 아이를 앉힌 황제는 강의 머리에 턱을 댔다. 허리에 손을 감은 황제는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슬슬 봉호를 내릴 때가 온 거 같으니….”
태감이 눈을 번뜩였다. 강도 봉호란 얘기에 손끝을 움찔거렸다. 드디어 다른 형제들처럼 친왕이 되는 것이다. 연주는 혼례까지 치러 부인이 둘이나 있었다. 연송도 그러했다. 연송은 진영왕이란 봉호를 받고, 그 해에 무관의 딸을 부인으로 들였다.
부인과 입을 맞추고, 초야를 행복하게 보냈다는 연송의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부러웠던가. 강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눈을 감고 있던 황제는 아들이 설레는 걸 느꼈다.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커가면서 당연히 형제들처럼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일이고, 섭리인데 어째서 이렇게 불쾌한 건지 황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원인 없는 병을 앓는 기분이었다. 무척 답답한 마음에 속이 끓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좋아하는 아들이 야속했다. 황제는 아들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줬다. 얼마나 힘을 세게 줬는지, 강이 끙끙거리며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황제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 안겨 노닥거리는 강을 보았다. 자신을 보고 해맑게 웃는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숨 쉬는 태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빛날 리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매정하게 속을 검게 태울 리 없었다.
“영현왕이 좋겠다.”
영은 황제가 친왕 시절 받았던 것과 같은 글자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강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현도 황제의 것과 뜻이 같았다.
“영현왕이요?”
“그래. 너의 봉호 말이다.”
황제는 자신의 친왕 때 받았던 봉호를 떠올렸다. 영휘왕이었다. 최대한 자신과 비슷한 봉호를 내려주고 싶어 한동안 머리를 굴렸다. 아이와 잘 어울리는 봉호를 내린 것 같아 황제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강을 품에서 떼어놓았다. 순박한 검은 눈을 휘며 사랑스럽게 웃는 아이를 보고, 마주 웃은 황제는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왕부에 가더라도 아바마마를 잊으면 아니 된다.”
“예.”
“늘 와야 한다. 알겠느냐?”
“예.”
볼을 붉히고 수줍게 웃는 영현왕을 멍한 눈으로 보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궁녀에게 말했다.
“조반을 들여라. 영현왕과 같이 먹겠다.”
*
강이 영현왕이라는 봉호를 받았다는 소식이 물 흐르듯 궁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연무장에서 활을 쏘던 진영왕, 연송은 후다닥 달려와 소식을 전하는 내관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땀에 젖은 소년의 얼굴이 싱그럽게 영글었다.
“강이 영현왕이 되었다면, 형님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강을 봐야겠다.”
“안 그래도 영현왕 전하께서도 전하를 뵙겠다고 하셨사옵니다. 따로 모실까요?”
“그래. 소율각으로 오라고 전해라.”
소율각은 한녕전에서 북동쪽에 있는 인공 호수 쪽에 있었다. 한가하게 배를 타는 걸 좋아하는 황제들의 취미를 위해 예전부터 있던 거대한 호수였다. 그곳엔 황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전각이 있었는데, 소율각도 흔한 용도로 쓰는 전각이었다. 다만 소율각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수풀이 우거져 밖에선 그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호수와 수풀, 꽃이 어우러져 시선을 막으니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기에 적당했다.
진영왕은 활을 내려놓았다. 같이 활을 쏘던 어린 황자들이 진영왕을 둘러쌌다. 진영왕은 이복형제들이 짧은 팔을 내밀어 자신을 막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들, 형님께 무슨 짓이야.”
“형님! 오늘은 분명히 새를 잡는 걸 보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보여주고 가십시오!”
강 귀인의 아들이 둔한 발음으로 빠르게 말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야 해석하듯 말을 이해한 진영왕이 키득거렸다.
“이곳은 사냥터가 아니라 새를 잡지 못해. 나중에 아바마마와 함께하면, 그때 보여주마. 아니면 사냥대회도 있고.”
그러나 황자들은 풀이 죽어 흙먼지가 일어나는 땅을 보았다. 매섭고 오만방자한 친왕들과 달리 황자들, 황녀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착한 진영왕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관들에게 구박당하는 황자들을 보호해주는 것도 아비가 아닌 진영왕이었다. 당과가 먹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강에게 일부러 당과를 챙겨주고, 무시당할까 자기가 챙기고 다녔다. 애가 애를 돌보는 형국이었지만, 둘이 퍽 잘 어울려 숙비도 여 미인도 둘을 내버려 두었다.
