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4화 (4/11)

2권

2장. 춘몽 (2)

처음이었다. 황제가 진영왕을 사적인 공간으로 부른 것은. 황제에게 기대하지 않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끌리는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진영왕은 자신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는 걸 깨닫고 손으로 얼굴을 소세하듯 쓸어 만졌다. 그러나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두근거리는 세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황제를 보필하는 궁녀가 다가와 몸이 편찮으시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진영왕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궁녀는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보냈지만, 차마 친왕에게 두 번 물을 수는 없는지 뒤로 사뿐히 물러났다.

곧이어 마지막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붉은 빛에 진영왕은 눈을 슬쩍 내리떴다. 동백꽃이 핀 것처럼, 강렬한 붉은 색에 눈꺼풀이 따끔거렸다.

그 중심에 백색 평복을 입은 황제가 있었다. 늘 단정하게 묶던 은발도 푼 상태로, 황제는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진영왕을 보고 있었다. 황제의 품에는 황제의 장의를 덮고 잠이 든 강이 있었다. 벌써 14살이 되어 훌쩍 컸지만 황제가 워낙 장신에 체격이 좋다 보니, 강이 유독 작게 느껴졌다. 황제가 입버릇처럼 “작다, 너무 작아.”라고 푸념을 늘어놓던 것이 참된 말로 느껴질 정도로.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여름 햇볕보다 덜 뜨겁고, 봄 햇볕보다 따스한 그런 느낌이었다. 미적지근하지 않은 온도에 진영왕은 신방을 몰래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이대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정말, 황제가 자신을 부른 게 맞을까. 여러 고민이 용솟음쳤다.

‘으응….’

강이 황제의 품에 안긴 게 불편했는지 끙끙거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황제가 자세를 바꿔 강이 편하게끔 안아줬다. 이제 강의 머리는 황제의 어깨에 있었고, 황제의 길고 단단한 팔은 강의 허리에 감겨있었다. 두 다리는 활짝 펼쳐져 황제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황제는 떨어진 장의를 한 손으로 주워 마르고 작은 등에 감싸주었다. 강의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나와, 강의 존재감을 알렸다.

황제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이번 주국 복속에 네가 필요하다.’

‘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진영왕이 눈을 크게 떴다. 황제는 진영왕을 직시하며 웃음기가 걸린 입술을 움직였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느냐. 전쟁에 한두 번 참여한 것도 아닐 텐데.’

주국을 복속시키고 싶어 하는 황제의 마음은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마땅한 빌미가 없어서 황제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 주국과 연국이 맞닿은 대산 국경 지역에서 싸움이 발생했다. 백나무 소유권이 문제였다. 뿌리는 연국에 있었으나, 가지는 주국 쪽으로 자라고 있었다. 같은 신을 모시는 나라였기에, 백나무는 두 나라 모두가 신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나무를 가지고 연국은 하늘의 모습을 조각하고 싶어 했고, 주국은 신당을 짓고 싶어 했다. 주국은 가지를 베어가려 하다가 국경 지역을 지키는 병사에게 들켰다. 병사는 당연히 뿌리가 연국에 있으니 백나무는 연나라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주국 사람은 가지는 주국 쪽으로 향해 있으니 가지만은 주국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이내 두 나라의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황제는 협정을 걸고넘어졌다. 중간 지역에 있는 것은 둘 다 건드리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먼저 주국에서 건드렸으니 협정이 깨졌다고 선언했다. 주국의 왕 또한 자존심이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국경에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몇십 년간 유지해온 휴전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같은 하늘과 조상을 둔 두 나라였지만, 창끝은 서로의 가슴을 향했다.

황제는 군사들을 이끌 친왕으로 고민 중이었다. 또한 경혜왕도, 진영왕도 이번 전쟁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달라질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태자가 되기 위한 적절한 시기였다. 문무백관들도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친왕에게 황제의 절대적인 호의가 쏟아질 것을 알고서, 자신이 미는 친왕을 은근슬쩍 황제에게 내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황제였고, 그 시기에 황제는 진영왕을 자신의 공간으로 불러들였다. 진영왕은 내심 눈치챘다.

황제가 경혜왕 대신 자신을 이번 전쟁의 적격자라고 결정한 사실을.

황제는 안고 있는 강을 침상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 동작이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하던지, 순간 자신이 강이 되고 싶다는 헛된 망상마저 들었다. 황제의 시선 끝, 손끝마다 애정이 배어있었다. 황제는 강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서 만져주며 진영왕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어느새 강을 보던 애정은 물에 씻긴 듯 사라지고 냉정한 아버지의 눈이 되어 있었다.

그 눈엔 물건을 가늠하는 듯한 객관적인 감정만이 감돌고 있었다.

‘경혜는 조급하고, 포악하고… 자기 마음대로지. 하지만 넌 달라. 품성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인내할 줄 아니 군주가 되기에 인성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다 못해 폭발할 것 같다. 진영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는 강을 침상에 내버려 두고, 천천히 진영왕에게 걸어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진영왕은 떨리는 시선으로 황제의 커다란 손과 아름다운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았다. 진영왕이 일어나지 못하자, 황제가 직접 손을 움직여 진영왕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황제가 아직은 자신보다 작은 진영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은발이 햇빛처럼 아찔하게 쏟아져 내렸다.

‘주국 왕의 머리를 천자에게 가져와라.’

‘예, 폐하.’

진영왕이 단단하게 여문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손을 여유롭게 움직여 아들의 어린 뺨을 쓸어 만지며 너그럽게 속삭였다.

‘이제 슬슬 태자를 결정할 때도 되었다.’

황제가 웃었다. 그는 진영왕에게 등을 보였다. 그의 넓고 훤칠한 등이 매섭게 느껴졌다. 평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단단한 몸이 어른스러웠다. 그의 등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붉은 빛에 진영왕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성스러운 백색, 황가를 상징하는 붉은 색…. 모두 황제를 상징하는 원색에 가슴이 설렜다.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내 발아래 두고 싶다. 강이 잠든 저 침상에 눕고 싶다….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진영왕을 차근차근 지배했다.

황제가 발을 멈춘 곳은 자신의 대도가 걸린 벽이었다. 그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대도를 뽑아 들었다. 황가를 상징하는 늑대의 발톱이 각인된 대도가 빛을 그대로 튕겨내며 매섭게 빛났다.

‘주국을 천자의 발밑에 가져와.’

황제가 대도를 건넸다. 진영왕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대도를 받아들였다. 묵직하게 손에 감겨드는 대도가 마음에 들었다. 진영왕의 눈에 대도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들어갔다. 황제는 황궁에 맞게 변해가는 진영왕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었다. 그의 손이 슬쩍 움직여, 진영왕의 머리에 닿았다. 그의 검지가 내려와 진영왕의 이마에, 콧등에, 그리고 입술과 뺨까지 내려왔다. 그의 손이 가볍게 턱을 틀어잡고, 시선을 오로지 자신에게 맞췄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폐하. 이 대도로 반드시 주국 왕의 머리를 베어오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잠든 강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이 강의 이마에 닿았다. 자신을 보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때서야 알았다. 황제는 자신을 절대 아들로 인정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자신도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철저한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돌아가면 된다.

그 후로 진영왕은 황제에게 애정을 갈구한 일이 없었다. 포악스러운 면을 보이며 황제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으려 하는 경혜와 달랐다.

진영왕은 숙비의 소원대로 철저하게 황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다. 그 길을 장식하는 데 주국 왕의 머리가 필요했다. 황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감았던 눈을 치켜떴다. 연국과 달리 푸르게 장식한 주국의 대전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용들이 새겨진 푸른 천들은 다 찢겨 있었다. 주국의 신하들은 이미 땅에 산 채로 묻혔다. 이제 남은 건, 다수의 백성과 소수의 왕족뿐이었다.

“전하, 정말 직접 처형하시겠습니까? 처형 같은 일은 저에게 맡기시지요.”

진영왕을 보필하는 장군 조운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녀의 잘 그을린 얼굴을 건성으로 보던 진영왕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피가 묻은 그의 갑옷이 금속성의 날 선 소리를 냈다. 진영왕은 등 뒤에 고정하고 있던 대도를 뽑아냈다.

“처형은 내가 한다.”

진영왕은 자신을 말리는 장군들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성벽 가장 중앙, 백성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그곳에 마지막 왕이 무릎을 꿇고 비참한 얼굴로 진영왕을 보고 있었다. 진영왕이 대도를 들고 성벽에 들어서자, 자리 잡은 백성들이 비통해하며 우는 소리가 울렸다. 연국 병사들은 그들이 울지 못하게 봉을 집어 들어 두들겨 팼다.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성벽 아래에서 생생히 들렸다.

“나 하나로 만족하면 됐지, 불쌍하고 어린 백성들은 왜 때려죽이는 것인가!”

왕도 아닌 자가 밑에서 맞아 죽는 백성들이 불쌍했는지, 노성을 질러댔다. 진영왕은 그의 성난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뺨을 후려쳤다. 포승줄에 묶인 몸이 휘청거리며 아래로 곤두박이쳤다. 왕이 머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게 진영왕이 그의 머리를 발로 짓눌렀다. 그의 머리가 돌에 부딪히며 피가 질질 흘렀다. 진영왕은 그의 머리를 발로 더 세게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때려죽이든, 칼로 찔러 죽이든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 패망한 나라의 왕이 결정할 일이 아니지.”

“…제발, 내 백성들은 그만 내버려 두게. 내가 패배를 인정하면 된 거 아닌가.”

왕이 평민들처럼 통곡을 하며 흐느꼈다. 진영왕은 싸늘한 눈으로 그의 전신을 훑었다. 패망한 왕다운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망나니 같은 머리와 찢긴 용포. 억세게 묶인 몸. 진영왕은 자신에게 감히 백성들의 안위를 부탁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죽이고, 백성들을 살리고 하는 건 모두 자신의 결정이었다.

짜릿했다.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왜 불쌍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들은 연국의 백성들이 아니었다. 죽여야 할 적의 백성들이었다.

진영왕은 눈물 맺힌 눈으로 자신을 보는 왕을 향해 대도를 치켜들었다. 왕의 눈에 절망이 퍼져간다. 자비가 없는 군주를 보고 허망함을 느끼는 패배자의 눈을 보며 환하게 웃은 진영왕이 유쾌하게 말했다.

“잘 가시게. 부디 저승길도 비참했으면 좋겠군.”

그의 대도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아아아아악!” 하는 여자의 높은 비명 소리에 화답하듯 왕의 늙은 목에 박혀 들어갔다. 왕의 눈이 허옇게 뒤집히고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들끓었다. 진영왕의 얼굴에 피가 푸슛, 하고 튀었다.

“이런. 사람은 쉽게 안 죽어서 이게 문제라니까….”

진영왕이 낮게 웃으며 박힌 대도를 뽑아내고, 다시 목에 박아 넣었다. 그 행위는 왕의 목이 완전히 잘릴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왕이자, 아버지의 죽음을 보는 공주와 왕자들의 울음이 커지고 백성들의 통곡도 범람했다. 진영왕은 왕의 목을 자르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하얀 목뼈가 잘릴 때까지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덜렁덜렁거리는 목을 머리채를 잡고 뽑아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진영왕의 손아래에 움직였다. 그 행위를 무감한 얼굴로 지켜보던 조운이 다가와 함을 벌렸다. 그 안에는 연국의 붉은 비단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황제에게 진상할 선물을 위해 연국에서 가져온 함이었다. 안으로 주국 왕의 머리가 들어갔다. 진영왕은 직접 함을 잠그고, 열쇠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피를 흠뻑 머금은 대도를 느슨하게 쥐고서, 다른 손으로는 피가 잔뜩 묻은 얼굴을 닦아냈다. 진영왕은 마지막으로 함을 두들기며 기분 좋게 말했다.

“규격이 딱 맞군. 역시 장인은 장인이야.”

소년다운 청량한 말투와 목소리에 조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저도 솔직히 함이 너무 큰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머리에 딱 맞아서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전하께서 준비한 진귀한 선물이지 않습니까?”

진영왕과 조운, 그리고 성벽을 지키는 장군들이 큰 목소리로 웃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위에선 한 사람의 목을 자르는데, 밑에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머리가 깨지는 백성들이 있었다. 위도, 아래도 온통 붉은 피투성이에 망가진 시체들이 넘쳐났다. 그 광경을 오래 지켜보지 못한 공주는 끝내 실신했다. 실신한 공주를 안아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주의 몸은 뒤로 넘어갔다.

