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식사가 끝난 이후 레오나드는 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시간을 쭉 함께 보냈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덕분에 채이는 오늘 하루 동안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너 일 바쁘진 않아?”
솔직히 레오나드는 이리 한가하면 안 될 일이 아닌가. 어제만 해도 업무가 많아 보였다. 걱정이 되었던 채이가 물으니 레오나드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괜찮아.”
“농땡이 부리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미덥지 않아 하는 채이의 모습에 레오나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매를 꼬았다.
“오늘 할당량 전부 끝내고 온 거야. 채이랑 남은 하루 같이 보내고 싶어서.”
흠… 그렇다고 하니 미심쩍긴 해도 믿어줘야지. 뭐 어릴 때부터 빠릿빠릿하고 꼼꼼한 면이 있었으니. 거기다 책임감 없는 녀석도 아니었기에 자기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렇게 떠들고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놀다 보니, 벌써 취침 시간이었다. 레오나드는 채이를 자연스레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채이는 레오나드가 이만 자기 방으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다. 너도 얼른 자러 가 봐.”
그런데 레오나드는 답하지도 그 자리에서 떠나지도 않은 채 채이를 바라보았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나 싶어 말해보라는 의미로 채이가 미소를 짓자 레오나드가 채이의 손가락을 은근하게 엮어 잡았다.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그러면서 내리뜬 시선은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그 때문에 더욱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를 유혹하려는 수작질이었다.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그물망에서 쉽게 벗어나는 이는 몇 없으리라.
물론….
채이는 레오나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눈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유혹의 그물망에서 쉽게 벗어나는 몇’에서 ‘몇’을 담당하고 있던 채이에게는 수작이 통하지 않았다.
“응? 그걸 왜 나한테 허락받니. 마음대로 해.”
‘정신 나이 기준 50년’ 동안의 솔로 인생이 쌓아 놓은 눈치와 그의 대부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강력한 장벽은 채이가 그쪽 가능성에 일말의 염두도 두지 않도록 만들고 있었다.
“…내 말뜻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아?”
“응. 오닉스에서 하루 자고 가고 싶다는 뜻이잖아.”
“…….”
“네가 주로 쓰는 방도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거지? 어차피 네 집이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마.”
야심 차게 꼬셔 보려 했던 레오나드의 얼굴이 토라졌다. 채이는 그가 왜 저러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 채이 방에서 같이 자고 싶다는 뜻이야.”
“뭐?”
“한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채이랑 같이 자고 싶다고.”
채이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분명 어릴 적 레오나드에게는 꼬박꼬박 붙어 자는 버릇이 있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다 컸으니까 그런 고질적인 버릇도 고쳐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레오. 너 아직도 다른 사람이랑 붙어 있어야 자는 거니?”
어쩜 좋아. 매번 다른 사람을 불러다 끌어안고 자는 게 아닌 이상, 혼자 자는 날도 더러 있었을 텐데. 그럼 그런 날들은 제대로 자지 못해서 불면증에 시달렸을지 어찌 알겠는가. 채이가 가엾고 딱한 마음에 비탄을 금치 못하고 있으려니, 레오나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뭐야 그럼. 네 방 가서 자.”
“같이 잘래. 오랜만이니까.”
나 참….
레오나드의 옹고집에 채이도 다른 의미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없이 어른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이럴 때 보면 아직도 철이 없었다. 23살이나 되었으면 이제는 부모 품에서 벗어나 자립심을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레오나드의 친부모는 따로 있지만 어쨌든.
‘흠. 어쩐다.’
방 침대 사이즈가 어느 정도였는지 떠올리던 채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워낙 침대가 넓어 성인 두 명이 뒹굴어도 불편함은 없을 거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알겠어. 대신 불편하면 꼭 말해야 한다.”
“응.”
아까까지만 해도 불퉁했던 레오나드의 얼굴에 지금은 꽃이 활짝 피어 있다. 평소 표정에 극적인 변화가 없는 레오나드이기에 채이는 지금 그가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그리도 좋을까.
아무리 레오나드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다 해도 ‘아빠랑 꼭 끌어안고 자는 걸 좋아하는 아들’이라는 해괴망측한 상황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게 좋다는데 어쩌겠나. 채이는 아직 철이 덜 든 못난 아들내미도 제 품에 안아 주는 참된 아버지였다.
레오나드를 들여보낸 채이는 먼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방마다 딸려 있는 개인 욕실이었는데 넓기도 넓고 매일 아침에 시종들이 청소를 해 주어서 깨끗한 곳이었다. 반면 채이 집에 있던 욕실은 너무 작아서 몸을 담글 탕도 없었다. 그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근사한 효도 관광이었다.
