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채이가 그날 저녁, 평소와 같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귀가했을 때였다.
‘응?’
평소에는 문이 열리자마자 쪼르르 마중 나오던 레오나드가 오늘은 잠잠했다. 신발을 벗으면서 확인해 보니 레오나드는 쪼그리고 앉아 제 무릎을 안고 있었다.
“레오? 너 왜 그러고 있어?”
당황한 채이가 그리 물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채이를 돌아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에서 무슨 일 있었나?’
그러다 문득 식탁에 올려져 있는 봉투와 지갑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 심부름은 또 잘해 온 모양이었다.
“심부름해 보니까 어땠어?”
“…그냥 그랬어.”
“이야. 그래? 우리 레오, 이런 거 해본 적도 없을 텐데 의젓하네. 도와줘서 고마워.”
“…응.”
대답에 힘이 없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이번에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으려나.’
채이는 레오나드를 조심히 의식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저녁 준비를 시작하자, 레오나드도 식탁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대화를 시도한 채이였지만, 레오나드는 조곤조곤 대답을 잘하면서도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항상 책을 읽어주지 않아도 붙어서 자려고 하던 레오나드가 오늘은 혼자 자겠다고 선언한 점이었다.
“오늘은 거실에서 잘래.”
“…그래. 밤에 추우니까 난로 피워 둘게. 감기 안 걸리게 담요도 꼭 덮고.”
레오나드는 고개만 까닥이곤 담요 속으로 쏙 몸을 숨겼다.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들러붙어 안 떨어지려고 하던 녀석이… 하루아침에 이리도 달라지니, 채이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닌 듯한데….’
의심되는 부분은 역시 마을로 혼자 내려간 것뿐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질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결국 채이는 오늘따라 신경을 많이 써서 피곤한 건가, 정도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찝찝하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에도 새벽부터 일어난 채이는 곧장 거실로 나가 레오나드를 확인했다. 추울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짐승의 모피로 만들어진 두툼한 담요를 밤새도록 둘둘 몸에 말고 잔 모양이었다. 난로도 피워 두어서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모아둔 돈이 제법 있었던 덕에 생활 여건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야.’
대부분 ‘소설 속 채이’가 나쁜 일을 해서 모은 돈이기는 하지만…. 채이는 담요를 레오나드의 목 위까지 올려 덮어 주었다. 그리고 뒤척이다가 실눈을 뜨고 확인하는 레오나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녀오마. 오늘은 푹 쉬어라.”
그에 레오나드가 담요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이는 조금 안도한 후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눈이 오려는 건가.’
집을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두툼하고 칙칙한 구름이 잔뜩 뒤덮여 있었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 시야를 많이 방해하니, 얼른 움직여야 할 듯싶었다. 채이는 바삐 발을 움직여 숲으로 향했다.
그러고 몇 분 뒤….
자박.
채이의 뒤를 레오나드가 몰래 쫓기 시작했다. 언제 졸린 듯 굴었냐는 양 그의 두 눈은 형형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방금 전까지 덜 깬 듯하던 아이가 저를 미행하리란 사실을 채이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채이는 숲에 접근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던 걸까.’
사실은 숲에 무언가 숨기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이제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레오나드는 아직 채이를 믿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확인해야만 해.’
채이는 단순히 마물 때문에 위험하니 그랬던 것뿐이지만 현재의 레오나드가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레오나드가 제 뒤를 미행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채이는 성큼성큼 숲으로 들어갔다.
‘오. 있다,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숲 깊은 안쪽까지 도달한 채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 나무 아래를 잘 살펴보니 겨울 약초들이 영롱한 잎사귀를 흔들고 있었다.
‘저건 차브귀.’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둥근 돔 형태의 흰색 꽃이 달린 약초다.
‘저건 오색고메꽃이군.’
잎사귀가 갈퀴 같다는 특징이 있고 아래로 굽은 꽃은 방울처럼 작은 약초다.
이 장소는 주로 차브귀와 오색고메꽃의 번식지인 듯했다.
채이가 조심히 약초들을 뜯어 허리춤에 달고 왔던 약초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이 부근의 약초를 전부 캐낸다면 오늘은 제법 짭짤한 액수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 집중하고 있었을까.
그르륵.
어디선가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흠칫 손을 멈춘 채이는 가느다랗게 뜬 눈을 흘긴 채 귀를 열었다.
‘평범한 산짐승이 아니군.’
현재 그는 숲 깊은 안쪽까지 들어온 상태다. 그리고 이 근처엔 산짐승뿐만 아니라 마물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채이의 힘으로 때려잡지 못하는, 4등급 이상으로 분류되는 마물은 본 적이 없지만…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염두해둘 필요는 있었다.