“무고한 생명들을 죽이면서까지 태자가 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절대 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군주는 무고한 자들을 사랑하며 보듬어야 하는 자리다! 아무리 적국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건 하늘이 용서치 못할 일이야!”

주국을 수호하며, 연국과 같은 하늘을 모시는 신관이 진영왕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얼마나 분노가 치밀었는지,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목엔 핏대가 일어나 있었다. 얼굴에도 피가 몰려 붉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그 얼굴을 삐뚜름한 얼굴로 지켜보던 진영왕은 조운이 들고 있는 창을 뺏어 들었다.

“그대는 절대로 태자가 되지 못해! 하늘은 정당하지 못한 살육을 용서하지 않는다! 넌 황제에게 속은 거야! 그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다!”

진영왕의 창이 신관의 가슴을 뚫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활을 쏘듯 창을 신관의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 정확하게 신관의 가슴을 정통으로 뚫고, 창이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신관의 피가 주변에 있던 자들에게 물방울처럼 튀었다. 진영왕은 꺽, 꺽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신관을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은 저승에서 하시게.”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진영왕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는 밑과 위를 장식한 붉은색을 내리비추는 햇빛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갑주에 둘러싸인 그의 손이 성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마치 연나라 같다.”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기쁨에 가득 찬 미소였다.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듯, 진영왕이 무척 기뻐했다. 그 모습을 무관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조운이 경멸의 빛을 슬며시 드러내며 웃었다.

‘너는 신관의 말처럼 태자가 되지 못한다. 태자는, 경혜왕께서 되실 테니까.’

조운은 속내를 삼키며 그의 뒤에 섰다. 진영왕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충직한 신하의 가면을 쓰고 웃었다.

*

2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를 쟁취한 진영왕이 수도로 돌아왔다. 봄 향기가 짙어지고, 바람은 한결 가벼워져 두둥실 떠다니는 시점에 맞이한 반가운 귀환이었다. 선두를 지키는 조운 장군과 그녀의 꼬리를 물고 있는 보병들 틈에 진영왕이 늠름한 자태로 우뚝 서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백성들이 소년의 발치에 닿지도 못한 위치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모두 소년을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소녀들이 가지고 온 꽃잎이 깃발 아래에서 펄럭거렸다. 나라를 위해, 천제를 위해 값진 땅을 쟁취해온 소년을 위한 백성들의 약소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시선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은 심연을 가진 소년의 눈은 오롯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그들만의 세계가 소년의 검은 눈에 담겼다. 소년의 눈이 점차 실처럼 얇게 변해갔다. 입에선 나이에 맞지 않는 묵직하고 두터운 숨이 흘러나왔다. 입술 표피에 옅은 불편함이 떠올랐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전하.”

그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이동하던 기소진이 입을 열었다. 진영왕은 고삐를 잡던 손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2년 동안 험한 국경에서 구른 터라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피부는 얼기설기 짜인 베처럼 버석했다. 입술은 얼마나 피곤했는지 각질이 올라와, 살짝 움직여도 살이 뜯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슬쩍 입술을 만져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말없이 눈여겨보던 기소진이 소매에서 수를 놓은 천을 꺼내주었다. 진영왕이 거부하려 했으나 기소진은 건조한 나뭇가지같이 마른 팔을 뻗어 기어코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가 눈을 새초롬하게 내리뜬 게 보였다. 길고, 쭉 뻗은 속눈썹이 새의 깃털 같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팔락거리는 자태를 멍하니 지켜보던 진영왕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아무리 청년같이 여물어간다고 해도, 연하게 남아있는 소년의 본성에 기소진이 싱긋 웃었다.

“전하, 수도에서 쉬시면서 몸을 보양하셔야겠습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셔서…. 전하의 얼굴을 보면 영현왕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진영왕은 2년 전 보았던 아우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이가 돈독해서 제법 오래 붙어있었는데, 2년이란 세월이 제법 길었는지 얼굴이 퇴색되어 버렸다. 기억나는 건, 강이 차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개나리처럼 선명한 노란색 평복을 입은 강의 소매가 공중에서 나부꼈다. 그네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손이 매우 어여쁘고 단정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매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손은 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하얀 손등은 여전히 보드라워 보였고, 그 위로 융기한 푸른 핏줄은 잎맥처럼 가느다랗게 뻗어있었다. 둥글고 길쭉한 손톱은 투명한 분홍색이었다.

강은 따른 차 위에 꽃잎을 띄우는 걸 좋아했었는데…. 진영왕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꽃잎들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꽃을 사 가야겠다.”

“꽃이요?”

기소진이 소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진영왕은 무의식적으로 기소진의 창백한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머니도 드리고, 왕비도 줘야지. 계속 기다렸을 테니까.”

진영왕이 스스로 기소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기소진은 구겨진 천을 보았다. 그의 피가 점점이 묻어있는 귀한 비단이었다. 지독한 결벽증을 앓고 있었지만, 그의 접촉이 묻어있는 물건은 쉽사리 버릴 수 없었다. 기소진은 아무렇지 않은 산뜻한 얼굴로 비단을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게끔 가슴팍에 넣었다.

전쟁을 승리를 이끈 주역들을 칭송하는 행렬은 금색 기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붓으로 경계선을 나타낸 것처럼, 백성들은 황족들이 사는 구역에 한 발자국도 대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지붕 밑에 옹기종기 모여 진영왕을 흠모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평생을 아래에 머물 자들다운 행동에 진영왕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은우문이 보였다. 2년 만에 보는 은우문은 여전히 웅장한 위압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붉은 담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은 백색 문은 세월의 흐름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진영왕이 말에서 내렸다. 예법대로 이제부턴 진영왕의 발로 화비전까지 가야 했다. 아마 모든 황족이 그곳에서 진영왕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진영왕이 은우문 앞에 당당히 섰다. 금군들이 허리를 숙이며 진영왕에게 존경의 뜻을 보였다. 결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은우문이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돌길이 가장 먼저 진영왕을 반겼다. 진영왕은 앞으로 걸어가면서 띠돈(노리개를 고름이나 허리에 거는 장식)에 고정된 대도를 풀었다. 마지막 왕의 머리를 벤 대도는 다른 이의 손을 거쳐 황제에게 향할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다시 환수할 날을 머리로 세어보며 진영왕은 궁인들이 환대와 함께 가마에 올라탔다. 진영왕의 뒤로 병사들이 줄을 이었다.

화비전까지 가는 길에 금군들이 연국과 승전을 축하하는 거대한 깃발을 든 채 진영왕을 환대했다. 백성들이 원 없이 소리 내어 기뻐했다면, 금군들은 침묵과 눈빛으로 환호를 보냈다. 가마가 물 위에 떠다니는 낙엽처럼 이동해 드디어 화비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섰다.

수양문을 통과하자, 예복을 입은 가장 낮은 품계의 문관이 보였다. 그들의 뒤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금군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문관들이 고개를 돌려 진영왕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그 뒤로 차례차례 윗사람까지, 진영왕과 그의 부하들이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느리고 확실하게 허리를 숙였다.

화비전 앞에서는 성대한 규모의 악단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둥, 둥, 둥…. 화비전이 떠나갈 듯 울리는 북소리에 귀가 둔해졌다. 북소리는 점차 멎어 들고, 그 안으로 빗소리처럼 가련하게 울리는 현이 자리 잡았다. 황궁에 소속된 이들이 연주하는 곡은 고양이의 걸음처럼 가벼우면서도, 무희의 옷자락이 흩날리듯이 고혹적이었다. 귀가 매료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영왕의 걸음이 12연단 가장 아래에 멈췄다. 진영왕을 따라온 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맞게 무릎을 꿇고 앉아 황제에게 엎드려 예의를 표했다.

“고귀한 천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황제를 향해 소리쳤다. 한 명의 거인이 내는 것처럼 일정한 발음과 크기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음악 소리를 묻어버렸다.

진영왕은 그들의 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황제만을 보았다. 화비전 가장 가운데, 그리고 12연단 중심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붉은 용포에 금실로 수놓아진 하늘의 상징 12개가 보였다. 호화롭다 못해 눈이 질식할 것 같은 화려함에 눈이 지끈거렸다.

그러나 황제가 12류 안에서 슬며시 미소를 짓자, 아예 눈이 멀어버렸다. 정말 살아있는 신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용안은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드디어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동작 하나에 모든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댔다. 진영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숱하게 먹었던 잔인한 마음을 억누르고, 황제를 칭송했다. 황제가 걸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12연단을 내려왔다. 그가 걸어올 때마다 12류가 차르륵, 움직이는 소리와 그가 착용한 장신구에서 나는 금속성의 마찰음으로 그의 존재감을 알아차렸다.

그러다가 소리가 음악과 함께 동시에 멎었다. 진영왕은 가슴에서 퍼지는 박동에 눈앞이 혼미해졌다. 왜 이리도 가슴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아들로서 인정받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는데.

“고개를 들라.”

황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진영왕은 바닥에 두 손을 댄 채 고개만 들어 올렸다. 용안이 시야에 범람했다. 옥을 가다듬어 만든 듯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호박을 박아넣은 것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금안에 진영왕은 입을 슬쩍 벌렸다.

“그대의 승전 소식은 천자가 받아본 절일 선물 중 최고로구나.”

“…폐하, 소신 폐하를 위해, 연국을 위해 온몸을 바쳐 주국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대의 충심은 그대의 주군이자, 아비인 천자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들려준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긴 붉은 소매에서 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진영왕의 시선 끝이 금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손등에 머물렀다.

황제의 손이 원래 저렇게 컸던가? 자신도 컸다고 생각했는데. 진영왕은 황제에 비하면 여전히 아이 같은 자신의 손을 보고 부끄러움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황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준 대도는 자신이 쥐기에 너무 커서, 양손으로 쥐고 휘둘러야 했는데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잡았었다.

“잡지 않을 생각이냐?”

황제가 웃으며 농을 걸었다. 진영왕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황제를 보며 머뭇거렸다. 정말 잡아도 될까. 잡으면, 그가 자신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는 게 아닐까…. 헛된 망상이 들 무렵, 황제가 덥석 진영왕의 손을 맞잡고 일으켰다. 황제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진영왕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다운 미소를 보여주며 진영왕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황제가 고개를 천천히 숙여 진영왕의 귀에 대고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태자로서 인정받을 단계까지 왔구나. 축하한다, 아들아.”

황제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지는데도 진영왕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황제는 멍청하게 얼어붙은 진영왕의 뺨을 툭, 건드렸다. 진영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식의 접촉은 난생처음이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털까지 오소소 돋아, 진영왕의 심경을 대변했다.

진영왕의 흔들리는 시선이 황제의 등에 닿았다. 12연단의 중간까지 오르던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황제가 나른하게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자신이 원하던 것을 덥석 잡아냈다.

“아바마마…!”

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2년 전과 달리 좀 더 낮아지고, 풍부해진 목소리였다. 당황하고 어리숙한 목소리가 유려하게 흐르는 곡에 비껴가며 드문드문 퍼져갔다. 진영왕의 질투, 집착, 그리고 형제로서 보여주는 동질감이 섞인 시선에 사로잡힌 강이 얼굴을 붉히며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황제는 양손으로 강을 안아 올렸다. 단숨에 황제에게 안기게 된 강이 능숙하게 황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황제는 어렸을 때처럼 강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은 날씬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안아 고정했다. 강의 목덜미가 공중에 드러났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목덜미가 온통 새빨갰다.

“아바마마, 아직 승전식이 거행되고 있는데…. 그리고 이곳은….”

“그게 무슨 상관이지?”

황제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강을 안아 12연단을 올라갔다. 강은 차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용기는 없는지, 붉어진 얼굴을 황제의 어깨에 파묻었다. 이제 15살, 혼례를 하고도 남을 나이였지만 강은 2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황제의 그늘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어좌에 앉고, 강을 옆에 세워두었다. 강이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집요하게 눈으로 훑던 황제가 손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아비를 봐야지.”

황제가 다정하게 요구했다. 강은 황제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그를 애써 달랬다.

“아바마마, 지금은 형님을 위한 승전식이 아닙니까. 승전식이 끝나면, 그때…. 옆에 있어드릴 테니 부디…”

강이 부끄러웠는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황제의 손에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거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황제의 살에 뺨을 맞대고 숨을 토해냈다. 숨이 황제의 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탓이었을까. 황제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고조되던 음악이 힘을 잃어가는 동안, 황제의 금안엔 작은 파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강은 황제가 길들인 버릇대로 황제를 달래기 위해 눈웃음을 지었다. 강의 순진무구한 검은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입술 끝이 찬란하고 아름답게 휘기 시작하자 황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양손이 강의 어깨를 억세게 잡았다. 너무 작고 여린 어깨가 황제의 손아귀에 무자비하게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아파요.”