진영왕은 타고난 성품으로 오늘도 이복동생들을 어르고 달랬다.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진영왕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주자 마음을 풀었다. 진영왕은 활을 내려놓고, 태감들이 모는 가마에 올라탔다.
호수로 이동하는 동안, 진영왕은 가마 안에서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얼굴을 정돈했다. 어느덧 가마가 호수 근처로 진입했다. 벌써부터 진동하는 물비린내에 진영왕은 고개를 돌렸다. 호수 주변을 감싼 푸른 꽃들이 보였다. 저것들의 이름은 무엇이려나. 멍하니 생각하던 진영왕은 꽃에 대해 잘 아는 강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향이 짙지 않고, 겉모습이 수수한 듯 정갈한 것이 부인이 좋아할 듯했다. 벌써 첩을 둔 형 연주와 달리 연송은 지고지순하게 부인만 보고 있었다. 친우들은 홍등가에서 술을 마시며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안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결단코 없었다.
어찌 사내가 아내를 두고 다른 곳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여자를 안는 것이 사내를 치켜세우는 것이라니. 역겨운 풍습이었다. 연송은 자신의 손을 잡고 조신하게 웃던 아내를 떠올리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가는 길에 꽃을 사가야겠다.
연송은 그리 홀로 생각하며, 가마에서 내렸다. 밖에선 물비린내에 묻힌 것처럼 느껴졌던 향이 물씬 풍겼다. 그는 졸졸 흐르는 호수 소리를 벗 삼아 소율각으로 걸어갔다. 소율각 안에 앉아있는 소년이 보였다. 황제가 총애하는 아들답게 귀여운 얼굴을 한 소년, 강이었다. 검은 머리를 나풀거리면서 뛰어오는 게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형님!”
“강아.”
연송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강이 해맑게 웃으며 연송의 품에 와락 안겼다. 연송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두 발로 버텨 강을 잡아주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강이 예전보다 훌쩍 커 있었다. 뺨에 있던 젖살도 빠졌고, 선도 굵직해졌다. 특히 목이나 손목, 이런 곳이 둔탁해졌다. 황녀들과 달리 묵직한 느낌도 남자다웠다.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신체 부위가 있었다. 바로 눈과 손이었다. 유난히 검은자위가 큰 눈은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속눈썹이 풍성하고 길어서 깜박거리면 날개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손은 굳은살이 있어서 딱딱했지만,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가녀린 느낌이 있었다. 차를 따르면 유독 예쁜 손이었다. 그 손을 양손에 넣고 만지던 연송이 싱긋 웃었다.
“많이 컸다.”
“아바마마도 그러셨어요. 제가 많이 컸다고.”
“아쉬워하셨을 거 같은데. 그렇지?”
연송이 소리 내서 웃으며 되묻자 강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척 섭섭해하셨습니다. 왕부에 가더라도, 꼭 매일같이 오라고, 아바마마를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고도 남으실 아바마마다.”
그는 전각에 들어서면서 강을 보고 부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아바마마는 너만 예뻐하시니까.”
강은 송의 눈에 스치는 그리움, 부러움, 그리고 희미한 질투에 입을 다물었다. 송은 강을 감싸주는 형이었지만, 끝은 늘 아릿한 질투와 분노로 강을 보았다. 강은 발을 멈추고 송을 지그시 보았다. 송도 자신이 어떤 감정을 비쳤는지 자각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둘은 말이 없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간혹 부는 바람, 저 멀리서 느껴지는 물소리가 그들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강도, 송도 이 뒤틀린 애정의 근원을 알았다. 황제였다. 황제가 강만 예뻐하고 감싸고도니, 저절로 편애가 되었다. 강도 그걸 알고 형제들에게 황제의 관심을 주려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강만 더 황제에게 관심을 받았다. 지금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강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황제의 사랑을 골고루 나눠줘서, 형제들이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 같았다. 강은 움찔거리는 송의 손끝을 보다가, 손을 내밀어 그를 꼭 잡았다. 송이 고개를 들어 강을 보았다. 강은 형을 보며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형님.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송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깜박거렸다. 강은 후, 하고 숨을 길게 뱉으며 중얼거렸다.
“아바마마께선 진작 저를 태자 후보에서 제외하셨습니다.”
“뭐?”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시체를 못 보는 것을요.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습니다. 시체도 제대로 못 보는 애가 어떻게 어좌에 앉겠느냐고요.”
