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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16화 (16/105)

016화

짧은 한숨과 함께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채이가 삐딱한 자세로 섰다.

“그러니까 가르쳐 줄 수 없다?”

“그건 아닙니다만, 위험하니….”

“그럼 가르쳐 줄 수 있단 거네.”

“예?”

“걱정하지 마요. 레오 진짜 착하니까. 혹시 다치더라도 내가 잘 말해 둘게요.”

그러고 목검을 꼬나쥔 채이가 지체 없이 바닥을 박차고 로렌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에게서 기술을 얻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전이었다.

“……!”

목검의 끝이 로렌스의 목젖을 노리며 아래에서 찔러 들어왔다. 생각보다 날쌔고 위협적인 움직임이라 당황한 로렌스가 뒤로 크게 몸을 물렸다. 채이가 몸에 익히고 있는 검술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서 로렌스가 보기에는 아주 낯설고 변칙적인 움직임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상류 계층이 배우는 정형화된 검술이 아닌 평민 사냥꾼들이 쓸 법한 잡기에 가까웠다. 어쨌든 채이도 한때 사냥꾼 소리를 들으며 마물을 때려잡고 다녔으니 아주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카각!

사선으로 올려 치는 목검을 방어하며 흘려보내려 하자 채이가 역으로 목검을 꺾어 방어 동작을 무산시켰다. 로렌스는 당하기 전에 한 번 더 몸을 뒤로 물려 거리를 유지한 후 목검을 아래로 내려치는 걸로 방어를 이었다.

캉!

검질기게 따라붙는 목검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군.’

혀를 내찬 로렌스가 속으로 감탄했다. 채이는 베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오메가들보다 힘이 좋았으며 유연성과 상황 판단력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났다. 분명 거기에 압도당해 버리고 만 탓이리라. 로렌스는 쇄도하는 채이에게 맞서 그만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말았다.

타악!

검이 맞부딪치자마자 채이의 손에서 빠져버린 목검이 연무장 밖으로 날아갔다. 힘에 밀려 털퍼덕 주저앉은 채이가 동그랗게 눈을 올려 떴다. 제아무리 채이에게 재주가 있다지만 열성 알파인 로렌스를 힘으로 상대할 재간은 없었다.

‘오. 역시 알파는 다르구나.’

새삼 감탄하고 있는데 당황한 로렌스가 냅다 목검도 내팽개치고 주저앉아서는 혹여 채이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전전긍긍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아니. 진짜 괜찮은데요.”

딱히 다친 곳도 없고, 자신이 금방 죽는 것도 아닌데 너무 큰 호들갑이었다. 그때 연무장 밖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들렸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로렌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더니 작은 비명을 입 안으로 삼켰다. 채이도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삼백안을 흉흉하게 뜬 레오나드가 이쪽을, 정확히는 로렌스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레오? 일찍 왔네.”

아직 정오가 지나려면 몇 시간이나 더 남았다. 오후나 되어야 올 수 있겠다고 말한 것치고는 엄청 이른 시간에 찾아온 것이었다.

“…설명해.”

레오나드의 뾰족해진 시선이 짧게 채이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로렌스에게 꽂혔다. 주어가 없는 명령조였지만 어떻게 보아도 로렌스를 추궁하는 눈치였다. 새하얗게 질린 로렌스는 이제 곧 쇼크사할 것 같았다.

채이는 그의 생명을 좀 더 연장시키기 위해 냉큼 끼어들었다.

“오해하지 마. 내가 먼저 하자고 했으니까. 기사들의 검술이 어떤지 한번 배워 보고 싶었거든.”

“…….”

“정말이야, 레오.”

채이의 두 눈이 레오나드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레오나드의 낯빛이 결국 풀어졌다. 꼭 냉랭한 겨울이 끝나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다친 곳은 없어?”

“없어.”

“그럼 다행이고.”

연무장 안으로 발을 들인 레오나드가 로렌스를 향해 흘깃 눈짓하자 로렌스는 얼른 묵례하곤 자리를 떠났다. 그동안 채이가 바지를 탈탈 털고 일어나자 등 뒤로 다가간 레오나드가 채이의 허리를 팔로 안았다. 그는 채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렸다.

“채이… 보고 싶었어.”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응.”

그럼 일 끝내자마자 바쁘게 와준 것 같다. 그의 몸에선 옅은 바람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다 큰 녀석이 어리광은.”

그리 말했지만 제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레오나드가 꼭 애정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다. 꼼지락 몸을 돌린 채이가 레오나드와 마주 보는 위치에 서서 그의 양쪽 뺨을 가볍게 쥐었다. 한때 젖살로 포동포동하던 양 뺨은 어느새 날씬해져서 예쁜 턱선이 드러나 있었다. 언제까지고 아기 같을 줄만 알았는데….