말끔해진 채 나온 채이는 욕실을 레오나드에게 넘겨준 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책을 조금 읽기로 했다. 불빛은 협탁에 올려진 초롱에 의지했다. 이 방에도 큰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긴 하나 매번 샹들리에를 내려서 불을 켜고 끄긴 번거로운 일이었다.
읽다 보니 점점 텍스트에 빠져들었다. 방 안 책장에 꽂혀 있던 거 아무거나 꺼냈는데 그게 소설이었나 보다. 상당히 야하고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누가 이런 걸 들여놓은 거야.’
레오나드가 일일이 무슨 책을 꽂아 두라고 말해두었을 린 없고, 저택 관리인이나 시종들이 임의로 정해서 넣어 둔 것 같았다. 다만 채이가 이 방을 쓰기 시작한 이후 책장에 손을 댄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일부러 누군가가 들여놓은 것은 아닐 터…. 어쩌면 누군가가 이걸 책장에 넣어 두었다는 사실마저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채이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은 불가항력이었다.
‘숭하다, 숭해.’
야한 것에 대한 저항력이 다소 약했던 채이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채이. 뭐 해?”
채이가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별안간 머리 위로 그늘이 깔렸다. 고개를 드니 그곳에 나른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선 레오나드가 있었다. 수건에 덮인 머리카락은 살짝 덜 말라서 물기로 촉촉했다. 채이는 부끄러운 책을 얼른 침대 밑에 내려놓고 말했다.
“이리 와. 말려 줄게.”
옆으로 살짝 움직인 채이가 이불 위를 팡팡 두드리자 레오나드도 군말 없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채이 쪽을 돌아보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서 자연 바람이 통하게끔 한 채이는 수건으로 레오나드의 머리채를 뽀송하게 털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머릿결이 좋네.’
풍성하고 보드라워 사락사락, 반곱슬인 자신의 머리와 다르게 완벽한 직모인 레오나드의 머리는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건 본인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희귀한 감촉이었다.
채이가 그 감촉을 만끽하면서 말려 주던 것도 잠시….
정면에서 굽어보는 자세였던 레오나드가 손을 뻗어, 진즉에 다 말라 건조된 채이의 앞머리 끝을 무심히 건드렸다. 의뭉스러운 행동이었다. 머리를 말려 주는 데에 집중하던 채이가 초점을 레오나드의 눈에 맞추었다.
“왜?”
“…채이는 강아지 같아.”
“내가?”
“응. 복슬복슬해서 귀여워.”
그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아이가 어른을 보고 아이 취급하는 것 같은, 그런 미묘한 감각이었다.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할 군번이니?
문득 지독한 유교 사상의 잔재가 머리를 벌떡 들었지만 나이보다 신분이 우선인 사회에서 눈앞의 아드님이 무려 대공작가 정식 후계자임을 재차 인지하곤 쏙 들어갔다. 그럴 군번이었다.
“됐다, 이 녀석아. 다 마른 거 같으니 이제 그만 자자.”
채이는 세탁물을 모아 두는 통 안에 젖은 수건을 던져두고 초롱불을 꺼트렸다. 간간이 창밖에서 ‘부우부우’하고 들려오는 새소리 말고는 고요한 밤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곧 창문을 통해서 스며든 달빛에 적응한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채이는 여전히 정면을 보고 반듯이 누워 있는데 별안간 부스럭대는 소음이 들리더니, 레오나드가 채이를 향해 몸을 돌리고 누웠다. 옆통수에 빤히 꽂히는 시선이 그만 부담스러워진 채이가 결국 고개를 홱 돌려 레오나드를 흘깃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보면 안 돼?”
“…저쪽 보고 누워라.”
“싫은데.”
뻔뻔하고 당돌한 거부에 기가 찼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직 어린 시절의 레오나드가 겹쳐 떠오르면서 귀엽기도 하였다.
헛숨을 뱉은 채이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노려보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웃음을 뱉었다. 채이가 레오나드를 끝내 미워할 수 없는 건 그가 본인의 신분을 이용해 채이를 업신여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너는 정말 변한 게 없구나.”
“…정말 그런 거 같아?”
돌연 상체를 일으켜 세운 레오나드가 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듯하더니, 팔을 뻗어 채이의 머리 옆을 짚었다. 채이의 다리 사이로 레오나드의 한쪽 무릎이 들어오자 서로의 옷자락이 쓸리며 부산스러운 소음이 일었다. 채이가 시선을 조금 위로 들어 올렸다. 짙게 드리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레오나드의 푸른 눈동자만이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응?’
문득 두 사람의 자세가 어떠한지 인지한 채이가 눈썹을 휘었다.
자신은 지금 레오나드의 품 안에 갇힌 꼴이었다.