강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송은 순식간에 무안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허탈하게 웃었다. 송은 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강을 끌어당겨 안았다. 다시 이어진 형제간의 우애에 강은 마음을 놓고,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에 손을 천천히 올렸다.
“미안해, 강아. 내가… 형답지 않게 질투를 해버렸어.”
“아닙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진영왕은 헛기침을 하며 강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긴 소매로 가렸다. 아무래도 밀려오는 수치심을 이기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 형을 발치에서 지켜보며 강은 가만히 웃고 있다가, 전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시중드는 궁녀들을 모조리 물린 강은 직접 차를 우렸다. 찻잎으로 유명한 현에서 진상한 차를 집어 다기에 넣었다. 뜨거운 물을 천천히 다기 안으로 부은 강이 뚜껑을 덮고, 차가 우러날 때까지 기다렸다.
강은 진영왕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궁에서 자신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고, 절대 그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신신당부했던 것이 있었기에, 강은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며 다녔다.
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황제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여러 명의 처첩을 두어 누구랑 자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잡으며 권력을 과시하는 것도, 잘못에 등급을 나누어 목을 자를 것인지, 거열형에 처할 것인지, 혹은 궁형에 처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싫었다.
특히 강은 수없이 죽어가는 이들의 눈을 보는 게 괴로웠다. 몇 차례 겪었던 악몽에서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그게 너무 힘들어서 강은 황제에게 사냥터에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황제는 괴로워서 도망치려는 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왜 그리 힘들어하지? 이것들이 이렇게 달콤한데.’
그의 손에 들린 죽은 토끼의 목에 강은 실신할 것 같았다. 두 발로 겨우 버텼다. 그리하여 강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자신은 절대 그 불쌍한 것들을 느리게 죽이지 않겠다고. 죽이게 된다면, 단숨에 목숨을 끊어줄 것이다.
“강아?”
언제 왔는지, 진영왕이 의자에 앉아 강을 보았다. 정신을 차린 강은 얼굴을 붉혔다.
“잠시 생각하느라….”
“괜찮아. 그것보다 축하한다. 드디어 너도 친왕이 되었구나.”
“예, 형님.”
강이 축하를 받아 기뻤는지 뿌듯하게 웃었다. 강은 궁녀에게 배운 그대로 차를 따랐다. 차를 따르는 손도, 팔도, 그 자태도 참으로 어여뻤다. 황제는 강이 차를 따르는 모습을 좋아해서 궁녀들을 내보내고, 꼭 강에게 차를 따르게 시켰다. 그러한 고약한 취미는 형제들이 있을 때도 발현되었다. 강은 머뭇거리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황제의 앞에 서서 차를 따랐다. 차를 따르는 강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던 황제를 떠올린 송은 고개를 저었다.
“드시지요.”
강이 찻잔을 내밀었다. 차를 맛본 연송이 웃으며 말했다.
“맛있다.”
“다행입니다.”
다정하게 중얼거린 강은 이내 무표정하게 변했다. 찻잔을 잡고 생각에 잠겨있던 강이 고개를 들었다. 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진영왕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왜?”
“형님.”
“응?”
“전 가끔 아바마마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찻잔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은 강이 흔들거리는 수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께서… 모든 형제를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저만 예뻐해 주시니까…. 너무 죄송하고, 부담스러워요.”
찻잔에서 손을 떼어낸 강이 얼굴을 감싸며 막힌 소리를 토해냈다.
“죽은 형제들에게도 미안하고….”
“강아.”
“예?”
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손을 떼어냈다. 진영왕이 강의 손을 꼭 잡고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었다.
“그게 왜 네 잘못이지? 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형님.”
“이렇게 착한 널 질투했던 내가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영왕이 수줍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아인데. 폐하께서 널 예뻐하시는 것도 당연해.”
강의 얼굴에 때아닌 불이 일었다. 불꽃은 불어오는 바람에 부피를 키워갔다. 금세 강의 목덜미까지 뜨끈뜨끈해졌다. 칭찬을 못 견뎌하는 것도 변하지 않은 아우의 모습에 진영왕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강은 손등으로 붉어진 뺨을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이 아우를 놀리지 마십시오, 형님. 이제 저도 곧 혼례를 올릴 수 있는 나이가 되옵니다.”