사박.
이내 수풀을 헤치고 녀석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마물임은 확실했다.
다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채이는 그만 몸에서 쭉 힘이 빠지는 걸 느껴야 했다.
‘뭐야. 키루그잖아.’
녀석은 마물 중에서도 가장 약한 6등급 마물이었다. 마물에 대해 빠삭한 지식을 갖고 있던 ‘소설 속 채이’의 기억에 의하면 잘 길든 키루그는 애완용으로도 사고 팔리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방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온할 때는 그저 작고 까만 털 뭉치에 불과한 모습이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에게는 엄청난 공격성을 보이므로.
[캬아아아악!]
채이를 보고 잔뜩 흥분한 키루그가 동그랗고 작은 몸을 크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가시처럼 털을 삐쭉삐쭉 곤두세웠다. 그대로 키루그가 데굴데굴 굴러오기에 채이는 옆으로 한차례 피한 뒤,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숲은 나무가 많아서 흥분한 키루그에겐 상대적으로 불리한 장소다. 지능도 높지 않으니 스스로 만든 덫에 걸리도록 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캬아아악! 캬악!]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했던 대로 키루그의 가시는 나무 사이에 박히고 말았다. 그 탓에 키루그는 채이를 더 쫓지 못하고 바둥거리기만 했다.
‘호신용 단검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거론 길이가 부족할 것 같은데….’
채이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부러트렸다. 이거면 무기로도 손색없으리라. 그걸 창처럼 든 채이가 다음 순간… 마물의 중심부를 정확히 노렸다.
파앙!
팔뚝에 힘을 넣고 정확히 키루그의 중심부, 생명 코어가 있는 급소로 나뭇가지를 쏘듯이 날렸다.
[끼익!]
나뭇가지가 중심부를 푸욱 파고들었다. 일반 베타의 힘으로는 쉽게 뚫기 힘든 것이 키루그의 표피이지만 채이는 단련된 사람이기도 하고 적은 힘으로 치명상을 입히는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윽고 퍼드득 떨던 거대한 털 뭉치의 부피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
키루그는 숨을 완전히 거둔 것 같았다. 그제야 채이가 가벼이 한숨을 뱉어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굳었던 어깨가 슬그머니 풀렸다.
그때였다.
‘응?’
차가운 무언가가 뺨에 사뿐히 닿다가 사라지기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 해야겠군.’
다행히 약초 바구니는 뚜껑을 닫아놔서 약초들은 쏟아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정도도 썩 나쁘지 않은 양이었다. 그렇게 채이가 제법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설 때였다.
솨아아아아….
한차례 숲을 쓸고 지나간 바람. 착각이었을까. 그 바람을 타고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오두막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
숨죽이고 있던 채이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 속도는 점차 빨라져서 어느새 그는 달리고 있었다.
‘레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지레 걱정하고 싶진 않았으나 레오나드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채이가 속으로 부정을 반복하며 숲을 내려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흥분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기에 퍼뜩 앞을 내다보았다. 저기 내려가는 길목 앞에 거대한 늑대 형상을 한 무언가가 가로막고 서 있다.
검은색 모피에 두 쌍의 붉은 눈. 5등급 마물인 일루간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가 있다. 그 조그만 인영은 뒤로 슬금슬금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이미 한차례 공격을 당한 건지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설마.’
쿵. 쿵. 채이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곤두박질칠 듯 뛰어대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하필 마물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채이가 그 얼굴을 얼른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반쯤 이성을 잃은 때였다.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그륵?]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일루간의 관심이 채이에게로 잠시 쏠렸다.
“……!”
채이는 이쪽을 돌아보는 눈과 마주쳤다.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제발 레오나드만은 아니길 바랐건만… 그 인영의 정체는 절망스럽게도 레오나드였다.
‘어째서.’
하지만 왜 저 녀석이 이런 깊은 숲 안쪽까지 들어와 있는지는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구해야 해.’
굶주린 마물이 레오나드를 코앞에 둔 채다. 거기다, 저 마물은 아까 전 녀석보다 한 단계 더 위험한 마물로 분류되는 5등급이었다. 채이도 상대하기 벅찬데 아직 발현도 못 한 힘없고 어린 레오나드가 일루간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쪽은…!”
위험해, 채이.
레오나드가 채이를 향해 오지 말라 손짓하려던 때였다. 더 이상 굶주림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침을 뚝뚝 흘리던 일루간이 레오나드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고.
“레오!”
채이는 이미 이성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