강이 더듬거리며 말하는데도 황제는 멍한 얼굴로 강을 뚫어지게 보았다.

“아바마마.”

노래가 뚝 멎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화살이 되어 황제의 등 뒤에 꽂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강한 무기가 황제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강의 눈이 표창이 되어 황제의 가슴에 직격하고, 작은 선홍빛 입술이 날개처럼 움직여 ‘아바마마’라고 부르자 황제는 포위되고 말았다. 황제가 떨리는 손으로 강의 뺨을 매만졌다.

그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뭐지…. 뭔지 모르겠는데, 이거.”

“…소자입니다, 아바마마.”

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황제에게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은 황제의 손목에 손을 올렸다. 아주 약한 힘으로 잡았을 뿐인데, 황제는 그곳에 사슬이 감겼다고 생각했다. 강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 소자예요. 아바마마의 아들, 강이에요.”

“…그렇지.”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강아, 넌 내 아가고… 내 아들이지. 그래. 내 아들이야.”

강이 웃었다. 황제도 거울을 마주 보듯 따라 웃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은 서로를 비껴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종착지도 달랐다.

*

나라에서 가장 성대한 명절 중 하나인 절일과 승전식이 필연적인 것처럼 우연히 맞물린 덕분에 축제는 이레에서 사흘이 더 붙어 늘어났다. 황제는 대대적으로 장사를 쉬게 하고, 백성들에게 주국의 곡식과 과일을 나눠주었다. 주국이란 나라는 사라졌고, 그 땅 위에 새로운 해로와 육로가 트였으니 안 그래도 모자랐던 식료품을 적절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곳간마다 새로 차는 곡식에 백성들은 ‘천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더불어 살아남은 주국 백성들은 이마나 뺨에 낙인을 찍어 황족들의 저택마다 노비로 팔려갔다. 황족들은 가축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노비로 맘껏 부릴 수 있어서 좋아했고, 백성들은 때아닌 배부름에 기뻐했다. 인간돼지가 되어 사육장에 갇힌 주국 황족들, 한순간에 인두로 낙인이 찍히고 노예가 된 주국 백성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강은 행복하지 못했다. 대놓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눈에 근심이 심해처럼 생기고, 볼까지 움푹 파여 초췌해진 형 진영왕을 보자 가슴에 죄책감이 돌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경혜왕이 경멸과 함께 비난 어린 충고를 하고 떠났던 것이 어제 일처럼 아른거렸다.

정말 나의 위치는 무엇일까. 황제의 아들이나, 아들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친왕이었다. 하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황제의 비위 맞추기뿐이었다. 물론 황제가 그것을 좋아했고,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했으니 따랐으나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제대로 된, 타인에게 인정받는 친왕이 되고 싶었다.

강은 황제가 ‘어여쁘다’라고 칭찬하는 하얀 손을 보았다. 한녕전에서 황자 교육을 받을 때, 활을 얼마나 쏘아댔던지 굳은살이 크게 박여있었다. 툭 튀어나온 것이 길에 솟아난 돌부리, 혹은 나무에 붙어 자라난 겨우살이 같았다. 그 부분을 엄지의 뭉툭한 부분으로 만져보았다. 딱딱했다. 황제를 위해서, 언젠가 전쟁에 나갈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훈련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노력은 성과가 없었다. 강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황제의 말처럼 작게 느껴지는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뜻 본 진영왕의 왼손은 전쟁터에서 싸우느라 약지 한마디가 잘려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붉은 생채기가 손등에 남아있었고, 오른손은 움직임이 둔했다. 경혜왕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가 활이 팔뚝에 박혀 한동안 고생한 흉터가 남아있었다.

강은 죄 없는 다식만 죽어라 노려보다가 시선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턱을 괴고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또렷하게 뜬 금안이 무슨 일인지 무척 답답해 보였다. 그는 강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슬며시 돌리고, 어머니인 여 소의를 보았다. 강도 그의 시선을 진득하게 쫓아가 어머니를 보았다. 거의 일 년 만에 만난 어머니 여 소의는 전보다 아름다워져 있었다. 어머니의 자랑인 검은 머리가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머리를 매만지는 걸 좋아하는 황제의 취향에 따라, 땋거나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흘러내려와 어머니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몸을 감쌌다. 창백하게 느껴지는 하얀 피부와 어우러지는 검은 머리, 살결이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어머니는 신선 옆에서 머무르는 선녀 같았다.

여 소의는 눈을 내리뜨고 황제에게 차를 따라 주고 있었다. 황제가 강의 시선이 여 소의에게 닿은 것을 감지하고 여 소의의 어깨를 상냥하게 감싸 쥐었다. 황제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뜨고 강을 보았다. 강은 어머니와 오랜만에 눈이 마주쳤으나, 웃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황제는 두 사람 사이에 느긋하게 앉아 둘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어머니의 턱을 그러모아 쥐었다. 황제가 애틋한 동작과 달리 서리가 서린 눈으로 경직된 여 소의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손이 너그럽게 움직이며 파리한 그녀의 뺨을 매만지고, 아래로 내려와 목덜미까지 쓸었다. 묘하게 생성되는 야릇한 분위기에 강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금슬이 여전히 좋으시구나.”

옆에 있던 경혜왕이 우아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내 어머니는 오늘 저 꼴을 보고 배앓이를 하실 테고 숙비께선 송의 승리를 거들먹거리시면서 폐하를 부르시겠지.”

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경혜왕을 보았다. 이런 곳에서 괜히 도발에 넘어가 싸우는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경혜왕은 조각낸 과일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 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내는 건 불경한 일이었고, 황자든 황녀든, 황궁에 사는 누구든 소음을 내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다. 차를 따를 때나, 걸을 때나 심지어 황제와 침상을 나눌 때도 함부로 소리를 내어선 안 되었다.

“왜? 내 말이 틀린 것 같아? 내 어머니는 툭하면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사정하면서 폐하께 매달리거든. 병명은 늘 같아.”

“실제로 심신이 미약하시지 않습니까.”

경혜왕을 제외하고, 귀비와 귀비의 자식들은 잔병을 달고 살았다. 물론 정말 아픈지, 안 아픈지는 관심 밖이었다. 원인 없는 병은 늘 많았다. 황제도 딱히 뭐라 하진 않았으나 그녀가 아프다며 패를 올릴 때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눈에 짜증이 확실히 서려 있었다.

“정말 어머니가 아프다고 생각해?”

“그건 제가 알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저는 어의가 아니니까요.”

경혜왕의 눈웃음이 진해지고, 소리는 더 없어졌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손으로 무릎을 느릿하게 건드리며 건들건들 중얼거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인데 어째서 저렇게 추하게 변하신 건지. 어차피 폐하께선 너를 빼고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으신데.”

강은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경혜왕이 손목에서 내려와 손을 맞잡았다. 강이 눈을 치켜뜨고 거부하자, 손가락을 세워 뼈를 타고 만지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승전식에서 있던 일을 생각해봐. 승전식의 주인공은 송이었는데, 폐하는 역시나 너만 챙기시지 않았더냐. 아무리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가져온다 한들, 언제나 사랑받는 건 너지. 수도에서 아무것도 안 한 네가 가장 사랑을 받는 걸 보면, 왜 어머니들이 저렇게 기를 쓰고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지 이해가 간다니까.”

“그러면 형님도 귀비 마마처럼 노력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배앓이를 한다고 폐하께 고하시든가요.”

둘의 대화는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보다 조용하게 진행되어 근처에 있는 사람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보면서도 표독스럽게 웃지 않고, 선선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강은 힘이 빠진 틈을 타 손목을 빼내고 몸을 일으켰다. 여 소의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진 듯했던 황제는 강이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벗어나려 하자 불쾌감을 드러냈다. 강은 목덜미에 꽂힌 익숙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걸었다.

강이 소피를 보기 위해 나가는 용도로 쓰이는 문까지 걸어가자, 궁녀가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강은 평소처럼 슬쩍 웃어주고 사람들이 한적한 곳을 찾았다. 철저하게 통제가 되는 원림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 갈 수는 없었다. 연회가 벌어지고 있으니 보안이 엄격해, 황제가 으슥한 곳의 출입은 모두 막아버렸다.

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금군들이나 오순도순 모인 대신들이 있어 선뜻 마음을 놓을 공간이 없었다.

강은 태양보다 환한 빛을 뿜어내며 위용을 자랑하는 화비전을 등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정신을 다잡은 강이 화원 근처에 있는 돌에 앉으려 걸어가는데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회색기가 섞인 청색 예복을 입고, 어깨에 검은 장의를 걸친 진영왕이 서 있었다. 2년 만에 마주한 형을 본 강이 활짝 웃었다. 진영왕은 강이 가장 좋아하는 형이었다.

“형님.”

“주랑 또 싸웠어?”

진영왕이 의젓하게 미소 지었다. 강이 선뜻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거리자 진영왕이 다가와 강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 봐도 안다. 주가 또 시비를 걸었지? 주는 질투가 많은 애니까. 네가 이해하렴, 강아. 그 애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강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따스하게 다독여주는 진영왕의 성품에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진영왕이 알 정도면, 황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눈치 빠른 황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괜히 경혜왕의 농에 넘어간 거 같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바마마께 어서 가봐. 널 찾으시니까.”

“형님이 혼나셨습니까?”

“음… 조금?”

진영왕이 어색하게 웃었다. 강이 축 늘어져서 미안한 표정을 짓자, 진영왕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혼나긴 했지만 대놓고 혼난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훈계를 들은 정도였어. 기분 좋은 연회에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정도였다.”

“다행입니다. 저 때문에 괜히 형님이 혼나실까 봐…. 어쨌든 저도 같이 싸운 건 맞으니까요.”

“주는 네 탓만 하던데, 너는 아니구나.”

강은 우뚝 서서 진영왕을 물끄러미 보았다. 진영왕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눈부시게 만드는 강의 잘생긴 외모에 쓰게 웃었다. 황제가 여 소의의 얼굴과 강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무언가를 평가하고 있었다. 흡사하게 생긴 외모인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조금 궁금해져 강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지만 마땅히 나온 답은 없었다.

진영왕이 느낀 건, 강이 너무나 착하고 속이 말랑말랑한 소년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타인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것들을 해칠 줄 모르는 작은 아이였다. 아마 황제가 작다고 투덜거렸던 연유도 이런 성품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영왕은 수도에서 곱게 길러져 아무것도 모르는 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2년 동안 전쟁터에서 구르면서 살기로 두터워졌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황제의 태자 발언과 따스한 손길에 녹아내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증오하던 자에게 인정을 받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다니. 살기가 누그러지자, 강에 대한 미움도 희석되었다. 강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의 잘못도 없었다. 형제가 부모의 애정을 가지고 다투는 건, 어느 나라나 가정마다 있는 일이었으므로.

“형님도, 주 형님처럼 제가 미우시겠지요? 저는 맨날 황궁에서 편하게 지내고…. 전쟁도 도맡아 하지 않고…. 전 형님들께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너도 좀 더 크면 친왕으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강은 다정다감한 형의 얼굴을 보며 속에 있던 마음을 얼떨결에 털어놓았다.

“아바마마께 부탁을 드려볼까 합니다.”

“부탁?”

진영왕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유롭고 당당한 웃음소리는 그윽했다. 듣자마자 가슴에 징이 울린 듯, 찡하고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강은 진영왕과 달리 정면에서 다가오는 황제의 붉은 용포를 보고 굳었다. 진영왕은 빠른 속도로 딱딱해져 가는 강을 보고, 덩달아 굳어져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등 뒤에 친군과 얼굴이 붉어진 경혜왕을 달고 온 황제는 홀로 느긋하게 다가와 진영왕의 어깨에 손을 턱하고 올렸다. 황제의 면류관이 차르륵 소리 내며 앞으로 쏟아졌다. 황제가 잠시 멈췄던 웃음을 이어서 터트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아비가 알아도 될까.”