피어오르는 부끄러움을 채 삭이지도 못한 강이 나이를 과시했다.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아우가 귀엽기도 하고, 곧 혼례를 치를 나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진영왕은 눈을 반짝였다. 진영왕은 눈을 실선으로 만들면서 주변을 살폈다. 호수를 둥글게 감싸는 푸른 꽃과 긴 머리채처럼 늘어진 잎을 가진 나무들로 무성했다. 강이 궁녀들을 내보낸 터라, 전각 안에는 오롯이 두 사람뿐이었다. 진영왕은 그 나이 소년답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강의 앞으로 바짝 붙었다. 강은 서슴없이 다가온 형제의 얼굴에 깜짝 놀라 슬그머니 뒤로 도망가려다가 뒷목이 잡혔다. 형제의 이마가 닿았다.
“비는 정해졌느냐?”
“비는…. 그것이, 아바마마가 아직이라고….”
진영왕이 간드러지게 웃음을 흘렸다. 변성기를 거치는 중이라, 진영왕의 목소리는 마치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아픈 사람이 신음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묘하게 귀를 자극하고, 심장을 거세게 박동하게 만들었다. 사아아, 하고 이파리가 서로 마찰하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수면을 애무하며 만들어내는 찬란함도, 햇빛이 느리게 지면을 기어가며 달구는 온도도 피부에 닿지 않았다. 12살의 어린 강은 초야를 치러본 형의 입술에 온 신경을 다 쏟았다.
“전하.”
하지만 형의 온전한 문장을 듣기 전에, 예담영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강의 귀에 닿았다. 강은 친우이자, 자신을 지키는 호위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분명히 오지 말라고 말했던 담영이 전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담영아. 오랜만이구나.”
담영과 얄팍한 친분이 있는 진영왕이 말을 건넸다. 담영은 진영왕을 보며 말없이 눈을 마주치고 고개만 살짝 숙였다. 친군들은 황제를 가장 우선시했기에 남은 황족들에겐 간단한 예의만 표했다. 교본대로 움직인 담영은 곧장 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폐하란 소리에 강이 눈치를 살폈다. 오랜만에 궁에 들어온 진영왕과 더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진영왕이 가보라는 듯, 웃음을 짓자 강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터벅터벅 계단에서 내려왔다. 담영이 손을 내밀어 잡으라고 했지만 강은 잡지 않았다. 강은 계단 아래에서 형을 올려다보았다. 전각 안에서 남은 차를 홀짝이며 홀로 침묵을 곱씹던 진영왕은 피부를 더듬는 눈빛에 눈을 돌렸다. 그곳엔 강이 주먹을 쥐고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진영왕은 아직도 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지 않고….”
어서 가라며 채근할 생각이었는데, 강이 갑자기 계단을 후다닥 올라왔다. 강은 아까 농을 듣던 얼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처럼, 꽉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기도 했다. 도대체 강이 왜 저 모양인가. 진영왕은 처음 보는 동생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강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뜬 강은 만날 때부터 손목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강은 담영이 보지 못하게, 온몸으로 주머니를 가렸다.
“강아.”
“형님, 조용히….”
강이 안달 난 목소리로 진영왕을 달래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진영왕은 착한 형님답게 입을 다물고 동생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강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목걸이였다. 겨우 보석 하나 박은 단출한 목걸이에 진영왕은 웃지도 못했다. 이런 목걸이나 가락지, 팔찌는 왕부에도 굴러다녔다.
“친왕들은 14세가 되면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강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진영왕은 강의 말대로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진영왕의 입술에 걸린 것은 희미한 미소 한 줄기였다. 인자한 형의 미소에 얽힌 긴장을 푼 강이 손을 움직였다. 강은 작은 손으로 직접 형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예상치 못한 동생의 선물에 진영왕이 눈을 서서히 크게 뜨고, 강을 쳐다보았다.
강의 작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강은 형의 시선이 낯간지러웠는지, 눈을 한쪽으로 돌렸다. 강은 아랫입술을 가지런한 치아로 반복적으로 씹다가, 양손을 형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강이 초조한 듯, 입술을 열었다.
“본래 이런 건 여인들이 하는 것이지만…. 전 형님이 좋고…. 또….”
입술을 달싹거리던 강이 두려움을 이기고서 눈을 마주쳤다. 진영왕은 강의 두 눈에 박힌 반짝임에 홀렸다. 입이 벌어진지도 몰랐다. 동생의 눈에 고인 반짝임이 어여쁘고 순해서, 그리고 무디고 무뎌서 약간의 힘만 가해도 부러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진영왕의 손이 강의 뺨을 감쌌고, 그 손등을 강이 다시 감쌌다.