“다시 봐도 잘 컸네. 우리 레오.”

일순 레오나드의 눈동자에 담긴 바다가 일렁였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으나 얕은 숨결을 타고 레오나드의 페로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발현했을 당시 느꼈던 페로몬, 일전에 화가 나서 쏟아지던 페로몬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이건 어딘가 간질간질한… 굳이 비유하면 진한 다크 초콜릿에 우유가 잔뜩 섞여서 밀크 초콜릿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한낱 베타일 뿐인 채이는 레오나드의 생리 현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갈무리되지 못한 채 마냥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채이에게 있어 걱정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채이가 레오나드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이마가 하얗고 고왔다.

‘이 녀석. 햇빛은 충분히 보고 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침음한 채이는 턱을 짚었다.

흠. 정확하진 않지만 체온이 정상 온도보다 뜨끈한 거 같기도 하고….

“아픈 거 아니야.”

그때 레오나드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손짓으로 허리를 놓아주었다. 페로몬도 힘겹게 억누른 덕분에 가라앉아 있었다.

“눈치가 없어서 다행인 건지….”

“응?”

“아무것도. 아직 식사 안 했지?”

“아, 응.”

“그럼 나랑 같이 먹으러 가자.”

어쨌든 아픈 건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네.’

오히려 건강하면 건강했지 그보다 덜하진 않다는 신호였지만 채이가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

함께 식당을 찾은 두 사람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을 확인한 주방장과 시종 여럿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리나케 움직이자 금방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뒤 식탁에는 전에 없던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버터와 양념을 입히고 구워 달짝지근한 냄새가 향긋하게 풍기는 닭 두 마리. 과일과 신선한 야채를 소스에 버무린 샐러드. 밀로 만든 하얗고 부드러운 빵에 양옆을 채우는 고소한 치즈와 계란 요리. 음료로 올라온 술은 연노란빛을 머금은 벌꿀주였다. 하나같이 비싼 재료였고 비싼 음식이었던지라 보기만 해도 즐겁다. 눈으로 먼저 그 산해진미를 음미한 채이가 픽 웃었다.

“너 자주 와야겠다, 야.”

“…평소에는 이렇게 안 해줘?”

레오나드가 가늘어진 눈을 옆으로 흘기자 안절부절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던 주방장이 겁을 먹고는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얘가 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채이는 레오나드를 만류하여 또 한 명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죄 없는 사람 겁주지 마. 나는 뭐 농담도 못 해?”

“채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야. 네가 여기서 잘 먹고 잘 자고 편안하게 잘 지내는 거. 다른 건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흠.”

“그러니까 모자라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야 해. 뭐든 맞춰줄 테니까.”

“덕분에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걱정일랑 하지 마시지요.”

불도저 같은 레오나드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채이가 버터나이프로 잼을 긁어 빵 위에 발랐다. 그런 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진짜야? 더 필요한 거 없고?”

“그래. 지금도 충분히 좋아.”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이만한 효도 관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소박하게 말하면 ‘아들내미 집에 잠시 놀러 온’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세계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베타 평민이 무려 대공작가의 손님으로 대접받는 거다. 그것도 저택 하나 통째로 빌려주는 스케일로. 여기서 더 바라면, 오히려 그게 더 염치없는 짓이지 않을까.

“그럼… 계속 여기 남아 있어 주는 거지? 채이.”

“응?”

아. 그러고 보니 같이 살자는 둥 그런 말을 했었지.

그거 진심이었나….

‘뭐 나로서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해. 나중에 레오가 미래의 짝을 만나고 내가 귀찮아지면 어련히 눈치 줄 테니까. 그때 나가면 되지.’

주인 잃은 집은… 걱정되긴 하지만, 조금 더 내버려 둔다고 따로 돈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채이가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그럴게.”

레오나드의 눈매가 슬며시 접혔다. 입매는 방긋 호선을 그린다. 어느 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약속한 거야.”

“그래그래. 아, 참. 대신 나 나중에 서신 하나 보낼 거거든. 여기선 서신 보내려면 어떻게 해?”

“어디? 채이가 일하던 거기?”

“응. 갑자기 그만두고 나온 꼴이니까, 사정은 알려야 괜한 걱정 안 할 것 같아서.”

“랭커스터 가에서 나가는 서신은 서기관들이 처리해주고 있어. 내가 대신 전달할 테니까 서신 쓰게 되면 주변에 건네주고 나한테 보내라 하면 돼.”

“그래? 알겠다, 고마워.”

그렇게 레오나드와 함께 보낸 점심시간은 끝날 때까지 화기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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