황제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물음에 진영왕과 강, 황제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온 경혜왕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아바마마, 그저 형제들끼리의 작은 다툼이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황제가 검지를 입술에 천천히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진영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제는 자신이 잡아끌고 온 경혜왕을 거칠게 앞으로 내밀었다. 거의 내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몸이 비틀거린 경혜왕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강이었다. 강은 서둘러 앞으로 뛰쳐나와 형의 몸을 받아주며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손을 내리고,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슨 일이기에 즐거워야 할 연회에서 형제끼리 싸우고, 둘은 밖으로 나와서 부탁이란 단어를 내밀면서까지 진지하게 얘기한 거지?”

진영왕은 입술을 깨물고 눈치를 보았고, 경혜왕은 강의 손에서 벗어나 똑바로 서서 땅을 노려보았다. 강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황제의 얼굴을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황제의 금안에 서린 요기가 한층 짙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뱀의 머리처럼 올라왔다.

황제의 웃음은 여유롭고, 형제들의 긴장은 안쓰럽다.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강은 저울질을 했다. 항해사의 항해가 틀어진 순간, 배는 전복한다. 그렇다면 배에 탄 모든 이가 죽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죽느냐, 한 사람이라도 살리느냐…. 그곳에서 저울을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강은 황제에게 다가갔다.

강의 손이 황제의 어깨에 닿았다. 황제는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아들의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그의 금안에 아들이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한 일입니다. 형님들께 잘못이 없어요.”

강이 발돋움해서 황제의 뺨에 입술을 스치듯 갖다 대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했다. 황제의 눈이 돌을 맞은 수면처럼 흔들렸다. 그의 숨은 달린 것도 아닌데 거칠었고, 손끝은 둔탁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스스로 안겨오는 강을 떨리는 손으로 마주 안았다. 덜 여문 과육 같은 몸이 황제의 몸에 다 가려졌다.

“네가 잘못했을 리 없다.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아인데,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느냐? 잘못은 경혜가 했겠지.”

황제의 분노가 경혜왕을 향해 가자 깜짝 놀란 강이 황제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아닙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감히 형님께 대들었습니다. 형님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아바마마.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시옵소서.”

경혜왕이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은 황제의 노기를 어떻게든 꺾어야 했다. 경혜왕의 말처럼, 베갯머리 송사 같은 행동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계책이 없었다.

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황제의 뺨에 입술을 댔다. 그 광경은 귓속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댄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빨랐고, 모호하게 입술을 댄 강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강의 얼굴에 넋을 놓고, 강이 입술을 스스로 댄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황제만 다른 세상에 빠진 듯, 주변은 혼비백산이었다. 두 친왕은 황제의 노기에 질식된 듯 아무런 변명도 뻥긋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주도권을 잡고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강이 있었으니, 나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바마마, 형님을 용서해주세요.”

“…네가 말한 부탁은 뭐였느냐.”

황제가 강의 어깨에 간신히 두 손을 올리고,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는 이제 경혜왕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호박처럼 맑고 영롱한 금안은 강을 보고 있었다. 강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황제가 허리를 숙였다. 강은 다가오는 황제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황제는 선홍색 입술이 꽃잎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초점이 형편없이 뭉개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부탁이요?”

“그래. 아바마마에게 부탁을 드려본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그게 궁금하다.”

“그걸 말씀해드리면 형님을 용서해주실 건가요?”

황제가 경혜왕을 힐끔 보았다. 그는 빠르게 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주마.”

경혜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빈뿐만 아니라 비빈의 자식들의 목숨 줄도 쥐고 있는 황제였으니, 그가 자결하라고 명령하면 자결을 해야 했다. 강은 자신의 부탁을 언급하는 대가로 형제의 목숨을 살려냈다. 강도 안심을 하고 아까 전보다 편해진 얼굴로 황제의 손목을 잡았다. 누구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강에겐 조반 수저를 드는 일보다 쉬웠다.

강은 황제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매달리며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자도 아바마마를 위해 공을 쌓고 싶습니다. 아바마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왜?”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그는 애틋해서, 그래서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 듯한 손길로 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전쟁터로 보낼 수는 없다.”

“소자도 아바마마의 신하입니다. 전쟁터에 가고, 정무를 보고, 그리고 혼례를 치러 자손을 낳아 아바마마를 위한 나라를….”

“넌 안 그래도 된다.”

“아바마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소자만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 소자는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아바마마의 작은 아기가 아닙니다. 소자도 아바마마의 충신으로 이 육신과 영, 마음까지 다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황제는 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는 고개를 바짝 갖다 대고,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웃음을 덧그렸다.

“경혜나 진영은 전쟁터에 가도 되지만, 넌 안 된단다.”

“아바마마!”

강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황제는 강을 놓아주었다. 가려는 황제의 용포 자락이 강의 손에 잡혔다.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는지, 강은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황제에게 부탁했다.

“소자는 한녕전에서 아바마마를 위해 공부했습니다. 아바마마를 위해 활을 쐈습니다. 오로지 아바마마를 위해서요! 하지만 지금 소자는 그저 허울뿐인 신하입니다. 소자는, 아바마마의 아들이기 전에 신하이자 장수이지 않습니까?”

“…조금 더 크면.”

황제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강의 머리 위에서 한참 올려댔다. 그의 금안이 장난스럽게 미래의 강, 성인이 된 강의 크기를 측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커도 그 신체는 될 것 같지 않아 강은 황망한 얼굴로 황제의 손을 보았다.

“아바마마…. 그건… 아바마마와 같은….”

“아바마마가 말했지 않았느냐. 넌 너무 작다고. 작고, 어려서 사람을 못 죽일 것이라고.”

황제는 웃음을 단숨에 지우고, 단호한 얼굴로 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쐐기를 박았다.

“동물도 불쌍해서 제대로 못 죽이는 강이 네가, 전쟁터에 간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가 강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는 두 아들을 보고 쯧, 혀를 찼다. 강을 볼 때와 달리 그의 금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황제는 강도 데려가지 않고 정면만 죽어라 노려보며 절도있게 걸어가다가, 총관 태감을 불렀다. 다가온 총관 태감이 허리를 숙였다. 황제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서, 아래에 있는 태감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대신관은 어디에 있지?”

“신전에 머물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금안이 원림에서 먼 신전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원림이 너무 울창한 탓이었다. 손을 턱에 댄 황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이내 태감을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신관을 데려와.”

*

침상에 드러누운 등이 현저히 시무룩했다. 강이 목침을 끌어안고 엎드려 있자, 그 위를 설이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설은 제 주인이 기분이 상해 우울한 것도 모르고 태평한 얼굴로 똬리를 틀고 누웠다. 어린 강아지지만, 성견처럼 덩치가 커진 설이 무거울 텐데도 강은 설이 불편할까 봐 그 자세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전하.”

담영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표준 발음에 어우러지는 강직한 목소리가 친군다웠다. 목침을 앞으로 쭉 내밀고, 턱을 올린 강이 풀 죽은 눈으로 문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위에 엎드려 있던 설이 눈치 빠르게 후다닥 내려와 침대 밑에 바른 자세로 앉아 강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설의 둥글고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강이 입고 있던 예복을 슬슬 벗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

강이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담영의 무뚝뚝한 시선이 쏟아지는 햇빛처럼 여과 없이 강의 전신을 훑었다. 흑요석 같은 담영의 눈이 딱 고정된 곳은 훤히 드러난 목덜미와 가슴팍이었다.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강은 어깨가 넓고, 자잘한 근육이 딱 잡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군침을 흘릴 만한 아름다운 상앗빛 피부의 탄탄한 질감에서 눈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왕부임에도, 담영은 누가 강을 볼까 두려워 옷깃을 여며주었다. 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담영의 조급한 손끝과 눈을 보았다.

“왜 그래?”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강이 묻자, 담영이 대답했다.

“누가 전하를 보고 흠모할까 봐요.”

“누가 날 보고 흠모하는데? 맨날 얼굴도 가리고 다니잖아.”

“그래도 타고난 태는 가리실 수 없죠.”

담영이 얇은 허리를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끈을 풀고, 다시 강하게 매듭을 지어주었다. 강은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기분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한 급류에 떠밀리고 있었다. 강의 의지는 이 분위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폐하께선 전하를 총애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이가 전하를 흠모하게 된다면, 아마 그의 목을 잘라 전하께 주실 것입니다.”

강은 극악무도한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황제는 목을 자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지를 절단하거나 인간 돼지로 만들어 사육장에 넣으리라. 황제가 즐겨하는 고문 방식이었다. 팔다리를 관절 부분에서 자른 뒤, 눈을 뽑고 성대를 자르고, 귀까지 잘라낸다. 그다음에 이마에 인두로 낙인을 찍는다.

“난 아바마마의 총애를 원하지 않았어. 내가 원한 건 친왕다운 역할이었다. 아바마마의 애첩이나….”

강의 입술에서 묵직한 숨을 흘러나왔다. 담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강이 주먹을 쥐고 달이 스민 방 안을 누비며 말했다.

“인형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럼 전하의 의지를 폐하께 보여드리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담영은 천천히 강에게 다가왔다. 담영과 함께한 시간을 잊지 않은 설이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미성숙한 설의 모습을 힐끔 본 담영이 드물게 웃으며 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이 정성껏 키워서 그런지, 길에서 떠돌던 때보다 살이 오르고 털도 한껏 부드러워졌다.

“전하께서도 설을 돌보실 때 너무 작고 연약해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겁을 내지 않으십니까. 폐하도 이 나라의 천제이시기 전에 아비로서, 전하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대해 겁을 내시는 겁니다. 혹여나 다칠까 봐 말입니다.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칼로 자르듯 잠시 말을 멈췄던 담영이 아버지로서 은은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저도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품에서 키운 자식이 커갈 때마다 흐뭇하기도 하지만, 겁이 늘 따릅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아이가 아프거나, 하늘로 떠나갈까 봐요. 폐하께서도 그러시겠지요. 전하는 특별한 자식이니까요.”

“정말 날 자식으로 소중히 여기시는 거겠지.”

강이 본심을 드러냈다. 투명한 검은 눈에 탁한 불안과 겁이 흐물흐물 춤추고 있었다. 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자, 강이 가지 말라는 듯 손을 붙잡았다. 담영의 어깨에 유독 예쁘고, 가지런한 두 손을 올린 강이 메마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형님들이 죽을까 봐 나도 모르게 아바마마 뺨에 입술을 대었다. 어릴 때처럼 말이다. 다행히 아바마마가 좋아하셔서 형님들을 살렸지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정말 애첩 같은 행동을 스스로 하셔서요?”

담영이 담담한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몸은 의지와 다르게 궤도를 벗어나 황제에게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연국에서 혼례를 치르는 평균 연령이 12세고, 후에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나이였다. 자신의 부모와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하는 등의 진득한 애정 표현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강은 지극히 당연한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황제도 그걸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강이 자신에게서 떨어질 때마다 분개했으며 혹여나 강이 떠날까 봐 불안해했다.

“…이런 짓은 맞지 않는 거야. 아바마마에게 입을 맞춘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의식이 가장 무서웠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제어할 수 없는 것도 두려웠다. 강은 환영처럼 피어오른 황제의 흔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는 이곳에 없는데, 황제의 체취가 맡아졌다. 그의 체취는 숲 같았다.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눅눅한…. 맡을수록 집요하게 맡게 되는 향이었다.

황제가 등을 어떻게 만지는지 생생하다. 그는 강의 목과 허리에 팔을 감싸고, 손끝을 세워 살결을 음미하듯 만졌다. 그의 손이 솜털 하나하나를 쓸고 만질 때마다 등에 소름이 곤두섰다. 소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각이 전신에 퍼져 오로지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려야 했다. 그의 행동의 마지막은 언제나 강의 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코와 입술을 목과 쇄골 쪽에 파묻고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숨이 나부끼면, 가슴이 널을 뛰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바마마가 너무 좋아해서 멈출 수 없었다. 고작 강이 웃거나, 손을 내밀어 안아 달라 청하면 어쩔 줄 몰라서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면 세계가 달라졌다. 그가 곧 세계였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차라리 황제가 구분이라도 지어주면 좋으련만, 그는 아무런 제지도 더한 요구도 없었다.

‘평생 이렇게 아가로 있어주면 좋을 텐데.’

나만 보면 좋을 텐데.

그가 맥 빠진 목소리로 칭얼거리던 게 떠올랐다.

“전하. 폐하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담영의 직설적인 물음에 강이 머뭇거렸다. 담영은 강의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는지, 띠돈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친군답게 걸음은 매끄럽고 정갈했다. 그는 소리 내지 않고 강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담영은 뿌연 안개 같은 달빛 끝머리에 서 있는 강을 보았다.