“원래 줄곧 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여인들이 주는 거라고 여린이가 비웃어서 드리지 못하고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형님이 14살이 되면, 전쟁이 발생하면 형님께서 가셔야 한다고 들어서….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니 만나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단단해지고, 점점 커졌다가 생을 잃어가는 불처럼 작아졌다. 강은 형의 품에 파고들 것처럼 안기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형제들이 죽는 건 그만 보고 싶어요. 그러니 형님만은 부디…. 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전쟁에 가지 않았는데도?”
“요새 변방에서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곡식과 아녀자를 약탈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대신들은 아바마마 대신 친왕을 보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에라도 전쟁이 발발한다면 형님을 만날 날이 없으니… 미리 드리고 싶었습니다.”
북쪽 변경에서 발생하는 오랑캐들의 침입은 강도, 진영왕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은 황제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모를 수가 없었고, 진영왕은 황명이 몇 번이나 내려왔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경혜왕 연주가 14살이 되는 해에 전쟁에 참여해 활약했다. 진영왕이라고 못할 것이 없었다. 연주, 연송은 둘 다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황자들이었으며 도술, 마술, 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진영왕은 전쟁에 참여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랑캐를 쓸어버리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황제에게 바쳐 인정을 받을 참이었다. 이 과정이 태자로 가는 길이라면, 누구의 피든 목이든, 시체든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은 진영왕과 달리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12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숱하게 봐온 형제들의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진영왕은 강이나 여린 황녀, 율하 황녀를 빼고 다른 형제들에게 정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빨리 죽어서 사라져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태자가 되어 처리해야 할 적들이었다.
권력 앞에 가족은 없었다. 적이냐, 아군이냐. 그것뿐이었다.
만약 강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거침없이 베어버릴 참이었는데, 어찌하여 이 아이는 자신에게 이리도 정을 느끼는 것일까. 그래서 황제가 강을 예뻐하는 것일까. 유해하지 않아서, 그저 이 존재 자체가 이슬처럼 순수하고 투명해서….
진영왕은 서서히 손을 거두려 했는데, 강이 놔주지 않았다. 강은 형에게 매달렸다.
“죽지 마세요, 형님.”
“그러마.”
진영왕은 동생이 걸어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쯤 되면 목걸이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목걸이에 박힌 불투명한 보석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 보석이 무엇이냐고, 이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생각이었는데 대기하고 있던 예담영이 강을 불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왕은 예담영과 눈을 마주쳤다. 말없이 예담영을 눈여겨보던 진영왕은 강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는 어느 정도 얼굴이 식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가렴, 강아. 아바마마께서 부르시잖니.”
“예, 형님.”
“그리고 전쟁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만약 간다 하더라도, 네가 준 목걸이가 있어서 걱정은 안 된다.”
강은 떠나기 전, 진영왕을 약하게 끌어안았다. 진영왕이 손을 들어 등을 만져주려 하는데 줄곧 앉아있던 예담영이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켜 저벅저벅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의심이 자꾸 확신으로 다져지고 있었다. 예담영의 시선이 강의 행동, 말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고 있었다. 예민을 넘어선 예리한 눈빛에 털이 곤두섰다. 진영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예담영을 노려보고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담영이 감히 뛰듯이 걸어와 강의 뒤에 섰다.
“전하. 이만 가셔야 합니다.”
“…형님.”
강은 담영이 듣지 못하게 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태자가 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그러니 전쟁이 발생해도, 승리해서 돌아오세요.
진영왕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남긴 강이 등을 돌렸다. 강은 자신을 기다리는 담영의 손을 잡고 소담스럽게 웃었다.
“가자.”
강은 진영왕을 전각에 두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예담영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진영왕을 딱 한 번 돌아보았을 뿐이다. 진영왕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강이 준 목걸이를 만졌다.
그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
숨소리조차 소음으로 느껴지는 회랑을 홀로 걸었다. 앞에는 등이 굽은 총관 태감이, 옆에는 궁녀들이, 그리고 회랑 기둥마다 내군들이 창을 들고 있었으나 그들의 존재감은 유령처럼 희미해 혼자인 것 같았다.
적나라한 침묵은 걸어갈수록 짙어진다. 커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엄청난 위압감과 고독감에 짓눌려 숨이 턱 막힌다. 강은 덤덤한 척 얼굴을 유지했다. 눈동자에 감도는 긴장감도 능숙하게 감췄다. 가죽 안에서 요동치던 근육들도 잠잠해졌다. 강은 자신의 발에 흐르는 피를 모른 척하며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어른 아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무뎌지고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육체와 영혼이 마모되고, 둥글어졌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마찰은 갈수록 약해진다. 그만큼 마음에 생기는 상처는 깊지 않다.
