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13화 (13/105)

013화

정확히 채이를 향해 꽂히는 강렬한 시선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레오?”

분위기도 그렇고 많이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이였으나 이내 반가움이 앞섰다.

‘그 조그맣던 애가 엄청 컸잖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 세계를 지은 친구가 주접을 떨며 장황하게 설명하던 묘사에 완벽히 부합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잘생긴 건 여전하네.’

어쩐지 눈매는 어릴 때보다 더러워진 거 같지만.

마귀처럼 흉흉하게 뜨인 눈이 자기 때문인 줄도 모르고, 채이는 마냥 태연했다.

그때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태연한 채이와 달리 레오나드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고 공포에 빠져 있던 아저씨들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크게 경악했다.

“채, 채이….”

아저씨들이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채이의 옷깃을 붙들었을 때다. 턱, 테이블을 한 손으로 짚은 레오나드가 고개를 기울여 아래로 떨구었다.

“채이.”

순간 훅 밀려드는 묵직하고 끈덕진 페로몬 향. 채이가 아니었더라면 끔뻑 기절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위압감이었다. 다만 채이가 생각하기에 지금 레오나드의 페로몬은 어디 몸 상태가 안 좋은지 걱정이 될 만큼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채이를 내려다보는 눈이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이를 보듯 깊이 잠겼다가 이내 살벌한 빛을 띠었다.

“도망가지 말고 있으라고.”

이쯤 되면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심각한 상태라는 걸 채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응?’

채이는 뭐가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잔뜩 화가 나 있는 거 같은데… 레오나드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흠… 그게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그런 적 없는데.”

“그럼 신분패는 왜 위조했어.”

“어? 내 거 위조품이야, 설마?”

“…….”

레오나드의 침묵에 도리어 당황해서 ‘소설 속 채이’의 기억을 빠르게 되짚어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했다. 그에 더해 고아여서 이름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던 ‘소설 속 채이’가 길드에 등록하면서 처음으로 지은 이름이 채이였다는 사실도 덩달아 떠올랐다. 익명 코드로 쓰는 호칭이긴 했지만 동시에 하나뿐인 자신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까먹고… 있었다고?”

레오나드가 기어이 황당하단 얼굴로 되묻는다. 분노로 넘실거리던 페로몬도 그의 현재 감정을 대변하듯 차츰 가라앉았다. 하지만 채이도 이 일은 억울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설마 몇 년 동안 잘 쓰고 있었던 신분패가 위조품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

이처럼 생각해 내려 하지 않아서 떠오르지 않고 있는 정보가 더 있겠지. 그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다. 어떤 기억이 어떤 곳에 더 잠들어 있을 줄 알고 그걸 다 끄집어내겠냔 말이다. 결국 채이는 해명을 요구하는 레오나드의 검질긴 시선에 비루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미안하다. 내가 그… 약간 기억상실증 같은 게 있어서….”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낀 채이가 주위를 힐끔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점 안의 시선들이 모두 두 사람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민폐다.

“얼른얼른.”

아저씨들에게 양해의 손짓을 보인 채이가 작게 소곤거리며 레오나드의 등을 떠밀었다. 그런 채이의 재촉이 썩 싫지만은 않은 듯 레오나드도 군말 없이 떠밀리며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주점 밖으로 나가는 동안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람?’

그들은 레오나드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하여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대공의 아드님이 직접 찾아올 정도니 채이에게 큰일이 났구나 생각했더랬다. 특히 정식으로 후계를 잇기로 되어 있는 레오나드는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냉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꼼짝없이 채이가 죽은 목숨이겠다 여겼다.

그런데 도리어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서슴없는 취급을 당하고 레오나드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물며 한겨울의 북풍 같던 자신들의 주군을 매일같이 가까이서 봐온 기사들은 어떠할까. 제 주군이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드의 최측근 중 한 명인 기사단장 로렌스는 순한 양이 되어버린 주군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채이라는 사람을 미친 듯이 찾기에 무슨 원수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모양이었다.

“우리도 이만 나가지.”

기사단장의 말에 눈치 보고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 주점을 빠져나갔다. 뒤를 이어 주점 사람들도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바깥 상황을 훔쳐보았다.