황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학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수려하다면 강은 눈에서도 꼿꼿한 대나무였다. 올곧고 우직하다. 선을 아는, 악을 모르는 눈이다. 황제가 만들어준 세계에 갇혀 밖을 전혀 알지 못하는 투명한 검은 눈을 보며 담영은 아, 하고 탄식했다.

순간적으로 한 가지 사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의 비빈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 중의 기본. 바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도, 육체도… 깨끗한 샘물 같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가문에 갇혀 황제의 비빈으로서 길러졌다.

그러고 보니 강이 성교육을 받았던가? 그걸 묻고 싶었으나 담영은 고의적으로 말을 아꼈다.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이 뻗쳐간 담영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말이 가능하다고 해도 자신이 감히 상상해서는 안 될 영역이었다. 담영은 달이 희끄무레하게 번진 곳에서 발을 한 걸음 떼어내었다. 그곳엔 오로지 순수한 면사에 싸인 듯한 강만이 서 있었다. 강은 말간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담영을 줄곧 응시했다.

“폐하의 총애를 어찌하여 부담스러워하시는 겁니까.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다른 형제들의 시선이나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들이 전하가 모시는 군주는 아니지 않습니까?”

“안다. 하지만 폐하께서 날 신하로 여기지 않으시니 그것이 문제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의지를 보여주십시오. 폐하께선 아직 어린 시절의 전하를 그리워하시고, 거기에 맞춰 전하를 보시는 겁니다. 전하께서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늠름한지…. 절일 사냥대회에서 보여주십시오.”

후련하게 말한 담영이 씩 웃으며 강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하는 스승님께서도 인정한 신궁이 아니십니까?”

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담영은 황제의 금안만큼은 아니지만 반짝거리는 강의 눈을 보고 쓰게 웃었다.

*

은우문이 있는 곳에 가장 높게 매달린 망국 왕의 얼굴이 바람에 쓸리고, 비를 맞아 싸구려 가죽처럼 망가졌다. 눈은 진작 새 떼가 달려들어 파먹어버렸다. 한쪽 귀는 짐승이 먹었는지, 병사가 손으로 잡아 뜯었는지 결이 오돌토돌 일어난 채로 찢겨 있었다. 옥수수수염처럼 아래로 축 늘어진 회색 머리는 생기를 잃어 푸석해졌다. 그래도 왕이 외로울 걸 염려했는지, 황제는 왕 머리 주변으로 황족 해당하는 자들의 머리와 신체 일부를 잘라 걸어놓았다. 연국의 풍습 중 하나였으므로, 백성들은 머리나 신체 조각을 보고도 무서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잔인함을 위대함으로 받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폭력은 권력이었고, 권력 아래 짓밟힌 자들은 패배자에 불과했으니 비웃음을 사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다.

강은 그런 광경을 보며 불쾌해했다. 혼이 떠나간 시체에게 왜 그리도 잔인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눈빛이었다. 황제는 강이 무서워할까 봐, 옆에서 지켜보다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면 손으로 눈을 가려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고, 강은 못내 그것을 기다렸는지 몸에서 힘을 빼고 가만히 있었다. 달아오르던 심장이 황제의 손에서 다독거려졌다.

그러나 오늘의 강은 뭔가 달랐다. 시체를 보고도 의연했다. 차양막 아래에서 사냥감으로 끌려 나온 망국의 사람들을 보고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차하면 안아줄 생각이었는데, 강이 하루 만에 변해 은연중에 섭섭해졌다. 황제는 평소 입던 의복에 비해 소매가 짧은 행복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릴 때, 함께 사냥을 오면 사냥감을 보고 무섭다며 엉엉 울던 아이의 모습이 이리도 선한데 저렇게 커버리다니.

황제의 시선이 강에게 꽂혔다. 예전이라면 황제에게 꽃처럼 방긋방긋 웃었을 강은 묵묵히 앞을 보거나, 단지 황제에게 단출한 인사를 할 뿐이었다. 이상한 인사였다. 황제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생겼다. 입매가 뒤틀리며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라면 사냥에 좋아했을 황제가 뚱한 얼굴로 심기가 불편한 걸 드러내자 주변 비빈들도 눈치를 보았다. 경혜왕의 어머니이자, 황제가 그나마 예뻐하는 귀비가 황제의 어깨를 주물거리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폐하, 오늘 날이 무척 좋습니다. 햇볕도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도 선선한 것이 폐하의 탄신일에 하늘도 축복을 내려주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황제는 귀비의 손을 매몰차게 내치며 몸을 일으켰다. 귀비는 살짝 겁을 먹고 황제의 뒤에 섰다.

“폐하, 혹시 신첩이 잘못한 게 있사옵니까? 오늘따라 신첩에게….”

“귀찮으니 매달리지 말거라.”

황제가 드디어 귀비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불투명한 멱리 안에 가려진 고운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종종 황제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그건 둘이 있을 때였다. 황제도 귀비의 체면을 생각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억지로라도 웃는 낯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황제가 무슨 영문인지 짜증을 노골적으로 냈다. 요새 들어 황제의 침소에 자주 드나드는 첩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지만, 그녀도 섬광 같은 눈빛에 왈칵 겁을 먹었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모, 못하겠사옵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라며 황제의 뒤쪽, 약 스무 명이 넘는 비빈들이 보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여 소의도 있었다. 여 소의는 난감한 얼굴로 숙비를 보았다.

“이보게, 동생.”

“예, 형님.”

같은 지아비를 모시는 사이로서, 제법 돈독하게 정을 쌓은 두 사람이 숨죽인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숙비는 미안한 감정을 조심스레 드러내었다. 그녀는 손을 아래로 내려, 가락지를 낀 여 소의의 손을 잡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영현왕께 부탁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나? 폐하께서 저리 기분이 안 좋으시니. 가서 한 번 안겨드리면 폐하의 화가 풀릴 것일세.”

‘제 아들, 영현왕은 폐하의 비빈이 아닙니다.’

여 소의가 불쾌감을 간신히 삭이며 그 말까지 안으로 꾹꾹 욱여넣을 때, 벼락같은 비명 소리가 터졌다. 여 소의의 창호지 같은 창백한 얼굴이 금세 돌아가 소리의 근원지에 도달했다. 그곳엔 황제의 사랑을 받는 빈이 쓰러져 있었다. 첩여에 불과하지만, 자식을 낳은 빈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황제를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다가간 것 같으나 결과는 실패 그 자체였다. 황제는 자신에게 안겨오는 빈을 세게 밀쳐냈고 빈은 땅바닥에 매몰차게 밀쳐졌다.

“폐하!”

여인의 멱리가 바닥에 나뒹굴고, 화장을 곱게 한 아름다운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해 황제를 보았다. 황제에게 심통을 부릴 생각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던 여인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황제의 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얇지만, 분명히 피였다. 여인은 서서히 얼굴을 내려 자신의 손끝을 내렸다. 조금 긴 손톱에 황제의 피가 묻어있었다.

황제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묻은 피를 닦아냈다. 황제도 여인처럼 상처를 확인하고 나서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금세 얼굴이 변했지만, 금안은 숲속 깊은 동굴처럼 음습하고 어두컴컴했다. 황제의 노기 서린 눈빛에 여인은 달달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감히 천자에게 피를 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 넓은 사냥터에서 새 날갯짓 소리만 펄럭거리며 들렸다. 황제의 분노가 바람을 맞아 더욱 커졌다. 황제의 용안에 피를 낸 사람은 지위를 막론하고 사형이었다. 그녀는 꼼짝없이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녀는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용서받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황제의 손이 검 손잡이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겁을 먹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역병에 걸린 사람처럼 얼굴이 파랗다. 입술까지 퍼렇게 질린 그녀를 보던 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죄가 너무나 마땅하니 나설 가치도 없었다.

“용서는 응당 목숨으로 빌어야 하는 법인 것을, 건방지게 천자의 용안만 보고 있느냐? 여봐라! 이년의 자식을 데려와라!”

강은 반사적으로 놀라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알지만 도를 넘어섰다.

“오라버니!”

자신의 귀에 표창처럼 날아드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강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자식인 화영이 강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오라버니, 살려주십시오!”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강이 안쓰러운 감정을 내비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황녀와 황자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죄를 저지른 빈이 그제야 잘못을 빌었으나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 가라고 나긋하게 말했다. 화영은 눈물을 터트리며 강을 더욱 세게 잡았다. 강은 당겨지는 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끌려갔다.

“오라버니, 제발…. 아바마마는 오라버니를 예뻐하지 않습니까? 오라버니가 하,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강은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았다. 질질 끌려가는 빈과 그 모습을 보고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비빈들, 그저 이 모든 상황을 태만하게 지켜보는 황자들. 강은 비빈들 사이에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여 소의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애첩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니. 울적해졌다. 강은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이번만이다. 알겠느냐?”

“오라버니….”

강은 눈물을 흘리는 화영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병사들이 멈칫했다. 강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여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사슬처럼 느껴졌다. 강의 사지를 묶고 놔주지 않았다. 황제는 대도 손잡이를 느슨하게 놓았다. 겨우 강의 시선이 닿았을 뿐이었다.

강은 죽음보다 무겁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사냥터를 천천히 걸어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멀었던가? 황제와 자신의 사이가 마치 다리가 없는 계곡처럼 느껴졌다. 강이 다가가는 모습을 비빈들과 문무백관들이 빤히 바라보았다. 관을 쓰지 않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어서, 검은 머리가 말꼬리처럼 찰랑거렸다. 어머니를 닮아 흑단같이 검고 부드러운 머리였다. 머리를 고정한 끈은 청실과 홍실, 금실을 엮어 만든 것으로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었다. 요란하고 아름다운 실들이 강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폐하.”

강이 무심한 어조에 다정함을 담아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보이지도 않는지, 팔을 벌렸다. 강은 그가 보이는 의도를 알아채고 발을 멈췄다. 황제는 강이 오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챘는지 노기를 슬슬 드러냈다. 피부 가죽을 뚫고 나오는 화에 강이 다가갔다.

“아바마마, 오늘은 아바마마의 탄신일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리도 좋은 날에 어린 자식을 죽여 노기를 다스리시려 합니까? 죄는 죄인이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식도 죄인인 것을 잊었느냐?”

“아바마마, 그 죄인의 자식이 아바마마의 사랑하는 자식이지 않습니까.”

“아니다.”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강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자식들을 무감한 시선으로 훑다가, 강을 또렷하게 보며 웃었다. 저 수많은 자식은 잿빛처럼 느껴졌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었다. 자신에게 방해만 안 되면 되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강을 보았을 땐 다르게 보였다. 자신의 앞에 앳된 얼굴로 서 있는 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알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보지 않으면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잠들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시선을 피한다고 느꼈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찌릿하게 지배했다.

아들이 다시 황제를 보자 가슴이 살아 움직였다. 뭍에 나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황제의 뺨에 강의 손이 닿았다. 강은 피가 굳은 얼굴을 닦아주는 척하며 황제에게 안겨들었다. 강의 손이 황제의 고운 뺨에, 다른 손은 황제의 어깨에 닿았다. 강은 그렇게 접촉하기 위해 발돋움을 해야 했다.

“천자가 사랑하는 자식은 너뿐이다.”

황제가 명확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사방에 전달하듯 말했다. 강의 눈이 흐릿해졌다. 눈을 반쯤 내리뜨자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가슴이 또 뛰었다. 사냥을 한 것도 아닌데 몸에 열이 올랐다. 뒤에서 누가 머리를 팍, 때린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고 뭉개졌다. 황제의 금안은 떨림 없이 강을 보았다. 강의 눈, 손, 숨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은 너뿐이다.”

호칭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황제는 도망가려는 강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강은 두 팔을 벌려 황제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의 커다란 몸이 겨우 15살인 황자에게 사로잡혔다.

황제는 아들의 품에 안겨,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향이 나….”

“아바마마한테서도 나는걸요.”

강이 쑥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황제를 밀어내려 했으나, 황제가 엄청난 힘으로 강을 안았다. 강이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안겼다. 황제를 달래기 위해 손으로 황제의 등을 매만졌다. 그럴수록 황제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숨은 뜨거워졌다. 강은 목덜미에 내려앉는 열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뜨겁다. 머리까지 혼미해질 것 같은 뜨거움에 강이 그에게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강아.”

황제가 다정하게 속삭이며 강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강이 놀라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가 연신 관자놀이며 뺨에 쪽쪽거리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아바마마를 달래주러 왔으면서, 도망갈 셈이냐?”