어머니도 그렇게 단련하신 걸까. 진영왕도, 경혜왕도. 강은 수없이 이 회랑을 걸어간 황자들과 비빈들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강은 열두 개의 문 중 제일 밖에 있는 문에 멈췄다. 지옥이 그려져 있다. 검은 돌무더기를 파헤치며 하늘로 올라가려는 늑대가 떡하니 있었다. 살아있는 것 같은 안광에 사로잡힐 겨를도 없이, 총관 태감이 입을 열었다.
“폐하, 영현왕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똑같은 목소리, 어조가 반복되어 열두 개의 문을 통과했다. 이곳은 천금궁의 침전, 연나라에서 제일 안전해야 할 장소였고 그만큼 철저하게 황제를 지키고 있었다. 강이라고 해서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다. 강이 우뚝 서서 앞을 보는 사이, 열두 번의 대답이 회귀하듯 돌아왔다.
“들라 하십니다.”
총관 태감이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강이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문이 정확한 속도로 열렸다. 궁녀들이 강을 위해 연 문을 재차 닫는 소리가 뒤에서 착, 착 들렸다. 강은 오로지 앞만 보며 걸었다.
지옥을 거쳐, 7개의 문을 넘어, 바다를 넘고, 땅을 걷고, 마지막으로 늑대의 등을 타고 승천했다. 승천하는 늑대의 눈빛은 이제 신선처럼 고요하고 차분해져 신성하게 느껴졌다. 그 눈빛의 연장선에 황제가 서 있었다. 황제의 금안이 정적을 단숨에 달콤한 바다로 만들었다. 강은 그 바다에 빠진 조난자가 되어 손을 내밀었다.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손을 잡지 않았다. 그는 늘 그렇듯이 겨드랑이에 손을 꽂아 강을 번쩍 안아 올렸다. 황제와 조우했을 때처럼 강의 몸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황제의 푸른 소매가 젖혀지며 하얗고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근육이 강을 안고, 예뻐할 때마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고아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난폭한 팔뚝이었다.
“아가.”
황제가 또 아가라고 부르는 소리에 강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황제가 소리 내서 웃으며 강의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연꽃이 그려진 검은 신이 궤적을 만들어냈다.
“정말 못된 아가구나. 아비가 여기서 얼마나 외롭게 기다린 줄 아느냐?”
강이 고개를 숙이며 팔을 내밀었다. 황제가 자신을 안으라는 듯 목을 내밀었다. 황제가 착용하고 있는 비녀 끝에 매달린 비단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여, 강의 살결을 애태웠다. 강은 핏줄이 돋아난 진주 같은 목에 팔을 둘렀다. 강의 몸이 빈틈없이 황제의 상체에 밀착되었다. 황제는 강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숨을 내쉬고, 삼켰다. 그의 몸에서 나는 향에 강은 점차 정신이 혼미해졌다. 강은 바다같이 넓고, 각진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바마마….”
강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매달렸다. 황제는 강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들에게 팔을 내어준 그가 손가락으로 볼을 쓸어 만졌다. 강은 그의 애틋한 손길이 간지러웠지만 다정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강은 고스란히 자신의 뺨을 내어준 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여기서 얘기해도 되겠지. 아바마마는 날 사랑하시니까. 강은 황제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아바마마가 널 왜 부른 줄 아느냐?”
막 입술을 움직이는데 황제가 능글맞게 웃었다. 당연히 그 이유를 모르는 강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간헐적으로 소리 내서 웃더니, 강을 냉큼 안아 배 위에 올렸다. 무엄하게 황제 위에 타게 된 강이 난감함에 얼굴을 돌렸다. 이럴 때마다, 황제의 아름다운 용안을 보는 게 힘들었다. 풋사과같이 빛나는 그의 금안이 너무 새콤했다.
황제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강이 넘어지지 않게 한 팔로 허리를 감고서, 다른 손으로는 함을 가져왔다. 그가 잠금을 풀고, 뚜껑을 서서히 열었다.
“복숭아다.”
황제가 자랑하며 눈을 반짝였다. 강은 벌써부터 단내가 진동하는 복숭아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크기도 크고, 색도 좋은 것이 황제에게 진상된 과일이었다.
“워낙 귀한 것이라, 아바마마만 먹을 수 있는데 널 위해서 남겨두었단다.”