가게 입구 밖에선 레오나드와 채이가 편안한 사이처럼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중이었다. 물론 서로에게 쌓인 오해를 푸느라 일상 대화를 나누고 있다기보다는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이름은 어떻게 된 거야? 채이는 본명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나한테 그런 것까지 속이고 있었어?”

“아니야, 그런 거.”

채이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 정보 캐낼 때 내가 고아였다는 이야기도 혹시 들었니?”

“…응.”

“길드에 등록할 때 정한 익명 코드가 나한테는 살면서 처음으로 가져본 이름이야. 다른 건 없어.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게 내 본명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 속 채이’가 그랬다는 거였으나… 여기서 상황을 더 꼬지 않기 위해서 채이는 본인의 이야기인 척을 해야 했다.

“정말이야.”

레오나드가 채이의 모습을 눈동자라는 상자 안에 담아둘 것처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쏟아질 듯 커다랗던 눈은 어느덧 시간이 흐르며 날렵해지고 눈빛 또한 깊어져 있었다.

“…그럼, 내가 보기 싫어져서 연락 끊고 달아났던 건 정말 아니라는 거지?”

“아휴. 그렇다니까, 이놈아. 나는 네가 그렇게 날 찾아다니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먼저 연락해볼 수도 있었을 거다. 그 당시에 연락을 끊었던 이유는 정식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에 악영향이 생길까 봐였으니까. 만사가 잘 풀린 지금에는 상관없는 일. 채이의 말투와 몸짓에서 진정성을 느꼈는지 레오나드의 분위기도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채이. 많이 보고 싶었어.”

“그러니. 고맙기도 해라.”

“채이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나야 당연히 보고 싶었지.”

빈말이 아니다. 보고 싶으면 먼저 찾아오리라 믿었고 그러지 않는다는 건 바쁘거나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레오나드는 쉬이 믿기 어렵다는 듯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채이는 탄식과 같은 콧숨을 짧게 내쉬었다. 뾰로통해진 얼굴은 어딘가 옛 생각이 나서 제법 반가웠다.

“레오. 날 기억하고 먼저 찾아와 줘서 고맙다. 진심이야.”

“…….”

불현듯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채이의 뺨을 툭 쓸어 만지고 지나갔다. 자연히 손짓의 방향으로 흘깃 눈을 돌렸던 채이가 다시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고마우면.”

레오나드가 눈을 살며시 내리떴다. 그러자 너풀대며 내려앉은 속눈썹이 보석 조각처럼 난연한 벽안을 반쯤 감추었다. 마치 그 시선 속에 녹아 있는 지독한 집착을 채이에게 보이지 않기 위함인 듯.

“다시는 나한테서 멀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 엄밀한 뉘앙스는 언뜻 들으면 묘한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겠으나 채이는 그걸 듣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어릴 때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구나 생각했다. 예전에도 간혹 저런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곤 했던 까닭에 대수롭지 않다 여긴 것이다.

“그래. 어렵지 않은 부탁이네.”

하여 채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고 레오나드도 눈매를 살짝 접으며 반달을 그렸다. 그런 두 사람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제 주군의 보기 드문 미소를 보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겉보기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저 베타 평민 사내가 주군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일 거라고.

‘저 베타 평민 남자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주군의 손에 목이 달아나고 말 거다.’

기사들은 행여나 실수할까 봐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서 조용히 그들의 뒤를 지켰다.

그런 것도 모르고 어느덧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채이가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이니까 식사나 같이 할까?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채이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뭘 먹든 어딜 가든 다 좋아.”

“어쭈? 요 귀여운 녀석, 아주 그냥 오랜만에 만났다고 예쁜 소리만 해주는구나.”

채이가 무척 뿌듯한 얼굴로 레오나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에 “진심인데….” 하고 중얼거리던 레오나드가 곧 반짝이는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채이. 지금 사는 집은 어디야?”

“아. 생각해 보니 아직 모르겠구나. 그럼 일단 소개도 해줄 겸 우리 집으로 갈까?”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매만져 보던 레오나드가 채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사들도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그림자처럼 두 사람에게 따라붙었다. 주점 사람들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의 관계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채이. 손잡아도 돼?”

“그래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마지막으로 목격할 수 있는 채이의 모습이었단 사실을 주점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