“…부끄럽습니다.”

강이 한숨을 내쉬며 붉어진 얼굴로 황제에게 똑바로 말했다.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렸다. 강의 작은 몸은 황제에게 다 가려졌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황제의 듬직하고 커다란 등과 그 등에 올라간 백옥 같은 손뿐이었다. 손이 꼼지락거리며 황제의 어깨에서 유영하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

강이 포기한 듯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얌전히 황제의 어깨에 올렸다. 순순한 반응이었다. 황제는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빈의 딸도, 빈도 무사했으나 강은 석연치 않아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

원래 사냥대회에서 사용되는 사냥감들은 되도록 순한 생명들이었다. 내관들은 이날만을 위해 길러진 사슴, 여우, 등의 사냥감을 데리고 와서 사냥터 곳곳에 풀었다. 애초에 넓은 곳에서 키워진 동물들은 거침없이 사냥터를 누볐고, 간혹 그들이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내관들은 먹이를 풀어 의도적으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동물들이 길러진 대로 먹이를 먹기 위해 머리를 내밀면 황족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궤적을 그리며 사냥감의 숨통을 끊었다.

강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냥에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째서 말도 못 하는 짐승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려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제로 동물 여러 마리를 키우는 입장이라, 강은 짐승들이 괴이한 소리를 토해내며 죽을 때마다 설 같은 아이들이 연상되어 괴로웠다. 특히 생이 파리하게 꺼져가는 그들의 눈을 볼 때면 가슴에서 진물이 흐르고 눈에 열이 올랐다. 황제도 강의 쓸모없는 성정을 알고 나서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강과 함께 사냥터를 누비다가, 사냥감을 보고 질겁하는 강의 눈을 가려주고 귀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이제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 그의 보호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을, 어엿한 성인이라는 진실을 황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강은 등자를 한 발로 누르며 허리를 튕겨 올려 안장에 앉았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이 스민 행동을 지켜보던 황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폐하, 이제 곧 사냥이 시작할 텐데 어딜 가시나이까?”

황제의 절일을 축하하기 위해 현에서 올라온 태후가 나직이 물었다. 나이가 지천명이었지만, 아직도 불혹에 머무른 듯 탱탱하고 고운 얼굴을 가진 그녀를 본 황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린 자식과 놀아주던 지홍왕도 어머니와 형님 간에 퍼지는 묘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느릿하게 다가왔다. 황제가 말에서 내려 따로 마련된 막사로 들어갔다. 태후는 막사 입구에 서서 늠름한 아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폐하.”

태후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한동안 앞을 응시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초를 켜지 않아 어둠이 녹진하게 내려앉은 막사 안에서도 황제의 은발은 현란하게 빛났다. 탁한 빛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선연한 은발이었다. 아들의 은발을 기점으로 쭉 뻗은 등과 탄탄한 허벅지, 기다란 종아리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본 태후가 고혹적인 입술을 열었다.

“오늘도 영현왕 때문입니까?”

강을 가리키는 봉호에 황제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태후를 보았다. 남장을 한 태후는 여장군처럼 당당한 기개가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생긴 머리가 그녀의 나이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주름이 별로 없고, 깨끗하고 청순한 얼굴을 보면 순간적으로 그녀가 꽤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는 걸 잊게 되었다. 그녀는 황제의 어머니답게 차분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천천히 응시하던 황제는 강이 준 활을 내려다보았다. 활에 일가견이 있는 강답게 허투루 선물을 주지 않았다. 연국에서도 보기 드문 활이었다. 창과 대도가 발달된 연국에서 활은 비교적 잘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창이었고, 그다음이 대도였다. 이제는 멸망한 주국이 활로 유명했는데, 그들은 대산을 기점으로 숨어서 활을 쏘아대 사람들을 죽이곤 했다.

그러고 보니 주국의 마지막 왕이 신의 활잡이라 불렸던가…. 은우문 위에 걸린 망국 왕의 얼굴을 떠올리던 황제는 제법 묵직한 장궁을 어린아이 장난감 다루듯 휘둘렀다. 위협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태후의 귓전을 따갑게 때렸다.

“항상 천자의 기분은 영현왕이 좌지우지했지요.”

태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날 서린 미소를 지었다가, 황제가 돌아보자 싹 지웠다. 태후가 영현왕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아는 지홍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태후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 황자가 폐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입니까?”

태후가 너그러운 척 물었다. 교본에 나온 자세를 취하며 활시위를 당겨보던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설마요. 영현왕은 성격이 여리고 비단처럼 부드러워 천자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자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을 때 와서 달래주러 오지요.”

“달래주다니요…?”

태후는 괴상망측한 얘기를 들은 얼굴로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황제는 웃을 뿐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결국 나선 것은 분위기를 읽어내고, 해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홍왕이었다.

“영현왕이 종종 폐하를 안아줍니다. 그러면 폐하께서 화를 가라앉히시고….”

태후가 깜짝 놀라 말했다.

“폐하가요? 설마요. 폐하는 제가 안아주는 건 늘 싫어하셨습니다. 유모가 안아주는 것도 싫어하셔서 분개하셨던 폐하십니다.”

“방금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지홍왕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태후를 보고 조곤조곤 말했다.

“영현왕이 폐하에게 안겨서 교태를 부리시는 것을요. 어머니도 하지 못하는 행동을 영현왕은 할 수 있고, 폐하는 그것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폐위를 시키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실 정도로 말입니다…. 황제의 속심을 이미 알고 있었던 지홍왕은 그 말만은 삼키고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는 심드렁한 눈빛을 보내고서 내관들이 준비해준 호화스러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에 턱을 괸 채 들어온 지홍왕을 올려다보았다. 태후를 닮은 얼굴로 지홍왕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우의 얼굴에 연기처럼 퍼져가는 짓궂은 웃음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그렇게 영현왕이 좋으십니까?”

“그게 이상한가?”

“사랑하시면 계속 옆에 두시지요.”

지홍왕의 능청맞은 얘기에 태후가 “자중하세요.”라고 타박했다. 그러나 지홍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형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여, 태후가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사랑하시면 옆에 두셔야지요. 영현왕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 하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폐위시키라고?”

“뭐… 그것도 방법이지요.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천한 핏줄의 영현왕이 페하의 명을 감히 거부하겠습니까? 오히려 울면서 잘못했다고 폐하께 빌겠지요. 자신의 잘못도 모르고서 말입니다.”

황제의 금안이 짙어졌다. 어둠이 스미며 순식간에 음험한 습기가 감돌았다. 황제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영현왕이 흐트러진 자태로 바닥에 엎드려 우는 모습을. 검고 큰 눈망울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리고, 그 작고 예쁜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잡으며 흐느껴 운다. 상앗빛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얇은 침의 하나로 겨우 나신을 가리고 있었으며 다리가 쭉 빠져나와 있다. 그 몸은 어느 순간 탄탄해지고 부드러웠으며… 매끄럽고 향긋했다. 깨물고 입술을 마주칠 때마다 단내가 혀끝에 맴돌아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울음기가 섞인 애타는 목소리가 귀를 애무한다.

‘아바마마, 소자는 아픈 게 싫습니다. 소자를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가느다란 두 팔을 내밀자 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려가 뽀얀 속살이 보인다. 환상 속에서 강은 어엿한 성인이었는데, 이상하게…

상상뿐인데 머리에 열이 가득 차오르고, 입이 바싹바싹 타오르고 샅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치워주자 아랫입술을 깨문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예쁘게 웃던 눈이 아픔에 젖어 울고 있었다. 속눈썹이 이슬처럼 엉킨 눈물을 닦아내 주자 영현왕이 눈을 내리감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황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지홍왕이 다가가려는데, 황제가 뒤돌아보지 않고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나가!”

“폐하?”

이번엔 지홍왕이 아니라 태후가 놀라서 들어왔다. 그녀는 어느새 “혼아, 괜찮으냐?”라고 연거푸 물으며 다가왔다. 황제는 양손으로 홍시처럼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외쳤다.

“나가시라고요!”

“혼아.”

“나가세요, 어머니. 안 나가시면 친군을 부르겠습니다.”

황제가 열이 오른 낯으로, 냉기를 뚝뚝 흘리며 협박했다. 태후는 지엄한 자리에 앉아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아들을 섭섭한 시선으로 보다가, 지홍왕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태후가 황제를 대할 때와 달리 날카롭게 잘 벼려진 눈으로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다.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닌 이야기에 폐하가 어찌 저리 나오시는 겁니까!”

태후가 빠른 속도로 얘기하며 지홍왕을 흘겨보았다. 황제의 막사를 지키는 내관, 호위들은 전 황후, 현 태후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으나 그녀를 어머니로 모시는 지홍왕은 유쾌하게 웃고 넘겼다. 그는 어머니를 향한 두툼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태후는 도통 화를 누그러뜨리는 기미가 없었다. 그녀가 걸어가는 지홍왕의 뒷모습을 지그시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황제와 지홍왕 둘 다 태상황과 황후의 사랑을 받고 자라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면 어머니인 태후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비밀을 공유하고, 멋대로 행동했다.

“정말 이 어미만 내버려 두시는군요.”

태후가 홀로 서서 쓰라린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지홍왕이 뒤돌아보았다. 그는 어머니를 향해 그윽한 눈웃음을 보여주었다. 찬란한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였다.

“정말 별거 아니었습니다.”

지홍왕은 성큼성큼 태후에게 걸어와, 그녀의 손을 대범하게 맞잡았다. 혼례를 치르고, 아이를 낳으면 되도록 접촉을 삼가는 황족들이었다.

하지만 지홍왕은 어머니에게 살가운 편이었다. 그는 적절하게 궁법을 넘나들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무엇보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무엇보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황제가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홍왕은 현재 부인에게 하듯 태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눈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차남의 애교에 훌러덩 넘어간 태후가 입을 열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습니까?”

“그럼요, 어머니.”

지홍왕은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태후만이 들을 수 있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선 영현왕을 무척 사랑하고 계십니다. 영현왕이 없으면 성난 황소와 같으시지요. 어머니는 이 나라의 지존인 폐하께서 성난 황소처럼 뿔로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오명을 받으시길 원하십니까? 저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영현왕을 이용해서라도, 폐하를 너그러운 성군으로 만들어 역사에 남길 것입니다. 폐하는 성군으로 남으셔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태후가 아들을 보며 어머니다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홍왕은 태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귀에 입술을 대고 느리게 말했다.

“그렇다면 옆에 두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폐위를 시키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걸 원하지 않으시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지요.”

“다른 방법이요?”

태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이자 지홍왕은 말없이 웃었다.

“폐하께선 이제 답을 아실 겁니다. 영현왕을 곁에 두는 법을요. 지금까지 모른 척하셨을 뿐이지요.”

황제가 귀까지 발갛게 물들인 모습은 꼭 첫사랑에 빠진 풋내기 소년과 다름없었다. 그 모습을 눈치 빠르게 본 지홍왕은 더 이상 황제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원하면 가지고, 원하지 않으면 버린다. 황제가 영현왕을 원하면 곁에 둬야 했다. 그는 황제였으니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친아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런 식으로 황제가 영현왕 때문에 이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가 이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군처럼 행동한다면 하늘은 그를 버리리라. 하늘이 그를 버릴 수 없게, 단단한 성벽과 같은 황제가 될 수 있게 영현왕을 이용해야 한다.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게끔 단서만 던졌을 뿐이다. 이제 황제가 스스로 답을 깨우치고, 영현왕을 끌어들이는 것만 남았다.

이쯤 되면 정말 자신은 타고난 충신이었다. 지홍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고, 답을 찾지 못해 멀뚱거리는 태후를 끌고 사냥터로 이동했다.

황제는 막사 바닥에 엎드려 구슬땀을 흘렸다.

‘아바마마….’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강의 젖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계속 들렸다. 그의 손이 절박하게 땅에 깔린 부드러운 천을 꽉 움켜잡았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마디가 새하얗게 질리고, 손등에 핏줄이 오래된 나무뿌리처럼 융기했다.

가장 힘든 건, 다리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남근이었다. 벌떡 일어서서 흥분을 표출하는 남근이 절정에 도달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황제는 아릿한 신음을 애써 삼키며 바닥에 이마를 댔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강이 침의를 입고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입을 뺨에 갖다 대는 게 생생하게 보였으나 이내 신기루처럼 파삭하고 사라졌다. 강의 자취를 좇아 눈을 돌렸으나 보이는 건 막사를 꾸미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강이었다. 강의 향이 맡고 싶었다. 그 향을 찾아 고개를 파묻고….