“아바마마….”
강이 말끝을 흐렸다. 황제는 유독 복숭아 같은 단 과일을 좋아하는 강을 보고 헤벌쭉 웃었다. 그는 강을 아무렇지 않게 덥석 안아,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히고 손에 복숭아를 쥐여 주었다.
“먹으렴.”
황제가 대놓고 혼자 먹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강은 연나라에서 복숭아가 얼마나 귀한 과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흉년이 들면 황제도 자주 먹지 못했다. 강은 연한 분홍빛을 띠는 복숭아를 양손으로 쥐고 돌려보았다. 이걸 어머니도 드시면 참 좋을 텐데. 속이 쓰렸다.
황제는 먹지 않고 기운을 잃어가는 강을 보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황제가 농을 치듯 손가락으로 복숭아보다 더 향긋하고 달콤한 볼을 찔렀다. 강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왜 먹지 않지?”
“그게… 소자 혼자 먹기에 미안해서요.”
강이 우물쭈물하며 복숭아를 내려놓았다. 눈은 먹고 싶어 죽겠다고 빛나는데, 손은 반대로 행동했다. 강은 황제를 올려다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황제의 눈이 순식간에 강에게 함락되어 멍해졌다. 직격타를 심장에 맞은 아찔한 감각에 황제가 숨을 멈췄다.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강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면, 형님들이나…. 동생들이나….”
“그렇게 해라.”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어딘가 고르지 못했다. 강은 황제가 어디 아픈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는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강이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뜻이다.”
“정말요?”
강이 환하게 웃었다. 황제에게 등을 보이며 안겨있던 강이 침대에 무릎을 댔다. 황제는 강이 반쯤 일어나 자신을 보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아들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강은 복숭아를 소중하게 함에 넣어두고서,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황제의 향긋한 뺨에 입술을 댔다.
“황명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손이 돌처럼 멈췄다. 강은 어렸을 적, 황제가 가르친 대로 한 것밖에 없었다. 황제는 아들이 자신을 안는데도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 아니,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가슴에서 용암이 끓고 있었다. 폭력에 가까운 두근거림에 황제는 눈을 감았다.
“…아아.”
황제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흘렸다. 그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면서 아들을 끌어안았다. 힘을 주지 못했다. 힘을 주면 부서질까, 두려웠다. 그저 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그는 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번엔 황제가 어린 강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울 정도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황제가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괴로워할 때, 강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황제가 부탁을 하나 들어주니 용기가 생겼다. 강은 눈이 촉촉하게 젖은 황제의 용안을 똑바로 보며 선홍색 입술을 달싹였다.
“아바마마. 소자가 청할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만…”
황제가 눈을 느리게 뜨며 물었다.
“무엇이냐?”
“소자가 친왕이 되었으니, 어머니께도 그에 걸맞은 품계를 내려주시면….”
“그래, 네가 원하면 여 미인을 귀하게 만들어주겠다.”
황제는 둘러 말하는 법을 잊고, 직설적으로 말한 강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는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노라고 약조했다. 강의 웃음이 초여름의 햇살보다 빛났다. 황제는 외줄 중앙에 선 아슬아슬함에 가슴이 철렁였다. 죽을 것 같았다. 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어지는 아득함에 앞만 보았다. 그런데 앞을 보니, 꽃망울 같은 아들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도토리나 주울 것같이 생겼던 아들이, 어느새 커서 단단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성숙해지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저런 아들을 어떻게 밖으로 보낼 생각을 했을까. 황제는 순간, 아들을 친왕으로 만든 걸 죽을 만큼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황자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릴걸…. 그렇다면, 혼례도 치르지 못하고 전쟁터도 나가지 못할 테니까. 영원히 천자 옆에 있을 테니까.
황제의 눈이 음험해지는 것도 모르고, 강은 한겨울의 눈보다 순수하게 웃었다. 강은 황제의 뺨에 연달아 입술을 대고, 쪽쪽거렸다. 황제는 아들의 귀여운 애교에 황홀하게 녹았다. 손끝, 발끝이 마비되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볼에 입을 맞추는 게 싫으신 건가요?”
강은 황제가 넋을 놓고 있자 눈치를 보며 물었다. 황제가 입을 조가비처럼 꾹 다물고, 말없이 강을 보았다. 그의 손이 허락 없이 다가왔다. 황제는 양손으로 하염없이 두 뺨을 만졌다. 그의 손이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내려와 강의 허리에 닿았다.
“앗!”