“…아아.”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몸에 서서히 일으켰다. 그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가슴이 매섭게 뛰고 있다. 그런데 왜 이리도 간지러울까. 마치 가슴을 새 깃털로 흔들어 간지러움을 태우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감각이 가슴을 중심으로 다 퍼져나가고 있었다. 손끝에 퍼지는 아릿한 마비.

모든 신경과 감각이 강을 향해 뛰고 있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강이 자신을 보지 않아 얼마나 화가 났던가.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찮은 빈의 자식까지 죽이려 했다. 만약 강이 오지 않았다면?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사랑하시면 옆에 두셔야지요.’

지홍왕의 목소리가 방금 전에 했던 이야기처럼 들렸다.

‘원하는 건 다 가지셔도 됩니다. 폐하는 그러셔도 되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폐하는 하늘이 선택한 아들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늘께서 용서해주실 겁니다.’

태후가 황제가 막 된 어린 혼의 귀에 대고 속삭인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소자는 아바마마가 제일 좋아요!’

자신의 품에 안겨 다리를 동동 구르며 환하게 웃던 강이 하던 이야기가 가장 선명하게 들렸다. 하늘에서 번쩍 내리친 번개처럼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황제는 자신의 귀를 멍청하게 만지고, 손끝을 보았다. 귀에 남은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사랑인 건가?”

황제는 아무도 없는 막사 안에서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강이, 그 모습보다 조금 커서 젖살이 빠진 강이….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릴 정도로 훌쩍 큰 강이 차례차례 보였다.

넌 그렇게 커서 날 떠날 테지. 어른이 되어서 내 곁을 훌훌 떠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이를 낳겠지?

“안 돼.”

네가 낳아야 하는 아이는 내 아이여야 해.

그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고, 뒤늦게 그것을 본능임을 깨우친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강이 다른 여자와 자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 여인이 강의 아이를 낳는다 생각하니 그 아이와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 자신의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걸 생각하자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태자로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황제는 삼보들과 대화를 나누며 경연을 하던 때처럼 깨우쳤다.

“하하…!”

황제가 막사에서 산뜻한 웃음을 흘리며, 사정하고 싶어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남근을 잡았다. 이 남근을 물고 엉엉 울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작은걸.”

황제는 고개를 저어 아들의 모습을 지웠다. 강은 너무 작고 어렸다. 더 커야 했다. 강의 허리는 너무 가느다랬다. 팔도, 다리도… 자신의 한 손으로 두 손목을 잡을 정도로 얇지 않았던가. 황제는 오늘 품에 안은 아들의 체구를 가늠하며 눈을 찡그리고 남근을 어설픈 손짓으로 매만졌다. 언제나 여인들이 품어준 성기를 오랜만에 자신의 손으로 달래려 하니, 영 서툴렀다.

감정을 자각한 황제는 진한 웃음을 입가에 덧그리며 신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들켜서는 안 되는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

황제가 무사히 막사에서 나오고 나서야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 뿔피리 소리가 잠들었던 숲을 깨웠다. 야트막한 수면에서 웅크리고 있거나 헤엄치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도망쳤다. 풀이 밟히는 소리, 흙이 요동치는 소리, 그 외에도 달아오른 숨소리를 들으니 강에 의해 잠식되었던 의식이 살아났다. 그가 죽여야 할 생명체들이 저곳에서 살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쥐고 있는 활을 선물해준 강을 찾아 눈을 돌렸다.

강은 형제들 틈에 섞여 있었다. 윤이 흐르는 검은 비단에 붉은 매화가 새겨져 있었다. 강과 잘 어울리는 매화였다. 소매 깃은 점점 색이 옅어져 물이 섞인 회색으로 보였다. 그 끝에도 매화 꽃잎이 하늘하늘 날아다니고 있었다. 행복이라 장식은 최소화하고, 활동성을 강조한 옷이라 강의 선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굴곡이 별로 없는 매끈한 몸이었다. 전체적으로 쭉쭉 뻗은 날렵한 자태였다. 황제의 시선이 집요하게 닿은 곳은 강의 잘록한 허리와 합판 같은 배, 근육이 잘 잡힌 허벅지였다. 숱하게 만졌던 허리였다. 허리에서 조금 시선을 움직이니 의젓하게 앉아있느라 힘을 준 배가 보였다.

저 배가 산처럼 봉긋하게 올라온다면…. 배와 더불어 모유가 차오른 가슴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렜다.

처음엔 아파서 울겠지. 동생이자 자식인 아이를 회임하면 어떻게 나오려나. 설레서 터질 듯한 마음과 씰룩거리는 입을 꾹 다물어 참은 황제가 아우와 노는 강을 보았다. 혼례가 얼마 남지 않은 소현왕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다정했다. 눈에는 세 살 어린 아우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소현왕도 자신을 귀애하는 형이 좋은지 황제 앞에서 늘 굳던 얼굴을 풀고 방긋방긋 웃는다.

저렇게 다정하고 착한 아이니 자기 아이를 낳아도 잘 대해줄 테지. 싫다고 거부해도 상관없었다.

아이는 비빈을 지켜주는 명목이었으니까.

“형님, 이제 답을 찾으셨습니까.”

아이를 비에게 맡기고 돌아온 지홍왕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황제는 아우를 귀찮다는 듯 흘겨보다가, 고삐를 부드럽게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언제부터 알았느냐?”

“소신도 안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감히 천자를 가지고 농담을 하다니.”

차디찬 말투와 달리 눈빛은 나름대로 상냥했다. 저렇게 대놓고 차별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지홍왕은 미소를 찬찬히 눈가에도 걸면서 황제를 향해 속살거렸다.

“농담이 아닙니다, 폐하. 소신은 정말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폐하가 답을 찾아내신 그때 알았으니까요.”

“이런 가짜 사냥은 이제 질리는구나.”

황제가 뜬금없이 사냥 운운하며 차분하게 아들들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장남 경혜왕을 시작으로 이름도 모르는 비빈의 자식에게 향했다. 경혜왕도 황제를 따라 친왕들, 황자들, 황녀들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소신이 생각한 게 맞습니까?”

“진짜 사냥을 해야 할 때다.”

황제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었다. 황제가 시위를 당겼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황제의 화살이 황자들을 가볍게 뛰어넘어 수풀을 향해 달리는 망국의 백성에게 꽂혔다. 오늘의 사냥감은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주국의 백성이 비참한 비명을 흘리며 고꾸라졌다. 살아남은, 곧 죽을 사람들이 연달아 비명을 지르며 숲으로 달렸다. 황자들이 그 몸짓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고, 강은 그곳에서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선명히 내비치고 있었다. 달리는 형제들 틈에서 가만히 있던 강은 “형님!” 하고 부르는 앙증맞은 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따라갔다. 강의 머리가 빛 무더기 아래에서 흔들린다. 말꼬리처럼, 숱이 많고 탐스러운 흑발이 황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자신이 선물해준 청실이 새의 깃처럼 흔들거리다가 저 숲의 어둠으로 먹혀들어 갔다. 정신을 놓고 강의 늘씬한 뒤태를 살펴보던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홍왕을 보았다. 지홍왕은 확답을 원하는 얼굴이었다. 황제는 아우의 얼굴을 손으로 쓸 듯 눈으로 훑어보면서 입술 끝을 유려하게 올렸다.

“늘 답은 간단하지.”

지홍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사는 방법은 이곳에 없었다.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죽어야 했다.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리고 신음도, 비명도… 제발 살려 달라는 애원도. 광활한 숲 한복판에서 강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미세하게 떨리던 손이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건조하게 말라 있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인한 땀이었다. 강은 부유하는 웃음소리와 전혀 섞이지 못하는 처참한 비명에 이를 악물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황제였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무섭다고 느껴졌다.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누군가에겐 폭력이고, 사형대와 같을 테니.

황제의 애정이 자신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그가 주는 안온한 세계가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직접 겪는 현실과 그동안 겪었던 비현실의 괴리에서 강은 침음했다. 의지를 보여주고자 나선 사냥이었지만, 막상 죽어가는 이들을 보자 손이 떨려 시위를 당길 수 없었다.

쏟아지는 화살을 맞은 사람은 고슴도치가 되었다. 허겁지겁 도망가던 여인은 뒤뚱거리다가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소현왕이 놓치지 않고 달려가 검으로 머리를 베어버렸다. 한 번에 베어지지 않으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머리를 잘라냈다. 소현왕은 그 머리를 내관에게 건넸고, 내관은 죽창에 머리를 꽂아 소현왕의 사냥감을 자랑했다. 소현왕은 내관에게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첫 번째 사냥감일세.”

“고작 그런 걸로 좋아하는 것이냐?”

진영왕이 하하, 하고 웃으며 타박하자 소현왕이 미성숙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고작이라니요, 형님?”

“하나 가지고 즐거워하기엔 이른 법이지.”

사냥터는 탁 트인 들판과 울창한 숲이었기에 거리감이 상당했다. 진영왕과 소현왕 사이의 거리는 시냇물 하나처럼 넓어서 둘은 대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그렇다 보니 저절로 둘의 태평하고 잔인한 대화는 강의 귀에 뚜렷하게 파고들었다. 강은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려 소현왕이 잡은 여인을 보았다. 목이 잘린 여인의 시체가 배를 훤히 드러낸 채 높이 솟은 나무뿌리에 걸려 있었다.

그저 망국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어야 하는 여인을 보는 강의 표정이 파리하게 질렸다. 말고삐를 잡은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메마른 고목처럼 힘없이 보이는 아우를 보는 진영왕의 표정이 엄해졌다.

“강아.”

다정한 말투와 손짓과 다르게 진영왕의 눈빛은 매서웠다.

“아바마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동참한 사냥인데, 이렇게 연약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너도 친왕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면 쓸데없는 동정심은 버리거라. 그들은 여기서 사람이 아니야. 동물이다. 만약 네가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아바마마는 널 더 이상 친왕으로, 아들로 보지 않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말을 멈춘 진영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강을 훑으며 입술 끝을 비릿하게 올렸다. 강의 눈동자는 굳건했다.

“넌 그저 아바마마가 예뻐하는 애완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귀여워하면 그만인 동물 말이다.”

강은 형을 시무룩한 눈으로 쳐다보며 유난히도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의 눈끝엔 사람을 향한 애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동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대로 도망가겠다고?”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경혜왕이 거들었다. 그는 행복임에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햇빛보다 눈부신 백색 행복을 입은 경혜왕의 모습을 보던 진영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현왕은 세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적의에 안절부절못했다. 땅에 자리 잡은 어둠을 등지고 선 경혜왕은 고압적인 태도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섭다면 도망가라. 너에겐 그게 어울리니까. 아바마마의 품에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애첩 말이다.”

“애첩은 아니지.”

진영왕이 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강이 손을 쳐냈다. 쓰라린 손을 응시하던 진영왕이 피식 웃었다. 그는 토라진 강이 귀엽다는 듯, 뺨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애첩이라면 지금 아바마마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데, 강은 이곳에 우리와 있으니 말이다.”

진영왕까지 합세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말에 강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말고삐를 쥔 손등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래도 형님들과 아우가 있으니 참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강은 그들을 차분히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절 모욕하는 말도 참 여러 가지군요.”

“모욕이라니.”

경혜왕이 자신을 바라보는 강을 직시했다. 눈가만 살짝 발그레해진 모습이 예쁘긴 했다. 잘생겼으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와 대조적인 하얗고 보드라운 하얀 피부, 도톰한 분홍색 입술. 누가 보아도 감탄할 얼굴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훑어보던 경혜왕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뒤따라온 내관과 무관도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갈 테면 지금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사냥은 갈수록 거칠어지니까.”

경혜왕이 “가자!” 하고 짧게 명령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강의 시선은 핏기를 잃은 봉긋한 배에 향했다. 불쌍한 것을 불쌍하다고 여긴 게 약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일인가.

그리고 반드시 인정받아야 하는 수단이 이런 방법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서 나타내야 할 증명이라면, 필요 없었다. 만약 명분이 있다면 거기에 따라 사람을 향해 시위를 당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쾌락을 위한 살인은 사라져야 했다. 한녕전에서 그리 배웠고, 강은 그 척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쾌락을 위한 살인이 정말 정당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강이 넌지시 묻자, 진영왕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론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지. 그렇다면 너에게 반대로 물으마.”

진영왕이 등을 돌려 강을 마주 보고서, 두 손을 어깨에 올렸다.