그가 강을 와락 끌어안았다. 장벽 같은 품을 맞닥뜨리게 된 강이 팔을 엉거주춤 들고 있었다. 황제는 강의 뽀얀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속삭거렸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강의 볼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칭찬에 민감해서, 황제나 친왕들이 왕왕 칭찬을 하면 늘 얼굴이 붉어졌다. 강이 얌전히 안겨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황제의 습기 있는 숨이 목덜미를 파고들면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간지러워요, 아바마마….”
황제가 고개를 서서히 떼어냈다. 그는 강의 잘 익은 볼을 보며 입술 끝을 당겼다. 황제의 미소에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진 강이 착한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평상시라면 거울을 본 것처럼 미소 지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황제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길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이 걱정이 되어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자세히 보려 하자, 황제가 뒤로 물러났다.
“아바마마.”
강이 득달같이 쫓아왔다. 도망갈 길이 없으니 황제는 눈을 돌렸다. 그는 죄 없는 바닥만 노려보았다.
“아, 오수를 청하시는 건가요?”
“…같이 잘까?”
황제가 물었다. 그가 눈을 슬금슬금 감았다, 떴다. 눈을 떠도, 감아도 잔상처럼 떠도는 아들의 얼굴에 포기한 듯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은 같이 자자는 말에 꾸물꾸물 움직여 침대에 누웠다.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서 황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봄바람 같은 힘에 끌려, 황제도 나란히 누웠다. 그는 이불을 끌어당겨 아들의 작은 몸에 덮어주었다.
“오늘 진영왕과 놀았다고 들었다. 재밌게 놀았느냐?”
“음, 아뇨. 그냥 담소만 나누었습니다.”
“무슨 담소?”
황제가 가슴을 토닥거려주는 손길에 졸음이 쫓아왔다. 강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에 대해서…. 비가 정해졌느냐고… 형님이 물으셨습니다.”
“왕비?”
황제가 느리게 곱씹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소리인데 끝에 남는 게 스산했다. 어딘가 이상한 웃음소리에 강이 눈을 꿈틀거리자, 황제가 감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어버렸다. 큰 손에 얼굴이 반 이상 가려졌다.
“비라…. 그래, 내 아가가 벌써 혼례를 생각하고 있구나.”
황제가 조곤조곤 채근했다. 유난히 빨간 입술에 바람에 이는 꽃처럼 움직였다. 강은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제의 금안이 서서히 좁혀졌다.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변한 그의 눈이 아들의 입술을 읽었다.
명확하게 알아들은 그가 웃었다. 바닥을 기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에 녹녹하게 스며든 광기를 갈무리한 그가 손바닥을 떼어냈다. 강은 그 사이, 황제의 온기에 취해버린 듯 눈을 느리게 움직였다. 황제는 강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너무 작고 가느다랬다. 영양분이 부족한 나뭇가지를 잡은 듯했다.
“너무 작아서 혼례를 못할 거 같은데.”
“안 작아요…. 많이 컸어요.”
강이 여우처럼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황제에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말투가 워낙 상냥해서, 투덜거리기보단 가벼운 칭얼거림 같았다. 강의 소리를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제가 슬슬 웃으며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보렴. 얼마나 작은지.”
황제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속삭거렸지만, 강은 졸린지 잠투정을 부렸다. 황제는 쓰게 웃으며 손목을 내려주었다. 강은 자유로워진 손을 움직여, 황제의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어디 가지 말라는 듯, 여기 있어 달라는 듯한 아들의 요구에 황제는 움직이지 못했다.
충분히 밀칠 수 있는 힘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목을 꺾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혼례는 더 크면, 강이 더 크면….”
담담한 척 중얼거리던 황제는 잠든 아들을 보다가, 뺨을 쓰다듬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글쎄, 네가 더 성장해도 혼례는 해주고 싶지 않구나.”
그는 강이 깰까 봐, 조심하며 소매를 붙든 손가락을 떼어냈다. 강이 아쉬운 듯 잠결에도 손을 움찔움찔 움직였다. 황제는 턱 끝까지 보송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는 강과 노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침전 밖으로 나섰다. 황제의 등 뒤로 내관과 궁녀, 친군들이 따라붙었다.
황제는 답답한 숨을 겨우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소윤협과 예담영을 모호전으로 불러들여라. 강이 진영왕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야겠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더불어 그를 따르던 그림자도 스스슥, 어둠에 파묻혀 빠르게 움직였다. 먼지가 슬쩍 일었다가 땅에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