“넌 작금의 이 상황이 좋은 것이냐? 현명하게 행동해. 어째서 넌 태자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움직이는 걸 주저하는 것이냐?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정정당당하게 우리와 싸울 생각을 해야지, 어째서 그리 주저하고 무서워하며 폐하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하는 것이냐?”

“하지만… 전 형님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상황에 적응하지 마.”

진영왕이 딱 잘라 말하며 강의 파리한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두 팔을 벌려 강을 끌어안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황에 적응되고 길들어 살지 말란 말이다. 사람에겐 각자의 길이 있어. 그걸 정하는 건 오로지 너다.”

“알고 있습니다.”

강은 자신의 의지대로 형을 떼어놓았다. 그는 여전히 소심하게 상황을 살피는 소현왕을 보며 쓰게 웃고, 진영왕을 향해 듬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죄 없는 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인정받고 싶지 않군요. 저는 본래의 사냥대로 동물을 잡아야겠습니다.”

“강아.”

“형님이 무엇을 염려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저만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겠습니다. 살인 같은 방법은 차후에 생각하고 싶습니다.”

강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애마 바람에게 걸어갔다. 바람이 강을 보자 히힝, 거리며 머리를 내밀었다. 강은 바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눈을 내리깔았다. 흙과 피가 엉킨 가죽신이 보였다. 이것 또한 황제가 선물해준 귀한 물건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모순적이구나. 사람은 죽이지 못하겠다 하면서, 너와 같은 죄 없는 동물들을 죽여야 한다니….”

바람의 목을 감싸 안아준 강이 묵직한 숨을 흘리며 쓰디쓴 어조로 중얼거렸다.

“한심하고 모순적이지만 해야겠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날 부디 못됐다고 하지 말아주렴.”

바람이 걱정 말라는 듯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말에게서 나는 특유의 비린내 가득한 냄새와 강한 콧김에 강은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통에 담아온 화살이 거의 없어져 있었다. 사슴처럼 뛰지 못하는 사람을 잡느라 화살을 많이 소비한 탓이었다. 손으로 더듬어 개수를 확인하던 경혜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친분을 쌓은 무관 셋과 내관 셋,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듬성듬성하게 서 있는 호위들이 보였다.

“이봐.”

“예, 전하.”

경혜왕은 말 아래에서 굽실거리는 내관에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호위들을 모두 물려라. 물론 네놈들도 꺼지고.”

“예?”

“꺼지라고. 말 못 알아듣나?”

경혜왕이 우아하게 웃는 낯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진중한 말투로 욕처럼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경혜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본 것을 보고서야 그가 꺼지라고 한 걸 알아챈 내관이 호위들과 함께 물러났다. 습기 어린 숲엔 경혜왕과 그를 태자로 모시려는 무관들이 있었다. 무관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경혜왕은 말에서 내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향했다. 경혜왕은 볼록 솟은 돌에 걸터앉아 피가 묻은 손을 닦아냈다. 하지만 쉽게 닦이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찬 경혜왕은 발끝을 적시는 그림자에 입을 열었다.

“신관은 아직도 입을 열지 않지?”

“예, 전하.”

“하여간, 궁엔 쓸모없는 놈들만 넘쳐나지. 신관이나, 연송 같은 놈들. 그리고 베갯머리 송사나 하는 놈.”

의도적으로 숨죽인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초여름에 가까워지는 날씨지만, 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손끝부터 시작된 추위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던 경혜왕은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장군 조운이 입고 있던 행복용 장의를 벗어 경혜왕에게 덮어준 것이었다. 그녀는 어둠을 장막 삼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경혜왕은 그녀를 무심하게 보다가, 장의를 벗어 던졌다. 조운이 시무룩한 낯으로 바닥에 내던져진 장의를 집어 들었다.

“넌 지금 송의 사람인데 나에게 이리하면 안 돼. 내가 쫓아오지 말라 했을 텐데?”

“하지만 전하와 있고 싶은걸요.”

조운이 얼굴을 붉히고,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진영왕의 심복으로서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인 수가 무시무시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겨우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모습이 웃기면서 조금은 귀여웠다. 경혜왕은 돌에 앉아 발을 까닥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섬세한 부드러움을 가진 경혜왕이 눈을 휘고, 입술 끝을 올리며 웃는 자태에 조운이 황홀한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

경혜왕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조운이 쪼르르 달려왔다. 조운뿐만 아니라 두 명의 장군도 잇따라 다가왔다. 경혜왕은 그들을 병풍처럼 자신의 등 뒤에 세웠다. 바깥에서 보면 세 사람의 등만 나란히 보일 뿐, 그들 가운데에 앉아 피를 닦는 경혜왕은 보이지 않았다.

“제일 거슬리는 돌부리부터 치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인데, 이놈의 돌부리가 뽑힐 생각을 하지 않아.”

경혜왕은 돌을 가죽신으로 툭툭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그의 발길질에 그나마 버티던 돌이 툭 뽑혔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박혀있던 곳을 보자 제법 깊었다. 돌은 땅에 오랜 세월 몸을 파묻고 살았는지 보이는 부분에 비해 파묻힌 부분이 더 크고 듬직했다. 경혜왕은 일어서서 돌을 짐승보처럼 걷어찼다. 돌이 계곡 물에 풍덩,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난 천자가 되고 싶다.”

세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듯 지켜보던 경혜왕이 두 팔을 벌려 그들을 모아 안았다. 지금까지 함께 해온 신하들이었다. 조운은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쇠뇌를 다루는 경호진은 외할아버지가 키운 장군, 가장 오른쪽에 있는 자는 우복야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랜 경혜왕이 씩 웃었다.

“가장 거슬리는 놈부터 뽑아야겠지.”

경혜왕은 가운데에 듬직하게 서 있는 경호진을 보고 그만이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송부터 시작하자.”

세 사람 위로 새가 날았다. 그 새는 날아온 화살에 박혀 땅에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화살이 날아온 부근을 보았다. 그곳엔 점으로 확인되는 생명체만 있을 뿐,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경혜왕은 우뚝 서 있는 셋을 밀치고,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러 걸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새의 시체가 보였다. 화살 깃을 확인했다. 검은 바탕에 붉은 문양. 강의 화살이었다.

강은 본래부터 활을 잘 다루는 아이였다. 날아가는 새도 단숨에 잡고, 잘 보이지도 않는 사냥감도 달리는 말 위에서 거침없이 잡았다. 다만, 타고난 성정 때문에 그것을 즐겨하지 않을 뿐이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경혜왕의 목도 노리리라.

경혜왕은 입을 열어 나지막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다음은 강으로 할까.’

경혜왕은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멀리서 다가오는 강의 말을 보았다.

‘송만 보내기엔 송이 외로워할 테니까. 형제끼리 저승에서 뜨뜻하게 몸이나 지지면 딱 좋겠군.’

*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등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걸어갈 수 없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건 평범한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지, 지홍왕처럼 늑대의 피를 가진 자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지홍왕의 금안은 태양처럼 밝아 어둠과 한 몸이 된 장애물의 형체도 분간할 수 있었다. 지홍왕의 발이 두터운 어둠을 가차 없이 밟았다.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달조차 그를 밝힐 용기가 없었다.

“폐하께선?”

지홍왕은 굳게 닫힌 화원 문을 지키는 호위에게 웃음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호위는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 황제가 입단속을 시켜서 입을 열지 않는 거겠지. 지홍왕은 황제의 명령을 어림짐작하고서 소리 죽여 웃었다.

화원은 밝았다. 황제는 지홍왕과 다르게 평범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불을 밝혀주었다. 이 다정함이 자식들에게도 가면 좋으련만 황제는 지독하게 냉정했다. 지홍왕은 화원에 핀 소복한 꽃들을 보며 소리 없는 탄식을 뱉어냈다.

꽃을 키울 때도 골고루 물을 뿌려주는 게 중요했다. 한 꽃만 예뻐해서 물을 뿌리다 보면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법이었다. 황제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꽃밭은 언제나 황제의 사랑을 원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 순간만이라도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녀들은 단 하나의 사랑을 원해 가꿔졌다.

그러나 결실을 보는 건 항상 하나였다. 하나를 위해 다수가 시들어가고, 썩어서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그리 했던 것처럼 황제도 하나를 위해 칼을 들었다.

지홍왕은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을 화원에 던져버렸다. 늘 그렇듯이 앞만 보고 걸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들의 아우성은 저승에 가서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황제는 화원 안에 있는 전각에 있었다. 지홍왕이 안으로 들어오자, 황제는 의자에 앉아 흐릿하게 웃었다.

“왔구나.”

“오늘은 객이 있군요, 폐하.”

항상 신전에 틀어박혀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대신관과 그를 보필하는 신관이 보였다. 총관 태감은 황제의 그림자였으니 있는 것이 당연했다. 지홍왕이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서각에서 가져온 춘추를 읽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그는 아래에서 충성스럽고 듬직하게 앉은 아우를 보고 웃었다.

“무슨 연유로 부른 건지 네가 잘 알겠지.”

“폐하. 정녕 황자들을 향해 칼을 드실 계획이십니까?”

“아들들은 쓸모없지.”

그는 서적을 덮고 말을 끊었다. 황제는 잠시 눈을 내리뜨고서 사방에 포진한 빛과 어둠을 보았다. 그것들은 경계 없이 모호하게 섞여 전각을 밝히고 있었다. 강도 그러했다. 경계 없이, 확실한 구분선 없이 자신에게 넘나들고 있다. 강은 아들을 초월했다. 친아들의 막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던 내면을 보았다.

“강의 아이가 태자가 되는데 다른 아들들은 필요 없다. 그 녀석들은 충신이 되지 못해. 살아남는다면 강이나, 혹은 강의 아이를 죽일 것이다. 혹여나 내가 먼저 죽는다면 말할 것도 없지. 아마 순장을 빌미로 강을 산 채로 땅에 파묻을 것이다.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

웃는 낯으로 싸늘한 미래를 예감하는 황제를 보며 지홍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는 먼 미래의 일까지 가늠하고 있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특히 황제가 먼저 간다면, 그가 데리고 있던 후궁들의 앞날은 안 봐도 뻔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은 산 채로 순장 당해야 했다. 자식을 낳은 후궁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황제와 함께 지옥으로 나란히 가야 했다.

황제는 고민의 흔적이 전혀 없는 선선한 말투로 이어 말했다.

“강의 아이가 태자가 되어야 해. 그 아이가 온전히 천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아들과 딸은 죽인다.”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서 빛 쪽으로 얼굴을 돌린 황제가 웃었다.

“만약 죽이지 못하는 경우엔 팔이든, 다리든… 눈이든 좋으니 하나라도 자르는 게 낫겠지. 사지가 하나라도 멀쩡하지 못하면 태자가 되지 못하니. 그게 안 된다면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미치게 해야 한다.”

강의 아이가 태자가 된다. 그렇다면 강은…. 태자의 어머니를 생각하던 지홍왕은 얼굴을 미미하게 굳혔다. 들어서 안 되는 비밀을 들은 듯 가슴이 공포에 질려 식어갔다.

“그러면… 영현왕은 황후가 되는 겁니까?”

“태자를 낳은 어미라면 응당 황후가 되어야지.”

황제가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턱을 괴고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개구지게 웃었다.

“고작 시시한 비 따위에 강을 내버려 두지 않아. 강은 황후가 될 몸이다. 아마 역사에 유일무이한 친아들이자 황후가 된 몸이겠지.”

“하지만 강은 남자인데, 어떻게 아이를….”

“서역에선 이미 발견하지 않았는가?”

덤덤하게 대답한 황제가 빙그레 미소 짓는다. 지나친 행복에 범벅이 된 미소였다. 황제가 저렇게 순수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그와 어렸을 적을 함께했지만, 황제가 된 이후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금안에 서린 가볍고 뜨뜻한 감정에 지홍왕은 눈을 내리감았다.

황제가 저렇게 좋다는데 누가 뭐라 하고 말릴 수 있을까.

다만, 지홍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고 있을 강이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아무 영문 없이 비빈이 되고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가지고… 황후까지 되어야 하는 몸.

“빨리 임신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기다려야겠지.”

“예…?”

“내 남근을 받아들이기엔 버겁다는 뜻이다.”

지홍왕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황제는 사뭇 진지한 얼굴과 어조로 중얼거렸다.

“임신은 말할 것도 없지…. 그리고 혼례식에서 늑대가 된 천자의 남근을 받아야 할 텐데 지금의 몸으론 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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